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9화 - 인연(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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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마저 칼을 들다니, 이 왜인들의 땅은 정말 상종못할 짐승들만 가득하구나.'
역시 왜인들은 야만적이다고 생각하며 초희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부군을 그리 잃고서 급기야 정조마저 잃은 몸이었다. 그래서 주명에게 구해진 뒤로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묘를 만든 뒤 그 파에서 죽고자 결심했다.
하지만, 은인께서 위험한 길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차피 쓸모없는 이 목숨, 아무도 나서길 꺼려하는 험한 뱃일이라도 거들면 그 은헤를 갚는 길이라 여겨서.
그럼에도 자신은 쓸모가 없었다.
찬모를 자처하며 나섰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만든 요리는 맛이 없었다. 배려하는 마음에 아무도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여자의 날카로운 직감은 그런 하얀 거짓쯤은 손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쓸모가 없는 것을 넘어 은인에게 짐이 되고 있었다.
해적들에게 둘러싸였던 그때, 놈들에게 이끌려 저들의 소굴에 도착하는 즉시 발각될 위기에 처해 눈앞이 캄캄해 졌을 때, 은인은 그 촉박하고 다급한 가운데에도 급히 안전가옥을 배에 만든답시고 시간을 허비했다.
이대로 계속 부담이 될 수는 없었기에 뭐라도 도움이 될 길을 찾고자 발걸음을 내딛었다.
"임자. 내가 일하면서 들었대이. 쓰시마섬의 가장 큰 항구에 그리 용한 무당이 산다 카는데, 그 할멈이 조선인이라 카더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된 남편이 해준 말과,
"음, 무당이 될 상이라니. 어찌 아이에게 이런 시련을... 아미타불."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은 어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자신이 태어났을 때 지나가던 스님이 던지고 갔던 말을 떠올리며.
사실 그 조선인 무당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잘못된다 해도 더럽혀진 여인 하나만 세상에서 치워질 뿐이라 아무 의미도 미련도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분들...'
자신같이 도움도 안 되고 쓸모없는 여인은 빨리 덜어내는 게 은인에게 보답하는 길.
혹시 자신에게 변고가 있더라도 아직은 은인과 일행이 자신과의 정이 깊지 않은 지금 일어난다면 오히려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런 비장한 희생만을 생각하며 떠나온 길은 아니었기에 제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에서 거듭나 쓸모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은인의 큰 뜻에 도움이 되어야 해. 그렇지 못할 바에는... 없어지는 게 나아.'
주명이 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왜구들을 소탕하고자 세력을 모은다는 큰 포부를 밝혔고, 그걸 듣게된 초희의 마음은 더욱 급하게 내몰려 극단적인 선택지로 내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제발, 제발 내가 뭔가 역할을 찾을 수 있었으면.'
평소 자신이 신기가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불길한 일이 있기 전마다 항상 오한이 들고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혔으니까. 특히 남편이 그리 가버리게 된 왜구의 약탈이 있기 전날은 구체적인 예지몽과 같은 악몽을 꾸지 않았던가.
그것도 마치 왜인들의 습격을 말해주듯, 더럽혀질 자신이 운명을 말해주듯 남쪽에서 몰려온 앞니 튀어나온 쥐떼가 집을 갉아먹고 남편을 잡아먹고 자신의 치마속으로 들어오는 내용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때 내 꿈을, 내가 신기가 있다는 것을 곱씹어 봤다면 남편도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남편의 죽음이, 모든 불행이 자신의 불찰인 것 같아 초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인에게는 적어도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스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영험하기가 제일이라는 조선인 무당과 만나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받을 수 있다면 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무당이 되어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게 되면 주명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근데 길을 모르겠어."
하지만 평생 동래의 작은 어촌에서 살았던 그녀가 어찌 복잡한 대마도 항구의 뒷골목 길을 알 수 있을까.
한참을 헤메었지만 항구를 나와 산기슭에 있다는 무당의 집을 찾기는 커녕, 골목에서 나가는 길도 찾기가 막막했다.
뒷골목답게 불빛을 켤 여력이 없는 관계로 날도 점점 어둑어둑해질수록 주변의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둡고 음침해져 갔다.
자신을 버릴 각오로 뛰쳐나왔지만 막상 낯선 뒷골목의 집어 삼켜질 것만 같은 어둠과 맞닥뜨리게 되자 초희는 두려워졌다.
아까 왜인 여인과 사내들의 잔혹한 칼부림이 떠오르자 그 두려움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저 어둠 속에서 칼을 든 흉악한 왜인들이 다가와 자신을 어떻게 할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이대로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고 싶다.
이 비정한 세상에 대가없이 자신을 도와준 마음 따스한 은인에게, 더러워진 계집이라 천시하지 않고 오히려 친할아버지같이 따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던 정씨 어르신, 그리고 마치 친동생처럼 자신에게 다가와 애교를 떠는 귀여운 소년 옥현까지.
보고 싶었다.
자신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그들도 슬퍼할 텐데. 과연 무당이 되겠다고 이리 뛰쳐나온 행동이 옳았던 것일까? 갑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우윽.."
그들이 있는 따스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약해지려는 마음에 눈동자가 떨리던 초희는 익숙한 불쾌한 냄새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남편의 목을 베어버린 뒤, 숨이 끊어져가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도망치라 소리치는 그이 앞에서 자신을 게걸스레 범한 그 역겨운 왜인에게서 났던 냄새였다.
"썩은냄새. 우욱."
그 역겨운 기억에 저절로 구토감이 밀려왔다.
그 왜인은 진작에 주명의 손에 찢겨져 끔찍하게 죽어버렸지만, 그 상처와 그 불쾌하기 이를데 없는 시궁창 같은 냄새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아무리 씼어도 지워지지 않는데. 아무리 울어도 잊혀지지 않는데. 그건 몸 구석구석과 영혼까지 각인될 정도의 미친 역겨움이었다.
"짐승의 냄새. 짐승의 소굴."
그 쓰레기 같은 놈에게서 났던 냄새의 근원지는 이 역겨운 왜인들의 소굴이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이미 자신을 유린하고 더럽혔다는 생각에,
'싫어. 아니야!!'
초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떠오르는 생각을 부인하려 했다.
주먹을 부서져라 쥐고 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으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닥쳤던 여인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그 치욕적인 비극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면서도 은인에게 짐밖에 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무력하게 능욕당해야 했던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저벅
초희는 반드시 그 무당을 찾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길을 찾고자 발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하지만 길도 모르는데 의지만으로 이 썩은 시궁창내 나는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짝짝짝
"아가, 훌륭하구나."
그런 의문과 불안은 박수소리와 함께 들려온 늙은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조선에서 무당들이 늘상 입는다던 그 무당옷을 입고있지는 않았지만, 마치 왜인들처럼 머리칼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놓고서 왜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저 노인이 무당이라는 사실을 초희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형형한 눈, 그리고 전신을 휘감은 것 같은 신비하고 영험한 느낌에 저절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으니까.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가."
하지만 그녀가 건넨 따스한 한마디에 왠지 초희는 지금까지의 고난이 눈녹듯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정도로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듯한 신비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리 온."
초희는 자신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 그녀의 손길에 따스함을 느꼈다.
골목길의 시궁창 냄새는 이제 온데간데 없고, 싱그러운 초목의 향이 느껴졌다. 마치 어둠의 역겨움 따위는 노파의 고아한 풍취에 감히 범접하기 어려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내림을 견디고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또 모를 일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니 충분히 자격이 있어!"
"자격이 있다고요? 제가, 저같은 게 자격이 있나요?"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초희의 떨리는 눈동자를 노파의 빛나는 눈이 뚫어져라 직시했다. 초희는 그 눈 앞에서 모든 게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마치 영혼까지 꿰뚫어볼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초희의 어깨를 꽉 부여잡으며 노파는 말을 이었다.
"그 한걸음. 비록 울분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두려움과 절망을 이겨내고 내딪는 그 한걸음이 중요한 법이지."
"겨우 그걸로 자격이 되는 건가요?"
"그걸 못하고 주저앉는 놈들이 온 세상에 그득하지. 그런 필부의 몸에 신이 깃들 자리따윈 없어."
그 말을 하더니 노파는 갑자기 초희를 와락 껴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내 눈앞의 너는 달라. 지아비를 잃고, 정조도 짓밟히며 피눈물을 흘렸던 그 혹독한 고난이 내눈에는 다 보여. 또 모질지 못하고 목숨마저 끊으려고 했지 않았느냐? 지아비를 묻으며, 또 지금 이곳에서 날 찾는다는 핑계로."
"...!"
말해주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정확히 말하며, 그 상처를 달래주는 노파의 말에 초희는 울컥했다. 막으려 하는데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근데 아가, 너는 그 모진 고난에도, 그 절망에도 용기를 내서 길을 찾아 왔단다. 비록 몸을 던지듯이 한 결정이었다만 이 이국의 땅으로 건너왔지. 또, 길을 모름에도두려워 하지 않고 날 찾아왔어. 방금 전 난 보았단다. 굴욕과 고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너를 말이야."
"흑흑. 겨우, 겨우 그정도 가지고 제가, 흑 제가 뭔가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내가 길을 가르쳐 주마. 아가."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이제는 안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초희의 몸이 기울어지며 노파에게 기대었다.
늙수그레한 얼굴을 한 나이든 노파는 그 볼품없이 작은 체구로도 마치 거목처럼 굳건히 그녀를 지탱해 주어, 이대로 천년만년 기댈 수 있을 것 같이 든든했다.
"아가, 네가 무당이 되는 건 하늘이 안배한 길이야. 그러니 이렇게 나를 시켜 널 기다리게 하고..."
노파는 흐느끼고 있는 초희를 쓰다듬어 주면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에게 당도할 수 있도록 인연을 보내 지켜주었지 않았느냐."
***
"...?!"
뭐지?
외국인 여자가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신녀에게 당도한 것을 확인하곤 그녀가 무사할 것임을 이젠 알기에 자리를 뜨려 했다.
대마도주는 물론 규슈의 영주들까지도 찾아온다는 그 조선 출신의 신녀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아무리 구질구질한 놈이라도 감히 그녀 앞에서 망측한 짓거리를 저지르진 못할 테니까.
문제는 그 신녀가 자신을 정확하게 쳐다보았다는 것.
"씨발. 아니 이 밤에, 10장(30m)도 넘는 거리에, 그것도 무사이면서도 닌자처럼 은신술을 제대로 익힌 나를 본다고?"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명백히 신녀의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있었고, 자신이 외국인 여인을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지켜준 것을 다 안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던 지라 그럴 수 없었다.
내심 괴력난신을 불신해 왔던 나미에에겐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그 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본 것은 그렇다 치지만 진짜 이해가 불가능한 건 그녀의 신비로운 기운이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본 거지만 저 신녀 특유의 그 영험한 기운은 정말로 실존했다. 이 먼 거리에서도 잘 느껴질 정도로. 마치 몸이 정화되는 시원한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그것도 이 시궁창 같은 뒷골목에서.
게다가,
-주명이란 사내를 찾아 가거라.-
"뭐야 씨발?!"
-부러진 칼날의 운명을 지닌 무사여, 너를 다시 벼릴 수 있는 길이 그에게 있으니.-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거리를 격하고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라니. 사부님이 재미삼아 알려줬던 중원의 전음이란 말도안되는 허구가 정녕 사실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 그녀의 눈은 보름달처럼 더할나위 없이 크게 떠졌다.
-그래야만, 거짓의 장막을 뚫고 이름을 찾을 수 있느니라.-
거짓과 이름이라는 두 단어를 듣는 순간 나미에는 당혹감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휘청거렸다. 그녀가 가장 민감해 하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의구심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은, 왜 저 기분나쁜 단어들을 들었을 때 가장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녀의 자랑이자 우상이었던 사부의 얼굴이었을까.
***
"썅, 거기서 멍때리는 게 아니었어. 그저 얼굴만 닮았을 뿐인데, 그 외국인 여자가 뭐라고... 오지랍 떤다고 괜히 따라가는 게 아니었어."
나미에에게는 불행하게도 하필 그녀의 살인을 목격한 이는 세이죠 패거리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녀의 예상보다 신속하게 척살의 그물이 그녀를 덮친 것이다.
복잡한 심사를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오던 그녀는 족히 수십명은 됨직한 불량배의 무리를 맞딱뜨리게 되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뒤에도, 옆에도 그정도 인원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빠져든 것이다.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 그녀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나미에의 장발이 달빛을 받아 마치 그녀의 지금 상황처럼 핏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여어, 그 예쁜 얼굴 찡그리지 말라고. 방긋 웃어주면 이 오라비들이 좀 나긋나긋하게 대해줄 줄 누가 알겠어? 크크크"
이구역의 미친년 정도로 치부되어 왔지만 나미에의 미색은 뛰어난 편이었다. 아니 단연코 이 쓰시마는 물론 본토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출중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뚜렸한 이목구비를 지녀 일본 전통의 미인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긴 했지만, 굳이 공들여 치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빛나는 그녀의 미모를 보면 그 어떤 사내도 미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어두운 밤에도 그 미색이 감춰지지 않을 정도 아니던가.
"닥쳐, 이 뻐드렁니나 튀어나온 못생긴 쥐새끼야!"
물론 입이 거칠고, 여인답지 않게 큰 키와 탄탄한 근육이 붙어있는 강건한 체구를 지녔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마저도 매력있다고 뭇 사람들이 평가할 정도.
게다가 이미 포위된 그녀를 얼마든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제압하기만 한다면 그 고집세고 자긍심 강한 계집을 상대로 성적 욕망을 풀 수 있다는 생각에 사내들을 이끄는 세이죠란 사내의 얼굴엔 음탕한 만족감이 가득했다.
"흐흐흐, 그 쥐새끼의 배 밑에 깔려 교성을 내지를 니년 처지는? 푸하하"
쥐를 닮아 볼품없이 생긴 세이죠의 컴플랙스를 건드는 도발에도 울컥하지 않고 침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를 유린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서이기도 했다. 본래 세이죠는 폭급한 성정으로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세이죠 그 쥐새끼의 더러운 지껄임을 그저 도발이라 믿고 싶었지만, 백 가까운 인원을 동원해 자신을 포위한 것을 보면 지금으로선 정말 곧 실현될 확정적인 미래의 일이될 가능성이 높았다.
무사답게 칼을 맞아 죽는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으나, 더럽혀져 죽는 것은 여인으로서도 한 사람의 무사로서도 끔찍하게 싫었다.
나미에는 이미 반쯤 부러져 버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기수식을 취했다.
"...잔말 말고 들어와!"
싸움을 앞둔 결연한 마음가짐은 침착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서 확인할 수 있었건만,
"크크크, 무리하지 말고 힘만 빼놔. 알지? 꽃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거."
"예 대장. 돌려까지 그런건 우리가 전문이지요 크크크."
싸움의 상대방은 그런 결사의 투지에 걸맞지 않는 자들이며, 상대방은 싸움에 정정당당하게 응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상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상황에서 나미에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평생 딱 한번 사부의 손을 잡고 찾아간 나가사키의 어느 음식점에서 맛본 튀김우동이었다.
'죽음의 순간에서 음식이나 찾다니. 사부, 이 나미에는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봐요.'
피식
그래도 사부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자 굳어버린 그녀의 입가에 작지만 미소가 걸리었다. 사부와 함께했던 그 나날들이 참 행복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