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14화 (14/77)

〈 14화 〉 13화 - 발화(發火)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큰 거짓을 말하여 나라에 화근을 불러일으킬 운세입니다."

"뭐, 뭐라?!"

조선왕 선조에게 정치가 꼭 폭군 '주왕'과 같다고 직설적으로 말할 정도로 할 말은 꼭 하고야 마는 불같은 성정을 지닌이가 바로 김성일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눈앞의 무당이 한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감도는 전운, 눈에 차일정도로 보이는 전쟁의 징후.

그걸 자신도 알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반전 여론을 의식한 동인의 당론이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정해진 그 순간, 자신이 나중에 조선에 돌아가 주상전하께 아뢸 보고의 내용 역시 이미 정해진 것을.

동인의 당여(黨與)인 자신은 당론을 어길 수 없으니까.

동인의 영수(領袖) 이산해가 꾸민 집권을 위한 장구한 대계에서, 자신은 그저 장기말에 불과했다.

성리학을 익히고 품행을 갈고 닦으며 선비이기를 원했건만, 정치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큰 거짓을 고할 줄 알았기에, 그 거짓이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까 두려웠기에 복잡한 심사에 견딜 수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괴력난신을 멀리해야 하는 선비로서, 혐오하고 배척해야 마땅한 무당을 찾았다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이었다. 허나 고뇌를 풀 단초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에 발걸음이 이리로 향했다.

눈앞의 무당은 특이하게도 조선에서 건너 왔다고들 한다.

'명월(明月)이라고 불린다지? 마치 무슨 평양 기생의 이름같구나. 젊었을 적에는 꽤나 미색이 출중했을 것 같기도 하다만.'

하지만 조선과 왜국의 사정에 모두 밝은 대마도주의 말로는 그 진위가 의심된다고 했다. 그 전의 행적이 묘연한 것이, 마치 원래 없었던 이가 갑자기 등장한 것 같았으니까.

몇년 전 갑자기 왜국의 땅에 등장한 그녀는 뛰어난 신통력으로 그 명망을 떨쳤다. 규슈는 물론 저 멀리 혼슈의 서부에까지 그녀의 '명월'이란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

전대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는 혹세무민하는 외국인이 있다는 가신들의 우려에 그녀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지만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다.

처음 대마도에 왔을 때 평양에서 주로 쓰는 옷차림을 입고 있다는 것으로 알게된, 평양 출신이 아닌가 하는 추측 외에는.

'정말로 명불허전이란 말이 맞구나. 내가 가장 고민하는 점을 바로 짚어 내다니.'

김성일의 심사는 복잡했다.

무도한 예언을 자신에게 한 무례함따윈 관심 밖이었다. 그 예언대로 정말 무도한 일이 조선에 벌어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더 컸으니까.

하다못해 왜국의 변방에 불과한 대마도에서도 왜인들의 흉폭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저들이 통일이 되면 분명 외부로 힘을 투사할 것이 분명한데, 지난 을묘년의 일이 다시 재발한다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받을 것인가.

비록 왜국의 협소한 토지와 부족한 물산 때문에 국력이 조선에 비할바가 못된다 하지만, 평화에 젖어있는 조선은 그 전란의 불길에 얼마나 큰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자신이 속한 이번 통신사의 임무는 그래서 너무나도 중요하다. 대비를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결단의 근거가 되어줄 테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느끼고 있는 그 불안감을 자신은 끝끝내 주상께 아뢸 때 감출 수밖에 없다. 정녕 자신은 전쟁의 불길을 알면서도 외면한 위군자가 되는 것인가.

그 고뇌와 답답함에 그는 큰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저 무당이 그렇게 용하다면 혹시 이 고통을 풀 해결의 단초라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떨리는 눈으로 무당을 응시한 김성일은 굳은 표정으로 질문을 건넸다.

"대마도주가 너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고 하더구나. 대체 너는 누구냐? 조선인은 맞느냐?"

"천한 쇤네의 출신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

"쇤네가 거슬리는 말씀을 올렸는데도 잘 참으시는것 같습니다."

사실 저 무당의 눈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라 분노의 미약한 불길정도로는 어떤 파문도 그의 마음속에 일으키지 못했던 것도 컸다.

김성일은 저도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불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느냐. 나랏일을 하는 관료로서 때에 따라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나라에 누를 끼치는 불의를 행하는 것은 어찌보면 흔한 일이니."

"단지 그런 행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는걸, 누구보다도 대감께서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

"아시지 않습니까?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최대한 숨겨두고 싶었던 정곡을 찌르자 김성일의 눈매가 부르르 떨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당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어디서 요설을 내뱉느냐?!"

"그저 요설이 아니란것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 무당에게서 신비하고 영험해 보이기까지 한 기운이 느껴지는 통에 김성일은 처음과 같은 분기(憤氣)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마치 커다란 고목에 대고 화를 내는 것 같은 막막한 느낌에 도저히 계속해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허! 그래도, 정녕 경을 쳐봐야.."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잠시만 노기를 가라앉히고 쇤네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말로는 김성일의 의중을 물어보았지만,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는 무당의 행동은 확신에 가득찬 것인지 몰라도 너무도 지나치게 무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성일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영험한 기세에 반쯤 눌려있었고, 궁금증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지라 군말없이 따라 나섰다.

무당을 따라나서는 김성일의 뒤에 대마도주가 붙여준 호위병력이 따라 붙었다.

그들은 호위대상인 김성일이 어디로 향하든 묻지 않고 아무말 없이 그저 호위에만 충실한 것이 사람이 아닌 목석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감정이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존재 말이다.

하지만 목석과도 같은 그들도 무당이 안내하는 곳에 다다르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광산이었다.

사람이 광물을 캐고, 동시에 갱도에서 죽거나 학대당해 죽어나가 광물보다도 많이 쌓여가는 시체를 수거해야 하는 죽음의 광산.

"귀, 귀인(貴人)께서 보실만한 곳은 아닙니다. 너무 누추한 곳이라.."

호위병력의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어떻게든 김성일의 발걸음을 되돌리려 했지만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들리고 보이는 참혹한 광경이 그의 발을 붙들었다.

"쓸모없는 조센징 같으니!"

철썩

"끄으으으..."

왜인으로 보이는 감독관이 백발이 성성한 노파를 채찍으로 마구 후려치고 있었고, 노파는 견디지 못하고 시체처럼 허물어졌다.

왜어를 몰라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은 안되지만, 김성일은 조센징이라는 단어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채산성은 높으나 작업이 위험해 중범죄자를 처벌하는 곳으로 쓰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호위 책임자의 말을 뒤로하고, 김성일은 누가 인도하지 않았음에도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노파를 향해 다급히 다가갔다.

"이보게."

"끄으....."

하지만 노파는 이미 기력이 쇠했는지 그가 지척에 다가왔다는 것 조차 깨닫고 있지 못했다.

"넌 또 뭐야?! 너도 한번 매를 맞아...켁!"

눈치없는 감독관이 채찍을 들고 김성일을 위협하려 했지만, 호위 책임자가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목에 칼을 가져다 대는 덕분에 더이상의 경거망동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감독관이 호위병력의 위세에 눌려 대체 무슨 상황인지 고민하느라 눈알을 굴리고 있는 동안, 호위 책임자는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할 것인지 생각을 짜내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무당은 노파에게 다가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원래도 무당에게서 느껴지던 영험한 기운이 더 진하게 느껴지더니 노파의 가슴에 집중되었다.

"커, 커헉!"

초점이 없이 힘이 풀려있던 노파의 눈동자가 또렷해 지며 폐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죽음의 기운을 토해내곤 다시 숨을 들이켰다.

"..나, 나으리? 참말로 나랏일을 하는 분이신교?"

"그렇다."

다시 생기를 찾은 눈빛으로 김성일을 쳐다보고 그가 조선 고관대작이 입는 관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노파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어흐흐흑."

자신의 바지를 부여잡으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노파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김성일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위로해 주려 했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으니까.

"무슨 사정인지 본관에게 얘기해 보거라."

"왜, 왜 지금에야 오셨어예. 왜, 왜! 흑흑흑."

하지만 말해보라 허하자 마자, 원망이 가득 담긴 노파의 말을 쏟아부으며 오열하는 그 순간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아들 넷도 모두 끌려와 죽어불고 다만 이 할맹구 하나만 남았어라. 흑흑흑. 왜 이제야 오셨어예. 대체 왜!’

악에받쳐 울부짖는 노파의 무례에도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왜구 두목 3인의 수급으로 사죄하겠나이다. 부디 통신사를 아국에 파견해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초석으로 삼게 해 주십시오."

사죄를 논하며 평화와 통교를 말하는 왜인 사신의 그 '정중함'에 가려진 진면목을 두 눈으로 깨달은 것이다. 위정자들끼리의 '정중함'에 가려진 백성들의 피묻고 한맺힌 비참함을 알기나 했을까.

더군다나 왜인들의 횡포를 논하며 반대하는 서인들을 향해 이정도면 국가간 예의는 차고 넘치다고 소리치며 통신사 파견의 필요성을 설파한 조정의 대신이 누구였던가.

모든 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무당은, 현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래도 요설입니까 대감?"

오열하는 노파 주변에 짐승같은 초췌한 행색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조선의 관원이 당도했다는 것을 알자 너도나도 자신의 사정을 울면서 고하기 시작했다.

"나으리, 어무이를 저 간악한 왜놈들이 잡아갔습니대이. 어무이가 보고파요 흑흑."

"대감 나으리. 소인은 이렇게 죽어도 좋아유. 허나 흑흑. 소, 손자만큼은 다시 조선 땅을 밟게 해 주세유. 제발 부탁드립니다유."

"대감마님, 왜인들에게 정절을 잃은 더러운 몸이지만. 흑흑. 차마 먼저간 그이를 볼 면목이 없어 저승에 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 구차한 목숨을..목숨을.. 흑흑."

조선 각지의 다양한 방언 만큼이나 다양하고 기구한 사연이었다. 너무 기구하고 망극하여 듣는 동안 차마 하늘을 보기가 너무도 부끄러울 만큼.

자신이 조정에서 내뱉었던 발언들의 무게가 귓속에서 계속 울리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가슴이 미어졌다.

대저 사대부란, 선비란 무엇이던가. 나라에서 선비가 있는 이유이 무엇이던가. 백성에게 성현의 예(禮)를 가르치고 보듬는...

보듬는다는 부분에서 차마 생각을 이어갈 정도로 그는 염치가 없지 않았다. 또한 이곳으로 자신을 인도한 무당의 말이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이 아프게 치고 들어왔고.

이제는 타는듯이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있는 무당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이건 그저 대마도일 뿐입니다."

"허면, 이들과 같은 이들이 또 있단 말이더냐?!"

"요즘과 같은 태평성대에 이들과 같은 무게의 불행을 짊어지지 않은 이들이 선비님들 외에 조선에 또 있습니까?"

무당은 조선의 실정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날선 반문을 하고 있었다.

태평성대가 도래했다는 믿는 것은 굶주림과 외침으로 가족을 잃어보지 않은 위정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백성이 도적으로 변하고 옥토가 황무지로 변하고 있는데 태평이라는 말이 가탕키나 한가.

왜적들에게 끌려온 이들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신민들 모두가 지금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무엄하다고 말하며 그걸 부인하는 게 신하된 도리겠건만, 야만스런 왜국에 끌려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사는 조선 백성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대감께 진실이 그저 요설로 여겨진다면, 설사 다른 누군가 진실을 말한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온한 요설을 냉혹한 진실보다 선호하지요."

"..."

"결국 모든 게 다 요설로 치부되어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겁니다. 아니그렇습니까 '통신사' 부사 대감?"

"..."

"대감께서는 조선의 선비이시잖습니까?"

"나는, 나는..."

그래 내가 선비라고, 난 조선의 선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이 입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조선에 정녕 선비가 있는지 지금 이순간은 대답할 수 없었기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은 김성일의 가슴 속에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불길이 떠오르고 타올랐다.

그 불길은 태평성대라고 씌어진, 평화라고 씌어진 마음속 병풍을 태우고 있었다. 병풍을 태우니 더 많은 통곡소리를 삼키려 다가오고 있는 불길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칙쇼(畜生), 이 요망한 것 같으니!"

호위 책임자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무당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대었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통신사의 고관에게 보여주게 되어 대마도주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정상화에 찬물을 끼얹을 지도 모르는 훼방을 저 무당이 놓았다.

하지만 무당은 단 한점의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호위 책임자에게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목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축생(畜生), 짐승이라."

무당의 기백에 압도당한 호위 책임자는 칼을 쥐고있는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알던 선비께선 인간과 짐승은 결국 기(氣)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요기라고 해야 하나, 짙은 한이 서려 귀기까지 느껴지는 무당의 눈빛에 완전히 겁에질려 호위 책임자는 눈을 파르르 떨 정도.

"허나, 인간은 화기(火氣)를 다를 줄 안다는 점에서 그 뛰어남이 드러난다고들 하더이다. 그런데..."

무당은 손을 들어 바닷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저 인간, 또한 축생들은 그걸 증명하고 싶은가 보네요?"

항구에서 피어오른 불길을 바라보는 무당의 얼굴에는 스러져갈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짐승의 무리들끼리 상잔을 하게 되었다는 통쾌함의 두가지 상반된 마음이 동시에 드러났다.

"습, 습격이다!!!"

"귀인을 어서 주군께 모셔라!"

"어허! 아국 백성들의 사정을 다 파악하지 전까지 본관은 떠날 수 없다!"

급히 조선인들로부터 김성일을 떼어놓고 가지 않겠다 뻗대는 그를 어거지로 끌고 가려 실랑이를 벌이는 왜인들을 뒤로하고, 무당 '명월(明月)'의 시선은 불타는 항구에 머물며 거기있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처음 경애해 마지않던 그분을 떠나보냈을 때와 전국을 수십년 동안 떠돌다 동래의 한 어촌에 머물 때 받았던 두 번의 계시에서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대상.

무심한 하늘이 이미 안배한 패배의 운명마저 뒤엎을 역천(逆天)의 기수를.

사람과 땅에 발화(發火)한 저 불길이 부디 삼한(三韓)을 구원해 주길 천지신명께 기도하면서 말이다.

***

"그대는 검에 재능이 별로 없군."

"이봐 나미에. 그냥 평소 하던 식으로 '씨발, 검 별로 못 휘두르네'라고 하지? 크억!"

"이 새ㄲ... 흠. 그대는 참으로 매를 버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지. 그래서 그 '샌드백'이란 데 더욱 적합할지도."

나미에게에 재능부족이란 말을 들은지 어언 몇일 째. 아니 그건 지가 재능충인 거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놈인걸 어쩌란 말인가.

주명 입장에선 전처럼 경험치 꼼수라도 써먹게 검술 스킬북이라도 갬블링에서 나와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계속 꽝인걸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첫날보단 나았다.

처음 주명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시험삼하 살펴본 나미에는,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급기야 진지한 표정으로 그냥 검을 배우는 것을 포기하길 추천한다 말했다.

"때려쳐."

"뭐?!"

"진심으로 은인인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더이상 볼 필요도 없이 이건 시간낭비야."

"..."

"네 몸은 뻣뻣한 수준을 넘어 마치 메마른 나뭇가지를 보는 느낌이라 어떤 초식도 소화할 수 없다고. 거기다 애초에 초식에 대한 이해력이 너무 떨어져서 그냥 지금이라도 때려치고 다른 길을 찾아보자? 응?!"

"에이씨, 초식이고 나발이고 싸움은 힘과 의지로 하는 거라고. 증명해 줄테니 그 잘난 초식인지 뭔지 보여줘 봐!"

울컥하는 마음에 바로 대련을 신청했다.

왜인들을 찢어발기는 자신의 압도적인 무용을 보여주며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마음과, 그녀 앞에서 강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결과는?

털썩

"하아. 넌 검이 아니라 무예에 대한 재능이 없네."

자존심만 더 박살나고 이미지만 더 깎아먹었다.

애초에 밸런스가 가출한 듯한 높은 힘 능력치 덕분에 궁극의 괴력으로만 승부를 보는 자신같은 강(強) 스타일엔, 바람처럼 부드러운 움직임과 검리(劍理)로 극한의 유(柔)를 추구하되 쾌(快)를 가미한 그녀의 스타일이 상극이었다.

유(柔), 부드러움. 바람과도 같이 부술수도 누를수도 없는 그녀의 검술은 강(強)의 우직함 만으로 상대하긴 어려웠다.

주명의 민첩 능력치라도 높았다면 모르겠지만 그저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었으니 더더욱.

뭐 작정하고 눈이 뒤집혀서 쳐죽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결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녀를 모기에 비유하는 게 적절하지 않지만, 사람보다 월등히 빠른 모기를 느린 인간이 손쉽게 쳐죽이니.

하지만, 적어도 이번 대련에서는 그녀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온갖 자상을 입었으니 명백한 패배였다.

'하, 상성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클라스가 다른데 뭘 어쩌라는 거냐?'

결정적으로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으니 그건 재능의 차이였다.

"응? 이게 왜 안돼?"

"..."

"그냥 몸을 이렇게 움직이고 호흡을 몇번 끊어서 같이 병행하면 이 기술이 나오는데?"

"..."

그 부분에서는 주명도 나미에에게 질투 비슷한 마음을 품었을 정도. 보면 볼수록 설레는 미모의 여인이란 생각에 본인이 헤롱대는 중인데도 말이다.

질투심이든, 자존심이든, 아니면 예쁜 여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허세이든지간에, 주명은 이대로 주저않을 생각따윈 없었다.

"혈통(Lineage)의 지존 린저씨들께서 가라사대, 랭킹은 피지컬 순이 아니라 노력순이라고."

뭐 실제로는 재력순이었지만 사람은 원래 보고싶은 것만 보는 법.

떨어지는 재능을 보충할 방법은 끊임없는 노가다밖에 없었으니,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친듯이 검을 휘두루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또한 노력에 꼼수마저 더했다. 콘솔으로 구현 가능한 모든 가용 자원을 검술에 올인했으니까.

쳐맞고 베이며 고통받다가 어찌어찌 생겨난던, 그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던 검술 스킬. 그것에 최대한 CP를 때려박아 숙련도를 높이고 스킬 레벨을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미에의 평가도 점점 개선되었다.

"검 진짜 못 휘두르네."

아예 때려치라는 평(全無 : 0)에서 최하(最下 : 1 ~ 3)로,

"음, 아무리 봐도 검술 실력이 많이 별로야."

최하(最下)에서 하하(下下 : 4 ~ 6)로 올라가더니,

오늘은 그냥 '검에 재능이 별로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보아 이젠 하중(下中 : 7 ~ 9)을 넘어 하상(下上 : 10 ~ 24) 수준까지는 도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제 검을 비롯해 병장기를 휘두른다면 전처럼 마구잡이로 휘두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름 : 김주명]

[레벨 : 4(2,150/4,000)

[능력 : 힘 36, 민첩 23, 지능 22]

[기술 : 투척(Lv3), 검술(Lv10), 피아식별(Lv201)]

검에 재능이 별로 없다는 수준의 검술이 10레벨이라면, 그게 고작 하상(下上)의 초입 수준이라면, 대체 자신의 투척 스킬은 얼마나 허접했다는 것인가.

최하(最下) 끝자락에 걸친 수준의 허접한 투척스킬을 가지고 자신은 얼마나 우쭐댔던가.

그 하하(下下)의 투척에 맞고 비명횡사한 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수준이었다는 것을 상태창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내 검술 레벨이 10레벨이라니. 아예 재능이 없는 수준에서 이정도까지 실력을 끌어올린 건 대단하지 않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수준이었기에 남들이 보기엔 한심해 보일지라도 그에게는 참 경이로운 성장이요 뿌듯한 성취였다.

언제든 성장할 수 있는 검술의 불(火)꽃을 피우게 된 것 아닌가? 맨 처음 불을 피워내는 발화(發火)가 어렵지 산소와 탈것만 있으면 그 불이 커지는 것은 순식간일 테니까.

압축산소와 기름진 탈것을 무진장 공급해줄 콘솔 명령어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이 빌어먹을 레벨링 시스템의 하드코어함 때문에 도무지 손쉽게 레벨업이 가능할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 답답하네! 어디 경험치 얻을 데 없나?'

레벨업만 팍팍 되면, 5레벨마다 주는 스킬 포인트를 어찌 잘 쓰면 뭔가 대박이 날 것 같아 너무도 아쉬웠다. 그런데 경험치 바는 지난번 전투 이후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조바심이 들 정도.

그렇다고 수련하기도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보이지도 않는 적을 푹찍하려 찾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201레벨에 달하는 피아식별 스킬도 주변에 어떤 빨갱이(적)를 보여주지 않는 상황에서.

'대단하네.'

나미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실력 자체는 겨우 하류 검사의 수준이었지만, 그 실력의 고하에 놀란 게 아니었다.

'고작 3일만에 폐급에서 하류가 되었어.'

검사란 기본적으로 적을 검이란 이빨과 투지란 기세로 사냥하는 맹수, 한낱 힘센 초식동물에 불과했던 자가 3일만에 하류이지만 맹수로 거듭난 것이다.

'뭐, 초식은 초식인데 코끼리 같은 힘센 초식동물 느낌이긴 했지.'

자신이 빡세게 가르치긴 했다만, 과연 그게 이유였을까? 그녀가 생각하기엔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미에는 사부로부터 검을 사사받을 때 주명이 받았던 것 이상으로 엄하고 혹독하게 배웠긴 했다.

하지만 사부가 그런 방식을 택한 건 그녀의 엄청난 재능에 그녀 스스로 도취되어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이 숨겨져 있던 거라 수련방식과 실력의 급격한 상승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리고 원래 수련은 엄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그녀 역시 엄격한 수업방식에 너무도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칭찬에 인색하여 모진 말들을 그에게 던지고 심지어 포기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 이면에는 아무리 은혜를 갚는 의무감 때문이라도, 무사의 명예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그녀의 고절한 검술을 고작 범인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명과 같은 자에게 사사하는 게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자신이 가르쳐주는 검술은, 비록 비전은 빼고 사사하는 것이지만 위대한 검사인 사부가 창시한 바람의 검술이 바로 찬란하게 빛나는 상승의 검술 풍검류(風劍流)다.

부족한 재능의 주명과 같은 검사는, 아니 주명과 같은 범부는 감히 흉내조차 낼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으니까.

또한 자신을 두고 훌쩍 사라져 버린 사부와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가 바로 이 풍검류인데, 주명같은 반푼이도 안되는 이물질이 끼어드는 게 싫었다.

하지만 요 몇일.

그 재능이 전무한 폐급 검사가 어설프지만 그럭저럭 흉내라도 내는 수준의 하류 검사로 변하는 격변(激變)을 지켜보며, 나미에는 그의 성취에 깜짝 놀랐다.

이미 있는 감춰진 재능을 어떻게든 꺼내고 짜내어 실력을 갈고닦아 높이는 것이라면 많이 봐 왔다. 그건 재능의 개화(開花)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재능을 있는 걸로 만드는 건 거의 창조의 영역이지 않던가.

실력이라면 몰라도 재능이 높아지는건 거의 불가능. 없었다가 생기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데.

근데 저자는 그걸 해냈다. 그것도 단 몇일만에 둘 다.

하루만에 없던 재능이 갑자기 생기고, 단 몇일만에 검술 재능이 괄목할만하게 발전하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니까.

이 개화와는 차원이 다른 초현실적이고 불가해한 현상은 개벽(開闢)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마치 무슨 천명이라도 개입한 것 같은 기이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들리던 조선인 무당의 비현실적인 전음(傳音)을 겪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주명의 이런 비상식적인 개벽을 바라보는 나미에가 받는 느낌 역시 그때와 같았다.

'설마 저 녀석이 정말, 정말 나의 길을 열어준다는 그 사내인가?'

"아오 썅. 휴식 마렵다."

'내 은인이긴 하지만, 저 덜떨어진 녀석이?'

조선인 무당으로부터 주명(朱明)이라는 이름의 사내에게 자신의 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마음 속 깊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슈아키라(しゅあきら, 朱明)라는 사내는 분명 대단한 분일 거라 믿었다. 혹시 대단한 검사이실까? 아니면 대단한 학자이실까? 소녀같은 얼굴로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나미에였다.

하지만 저 한심해 보이는 녀석이 자신의 은인이자 무당이 말한 '그 사내'의 이름과 같은 주명이란 이름을 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치밀어 오르는 허탈감과 당혹감에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숙맥에, 검술에 대한 재능도 꽝이며, 그저 힘만 말도안되게 셀 뿐인 저 순한 도깨비 같은 녀석이 무당이 말한 '그 사내' 슈아키라일 리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더 모질게 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부의 위대한 검술을 더럽히고, 자신을 이끌어줄 남자 슈아키라(しゅあきら)의 이름을 더럽히는 이물질처럼 거북하게 여겼으니까.

하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마치 천운이 강제로 개입한 것 같은 녀석의 가파르고 급격한 성장곡선을 보니,

'정말 하늘의 선택이라도 받은 녀석인가? 그럼..'

주명을 보는 나미에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쟤가 슈아키라(しゅあきら)일 수도 있는 건가?'

두 남녀가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있는 그 때, 주명이 부하로 거둔 히로시란 이름의 왜구가 숨을 헐떡이며 급히 뛰어와 주명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다이쇼(대장)! 항구가, 항구가 공격을 받고 있스므니다!"

"..!"

"해적들이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사방이 불바다입니다. 피하거나 싸우거나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하므니다!"

왜구는 그저 그런 해적들이 아니다. 그저 굶주림을 피해 산속으로 내몰려 칼을 든 도적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만한 잡놈들이 아니란 것.

병력부터 최소로 잡아도 오천에 이르는 군벌이자, 동아시아의 바다를 주름잡으며 약탈해온 수많은 재화들을 거느린 거부인 왜구들은 다이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세력이라고 봐야 했다.

심지어 이 대마도의 지배자인 '소 요시토시'도 그들을 완전히 제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 아래 공존하고 있는 관계에 가깝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건 다이묘와 다이묘 사이에 벌이는 전쟁이라고 봐야했다. 무수한 생명을 집어삼킬 집단적 폭력의 충돌.

그 거대한 폭력의 향연에서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탐욕과 웅심, 공포와 증오가 뒤섞이고 범벅되어 증폭되는 온갖 감정의 격렬한 폭풍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 전쟁이었다.

심지어 전장에서 마모되다 견디지 못해 이 쓰시마로 흘러들어온 나미에 자신은, 그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는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사라 자부했지만 결국 자신은 패잔병에 불과했던 것인지 전쟁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나미에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나미에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뭐라도 말을 꺼내보려 입술을 달짝이던 찰나,

"오, 경험치다 경험치!!"

위험이 지척에 다가오고,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는 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오히려 기뻐하는 주명의 저 모습.

그냥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라 눈살이 찌푸려질 만도 했지만, 전투를 마치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마냥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기뻐하는 저 충만을 넘어 충천(衝天)할 듯한 자신감이 대단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히로시, 야마모토에게 말해서 다들 갑옷 입고 준비하라고 해!"

"하이(예)!"

이제는 전쟁에 나가는 무사처럼 당당하게 부하들을 통솔하는 저 사내의 뒷모습이 왠지 조금은, 쥐 눈꼽만큼 정도는 듬직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도모르게 밖으로 달려가는 주명을 몇 초동안 가만히 쳐다보았다.

"..씨발, 겨우 허접한 검사새끼 주제에 듬직은 무슨."

그런 생각을 억지로 털어버리려는 듯 괜히 허공에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결국 주명이 나아간 길을 따라 달려나가는 나미에였다.

"뭐 딱히 널 따르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거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들어줄 이가 없는 소리를 작게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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