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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데드라인 (3) (196/203)


196화 데드라인 (3)
2022.04.15.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싸움이 계속됐다. 땅을 가르고 하늘을 찢어발겨 가면서, 스테치와 아치발은 서로를 잡아먹을 기세로 싸워 댔다.

콰광!

설산 몇개를 관통하면서 날아간 스테치는, 북부의 얼어붙은 대지에 몸통을 깊숙이 파묻었다. 아치발은 그런 그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스테치는 지팡이 형태의 아티팩트를 만들어 능력을 발현시켰다.

“이!”

아치발이 휘두른 주먹이 스테치에게 닿으려는 찰나, 그를 에워싸고 있던 주변의 공간이 통째로 일그러지면서 주먹의 궤도를 엉뚱한 곳으로 비틀었다. 베네지아의 둘째 왕자 알프레드가 사용했던 공간조작 아티팩트, ‘디미누엔도’의 힘이었다.

“《레바테인》!”

스테치의 머리 위로 떠오른 세 개의 붉은 결정체가 빛을 받아 반짝이더니, 할로우 블레이드와 얽히면서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검을 빚어냈다.

스테치가 검을 휘두르자, 금속성을 내며 튕겨 나간 아치발이 눈밭을 나뒹굴었다.

“크아악-!”

스테치는 아치발의 뒤를 바짝 추격하면서 잇따라 검을 휘둘렀고, 아치발 또한 거기에 응전했다. 하지만 《레바테인》에 비하면 아치발이 든 대검은 거의 이쑤시개에 불과했다. 대검은 결국 힘과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산산 조각났다.

파괴되어 자루만 남은 검을 떨어뜨리고 아치발이 무릎 꿇으려는 찰나, 프레야가 플라잉 어퍼를 날리며 그의 몸을 강제로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서 뛰어오른 스테치는 양손으로 붙잡은 《레바테인》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작작하고 죽엇!”

무시무시한 열기를 내뿜으며 떨어지는 검날. 잽싸게 몸을 일으킨 아치발이 지면을 박차며 몸을 날리자,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 쌓여 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촤악!

“어딜!”

프레야가 손에 쥔 녹터널을 크게 휘두르자, 지면에서 뿜어져 나온 그림자의 사슬이 아치발의 사지를 옴짝달싹 못 하도록 옭아매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했겠지만, 프레야는 구속 능력이 있는 수십 가지의 아티팩트들을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중력. 그림자. 얼음. 나무. 석화. 디스펠. 기타 등등.

온갖 것들이 중첩됨에 따라 아치발의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결국엔 일시적이나마 움직임이 완전히 봉인되고 말았다. 아티팩트의 과다 사용으로 헐떡이던 프레야가 스테치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가지를 쳐 버려!”

“으아아아아아-!!”

스테치가 할로우 블레이드에 온 힘을 집중시킴에 따라, 화염으로 이루어진 《레바테인》의 검신이 무게와 길이가 엄청난 기세로 늘어났다. 길이는 거의 수 킬로미터에, 무게는 톤 단위를 가볍게 뛰어넘는 초대형 검.

그것으로 횡베기를 시전하자, 지축이 흔들리며 멀찍이에 우뚝 서 있던 산맥 일부가 통째로 썰려 나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위력. 스테치는 비틀었던 상체를 역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아치발의 목으로 정확히 검을 향했다.

순간, 아치발은 입을 쩍 벌리더니 초열지옥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레바테인》의 칼날을 이빨로 물었다.

콰직!

“뭔-?!”

그 광경에 직접 검을 휘두른 당사자인 스테치와 뒤에서 보고 있던 프레야 모두, 상식을 뛰어넘는 아치발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흐응!”

콰장창!

턱에 힘을 주자, 마치 얼음을 씹어 부숴 버리듯 《레바테인》의 검신이 박살 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날을 휘감고 타오르던 《인페르노》의 불꽃도, 검극을 따라 열광선을 뿜어내던 《써멀 비트》의 결정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

혼신의 일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력화되자 스테치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정말 운 없게도, 그와 동시에 아치발의 움직임을 봉하고 있던 아티팩트들의 힘도 한계에 달했다.

“내 차례지?”

그림자의 사슬을 강제로 뜯어낸 아치발이 그렇게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스피드로 돌진하여 스테치의 턱을 후려쳤다.

빠각-!

“으큭!”

턱으로 들어온 충격이 뼈를 타고 올라가, 스테치의 뇌수를 뒤흔들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치발은 그런 그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려 지면 깊숙이 처박더니, 질질 끌고 당기며 달려 나갔다.

“!”

피투성이가 되어 내던져진 스테치는 차가운 얼음과 눈이 깔린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치발이 재차 끝장을 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레오니다스를 든 프레야가 그 앞을 막아섰다.

“꺼져!”

프레야와 아치발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동안, 스테치는 어질어질한 시야를 간신히 부여잡으며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리 상대가 신이라곤 해도, 방금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상대가 강해진 건가?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스테치가 공격하면, 아치발 또한 이를 방어하기 위해 힘을 소모한다. 하지만 스테치는 계속해서 쏟아 내는 힘에 서서히 바닥이 보이고 있는 데에 반해, 아치발의 힘은 점점 더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스테치의 행위는 아치발의 회복 능력을 조금 더디게 만드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 또한 약해져 가고 있는 거였어……!’

“스테치! 정신 차렸으면 일어-”

막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프레야를 주먹으로 갈기는 아치발. 그의 한 대 한 대는 주위의 눈을 모조리 날려 버리고 새까만 흙바닥을 드러내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와 풍압을 동반했다.

“주둥이는 잘도 나불거려 댔다만!”

촤악!

아치발이 휘두른 수도에 프레야의 목이 날아갔다. 물론 그 정도로 죽거나 할 그녀가 아니었지만, 그것은 스테치가 일순 호흡하는 것조차 잊어먹을 정도로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네놈들이 무얼 지껄여도 난 멈추지 않아! 방해꾼인 너희를 제거하고! 내 자식들을 다시 되살려 놓겠다!”

“우라질!”

머리를 재생시킨 프레야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대신 집어 올려, 아치발의 수도에 맞부딪쳤다. 손날과 금속날이 불똥을 튀기며 서로를 밀어냈다.

“시간이 없어!”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이를 악물더니, 공중으로 훌쩍 튀어 올라 거대한 망치형 아티팩트를 소환시켰다.

“으오옷-!”

콰광!

망치 머리가 땅을 내리찍자, 지름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아치발은 그것을 피해 뒤로 몸을 뺐지만, 망치에 장식된 보석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척력장이 그를 저 멀리 튕겨 보냈다.

“허억-. 허억…….”

땀을 뻘뻘 흘리며 헐떡이는 스테치와 프레야. 잠깐의 시간을 번 스테치는 프레야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은 거지……?”

“이 페이스로 공격해 대면 2시간…… 아니, 3시간? 그 안에 녀석을 끝장내지 못하면 우리는…….”

프레야의 말에 스테치는 망치를 지팡이 삼아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2~3시간이란 얼핏 들으면 긴 시간처럼 들리지만, 세상 만물을 창조한 절대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X발.”

스테치는 이윽고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금세 상처를 회복시키고 다가오는 아치발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반지 없이 던전을 탐험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 키퍼를 피하느라 매번 던전을 빠져나왔을 때처럼,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목전에 둔 무력감.

새삼 밀려오는 피로가 그의 팔다리를 더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다 포기하고 그냥 쓰러져 뒤지고 싶다, X발.”

상처가 치료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고 해서 누적되는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스테치라도 결국은 인간.

육체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버텨 내질 못한다.

“안 어울리게 징징대지 말고 일어서.”

프레야가 그렇게 말하며 흔들거리는 스테치를 부축해 주려 했지만, 그는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엘레나도 이제 없는데, 나는 여기서 왜 싸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이건 이겨도 나한테 큰 의미가 없는 싸움이라고.”

기세에 몸을 맡기고 싸우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상황이 악화일로를 걸을수록 그녀의 빈 자리가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엘레나의 죽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 순간, 스테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지막 어빌리티가 해금되었습니다.》

“어?”

스테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해금되지 않은 어빌리티는 메테리얼라이즈를 포함해서 총 두 개였지. 싸움에 정신이 팔려서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둘 중에 남아 있던 하나가 드디어 해금된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헛웃음 지으며 새로 해금된 어빌리티를 확인한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간을 끌다가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 메멘토 모템의 마지막 기능. 그것은 전투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빌리티였다.

《어빌리티 “리저렉션” - 사자를 부활시킵니다.》

최후의 어빌리티, 《리저렉션》.

느릿하게 박동하던 스테치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두근거렸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그의 손에 다시금 뜨거운 혈기가 감돌았다.

“이겨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네.”

보란듯이 씨익 웃고 있는 프레야와 눈이 마주친 스테치. 그는 프레야가 뻗은 손을 붙잡고 일어선 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더 빨리 끝내 버리자.”

힘을 더 낼수록, 두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한계 또한 더더욱 빨리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말했고, 프레야는 그 말에 담긴 각오와 의미를 이해했다.

살아서 돌아가, 엘레나를 되살린다.

“알았어.”

푸화아악!

반지로부터 퍼져 나온 황금빛 마력이, 손가락과 혈관을 타고 신체의 말단부 여기저기까지 퍼져 나갔다. 그런 스테치의 모습에 아치발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 거냐? 이미 승기가 나에게 기울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이대로 시간을 끌어 봤자 네가 이길 확률이라곤…….”

“아, 닥쳐 좀!”

스테치가 말하자, 마력으로 화한 프레야의 몸이 반지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자 한층 더 강한 기운이 스테치의 전신을 휘감았다.

“너 따위는 그냥 내 인생을 가로막은 장애물에 불과해. 확률이고 나발이고, 방해되니까 치워 없애 버릴 뿐이다.”

스테치는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검신 전체를 아우르는 희미한 잔금이 보였지만, 할로우 블레이드는 아직 끄떡없다는 듯 강하게 빛을 밝혀 스테치의 뜻에 동조해 보였다.

“엘레나가 날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슬슬 좀 뒈지라고, 히스테릭 노땅!”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긴!”

아치발이 노호성을 토해 내며 스테치에게 달려들자, 스테치도 그에 맞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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