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36화 (36/56)

#36

사랑하는 나의 벗, 코델리아께.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당신의 편지를 보았습니다.

예상대로 많이 약올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무척 기뻤답니다.

그런데, 수많은 물음표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건 좀 힘든 일 같군요.

일단 틸버트와 베데르가 일어나면, 그들을 만난 후 다시 답장하도록 하지요.

뭐 급한 일 있겠습니까?

마음 편히 먹어요, 나의 벗.

열매달의 첫 날 아침, 아치 앨버트.

* * *

사악한 뱀 같은 아치 왕자님께

당신은 가끔 정말 세실리아보다도 악에 가까운 본질을 가지고 계신 것 같다니까요.

호기심을 자극하며 저를 놀리는 것이 재밌단 건 알겠는데요.

잘못하면 그것이 당신의 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왕자님.

틸버트와 베데르는 이미 일어나 필사를 해도 네 쪽은 더 했을 시간이지요.

전 궁금함에 못 이겨 서책보관함을 회사에까지 이고 왔고요.

무슨 말 하는 줄 아시겠죠?

이 못돼쳐먹은 왕자님아, 빨리 답장해요.

안 그러면 정말 무슨 수를 써서든 그쪽으로 건너가버리고 말테니까요.

7.28. 아침.

-당신의 화가 난 벗, 코델리아.

* * *

화를 내는 때 가장 사랑스러운 나의 코코,

당신이 분에 못이겨 서책보관함에 들어와 이쪽으로 건너올 것을 생각해보니, 그것도 꽤 괜찮을 것 같은걸요?

이 마법의 상자가 부리는 시간의 마법에 희생되어 당신의 붉은 머리는 백발이 되어버리겠지만, 초록 눈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며 나를 노려보겠죠.

글로 나를 괴롭히던 당신의 악랄한 손가락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공격성을 만 천하에 드러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검을 꼭 붙잡아 내 심장에 찔러넣을 테고요. 그것 참 좋은 죽음입니다. 난 화가 난 당신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 모습을 보며 삶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을테니까요.

코델리아, 이제 아시겠지요? 당신의 그 협박은 하나도 무섭지 않답니다.

좀 더 두려운 이야기를 해봐요. 다시는 나에게 답장하지 않겠다던가, 우리의 서책보관함을 부숴놓겠다던가 하는거요.

열매달의 상쾌한 아침,

-그런 무시무시한 걸 협박조건으로 내걸면, 난 윈저튼의 일급비밀문서마저도 당신께 드릴 아치 앨버트.

* * *

아치 앨버트.

당신은 정말 선수예요.

나를 놀리면서 동시에 하늘로 붕 띄워놓는군요.

우리의 편지가 끊길 것이 겁날 정도로 나를 좋아하면서,

왜 이렇게 나를 괴롭혀요?

그러다 길버트처럼 머리가 박살나는 수가 있어요.

-당신의 앤 셜리, 코델리아 그레이.

추신: 그렇게 날 약올리면 재밌나요?

* * *

앤 셜리보다 난폭한 나의 아가씨,

그럼요. 정말 재밌어요.

당신을 약올리는 보람으로 살아가는 매일이랍니다.

게다가 나의 이용가치란 것이 당신의 수수께끼를 풀어드리는 것 뿐인것 같은 지금, 내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비밀을 움켜쥔 채 당신을 안달나게 하는 것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책상이라도 주먹으로 쾅 치며 이를 갈고 ‘아치 앨버트...’ 하고 내 이름의 앞 뒤로 욕을 붙이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였답니다.

덕분에 낮에도 이렇게 당신과 필담을 주고 받을 수 있으니, 이렇게 기꺼울 때가요.

-바쁜 당신과는 관계없이 한적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아치

추신: 아, 내가 틸버트에 대한 비밀을 다 알아냈다고 말했나요? 기사 아서 길런 이야기에 얽힌 비밀들도요. 진짜예요. 전 다 알고 있답니다!

* * *

내 밤의 훼방꾼 아치,

내 낮도 마음껏 침범하세요.

약속드리죠.

당신이 아무짝에 이용가치가 없어진 때에도 매일 같이 편지할게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눈도 멀고 걷지도 못하게 되는 때에도 당신을 내 방 한구석에 가둬놓고 애틋하게 대우해드릴게요.

그러니 우리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 물음표 덩어리에 하나씩 대답해봐요.

7.28. 점심시간과 당신의 답장을 기다리며

-코델리아 그레이.

추신: 30분쯤 뒤 점심을 먹으러 다녀올거예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을 땐 당신의 편지가 와있었으면 좋겠어요.

추신2: 나도 낮에 당신과 만날 수 있다는 건 좀 마음에 드네요.

* * *

사악한 코델리아 아가씨.

나를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 눈도 멀게 하고 걷지도 못하게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그것 참 인상적이네요.

-당신의 멀쩡한 벗, 아치

* * *

윈저튼 최고의 한량, 아치 왕자님.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란 걸 잊지 말아요.

제일 처음 당신께 빌려드렸던 〈폭풍의 언덕〉이란 책, 기억하고 있나요?

그 미친 소설을 쓴 에밀리 브론테에게는 언니가 하나 있는데 언니도 동생 못잖게 미친 글을 썼답니다.

〈제인 에어〉라는 제목으로, 제인이란 이름의 한 고아애가 주인공인 소설이죠.

이렇게 말하면 당신이 〈빨간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를 떠올리실 지도 모르니 좀 더 정확히 설명드리면 〈제인 에어〉는 〈폭풍의 언덕〉만큼이나 으스스한 소설이에요.

이 자매의 남성관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이번에도 기가막히게 매력적이고 하나도 올바르지 못한 남자가 하나 나오죠.

글쎄, 이 남자는 작품 내내 못생겼다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아치, 당신도 아시죠? 제가 못생긴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지 않는지를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이 로체스터라는 남자는 못생겼다는 줄을 박박 지우고 싶을 정도로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다니까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요? 브론테 자매는 당신과 나보다도 더 사악하여, 마지막엔 로체스터를 눈도 멀고, 걷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어버리거든요.

지금 막 그 책 출간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당신께 쓰는 편지에도 로체스터의 마지막을 암시해버렸군요.

내가 가진 수많은 책들로 당신을 꼬시려 했던 건 절대 아니었고요.

하지만 어쨌든 넘어오셨으니, 여쭙습니다.

자, 내 엉성한 설명을 읽다보니 〈제인에어〉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지지않았나요?

비밀을 말해보세요.

내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답해주신다면, 오늘 밤 당신은 유령 소리가 들리는 손튼 저택에서 벌어지는 엄청나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거에요.

추신: 당신이 조금만 더 심보를 예쁘게 썼어도 당장 드렸을 거라고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재밌는 책이랍니다.

* * *

아직 넉넉한 이용가치를 지니신 나의 벗께.

그래요, 당신은 굳이 서책보관함을 부수지 않고서도 날 협박하고 유혹할 많은 장서를 소유하고 계셨지요.

언제나처럼 당신의 꼬드김에 넘어간 나는 책을 주시는 밤까지 열심히 단서를 풀어보겠습니다.

일단, 틸버트가 앤 셀린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당신의 추측은 완전히 틀렸어요. 하지만 너무 스스로를 탓하진 마세요. 나의 명탐정 아가씨. 당신이 틸버트를 잠깐이라도 만나보았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테니 말예요.

틸버트는 말을 못해요.

그는 로이틀링엔 출신으로 에드위나 공주님이 볼모기를 지내고 수도원에 올 때 같이 데려온 이입니다. 공주님이 데려온 시종과 시녀 몇은 수도원에 남아 한참을 보내다, 저마다 제 공간으로 돌아갔지만 틸버트에겐 돌아갈 집이 없었죠.

베데르가 말하길, 사실 로이틀링엔 출신인 그가 대체 어쩌다 여기 끼어 따라왔는지 역시 의문이라고 합니다.

그 의문은 20여년이 지난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역시 틸버트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 안엔 혀가 없어요. 아주 오래 전에 잘려, 아문지도 한참 된 흔적 뿐이지요.

그때에는 베데르가 하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하니, 혀가 있다 한들 윈저튼어로 자신이 에드위나 공주를 따라온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말만 못한다 뿐,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귀신 같이 이해하지만요.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지낸 20여년 동안 매일같이 베데르와 붙어 있었지 않습니까? 그것은 틸버트의 귀가 윈저튼에 사는 다른 어떤 이의 귀보다 더 많은 윈저튼 어를 담았다는 이야기고...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을 익힐 수 있게 되지요.

그러나 들을 수 있을 뿐, 여전히 글을 읽고 쓰는데는 서툴답니다. 배우려고 들었다면 배울 수야 있었겠지만, 말하지 않는 자에게 글을 가르칠 생각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틸버트 역시 굳이 윈저튼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고요.

지난 번에 당신이 여덟 수도사들을 모아 쪽지를 받았을 때, 그 안에 들어있었다는 ‘안녕하세요, 틸버트입니다’ 라는 문장은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윈저튼어랍니다.

당신이 절대로 보지 말라 하셔서 차마 구경은 못하였으나, 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짧은 글씨에도 그가 가진 재주는 여실히 드러나 있을 거예요. 아름답고 장식적인 글씨체로 한 글자 한 글자 예쁘게도 써내려갔겠지요.

그러나 틸버트가 쓸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고운 빛깔을 내어 글자를 장식하고, 어떤 채식사도 흉내낼 수 없는 섬세한 삽화들을 그려냅니다. 하지만 앤 셀린 작가의 글을 그가 썼다고요?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이쯤되면 당신의 물음표가 다시, 비죽, 샘솟을 때가 되었죠.

글도 읽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필경사가 대체 어떻게 일을 하냐고요?

아마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라면, 글을 읽지 못하는 필경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채식사라고 해도 장식할 글자를 이해하고, 글에 맞추어 그림을 그려야하니까 말예요.

하지만 잊지마세요, 코델리아. 레테 수도원엔 아주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답니다. 특별하게 시끄러운 우리의 베데르 영감 말입니다.

일은 이렇게 돌아간답니다. 일단 틸버트가 자리에 앉으면 베데르는 그 옆에 앉아 그가 맡은 책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주죠. 어떤 내용인지, 주문자가 어떤 글자를 어떻게 장식하기를 요구했는지, 이 장면에는 어떤 삽화가 들어가는지를요. 틸버트는 그 조그만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대로의 그림을 그려내지요.

당신도 보셔 아시듯,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그림을요.

그러니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틸버트에게 가서 제가 물은 것은 ‘앤셀린 작가’에 대해서는 아니었답니다. 그가 앤 셀린 작가가 아닌 것은 확실하니, 그 다음 질문을 해야했죠.

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필경사 틸버트, 기사 아서길런이 기억나나?”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대가 기사 아서 길런 이야기의 삽화를 채식했나?”

다시 그의 고개가 아래 위로 흔들렸습니다.

저는 얼른 당신이 주신 〈공주와 기사〉 를 꺼내서 그의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것 봐. 이 그림은 그대가 그린 거야. 틸버트.”

제가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그의 앞에 들이밀자 그는 가만히 그 그림을 바라보더군요.

그리고, 말그림의 작은 부분을 가리키고는 어깨를 으쓱하더군요.

그가 가리킨 부분에는 나도, 당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 t’ 자가 새겨져 있었고요.

“그러니까 틸버트, 지금 여기 떡하니 적어놨는데 뭘 묻냐 이건가?”

그는 다시 가만히 날 쳐다보았습니다. 딱하다 하는 눈초리였죠.

이쯤되니 슬슬 답답해진 저는 급하게 베데르를 불렀답니다. 요즘 들어 우리의 사이가 당신을 사이에 둔 채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틸버트의 몸짓과 표정을 추리하여 통역하는 데에는 베데르만한 실력자가 없으니까요.

베데르는 틸버트의 표정을 보자마자 끝없는 수다를 시작하더군요.

“아 그러니까 왕자님, 틸버트는 그저 하라는 대로 한 죄밖에 없다는 것 같은데요.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킨 자가 대체 누굴까요? 그러니까 그게 20년 전이라네요. 네, 20년쯤 전에 이 그림을 그린 거 같답니다. 아마 틸버트도 너무 오래 전이라 정확한 날짜는 기억을 못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틸버트? 그래 어깨를 으쓱하는 건 모른다는 뜻이지. 답을 하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뻔하지 뭐야. 어쩌다가 에드위나 공주님과 서책 보관함으로 편지를 주고 받게 된건가, 자네? 아니라고? 그래, 아닌 표정이군. 그럼 누가 시켰는가? 아, 그래 그분. 아, 그러니까 왕자님, 틸버트는...”

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틸버트가 윈저튼에 오게된 날부터 여태까지의 족적을 밟으며 세 시간 여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니 코델리아, 내가 이리 귀중히 얻은 이야기들을 한 번에 들려주지 않고 아꼈던 것이 어떤 심정인지 잘 아시겠지요? 그러니 부디, 편지가 조금 늦었다며 분통 터뜨리고 계시진 마시길.

그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고통을 견디며 빼내어온 정보는 저녁을 먹은 후에 마저 적겠습니다.

열매달의 첫날 저녁,.

-당신의 충실한 벗, 아치

* * *

나를 약올리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시는 아치 왕자님.

이번엔 당신이 좀 실패하신 것 같아요.

너무 많은 단서를 주셨잖아요.

틸버트가 글을 못쓴다라,

그럼 에드위나 공주님과 서책보관함을 통해 편지를 주고 받았을 가능성은 없네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로이틀링엔어를 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진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만약 그 정도로 소통이 절실했다면, 틸버트 역시 윈저튼 어를 더 열심히 배우려했을테니 말이죠.

게다가 우리에겐 제 3의 인물이 하나 더 있죠.

에드위나 공주님과 꾸준히 서신교환을 했다는 비밀의 공녀 말이에요.

베데르 필경사님은 그분의 정체를 계속해서 숨기셨어요. 제가 ‘아델라이드 여왕은 아니냐’고 확실히 물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질문에만은 대답을 주지 않으셨지요.

제 생각을 말해볼까요?

에드위나 공주님은 서책보관함을 들고 나의 세상으로 왔어요. 서책보관함을 통해 비밀의 공녀님과 편지를 계속해서 주고받으셨고 말이죠.

어쩌면 앤 셀린 작가님은 에드위나 공주님일 수도 있겠어요. 어쩌다 에드위나 공주님이 이쪽으로 건너오셨는지, 어떻게 해서 책을 펴낸 생각을 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말이죠. 어쨌든 앤 셀린 작가가 에드위나 공주라고 가정해보면 이야기는 술술 풀립니다.

자기 이야기를 글로 낸 에드위나 공주님에게는 걸출한 그림이 하나 필요했을테죠.볼모기부터 함께 지내와 익히 그 실력을 아는 틸버트는 에드위나 공주님의 머릿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었을 테고요.

비밀의 공녀님이 당신의 어머니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분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분이 틸버트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분명해요.

그러니 아치, 당신이 해주셔야 할 것은 간단하네요. 빨리 베데르에게 윽박이라도 질러 비밀의 공녀님이 누구인지를 물어봐요. 그분을 찾으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 같으니 말예요. 어쩌면 에드위나 공주님이 이곳으로 건너와 글을 쓰고 계시는 것처럼, 당신도 내가 계신 곳으로 오실 수 있겠죠. 어때요? 서두를 생각이 드나요?

7.28. 저녁.

-퇴근하고 명탐정으로 돌아온. 코델리아.

추신: 새로운 작업을 할 생각이 있는지 틸버트에게 물어봐줘요. 보수는 원하는대로 준다고 하시고요.

물론 내게 윈저튼의 화폐따위 동전 하나 없으니, 왕자님, 당신께서 모두 내셔야할 거예요. 이런 법이 어딨냐 하시면 그 액수만큼 책을 안겨드리겠다고 답하겠어요.

추신2. 그건 그렇고, 기사 아서길런 이야기는 어떻게 된거예요? 정말 아서 길런이 그렇게 흔한 이름인가요? 왕자님, 당신은 두개를 물으시면 한 개만 대답하시는 버릇이 있다니까요.

* * *

나를 혹독히 훈련시키는 명탐정 아가씨께.

당신의 두번째 추신에 모욕감을 얻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드리려합니다.

첫 째, 기사 아서 길런은 윈저튼에서는 전설같은 인물이에요. 당연히 그 분의 이름을 따 ‘아서’ 라고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하지만 ‘길런’이란 성은 대가 끊긴지 오래되었습니다.

당시 기사 아서길런이라는 작자가 와서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청혼했을 때에는 모두들 찰스 웰즐리나 다른 귀족가의 호기로운 청년이 펼치는 연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맹스러운 전설 속 기사의 이름을 가명으로 댄 체, 공주님 앞에서 하는 장난기 가득한 구혼일 것이라고요.

하지만 그가 투구를 벗었을 때에는 모두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지요. 금발에 푸른 눈은 몹시도 아름다웠으며, 에드위나 공주의 앞에 무릎을 꿇는 그 동작은 매우 절도있었으나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얼굴의 청년을 본 적 없었거든요.

아직도 아서 길런의 정체는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지 못한건... 윈저튼에서야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같은 것이니, 당신이 모를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못 미친 나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둘 째, 틸버튼에 대한 당신의 추리는 완벽해요. 비밀의 공녀가 우리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것만 빼면요. 사실 그 비밀의 공녀님과는 다프네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마주쳤답니다. 다프네의 고모이신 레이디 조세핀이라는 수척한 부인께서 플로리안을 보고 놀라서 따라오더니 ‘에드위나 공주님?’ 하고 물었거든요. 네, 플린은 이런식으로 쓸모가 있네요.

플린은 당황해서 조세핀 부인을 바라보았고, 조세핀 부인의 눈에서는 천천히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플린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리더군요.

“돌아가셨죠, 네 들었답니다.”

조세핀 부인이 조용히 그렇게 받아쳤고.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다프네가 우리에게 와 조세핀 부인이 플린의 어머니인 에드위나 공주의 시녀였으며, 나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드 여왕폐하와도 오래된 친구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죠.

“어찌나 친했는지, 에드위나 공주님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레테 수도원에 매일같이 드나들 정도였다니까.”

“레테 수도원에?”

“그래, 한 2,3년을 매달같이 드나드셨지. 고모네 아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고모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활기찬 여자였거든.”

다프네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만 전해드려도도 영민한 당신께서는 내가 어떻게 단서를 잡았는지 알겠지요?

밤의 파티는 점점 시끌벅적해졌고, 어느새 그분은 자취를 감추셨어요. 나와 플린은 조세핀 부인을 찾아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다프네가 다가와 우릴 만류하더군요.

“너희 수도원에는 혀가 잘린 수도사가 있다고 했지. 조세핀 고모는 마음이 그렇게 잘렸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별 것도 아닌 궁금증으로 고모 마음을 헤집지는 마.”

참으로 다프네 답지 않게 진지한 어투였습니다.

하마터면 결혼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도 안되는 낭설을 믿고싶어질 정도로요.

전쟁이 남긴 상흔은 세월이 지난다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우리 틸버트 역시 숨죽여 웃고 소리없이 미소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즐겁게 채식사의 삶을 살지만 매 새벽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 베데르에게 야단을 맞곤 하니까요.

그런 사람들의 상처에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는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입니다. 플린은 그래도 나보다 난 모양인지, 계속해서 조세핀 부인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하더군요. 결국, 수도원으로 떠나기 직전에 플린은 다시 부인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빵”

“빵?”

“빵이 있어요, 부인.”

“무슨 이야기인가요?”

조세핀 부인은 어두운 얼굴로 플린과 저를 한번씩 바라보았습니다.

플린은 부인을 따라잡느라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더니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예요. 빵이 있는데요. 빵이.. 제가 좋아하는.”

조세핀 부인이 웃으시더군요. 제가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었으니까요.

“플로리안 공작님. 앉으세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요?”

“아주 슬픈 사람도요. 빵을 먹으면 좋아요. 그러니까 빵은 별 것이 아닌데, 그걸 먹으면 조금은 도움이 된다니까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부인.”

“빵을 먹으면 도움이 된다고요?”

“네, 그러니까 빵을 드시러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레테 수도원으로요.”

정말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선문답이었습니다. 조세핀 부인은 당황한 얼굴로 한참을 골똘이 생각하시더라고요.

“내게 빵을 대접하시겠다고요.”

“네, 아마 엄청 달고 맛있는 빵일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빵을 드시면, 조금 덜 슬플 거예요.”

조세핀 부인은 그제야 플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는 듯이 웃으셨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의 따님. 제가 슬퍼보였나요?”

“조금요.”

“빵을 먹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요.”

“네.”

“빵을 드시면서 내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군요.”

“많아요.”

“네, 그럼 레테 수도원으로 가지요.”

그렇게 말하고 조세핀 부인은 떠났습니다. 네, 내가 못한 것을 플린이 해낸 것이지요.

돌아오는 길에 전 대체 ‘그 빵’ 이야기는 뭐였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 녀석, 씩 웃으며 말하더군요. 삼사일만 있다가 당신의 서책보관함 친구에게 물어보라고요.

이쯤되면 당신은 왜 이 중요한 이야기를 이제야 하냐고 할터인데, 뭐, 그러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프네의 결혼식에서 생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고요. 그러나 당신은 정말 일말의 호기심도 없는 듯 내 이야기를 묻지 않으셨지요. 여덟명의 수도사를 불러 쪽지적기같은 거나 시키시면서요.

이 마크같은 사람 같으니. 전 오래전의 코델리아 당신처럼 언제 물어봐주려나만 하염없이 기다렸답니다. 정말이에요.

셋 째, 이제 제인에어를 주시렵니까?

열매달 첫번째 밤.

-일목요연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일목요연함을 헤치지 않으려 이번 편지엔 추신을 쓰지 않겠습니다.

추신2: 방금 전의 추신만 빼고요.

* * *

사랑하는 나의 왕자님께.

난 당신이 번호 붙여 편지를 쓸 때가 가장 섹시해보이더라고요.

로체스터보다도 더더욱이요.

제인에어는 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다른 책을 먼저 드려야겠네요.

플로리안이 원했던 바로 그 책이죠.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빵’ 이 나오는 책이요.

이야기는 참 단순하고 짧아요. 스카티라는 아이를 둔 어느 부부가 아이 생일을 맞아 빵집에 케이크를 주문하지요. 하지만 케이크를 찾으러 갈 새도 없이 아이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의식 불명이 되고요. 생사에 기로에 선 아이를 지키려 병원에 붙어있는 부부에게 계속 연락이 와요. “스카티는 잊으셨소?” 라는 괴팍한 목소리의 남자에게서요. 부부는 오싹함을 느끼지만, 스카티가 죽을까 차마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이야기의 끝에, 스카티는 결국에 죽음에 이르르는데, 장례를 치룬 부부가 집에 돌아오자 다시 똑같은 연락이 와요.

“스카티는 잊으셨소?”

아이를 잃은 슬픔과 며칠간 계속되었던 밤샘이 준 피로에 정신 없던 부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알게되죠. 그 연락은 케이크를 찾으러 오지 않는 부부에게 화가 난, 빵집 주인이 한 것이란 걸요. 부부는 빵집 주인을 찾아가서 모든 사실을 말해요. 빵집 주인은 진정어린 사과를 한답니다. 여기서 끝난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소설에는 빵이 나와요. 밤 늦게까지 빵집주인이 가게에 남아 굽고 있던 롤빵이요. . 빵집 주인 아저씨는 부부를 앉혀두고, 빵을 먹고 가라고 말하지요. 캄캄하고 외롭던 밤에 시나몬 롤의 냄새가 가득해집니다. 허기 진 부부는 조용한 가게에 빵집 주인과 마주 앉아 갓 구운 시나몬 롤을 입에 넣어요. 달콤하고 따뜻한 빵은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니까요.

플로리안이 대체 어떻게 이 책을 아는지 모르겠네요.

이건 셰익스피어나 브론테 자매의 책과 달리 꽤 최근에 출간된 소설이니까 말예요.

어떠세요, 왕자님.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이야긴 지 모르겠지요?

나는 슬슬 모든 것을 알것 같아요.

당신도 궁금하시다면, 어서 조세핀 부인에게 빵을 대접하시고 이야기를 구걸하세요.

내가 당신께 제인에어를 미끼로 이야기를 구걸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죠.

-사랑을 담아, 코델리아.

추신: 마크 같다는 말은 정말 모욕적이지만 부인할 수 없군요. 혹시나 내가 또 수수께끼를 쫓느라 정신 없어 당신의 안부를 묻지 않을까 두려우니, 이번 기회에 말해둘래요. 언제고 기억해줘요. 난 당신 안부를 엄청나게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 * *

코델리아에게.

당신이 나의 안부를 엄청나게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별것이며, 아주 도움이 되는군요.

레테 수도원의 모두가 당신이 준 책을 읽었습니다.

수도원의 요리사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진 시나몬 롤 레시피를 따르라며 다투고 있고요. 필립과 루이즈는 곧 있을 빵 파티 때문에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요리계를 은퇴한지 조금 된 노엘은 자꾸만 복귀 이야기를 꺼내어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군요.

네, 곧 조세핀 부인이 방문할 거예요.

부디 그들의 빵이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열매달의 두번째 날 아침.

사랑을 담아, 아치 앨버트.

========== 작품 후기 ==========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15분 늦었습니다.

그래도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사실 전 갑자기 밤 12시 20분에 빵이 먹고싶어져서 큰일이에요.

글이 재미없으면 빵이나 드시며... 즐거움을.. 찾으세요...

+ 작중에 나온 소설은

샬럿 브론테- 제인에어

레이몬드 카버-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입니다.

추신: 후원쿠폰 주신

Sen98님, 듀둠칫님, 바쁜일상속에서님, lostclock 님, 련민님, 에스뗄라님, 문밀화님 넘치는 후쿠 감사합니다.

추신2: 선작, 추천, 코멘트, 서평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지독한 오타수정해주시는 분들도 복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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