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비밀이 많은 나의 벗, 코코에게.
템즈 강변에 날려버린 갈기갈기 찢은 편지 조각을 모두 모아왔다고요. 그것참 귀여운 거짓말이로군요.
모든 면에서 영민함을 보이는 당신이, 단 하나 거짓말에서 만큼은 교묘해지지 못하는 것만큼 귀여운 것은 또 없고요.
머뭇거리며 내게 어떻게 말해야할지는 생각했을 당신을 떠올리니, 더더욱 사건의 진상이 알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 캐물어봤자 좋을 것은 없지요. 그것은 스무해 넘게 살며 몸으로 깨달은 몇 안되는 삶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몸으로 깨달았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의 사랑하는 누이에게 얻어맞으며 배웠다는 것인데, 그렇게 상처와 함께 얻은 교훈은 쉽게 잊히지는 않는 법이랍니다.
그러니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싶다는 욕망을 뒤로 한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따위를 굳이 알려들진 않겠습니다.
허나, 코코.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언젠가 당신이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진다면 그 사람은 리암도, 줄리엣도, 당신 집 벽도 아니라 반드시 내가 되어야만 해요.
넌지시, ‘저기 아치’ 하고만 불러준다면, 언제든 서책보관함 앞에 앉아 당신의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초열달 마지막날의 저녁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고 살으려했던 인생의 결심을 뒤로 하고 당신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있는 아치 앨버트
추신: 이것 역시 때가 되면 당신이 알아서 이야기해주겠지 하고 한동안 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요. 이제 슬슬 앤 셀린 작가의 원고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 * *
벗이 가져야 할 거의 대부분의 미덕을 갖추신 나의 왕자님.
당신의 수 많은 장점 중에 제일 먼저 칭송되어야 할 것은 바로 참을성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챌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도, 그 호기심을 억누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당신 뿐이지요.
그런 당신이 여쭤보실 때까지 앤 셀린 작가님 이야기를 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저는 정말이지 무심하기 짝이 없었네요.
사실요, 아치. 당신이 다쳐 누워있던 때쯤에, 원고에 큰 문제가 생겼었답니다.
제가 또 원고를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던가 하는 크나큰 비극은 아니지만, 어찌보면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일이였지요.
그러니까 앤 셀린 작가님의 원고가요....
그 원고가...
...재미가 없어요.
왕자님께 말씀드렸던 ‘플로리안 찾기’ 부분까지만 해도 원고는 엄청나게 재밌어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그 재미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훅 하고 사라져버렸어요.
저희 편집부의 모두는 정말 당황해하고 있죠. 이건 완전히 사람이 바뀐 기분이라니까요. 앤 셀린 작가님이 갑자기 윈저튼 왕국으로 가버리고, 윈저튼의 장엄하게 게으른 역사기록관이 이곳에 오게된 사건이라도 벌어진 것일까요?
맨 처음의 간결하면서도 재기 넘치던 문장들은 모두 어딜 간 것인지, 이제 이 글은 사실의 나열 수준에 지나지 않아요.
제가 보아도 이런 감상이 들진대, 까다로우신 메리앤 편집장님께서는 어떠실지야 왕자님께서도 짐작하시겠지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내 이건 아니라고 하지 그랬냐’ 는 글씨를 이마에 붙여놓고 다니십니다. 당신께 말씀은 안드렸지만, 편집장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원고를 출간하는 걸 좀 꺼려하셨거든요. 그것은 제가 고집부려 하겠다 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가뜩이나 조그마하던 편집부 안에서의 저의 입지는 더더욱 작아서 이제 한발로 깽깽이를 하며 서 있어야 할 판이랍니다. 뭐, 문고판 책만한 입지 안에 서서 양 발로 번갈아 깽깽이를 해대며 줄리엣과 잡담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러다간 정말 다리에 쥐라도 날 판이에요.
그래서 일주일 쯤 전에는 리암에게 말을 꺼내보기도 했어요. 반응이 이러하니 앤 셀린 작가님께 다시 한번 원고를 봐주십사 한다고요. 그런데 이 남자, 그 말에 토라졌지 뭐예요?
아니, 그걸 토라졌다고 해야할까요? 멀끔한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주저앉더군요.
“그게…… 그렇게 최악입니까?
저는 얼른 말했지요.
“뭐, 최악은 아닌데요, 리암.”
“그렇죠? 최악은 아니죠? 그러니까 글재주가......”
“글재주가 없어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요. 신기하죠? 최악은 아닌데...”
“네, 최악은 아니죠? 그거면 됐어요.”
“...재미가 없어졌다는 측면에서는 최악보다 더 심하죠.”
“최악보다 더 심한 것도 있군요.”
리암은 제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정말 상처받은 사람같은 표정을 짓더군요. 하마터면, 리암이 이 글을 썼나 의심할 뻔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책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닌데, 아.....”
라고 까지 중얼거리니,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죠.
하지만, 왕자님. 리암은 당신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어요. 절대로 제게 편지 한통을 안 써주거든요. 제가 아무리 졸라도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글을 쓴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저는 앤 셀린 작가님의 이야기냐고 물었어요.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앤 셀린 작가...님이 잘못 생각하신 것 같아요. 차기작을 내자는 건 잘못된 아이디어였어요. 아니, 내긴 내야했지만 아주 짧게 쓰셔야했죠. 뒷 이야기까지 쓰는 건, 정말.”
리암은 계속해서 중얼거렸습니다.
좀 신기했어요. 리암은요,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람은 결코 아니거든요.
어느쪽이냐하면 아주 수수께끼만 가득한, 한 마디를 던져도 의미심장한 말만 골라 하는 사람이지요. 사실 어젯밤에도 제가 아주 궁금한 것이 있어 찾아갔더니 제대로 대답도 않고서는 ‘나중에요, 때가 되면’ 이란 말만 반복하는 통에 분통이 터지기도 했었거든요. 제가 조금만 더 성질이 있었다면, 앤 셜리가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치듯 그를 때리고 싶었을거에요. 그러니까 가끔 그렇게까지 답답하게 구는 사람인데... 그때는 그렇게 중얼중얼 하더라니까요.
“그게,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었는데...아, 그러니까 앤 셀린 작가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말예요, 코델리아.”
횡설수설하는 그가 불쌍해서, 전 얼른 어깨를 토닥여주었죠.
“괜찮아요, 리암. 그냥 좀 고쳐달라고 넌지시 말해보세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고쳐야할지.”
리암의 표정은 더욱 더 굳어지더군요. 저도 그 심정은 이해가 가더라고요. 멀쩡히 써 낸 글을 재미없으니 고쳐내라고 말하는 것도 리암처럼 다정한 이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테니 말예요.
“정말 그렇게 엉망이였어요?”
리암은 마지막 희망의 줄이라도 붙잡듯이 저를 보며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다 대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죠. 하지만 어떡하나요. 리암이 제 아무리 잘생겨봤자,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것인 걸요.
“네, 정말 재미없어요.”
리암은 거의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더군요. 아마 앤 셀린 작가님과 특별한 친분이라도 있는 모양이에요. 평소에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 보아도 공감 능력이 탁월한 편이니 그리 낙담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답니다.
털래털래 걷는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보자, 저 역시 가슴이 아파져 왔지만 별수 있나요.
당신 말대로 전 거짓말은 못 하고, 원고가 재미없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걸요. 이쯤 되면 당신 편지를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 원고를 고쳐내는 것보다 쉬운 작업이겠다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어쨌든, 어쨌든 원고의 수정은 리암이 잘 전달해본다고 했으니, 다른 작업이라도 진척이 있어야 할 텐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주엔 삽화가가 갑자기 연락 두절이 되었어요.
전적이 한 번 있던 삽화가인 터라, 메리앤 편집장님은 바로 계약을 파기하셨죠. 아마 편집장님은 이렇게 된 것, 그냥 이 책을 버리자는 심산이신 것 같았어요. 저 역시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아치 왕자님, 사실요. 당신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였더라면, 저 역시 이 소설을 그냥 놓아버렸을 거이에요.
하지만 이젠 절대 그럴 수 없죠.
이건 당신 이야기인걸요.
어쩌면 당신과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저는 문고본보다 작아져 명함만해진 입지 속에서도 큰 소리를 뻥뻥치며 새 삽화가를 데려오겠다고 했지요. 메리앤 편집장님은 그런 제가 괘씸했는지, 그럴거면 원작의 삽화가를 데려오라셔요.
사실 원작 〈공주와 기사〉의 삽화는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거든요.
당신의 필경사들께서 그려주신 내 모습처럼 한 붓, 한 붓 정성스레 묘사된 에드위나 공주님의 붉은 머리결은, 기사 아서 길런이 단번에 공주님께 빠져버렸다는 이야기를 아무 불평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답니다.
가느다란 선이 그려내는 섬세한 윈저튼의 풍경은 어찌나 아름다운지요.
기사 아서길런의 푸른색 눈동자를 그려낸 물감은 어쩜 그리 맑고요.
그의 금색 머리카락은 햇살이라도 한 줌 받아 그려낸 듯 선연한 금빛을 뿜어낸답니다.
성 앞을 기다리는 그의 그림자는 또 어쩜 그리 운치있는 회색인지.
저는 단지 색만으로도 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을 보고 처음 알았답니다.
그토록 슬퍼보이는 그림자는 없을 거예요.
저도 알아요.
그 삽화가를 찾아낸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원작을 낸 출판사는 이미 20년도 더 전에 사라진 아주 작은 회사인데다, 책에는 삽화가의 이름조차 실려있지 않고, 이 삽화가가 다른 책을 작업했다는 소식마저 들은 적 없으니까요.
전 다시 한번 리암을 불러 앤 셀린 작가님에게 삽화가의 이름을 물어봐달라고 했지만 리암은 딸꾹질을 다 하며 당황해하더군요.
“죽었어요, 죽었어.“
“죽..었다고요?”
“네, 그리고 살아있을 때도 말을 오지게도 안듣... 아무튼, 잊어요. 코델리아. 죽었어요. 죽었어. ”
그토록 단호한 얼굴은 또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절망의 바다를 헤매이며 흐느껴 울고는 영국에 현존하는 모든 삽화가들의 그림을 찾아보는 수밖에요.
친애하는 나의 왕자님.
당신의 코코가 얼마나 괴로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줄을 이제 아시겠지요?
오늘도 전 원작의 삽화가 님과 비슷한 그림체를 찾기 위해 주말을 반납한 채 하루종일 자료를 모으려 동분서주하고 있답니다. 내일이면 다시 회사에 돌아가 이달 안에 출간해야할 다른 책들을 손대야 할테고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마음은 언제나 레테 수도원 쩨 1스크립토리움 책상 한 쪽에 자리하고 있건만, 현실의 전 이렇게 일해야만 런던 한 복판에 둔 세발자국짜리 방을 유지하고 살 수 있으니 말이죠.
더 슬픈 일은 뭔 줄 아세요?
이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일을 정말 사랑해서, 책을 만든다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는 나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정말 신묘한 일이 생겨, 제가 윈저튼 왕국에 간다고 해도 아마 전 필경실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시도서 아닌 다른 이야기책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겠죠.
네, 책에 미친 순간부터 제 인생은 꼬여버렸어요. 그것도 아주 단단히요.
그러니 나의 관대한 벗, 당신의 코코는 이제 다시 무릎을 꿇고 부탁드립니다.
저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생각하신다면 부디 이 중대한 사실을 여태까지 숨겨온 것에 너무 노여워는 마세요.
네, 알아요. 우리가 편지를 이어갈 이유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요.
당신의 현실이 내가 가진 원고의 시간을 따라잡은 지금,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버렸고, 내가 당신께 드릴 정보 따위 남아 있지 않답니다. 네, 전 이제 이용가치 하나 없는 필담 벗이 되었어요.
아치 앨버트, 설마 나를 버리진 않을 거죠?
7.27. 저녁놀 앞에서.
-당신의 다정한 우정에 기대며, 코델리아 그레이
추신: 초열달은 27일이 끝이에요? 괜히 아쉽네요.
* * *
요망하고 간사스러운 나의 코코께
네, 초열달은 스물 일곱번째 날이 끝이랍니다.
당신의 사특함은 초열달의 달뜬 열과 달리 끝이 없는 것 같고 말이죠.
코코,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고 계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내가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 영민한 머리로 모두 기억하고 계실진대, 당신을 버릴 것이냐 물으시다니요.
사람에게 영원을 맹세하게 만드는 방법도 가지가지란 생각을 하는 밤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니, 당신의 영악스러운 편지를 모두 용서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수도원에서 농땡이를 치고 있는 동안에, 혼자 그리 바쁘게 살았다는 것에 괜스레 가슴이 아파오니 말이죠.
그러나, 코코.
관계의 역전이네, 당신의 이용가치네 하는 말로 나를 농락하는 것은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지금도 제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손에 쥔 채, 희희낙락하고 계시면서 말이에요.
네, 〈공주와 기사〉 말입니다.
거기에 실린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길래 일곱 줄에 걸쳐 그것을 찬탄하시는 겁니까?
리암의 (나보다 나을 리가 없지만 제법 잘생긴 것은 같은) 외모를 찬양하는 데에도 다섯줄 밖에 쓰지 않으셨으면서요.
어서 내게 〈공주와 기사〉를 보내줘요.
이것이 단순히 내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란 걸 당신은 아셔야합니다.
아름다운 그림은 혼자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죠. 우리 수도원 필경소의 해이해진 채식사 무리들에게도 보여줘, 그들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렵니다.
-혹시나 당신이 먼저 나를 버리시는 날이 온다면 그때도 오늘처럼 당당히 애걸복걸할 아치 앨버트.
추신: 이 세상에 책이 있는 한, 내게 당신의 이용가치는 영원할 거에요.
* * *
가끔은 아주 꼼꼼한 아치 앨버트.
그러게요. 〈공주와 기사〉초판본을 함께 보낸다는 것을 깜빡했어요.
절대로 당신의 안달하는 모습을 보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랍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니, 새 책 대신 내 보물의 상자에서 꺼낸 〈공주와 기사〉 초판본을 동봉할게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엄마가 저에게 수십번, 수백번을 읽어주셨던 책이에요. 덕분에 손때도 조금 묻어있고, 찢어먹은 자국이며, 비뚤빼뚤한 밑줄도 가득하지요.
하지만 이 책을 펼친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 그런 흠들이 아닐 거예요.
푸른 들판 아래, 연초록색 나무 밑에 서 있는 타는 듯 붉은 머리의 공주님 그림을 본다면 당신은 단번에 알게될테죠.
우리 편집장님이 괜한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니란 사실을요.
정말이지 멋진 그림이죠?
추신: 맞아요. 당신이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을 걸 알고, 그렇게 물었어요. 하지만 난 내가 가진 장서가 나의 가장 큰 장점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뭐예요. 그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슬픔을 지닌 분이라 날 버리지는 못할 줄로만 알았죠.
갑자기 이 세상에 책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되네요. 그럼 당신은 날 뚝 끊어버리겠죠. 서책 보관함 따위, 망가지든 말든 바닥에 내팽개치고요. 그러고 나서도 1백 년쯤 흘러, 갑자기 제가 생각나거든 템즈강으로 오세요. 전 템스강 바닥에 가라앉은 편지 조각들을 모으기 위해 그리움에 울부짖으며 바닥을 긴 머리로 쓸고 다니고 있을 거랍니다.
초열달이 끝나 슬픈 저녁.
-당신의 장서 보급책, 코델리아.
* * *
그리움에 울부짖어도 귀여울 나의 코코.
더 얘기해봐요.
내가 당신을 버린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울분에 못 이겨 내가 보낸 편지들을 모두 당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찢으며 외로워할건가요?
매일 밤 줄리엣과 술을 마시며, 꼬부랑 글씨로 온 벽을 장식할 겁니까?
손톱을 물어뜯으며 당신의 세 걸음짜리 방을 밤새 초조히 돌아다닐 건가요?
당신 슬픔을 최대한 처참하게 묘사해줘요.
특히 길바닥을 기는 장면은 더욱 상세히요.
제발 나를 위해 눈물을 뚝뚝 흘릴 거라 말해줘요.
내가 당신 슬픔의 이유가 된다는 것에 못내 기쁜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순수한 벗은 아니겠지요. 아무래도 내가 세실의 친동생이 맞긴 한가봐요. 사랑하는 벗의 슬픔에 기뻐 날뛰는 내 꼴이라니, 사람이 이토록 비틀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추신: 네, 당신이 말한 그대로 〈공주와 기사〉의 삽화는 몹시도 아름답네요. 당신이 왜 우리 수도원에서 그려준 그림을 언급했는지도 알 수 있었고요.
붉은 머리결을 묘사하는 섬세한 붓질은 우리 필경소 최고의 채식사, 틸버트의 솜씨와 흡사합니다. 그의 그림체는 좀 더 둥글고 둔탁한데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그릴 일 없이 매일같이 고리타분한 시도서의 글자작업만 하고 있긴 하지만요.
그리고요, 코코. 당신은 그림을 보라 하셨지만, 난 당신의 장난끼 어린 낙서를 보는데에만 1시간을 보냈답니다. 대체 왜 공주님 머리 위에 뿔을 달아놓은 거예요? 세상에 책이 없어져 당신의 이용가치가 적어진다면, 이제 난 당신을 내 안의 사악한 생각들을 공유하는 영혼의 동지로 쓰렵니다.
* * *
내 세계로 들어온 것을 환영할게요, 나의 왕자님.
공주님 머리 위에 뿔을 달아놓은 것은 나 역시 당신처럼 악에 가까운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죠.
왕자님, 가끔 전 당신이 날 너무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 짓기를 기대합니다.
괴로움이 몸부림치면서 내 편지를 기다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깐 숨을 참고 서책 보관함 앞에서 머뭇거릴 때도 있고요.
물론 내겐 당신같은 참을성이 없으니, 그 머뭇거림이 1분을 넘어가지 못하지만요.
-당신의 사악한 동지. 코델리아.
추신: 악을 공유하는 것은 역시 특별한 재미가 있는 일인가봐요. 당신의 이번 편지는 너무 좋아, 세 번을 다시 읽었답니다.
* * *
악에 물든 나의 영혼의 벗께
우리의 죄악을 감춰주려 어둠이 몰려왔습니다.
즉, 도둑질을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라는 것이죠.
〈공주와 기사〉에 실린 그림을 보고 아무래도 자꾸 틸버트의 그림이 생각나 필경소 한쪽에 있는 장서 보관소에 다녀온 참입니다. 도서관과 완전히 분리된 그곳에는 우리 필경사들이 작업한 여러 책들을 모아두고 있지요.
이놈의 필경사들은 어찌나 미련한지 주문 받아 따로 제작한 시도서마저도, 한 권을 더 만들어 이곳에 모아둔답니다. 네, 책에 미친 나의 벗. 이 세계에 온다면 당신이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낼 곳은 아마 이곳일거예요. 굳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이곳은 많은 이들에게 별천지처럼 보이는 장소지요. 플린 역시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답니다.
그러나 수도사들도 플로리안도 노엘도 모두 잠든, 이런 밤엔 나 말고는 그곳에 들어갈 사람이 없지요. 감히 그곳의 책을 훔쳐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낮이나 밤이나 나 혼자일 것이고요.
코델리아, 벌써 몇 개를 훔쳐내는 것이냐 나의 손버릇을 욕하려 들지는 마세요. 처음부터 그럴 심산은 없었답니다. 당신이 세 번이나 내 편지를 읽는 동안 적적한 나머지 틸버트의 옛 그림이나 구경하려 잠시 다녀왔을 뿐인걸요.
그런데 그곳에서 이런 것을 찾을 줄이야 내가 알았겠나요?
당신과 달리 꼼꼼하며 섬세한 나는, 잊지 않고 서책을 동봉하겠습니다.
책을 펼치면 바로 제목이 보이네요. 베데르 양반의 아름다운 솜씨지요.
〈기사 아서 길런 이야기〉
이 제목을 눈에 담자마자 당신은 나의 나쁜 손버릇을 용서하게 될테죠.
나의 성스러운 벗이여, 그래도 역시 남의 것을 허락도 없이 가지고 오는 것은 안될 일이라 생각하고 계신다면, 부디 책 장을 한 장 더 넘겨보세요.
거기엔 요즈음의 유행과는 완전히 다른, 길쭉하고 장식적인 그림체의 삽화가 보일테니까 말입니다. 그 밑에는 제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으로 틸버트가 작게 그려둔 ’t’라는 글자가 있고요.
그러나, 그 조그만 글자에 웃기도 전에 당신은 볼 거랍니다.
〈공주와 기사〉의 아서 길런처럼 산산히 부서지는 푸른 눈을 한, 햇살을 한줌 넣은 듯 밝게 빛나는 금발을 한, 우리 틸버트가 그린 기사 아서길런을 말입니다.
네, 코델리아.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일을 내가 해냈답니다.
〈공주와 기사〉의 삽화는 우리 틸버트가 그렸습니다.
당신이 뱉으신 여덟 줄 짜리 찬사는 내일 아침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드릴게요.
그러는 동안, 당신은 서책보관함을 덮고 침대에 누워 제가 드린 책을 읽다 잠에 들길 바랍니다.
꿈에서는 책에 미친 당신이나 기뻐할, 나의 세상 속 장서 보관서로 초대해드릴게요.
잘자요, 코코.
* * *
아치 앨버트, 미쳤어요?
이런 걸 주고 침대에 누우라는 둥, 책을 읽다 잠에 빠지라는 둥 하시면 제가 잠자코 꿈이나 꾸고 있을 줄 알았나요?
아니죠, 당신은 지금쯤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내 답장을 기대하고 계실 거예요.
틸버트가 〈공주와 기사〉의 삽화가라고요?
그럼 앤 셀린 작가님은요?
혹시 그가 앤 셀린 작가님인가요?
삽화는 대체 어떻게 넘긴 건데요?
서책보관함으로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다나요?
이런 사실을 숨겨두고 지난 번에 저에게는 ‘안녕하세요, 틸버트입니다’ 라고만 썼다고요?
틸버트 채식사님이야 말로 저보다 요망하고 당신보다 사특하며 세실보다 악랄하시네요!
게다가 이 책은 대체 뭐예요?
〈기사 아서 길런 이야기〉 라더니, 에드위나 공주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윈저튼의 건국 설화잖아요. 아서 길런이라는 용맹한 기사가 하나 등장할 뿐, 그의 사랑 이야기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고요.
혹시 윈저튼에는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나요?
기사 아서 길런은 윈저튼이 세워지는 것을 돕고 나서도 아주아주 오래 살아, 나중에 에드위나 공주를 만나러 오게 된 것인가요?
윈저튼 사람들은 100년, 200년씩 살기라도 하는거냐고요?
아니면 ‘아서 길런’ 이라는 이름이 윈저튼에서는 발에 채도록 흔한 이름인거예요?
빨리 답장을 해주세요, 나의 벗.
7월 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는 새벽,
-잠 못이루는 당신의 벗, 코코가.
* * *
나의 사랑스러운 물음표 덩어리, 코코에게
오랜만에 당신을 놀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아주 오랜만에 나의 이용가치가 증명된 것 역시 기쁘고요
하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하군요.
내일 아침, 틸버트가 일어나면 당신에게 다시 답장할게요.
부디 쓸쓸해하지 말고 주무세요, 나의 벗.
-사랑을 담아, 아치 앨버트
* * *
아니 왕자님,
저 지금 쓸쓸한 게 아니라 잠을 못 잔다니까요?
정말이지, 당신은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지니고 계시는군요!
-당신의 하나도 쓸쓸하지 않은 벗 코델리아 그레이 올림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독자님들의 댓글이 좋아 세 번을 읽었답니다.
….그 덕에 늦은 것은 아니고요.
그저 늦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완결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 넘어야할 산이 두어개는 보이네요. 쓸데 없이 연참욕을 불태우지 않고 이제 매일 한 편씩 성실히 가져오는 이용가치 풍부한 사람이 될게요. 이번편이 앤 셀린 작가님의 원고처럼 노잼이 되었다해도;;;; 부디 저를 자정의 불쏘시개로 써주세요. 그러니까 내일 또 뵙자는 말이에요.
추신1: 이제 전 공지사항에 바뀐 표지와, 독자님들이 보내주신 팬아트를 자랑하러 갈게요. 몇 분 후 와서 구경해주세요.
추신2: 선작과 추천, 댓글 모두 감사합니다. 글쓰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어 댓글에 하나하나 피드백 해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나, 독자님들의 의견, 지적 모두 귀담아 듣고 깊이 고민, 생각하고 있으니 답장 없는 편지 보내던 코코 아빠의 심정이 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추신3. 그래도 이건 피드백 할 수밖에 없네요. 지난 편에 '같은 경험을 하셔서' 이 글이 너무 공감이 된다는 댓글이 있었어요. 혹시.. 코코니..?
<--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