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역전 (197/203)


197화 역전
2022.04.16.


엘레나를 살릴 수 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피로와 절망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치발은 그런 스테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넘쳐나는 그와 달리, 스테치가 두른 마력은 앞으로 얼마 뒤면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마력을 더 쥐어짜 낸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단순히 행동뿐만이 아니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의 심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왜지?’

설마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이길 방법이라도 찾아냈다든가?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떠올린 아치발은 이내 희미하게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없지.

검에 벼락을 두르고 접근해 오는 스테치의 모습에, 아치발은 양손에 마력을 모아 스테치에게 발사했다.

퍼엉-!

그러나 스테치는 단거리 포털 아티팩트를 사용해 빔 공격의 궤도를 비틀었고, 아치발은 《디스펠》을 사용하여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드는 빔을 캔슬 시켰다. 불과 1~2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치열한 공방이었다.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군.’

할로우 블레이드의 번뜩이는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아치발은 양손에 각각 검 하나씩을 소환시켜 그것을 튕겨 냈다.

금속성의 충돌음과 동시에 번뜩이는 불똥. 눈으로는 쫓기 힘든 무수한 검격이 교차하며, 아치발과 스테치를 감싸고 있던 대기가 희미하게 떨려 왔다.

‘프레야.’

스테치는 아치발의 검을 받아넘긴 뒤, 그대로 반격하며 프레야를 불렀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지시를 그대로 따라와 줘. 신호를 보내면 시작하자.’

『언제든지 말만 해.』

콰캉-!

잠시 후.

스테치의 회전베기와 아치발의 2연격이 맞부딪치자, 그들은 서로에게서 크게 밀려 나갔다. 두 사람이 무너진 자세를 다잡는 바로 그때, 반지 안에서 대기 중이던 프레야가 튀어나와 아치발에게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코어 블라스트》!”

손바닥을 아치발의 복부에 대고 주문을 외치는 순간, 아치발의 상반신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마구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결과는 첫 시도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소용-”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프레야에 뒤따라 달려든 스테치가 그의 복부에 두 번째 추가타를 먹이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코어 블라스트》!”

뻐엉-!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해 아치발의 몸을 마구 부풀리던 마력이, 결국 그의 등허리를 터뜨리고 콸콸 쏟아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스테치의 공격을 받아 내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끄아아악!”

처음으로 아치발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건한 육체를 가진 그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끔찍하리만치 괴로운 감각이었다.

털썩!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새하얀 척추가 공기 중으로 드러났다. 아치발의 등 너머 지면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흩뿌려진 내장 조각과 피, 그리고 살점들이 있었다.

“이…… 이놈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스테치를 올려다보는 아치발. 그러나 스테치는 그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는지, 할로우 블레이드로 단숨에 목을 쳐 버렸다. 피분수와 함께 날아오른 아치발의 머리통은 그대로 땅에 떨어져 굴러갔다.

스르륵-.

잠시간의 적막.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치발의 머리통은 마력과 사기로 녹아 안개처럼 사라져 갔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그의 목 위로는 곧 새 머리가 자라났고, 뻥 뚫린 등도 재생되었다.

아티팩트 아므리타의 영향으로 눈이 검게 물든 스테치가, 프레야와 함께 아치발을 내려다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나 해서 시험해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끝내주는구먼.”

“…….”

《코어 블라스트》의 효과를 상쇄시키고자 체내의 마력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극히 찰나의 타임 랙(Time lag). 아치발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그 틈을, 스테치는 한번 보는 것으로 정확히 포착해 낸 것이다.

대체 이 공격을 명중시키기 위해 얼마나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고, 얼마나 많은 변수와 타이밍들을 계산한 거지?

“……정신 나간 놈.”

아치발이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힘을 사용했다간 ‘정말로’ 죽을 거다.”

신의 힘을 둘러 봤자 베이스는 결국 인간.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초월하려 들수록 그 충격은 계속해서 쌓여 가고,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치발의 경고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메멘토 모템의 능력으로도 구제할 길이 없는, 영원한 죽음.

주르륵.

마치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스테치의 콧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스테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훔쳐 낸 뒤 말했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지금의 너는 그야말로 자신을 심지 삼아 태워 없어져 가는 촛대에 불과하다. 불이 아무리 커져 봐야 촛불 이상은 되지 못할 운명이야. 네가 하는 모든 발버둥이 곧 너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이기도 하지. 그런데 왜 계속 싸우려 드냔 말이다.”

아치발이 말했다. 그러자 스테치는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중얼거렸다.

“……X발. 뭔 소리하나 궁금해서 들어 봤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네.”

뻐억!

스테치의 주먹에 얻어맞고 날아간 아치발은, 주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바윗덩이들 중 하나에 깊숙이 파묻혔다. 스테치와 프레야는 아치발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으윽!”

“또 엉뚱한 소리 할까 봐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이 짓거리를 반복할 거야. 그러니까 쓰잘데기없는 말 좀 그만하고 뒈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10m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좁힌 프레야가 먼저 아치발에게 장타를 먹였다.

퍼억!

“《코어 블라스트》!”

《디스펠》로 주문을 캔슬해 보려던 아치발은, 자신의 주문 해제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그녀의 공격에 다이렉트로 적중당하고 말았다.

아치발은 폐부의 공기를 그대로 토해 냈다.

“《코어 블라스트》!”

그리고 이어지는 스테치의 2차 타격. 두 번의 공격을 절묘한 타이밍으로 연달아 적중당한 아치발은, 목구멍 저편으로부터 밀려 나온 토혈을 쏟아 내며 바윗덩이를 부수고 날아갔다.

“으웨엑!”

과거의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을 수준의 마법. 그러나 힘이 온전치 않은 지금, 스테치와 프레야의 콤비네이션은 아치발이 감내할 수 있는 대미지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커스 이팅!”

《코어 블라스트》에 의해 터져 나온 마력. 전성기 시절의 힘을 되찾기 위해 대륙 곳곳에서 끌어모은 아치발의 마력을, 스테치는 커스 이팅을 사용해 모조리 빨아들였다.

본디 커스 이팅은 구속력을 잃은 죽은 생물의 마력만을 흡수하는 어빌리티였으나, 《코어 블라스트》의 영향으로 구속력이 약해진 아치발의 마력은 너무나도 손쉽게 메멘토 모템으로 흡수되었다.

‘이건…….’

아치발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스테치의 모습을 보곤 식은땀을 흘렸다. 깨진 그릇처럼 바닥을 보이던 그의 몸이, 강탈당한 마력에 의해 다시금 서서히 채워지고 있었다. 다 쓰러져 가던 그에게 계속 싸워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對)아치발 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메멘토 모템의 진정한 능력이었다.

‘……잡아먹히고 있는 건가? 이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씹어먹어 주마. 덤벼!”

반지 낀 왼손의 마디마디를 꺾어 보이며 다가오는 스테치의 모습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쓰러져 있던 아치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무섭게 스테치는 곧장 몸을 던졌다.

아치발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타이밍이 어긋나 반격까지 당하는 일도 여러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스테치와 프레야는 한층 더 집요하게 그를 공격했다.

계속되는 싸움으로 인해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물들고, 콧구멍과 입가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스테치는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아치발을 몰아붙였다.

압도적인 우위로 찍어누르려던 것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역전되어 있었다. 쫓는 자에서 쫓기는 자가 된 것이다.

‘어째서……?’

뇌리를 불태워 버릴 것만 같은 고통의 격류 속에서, 아치발은 자문했다.

‘진즉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일 텐데, 대체 어떻게 저런 엉망진창인 몸으로 계속 움직이는 거지?’

피투성이에, 넝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달려드는 스테치는 가히 광전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콰광!

결국, 멱살이 휘어 잡힌 아치발은 그대로 집어 던져져 저 멀리 눈이 쌓인 설산까지 날아갔다. 차가운 만년설이 상처 입은 그의 몸을 차갑게 감싸 안음과 동시에, 산 전체로 거대한 눈사태를 일으켰다.

“헉…… 헉…….”

아치발은 눈 속에 파묻혀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마력 흡수력과 몸의 재생 능력이, 대미지를 전혀 커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위험하다.

탁!

저 멀리에서부터 날아온 스테치가 사뿐하게 눈밭 위로 착지했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조차,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말했지? 죽을 때까지 하겠다고.”

“왜냐?”

갑작스럽게 트인 아치발의 말문에, 스테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애초에 너는 왜 계속 나를 적대하는 거지? 너에게 사명을 부여한 세 신들도 남이고, 네가 구해 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 또한 너와는 일면식조차 없는 남이다. 심지어 이 싸움에서 이겨 봤자 너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덤벼 오는 이유가 뭐냐?”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더니, 이윽고 말을 이어 나갔다.

“죽은 연인과 함께 하는 것이 너의 소망이었다면, 내가 그 연인을 되살려 주겠다. 그것으로도 이미 네가 싸움을 그만둘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살다 살다 별 신박한 개소리를 다 들어 보겠네.”

아치발의 회유 아닌 회유에 스테치는 발끈하여 대꾸했다.

“너 같은 놈이 제일 꼴 보기 싫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그 순간까지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놈이니까.”

“그러는 너는 스스로를 박애주의자라고 자처할 셈인가?”

“아니. 나는 내가 박애주의자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 네가 말한 것 중에 틀린 거 하나 없어. 쓸데없는 영웅놀음에도 관심 없고,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귀찮은 일은 더더욱 질색이야. 그런데 상황이 날 이렇게 몰아가는 걸 어떻게 하라고?”

스테치는 아치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작작 좀 죽였어야지, X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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