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37화 (37/56)

#37.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살아 있어요?

열매달의 세 번째 날 아침, 아치 앨버트.

추신: 알아요? 이제 이건 우리 사이 암호가 됐어요.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왕자님께

그럼요. 살아있죠.

7.30.

-코델리아 그레이

추신: 모든 암호에는 정확한 뜻이있죠. 내가 이해한 뜻과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같은 뜻일지 궁금하니 더 설명해보세요.

* * *

정확함을 사랑하시는 나의 벗 코코께.

글쎄요. ‘살아있어요?’는 몹시 길고 복잡한 마음을 다섯 글자로 축약한 것이지요.

풀어서 설명해본다면...

'당신 편지가 멈춘지 고작 하루가 지났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아야한다는 걸 알지만 이 하루를 견디기가 무척 힘들군요. 하루 종일 당신만 생각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나를 생각했다면 벌써 편지를 보내도 수백장은 보내셨을텐데. 그런데도 먼저 보내지 않고 기다리는 건 자꾸 재촉하며 당신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랍니다. 그러니 부디 내게 답장을 줘요. 10분 내로 답장이 없다면 그냥 죽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겠습니다. 그 편이 더 마음이 편할테지요. 아니, 그렇게는 안되겠어요 그냥 내가 먼저 물을게요. 코델리아, 살아있어요?

...를 마지막 다섯글자만 떼어와 말한 것입니다. 어때요, 당신도 나와 같은 뜻을 공유하고계십니까? 살아있다는 당신 대답은 이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시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요.

열매달의 네 번째 날, 7월 31일.

-사랑과 집착, 그리고 약간의 그리움을 담아, 아치 앨버트.

추신: 당신네의 7월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겁니까? 이제 블루베리 열매를 따러 갈 시간이라고요.

* * *

아치 왕자님께

열매달의 열매가 블루베리였군요. 전 나무마다 아름드리 열릴 사과나 감, 배를 생각하며 그곳의 여름은 빨리도 끝나는구나 했지요. 윈저튼의 열매달이 아롱아롱 맺혀있을 블루베리를 따는 일로 장식될 것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전 수도원 풍경을 더 자세히 그려볼 수 있게 되었어요. 물으시니 대답하자면 저의 7월은 딱 오늘 하루만 남아있습니다. 여름이 이렇게 저물어 가는게 아쉽네요.

추신: ‘살아있어요?’ 의 적확한 의미를 해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네요. 전 그냥 ‘할말은 많지만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긴 좀 자존심 상하니 당신부터 편지를 써요. 빨리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을 갖고 물어달라고요.’ 정도로 알고있었답니다.

* * *

코델리아에게.

아,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빨리 물어봐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난 당신께 드릴 선물까지 준비했답니다.

추신: 자존심이란 말은 뺍시다. 그런게 있다면 당신의 생사까지 물으며 이렇게 관심을 구걸하고 있겠어요? 당신은 리암의 고 예쁜 입술에 블루베리를 처넣어주며 깔깔대고 있을텐데요.

* * *

아치 왕자님께.

당신의 단정한 글씨가 전에 없이 날아가시는 걸 보니 오늘은 매우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할말이 많아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요, 원하시는대로 여쭤볼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내 생사여부까지 확인해가며 들뜬 편지를 보내셨어요?

7.30.저녁.

-마크같은 작자와 달리 먼저 물어볼 줄 아는 코델리아 그레이 올림

추신: 리암의 입술에 블루베리를 ‘처’ 넣어줄 일은 없어요. 그는 요즘 굉장히 바쁘고 초조해보인답니다. 앤 셀린 작가님께 원고를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 원고를 받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인가봐요. 뭐, 윈저튼이라도 다녀와야하나보죠. (그건 그렇고, 에드위나 공주님은 그럼 살아계신걸까요? 플린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 * *

나의 질투와 집착보다는 블루베리에 더욱 관심을 갖고 계신 코델리아에게.

어쩌면 블루베리만큼이나 당신께서 관심을 보일 일이 오늘 있었답니다.

레이디 조세핀이 오늘 레테 수도원에 방문하였습니다.

나의 누이, 세실리아도 마침 깨진 결계 문제를 해결하러 온 터라 수도원이 전에 없이 북적였지요.

가뜩이나 손님 방문에 바쁘건만, 눈치도 없이 하필 오늘같은 날 오다니, 세실은 참으로 좋아할 수는 없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전 윈저튼의 예의바름을 담당하고 있는 둘째 왕자답게 정중히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지요.

“왜 왔어?”

세실은 말보다 주먹을 우선시 하는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요.

그렇게, 아직 너덜너덜한 어깨 때문에 별 반격도 못하고 세실에게 당하기만 하고 있을 때쯤, 레이디 조세핀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역시 귀인은 도착하는 시간으로도 나를 도우시는 분이신 것이죠.

그런데, 레이디 조세핀께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저나 플린이 아니라 세실에게 와서 반가운 기색을 표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세실..? 세실리아 공주님! 맞군요!”

“레이디 조세핀, 오랜만입니다.”

게다가 세실의 표정은 또 어떻고요. 그토록 고분 고분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니. 변경백이며, 여느 높으신 분들 앞에서도 따박따박 하대를 하던 내 누이가 말입니다.

“레이디 조세핀을 알아?”

제가 그렇게 묻자, 세실은 얼굴에서 반가운 기색을 지우고, 여느때의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아는 것 중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냐?”

“아니, 나는 얼마전에야 처음 뵈었어. 다프네의 결혼식에서. 그런데 누이가 왜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네. 예전에 뵈었던 적이라도 있어?”

옐링가문이 보나파르트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여동생을 그리로 보냈다는 이야기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으나, 레이디 조세핀은 왕궁 출입을 자주 하시는 분은 절대 아니었지요.

저에겐 레이디 조세핀의 이름도, 다프네에게 그런 고모가 있었다는 것도 모두 가물가물한 이야기들이었으니 세실이 이토록 부인을 반기는 것이 저로서는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실은 자세한 설명도 없이 고개만 절레 절레 젓더군요.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한심한 놈이라고 하는거야.”

“뭐가 또 불만인데?”

“아는게 뭐야? 너는? 어깨는 아직도 그러냐?”

그렇게 말하고는 세실은 괜히 내 어깨를 꽉 누르더군요.

그런 식으로 화기애애한 만남의 시작이 점점 나에 대한 모독과 폭력의 장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을 막으며 세실과 당신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주신 것은 레이디 조세핀이셨습니다.

“아치볼트 왕자님, 저와 세실리아 공주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과 아델라이드 여왕폐하가 내 친구 앤과 아델이었던 시절이죠.”

코델리아, 제대로 읽으셨지요?

네, 레이디 조세핀께서는 ‘앤’ 과 아델이라고 말하셨답니다.

“앤이요?”

“네, 아치볼트 왕자님. 세실리아 공주님. 윈저튼의 왕족이 갖는 기나긴 이름의 비애는 모두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에드위나 공주님께서는 자기 이름 중에서 가장 짧은 ‘앤’ 이란 이름을 제일 좋아했지요.”

“그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을 보면 무척 친하셨겠군요.”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우린 서로의 이름을 불렀답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던 호시절이었지요. 그 시절이 지나, 이름을 부르기엔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때 세실 공주님을 뵈었고요.”

“저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겠습니다.”

“아델라이드 여왕 폐하의 뱃속에 계셨지요. 우리 세실리아 공주님께서는 그때도 멋진 꼬마 숙녀였고요. 저희 앞에 와서 인상을 쓰시며 드레스가 답답하다 하셨던 것이 눈에 선한데, 그 당참은 여전하시군요.”

“제가 그랬습니까?”

세실이 마치 자기도 수줍음이라는 걸 탈 줄 아는 인간인 듯 연기를 하더군요.

“세실이 드레스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제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흔들자, 다시 한번 남매 간에 벌어지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폭력 사태가 수도원을 핏빛으로 물들 뻔 했습니다. 레이디 조세핀께서는 잔악함에 놀랄 정도로 여린 성정은 아니신지, 세실이 꺼내든 칼날을 보고도 작게 미소만 지으시더군요. 어느새 옆자리로 온 플린은 신이나서 웃고 말입니다.

어쨌든 그 웃음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좋아지긴 했습니다.

레이디 조세핀은 예전일을 하나하나 되새기시듯, 저 멀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으셨습니다.

“그랬지요. 세실 공주님. 그때를 기억합니까? 앤..아니 에드위나 공주님이 당신께 그러셨어요. 아버지를 제치고, 어머니를 뒤로 하고, 태어날 아이가 남자건 여자건 네가 왕이 되라고요. 자라서 왕이 될 눈을 하고 있다고요.”

세실은 이제 수줍은 척 하는 것도 지쳤는지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기억합니다.”

레이디 조세핀의 어둡던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피었습니다. 작은 미소만으로도 이분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젊을 적엔 얼마나 해사한 미모를 지니셨을지가 짐작이 되더군요. 그렇게 레이디 조세핀은 한참을 세실을 붙잡고 예전 일을 이야기나누었습니다. 세실은 몇 살이나 되었다고 그걸 기억하는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고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에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한 것은 에드위나 공주님이 기사 아서 길런을 찾으러 사라진 이후였지요. 세실이 태어난 것은 당연히 그로부터도 1년여가 지났을 때의 일이었고요.

네, 에드위나 공주님이 너덧살 먹은 세실을 만나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레이디 조세핀 께서 무언가를 착각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나의 누이는 그런 말에 입을 맞춰줄 정도의 성숙함은 있었던 것이고요.

그러나 어젠 미처 그런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대화가 너무도 물 흐르듯 흘렀거든요.

플린과 나는 조용히 그 둘을 따라 걸으며 레이디 조세핀이 풀어주는 옛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이 어린 세실을 만나서, 그 조그맣던 때부터 세실이 가지고 있던 야망을 알아보시고 ‘왕이 되리라’ 한 것에 감탄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쯤 수도원 저편에서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빈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곳이 수도원이라 이렇다할 고기 요리 하나 맛보기 힘든 곳이지만 그래도 근처 마을의 올해 농사가 풍작이었던 터라, 당밀과 빻은 곡식은 풍부했답니다. 수도원 뒷밭에는 사탕무가 무성히 자라있었고, 수도에서 가까운 곳인지라 벌꿀 역시 손에 넣기 쉬웠으니 달콤하고 고소한 빵을 만들기에는 이만한 조건도 없었지요.

동글 동글 말려있는 롤빵을 가득들고 뜰 앞으로 온 것은 우리 노엘이었습니다.

레이디 조세핀은 이 자그마한 아이가 커다란 빵을 산더미처럼 이고 오는 모습이 귀여웠던 것인지, 그애를 유심히도 쳐다보더군요.

“아이야, 너는 이름이 뭐니?

“노엘이요.”

“노엘, 누가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왕자님이요. 제가 여기 온 게 크리스마스였거든요. 그래서 노엘이에요.”

레이디 조세핀께서 마른 손을 뻗어 노엘의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했습니다.

“겨울 아이구나. 나의 아이도 겨울에 사라졌지. 너처럼 검은 눈에 검은색 머리를 한 여자애였단다. 이제는 너보다는 한참 더 컸을텐데, 하지만 널보니 꼭 그 아이를 만난 것 같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어쩐지 처연한데가 있어 나와 세실은 별 말을 보태지 못하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답니다. 어린 노엘도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던지, 평소처럼 낯을 가리는 대신 잠자코, 레이디 조세핀이 자신의 머리를 마음대로 쓸어두게 두었습니다.

당신이 준 책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대로 별 말 없이 앉아있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안답니다. 타인이 가진 슬픔의 조각을 나눠가질 수는 없더라도, 때로는 빵을 나눠먹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요.

“빵을 드셔보세요. 부인.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플린이 얼른 거들었습니다.

“맞아요. 부인. 아까 제가 보았는데 노엘이 실수로 설탕을 들이부었어요.”

“...네?”

옆에서 노엘이 얼른 말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니까 엄청 맛있을 거라고요. 설탕은 많이 들어갈 수록 좋아요!”

레이디 조세핀이 소리내어 웃으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얘야. 얼마나 맛있는지 한 번 먹어볼까?”

그렇게 우리는 수도원 앞뜰의 그늘에 테이블을 두고 앉아, 선선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빵을 뜯어먹었습니다. 결대로 뜯긴 빵은 조금 질기긴 하지만 씹을 수록 폭신하고 군데 군데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았지요. 우리 노엘 덕분에 말입니다.

레이디 조세핀을 따라온 하녀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답니다.

“부인, 그렇게 한번에 많이 드시면 안되어요. 거의 매 끼니 거르시면서 갑자기 빵을 드시면...”

그 말이 이해될 정도로 앙상한 몰골을 하신 레이디 조세핀은 웃으며 하녀에게 손을 저었습니다.

“괜찮아요. 오늘은 먹어도 될 것 같아.”

그러고는 연달아 세 개를 드셔 노엘과 수도사들을 뿌듯하게 만들었답니다.

노엘은 빵을 더 구워오겠다며 우리의 만류에도 화덕 쪽으로 열심히 뛰어갔습니다. 세실은 결계를 점검하겠다며 빵을 두어개 더 입에 물고 수도원 저편으로 갔고요. 나와 플린만 부인과 함께 남아 열심히 남은 빵을 먹어치우고 있었죠.

테이블 위의 빵이 점점 사라져가고, 찻잔에 담긴 차가 미지근해질 때쯤, 조세핀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시더군요.

“로이틀링엔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틸버트 필경사와 나를 포함해서도 손꼽지요.”

“그래도 부인께서는 건강해보이시니 다행이에요.”

플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죠. 누가 보아도 좋지 않은 상태로 보였으니까요.

“윈저튼으로 돌아온 후 20년 간 내 인생엔 시련만 가득했답니다. 그것이 얼굴에 드러나있다는 것은 저도 잘 알지요. 괴로움을 견디려 한 결혼은 당연히 실패했고, 선왕폐하께서 만든 이혼법 덕분에 내 남편은 쉽게도 나를 버릴 수 있었죠. 뱃 속의 아이만이 희망이었는데...”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데요, 부인?”

그렇게 물어주는 플린에게 고마웠습니다. 레이디 조세핀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저는 차마 그것을 물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남편이 데려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그러기 전에 미리 돌려주어야한다고요. 내가 남의 아이를 빼앗아 온 것처럼 말예요.”

“말도 안되는 일이네요.”

플린이 다시 화가 난 듯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용기없는 저는 가만히 귀만 기울일 뿐이었죠.

“나는 아이가 있는 것을 숨기고 내 성으로 돌아왔거든요. 그러니 계속 숨기고 키울 생각이었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오빠도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태세였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지요. 아이를 낳고서는 한 시도 내 몸에서 떼놓지 못했어요. 씻지도 못하고 머리도 빗지 않았죠. 그래도 언젠가는 그들이 와서 내 아이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게, 남편같은 사람이 내 아이를 키울 거라는 것이 너무 두려웠어요.”

레이디 조세핀의 찻잔을 든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다면 코델리아 당신께서도 플린처럼 눈물을 떨구셨을 겁니다. 별 말을 더 보태지 않아도, 레이디 조세핀이 무얼 걱정했는지, 그 남편이란 작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이제야 나는 내 목소리에 저열한 호기심이 깃들어있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디 조세핀이 대답했지요.

“에드위나가 그 애를 데려가주었어요.”

“네?”

나와 플린은 둘 모두 당황한 채 그렇게 되물었어요. 레이디 조세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정말이에요. 아, 플로리안 공작. 그래서 당신을 만났을 때 그리도 기뻤답니다. 아이 잃은 어미이니 평생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누구를 보아도 웃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을 저버린 채, 당신이 에드위나인줄만 알고 그리 활짝 웃으며 당신을 반겼지요.”

다프네의 결혼식에서 깜짝 놀란 눈으로 플린을 쳐다보며 ‘에드위나?’ 하고 묻던 레이디 조세핀의 모습이 갑자기 다시 떠오르더군요.

“그러니까, 에드위나 공주님이... 음, 저희 어머니가 당신의 딸을 데려갔다고요? 저는.. 저는 알지 못해요.”

플로리안이 당황해 더듬거리며 물었습니다.

“네, 그런 것 같더군요.”

“그러니까, 어머니는...음...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플로리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삼키는 사람처럼 한참을 질질 끌며 결국엔 그렇게 사과를 했습니다. 조세핀 부인은 고개를 내저으셨지요.

“플로리안 공작님.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니랍니다. 나는 그저 옛 이야기를 할 뿐이에요. 난 앤을 믿었답니다. 앤은 믿음직스러운 친구였고, 우리들 모두의 왕이였거든요. 앤이 분명한 어조로 나를 설득했지요. 그런 작자가 데려가는 것보다 자신이 데려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밝고 수다스러운 아이로 키워주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내게 돌려주겠다고요.”

“그래서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아이를 맡기셨어요?”

플린이 해답을 찾는 이처럼 갈급히 물었습니다.

“난 아이를 남편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에 거의 미쳐가고 있었죠. 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고, 마치 운명같았죠. ”

“그래서, 그렇게 아이를 맡기셨군요. 아직 찾지 못하셨고요.”

“네, 그게 제 기억의 전부예요. 그렇게 알고 오랜 세월을 살았지요. 그 아이가 커서 당신만한 나이가 될 정도의 세월동안, 그렇게만 믿고 있었어요.”

레이디 조세핀은 그렇게 말하고 눈물을 떨구셨습니다. 마지막 말이 이상했기에 저는 그분의 슬픔을 어루만지기도 전에, 이렇게 물어야했습니다.

“그게 당신 기억이라 하심은, 무슨 뜻입니까?”

“한참을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에드위나가 아이를 데리고 올 때가 되었는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요. 몇년 전에야 우리 어머니께서 한숨을 쉬며 말씀하시더군요. 그 아이는 죽었잖아. 그런 일은 없어 라고요.”

갑자기 여태까지 들은 이야기들이 모두 뒤엉키더군요.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플린 역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본 것은 모두 환상이었을지도 몰라요. 어머니와 오빠의 말대로 미쳐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언제부터 미쳐있었는지 알 수도 없네요.”

에드위나 공주가 아이를 데려갔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이가 죽고 환상을 본 것이 맞는 이야기든, 어느 쪽이든 끔찍한 이야기였습니다.

세실은 어느새 우리쪽으로 돌아와 홀린 듯 이야기를 듣고 있더군요.

그러나 세실도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남매였습니다. 이렇게 깊은 슬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할 방식은 제왕학에서도 신부수업에서도 알려주지 않았지요.

그때, 노엘이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더군요.

“빵이요, 부인. 여기 빵이 더 왔어요! 제가 구운 빵이에요.”

노엘이 들고 온 빵은 동글 동글 말리다 못해 잘도 꼬부라져 있었는데 그게 꼭 우리 셜록의 엉덩이 뒤에서 나온 산물같이 생긴 터라, 식욕을 자극하진 않더군요. 하지만 노엘이 방긋 방긋 웃으며 건네는 데 어떡합니까? 저는 냉큼 받아 하나를 집어먹었지요.

플린은 가만히 그 빵들을 쳐다보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노엘, 이건... ...”

“말의 똥 같구나.”

플린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세실이 이어 받았습니다. 레이디 조세핀이 풉, 하고 웃기 시작하셨지요. 그 웃음은 점점 더 커져, 나중엔 눈물을 흘리며 모두 같이 말의 똥 모양을 한 빵을 먹었답니다.

한참 후, 웃음이 잦아들자 레이디 조세핀께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어때요, 이런 미치광이 부인에게 정말로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플린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요, 부인. 부인이 미친 것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설명할까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오라버니가 한꺼번에 내게 거짓말이라도 한 걸까요?”

“그건,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부인. 하나 제가 아는 것이 있답니다. 부인은 아이를 많이 사랑하셨어요. 아이를 위한 최선을 찾으려 노력하셨고요. 그것이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를 에드위나 공주님께 맡기는 것도 엄청나게 힘든 일이셨을 거란 걸 알아요. 부인이 아이를 그리워했던 것도, 사랑하셨던 것도 모두 진실이에요.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에요.”

조세핀 부인은 차분히 플린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네, 내 아이가 죽었다해도, 더는 볼 수 없다해도 나는 그 아이를 여전히 사랑한답니다.”

“네, 저도 알겠어요. 부인.”

“다만 정말 사실인 것 같아, 가끔 이렇게 작은 아이를 보면 아닌 걸 알면서도 내 아이인 것만 같아, 그런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 힘들지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디 조세핀은 다시 노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얘야, 여기가 너에게 가장 행복한 곳 같지만, 혹시 나중에 드레스가 입고 싶거든...”

우리 줏대 강한 노엘은 얼른 고개를 젓더군요.

“별로 입고 싶지 않아요.”

“그럼 케이크나 빵같이 엄청나게 맛있는 것들을 먹고싶으면-“

“여기에도 많은 걸요.”

플린이 쿡쿡 노엘을 찔렀지만, 노엘은 꿈쩍도 않고 부인을 노려보더군요. 레이디 조세핀은 그런 노엘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아이야. 그럼 가끔 내가 여기 와도 되겠니? 그건 괜찮을까?”

“그럼요. 오시면 또 빵을 구워드릴게요.”

조세핀 부인은 활짝 웃으셨습니다.

눈물이 많이도 흐르는 대화였건만, 마지막에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아 저도 기분이 좋아졌지요.

조세핀 부인이 떠나실 때쯤, 플린은 열심히 마차를 쫓더군요.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 플린은 마차의 창문에 대고 부인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저 멀리서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영이 보였습니다.

나는 물었지요. 대체 무어라 말했냐고요. 그애는 선뜻 대답을 해주더군요.

“편지를 달라고 했어요.”

“네?”

“에드위나의 딸에게 편지를 써달라고요.”

“당신에게요? 당신이 여자인걸 안답니까?”

“모를 리가 있겠어요, 아치? 당신만 빼고 모두 처음부터 알던데요.”

그렇게 말하곤 그애는 꼭 당신이 지을만한 짓궂은 미소를 짓더군요.

그것이 어제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낮, 바로 조세핀 부인이 보낸 사람 편에 긴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플린에게 보낸 편지기에 그녀가 먼저 읽은 후 나에게 주었죠. 그리고 그애가 내게 말하더군요.

'이제 코델리아에게 보내세요.’ 라고요.

나의 비밀 많은 벗, 코코.

당신에게 미혹된 나는 아둔함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아직도 일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눈치챈 것이 있다면 지난번, 여덟 수도사들을 모으라 했을 때 당신이 찾으려 했던 것이 다른 어떤 이도 아닌 플린이었다는 것이지요.

장난 편지를 보냈던 것 역시 플린입니까?

그애가 당신에게 대체 무어라 했습니까?

그애는 어째서 당신 세계에서 온 책을 받기도 전에 모두 알고 있습니까?

그애와 당신이 공유하는 비밀은 무엇입니까?

* * *

다정하신 나의 벗 아치 왕자님께

길고 따뜻한 편지를 읽느라 어느덧 자정이 넘었습니다.

사실 플로리안에 대해서는 저도 헷갈리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영민한 당신께서 처음에 의심했던 대로, 그애에게 비밀이 많다는 것은 확실하지요.

그러니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고, 그애가 무슨 일을 벌이는 지를 구경해보아요.

나는 이제 확신하거든요. 플린이 안내하는 길 대로 간다면, 어쩌면 나와 당신이 만날 수도 있다는 걸요.

이번 일만 해도,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말들을 플린이 잔뜩 해주었잖아요?

그건 그렇고요, 아치.

한 가지 질문이 있답니다.

레이디 조세핀의 아이는 정말로 그녀의 가족들이 말한대로 오래 전에 죽었을까요?

레이디 조세핀이 아이가 죽은 지도 모르고 환상 속에서 살던 사람같아보였나요?

그녀가 본 에드위나 공주님은 정말 환상이었던걸까요?

이것은 당신이 말씀하신 저열한 호기심 같은 건 절대 아니에요.

저는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레이디 조세핀의 슬픔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 편지를 읽으면서는 더러는 슬프고 더러는 짠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거예요. 레이디 조세핀이 믿고 있던 쪽이 진실일 거라는 생각이요. 그게 진실이면 또 어떻게 하나, 하는 한탄과 함께 말이지요.

어쨌든 전 레이디 조세핀과 노엘이 만났다는 것이 퍽이나 기쁘답니다.

삶은 가끔 너무 큰 시련을 우리에게 주지요.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 자체가 힘겨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살다보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조금이나마 메꿔줄 만한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는 것이 전 참 좋아요.

엄마가 사라졌을 때 내게 편지를 보내주던 후원자처럼.

당신 때문에 가슴 아플 때마다 나와 수다를 떨어주는 줄리엣처럼.

제국의 드넓은 땅보다 광대하게 나의 마음에 뚫린 구멍을 단숨에 메꿔주는 설탕 덩어리의 빵처럼말이죠.

노엘과 조세핀 부인이 서로에게 그런 사이로 남았으면 좋겠네요.

7.31. 새벽.

사랑과 빵 냄새를 담아, 당신의 코코.

추신: 레이디 조세핀의 편지까지 기다리게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거예요.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다 쓰고 쓱 읽어보는데 5분 남짓 걸리더군요. 그 5분이 하루동안 생긴 삶의 작은 시련을 대체하는 빵같은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내일 혹은 내일모레 쯤, 조세핀 부인이 전해주는 에드위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게요.

열매달의 한가운데에.

매번 20분씩 늦는 데다 분량마저 길게 오는 것을 사죄드리며.

추신: 후원쿠폰 주신 Sen98님, navice님 모두 감사합니다.

추신2: 무더운 열매달에도 잊지 않고 읽어주시고 선작과 추천, 따뜻한 코멘트 주시는 분들 모두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 에드위나 공주와 기사 아서 길런 -->

연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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