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18화 - 보상(補償)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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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관우와 장비가 몇단 단위의 적을 압도적으로 썰어재끼던 때가 언제이던가. 그건 오직 황건적의 난 시절, 그러니까 삼국지의 초창기에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아무리 그 둘이 당대에 둘밖에 없었던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청주에서 관해가 이끌었던 수만에 달하는 황건적들이 고작 자신들의 대장인 관해가 관우에게 몇합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하여 흩어지고 쓸려버렸다는 사실이 가당키나 한 이야긴가.
그건 그 만단위의 황건적이 고작 황건적이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
노란 천쪼가리를 머리에 동여매고 황천당립(黃天當立)을 부르짖는 그 광신적인 믿음에 사기야 충만했겠으나 그뿐이었을 뿐이다. 너무나도 낮은 수준의 훈련도와 그보다도 처참히 낮은 무장도를 지닌 잡병이었을 뿐이니까.
입고있는 무장은 천쪼가리로 만든 갑주에 무기라고 해봐야 농기구였던 그 언빌리버블한 수준으로 개판이던 베리 환장스틱 황건적.
그리고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낭만'조폭들의 싸움처럼, 병사들이란 존재는 그저 칼을 든 허수아비나 병풍과 같았던, 대장이 앞장서면 죄다 우르르 몰려나가 그자의 활약과 카리스마에만 의존했던 후진적인 전투방식.
그런 두가지 요소가 맞물렸기 때문에 북해 구원전에서 수만의 황건적이 관우 한명의 원맨쇼에 털려나간 것이다.
왜구들은 그런 황건적들에 비해 전투경험이 조금 더 많았다는 사실만 더했을 뿐 저들과 그다지 다를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 전투경험이라는 우위도 정규군을 상대로한 목숨을 건 싸움을 겪은게 아니라, 저항할 수단이 거의 없다시피한 민간인들을 상대한 수준에서 그친 약탈에 불과했기에 유의미한 차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어쨌든 황건적이 관우의 압도적인 무위에 털려 버렸듯, 6,000에 달하는 왜구의 군세도 주명의 활약에 박살이 나 버렸는것은 그 이유에서 현실성이 있다는 것.
"도망쳐!"
"아아악!"
물론 그 활약에 당하는 왜구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충격적이겠지만.
신삼보라(信三甫羅, 신사부로)라고 쓰여 있는 적의 총대장 깃발이 보이자 그 깃발 그 주위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주명은,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초로의 왜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단신으로 수백을 참하다니...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초로의 사내, 왜구의 총대장 신사부로는 분노도 아쉬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뭔가 초탈해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 부하들이 죽어갔는데 고작 그런 감상뿐인가?"
"부하들이라, 그래 내가 거둘 수 있는 부하들은 고작 이런 해적들 뿐. 50 평생을 앞만 보고 달려왔건만 주위에는 잡놈들 뿐이니 내 인생도 결국 잡스러웠을 뿐이네."
전투의 의지가 아예 증발해 버린듯 자괴감에 푹 절어있는 놈을 보며 주명을 혀를 찼다.
죽어도 싼 왜구들을 썰어버린 거지만 적어도 저놈에게는 부하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구들에게 전쟁을 말하며 사지로 몰아넣었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부하들의 수준 타령을 하고 있으니 좋은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미친 놈."
자신을 비난하는 말에도 신사부로는 대꾸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주명의 어깨 너머로 뛰어난 갑옷을 입은 20인의 무인이 도망치는 적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명의 갑옷만큼은 아니지만 적의 피로 피칠갑을 한 저들의 모습은 흉흉했으나 그만큼 강맹해 보였다.
"돌격(とつげき)!"
기세 좋게 돌격을 감행하여 도망치는 왜구들의 등 뒤로 칼을 박아넣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도 부러웠다.
허접한 철 쪼가리를 갑옷이라고 걸치며 이가 나간 칼을 들고 있는,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자신의 부하들과는 달리 당세구족이란 걸출한 갑옷을 걸친 저들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어서.
대장인 자신을 버리고 그저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쥐떼처럼 달아나는 모습과는 달리 용맹하게 돌격하는 저들은 너무 위풍당당한 모습이어서.
"좋은 무사들을 두었군. 저런 부하들이 있으니 이몸의 패배는 필연이었구나. 내게도 저런 훌륭한 사무라이들이 함께했었더라면..."
20인의 사무라이(?)들을 바라보며 아쉬움 가득한 탄식을 한 신사부로는 돌연 눈을 부릅뜨며 주명을 노려보고 삿대질을 했다.
"저런 훌륭한 무사들을 거느리는 것을 보니 본토에서 온 명가의 자제라도 되는 모양이군. 어떤가, 나같은 잡놈의 꿈을 부숴 버리니 좋던가? 짓밟아 버리니 좋냐 그말이다!"
아쉬움, 질투심이 섞인 놈의 말에 기가 찼는지 주명은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뭐가 개소리란 말인가! 이몸에게 주어진 것은 이 쓸모없는 몸뚱아리와 저주받은 가난한 삶 뿐이었다! 내게도, 내게도 너같은 훌륭한 부하와 배경이 있었다면 이런 결말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병신새끼. 이 와중에 끝까지 남탓이네."
차라리 자신에게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왜놈들이 훨씬 용맹한 놈들이요 훨씬 나은 놈들이었다.
단죄의 대상이 저런 한심한 놈에 불과했다는 허탈함에, 놈의 한심함이 왜구에게 비참하게 도륙당한 조선 백성들의 처절함에 똥칠을 하는 것 같은 불쾌함에 주명은 화가 날 것 같았다.
주명은 신사부로에게 성큼 다가가 놈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괴로워하는 놈을 노려보며 주명은 신사부로에게 일침을 가했다.
"첫째, 난 조선인이다. 무일푼으로 너같은 왜구새끼한테 붙들려와 노예로 팔려나갈 뻔한 불행한 조선인. 니놈들이 수도없이 도륙하고 약탈했던 그 조선인 말이야."
"조, 조센징?!"
"명가의 후예같은 개소리는 니놈 아가리에서 꺼내들지 말고. 어차피 왜놈새끼들인데 명가든 아니든 관심도 없지만."
주명은 충격을 받았는지 동공을 떠는 놈을 비웃고는, 머리채를 잡은 손을 들어 강제로 놈이 자신의 부하들이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만들었다.
"쟤들하고 니 부하하고 달라 보이냐?"
"물론이다! 사무라이하고 왜구들하고 어찌 같다고 볼 수 있.."
"완전 틀렸어. 둘째, 쟤들 다나카란 놈 밑에 있던 전직 왜구야. 오히려 네 부하들 중 가장 허접했던 놈보다 낮은 지위에 있던 별볼일 없는 녀석들."
용의 꼬리가 뱀의 머리보다 낫다는 점에서 맞는 말이었다. 특히나 다나카가 이끄는 해적단은 뱀이라고 볼 수도 없는 지렁이 수준이었으니 더더욱.
신사부로의 눈이 충격에 부릅떠졌다. 저 훌륭한 갑옷과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이 사무라이가 아니라니. 저자들이 자신이 이름도 기억 못하는 다나카란 잡놈의 밑에있던 이름모를 허접한 것들이라고?
칼을 휘두르는 모양세가 어설퍼 보이고, 그 특유의 기세가 없어 뭔가 사무라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저들이 사무라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 질수록 자신이 더 비참해졌다. 그럼 자신이 말한 주어진 '조건'의 차이는 그저 허상이란 말인가.
사실 조건이고 나발이고 주명이 오늘 보여주었던 무위를 생각하면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였지만, 자신의 실패를 어떻게든 세상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던 옹졸한 노인의 눈에는 그게 들어오지 않았던 것.
신사부로의 혼란스런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기에 더욱 의미없었다. 주명이 거검을 내리쳐 놈의 수급을 잘라 내었으니까.
대원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야마모토가 재빨리 달려와 그 수급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는 신사부로라는 이름이 크게 쓰여진 높다란 장대에 매달았다.
야마모토는 가족을 잃은 그날 이후 피를 보면 극심한 고통과 거부감을 느끼며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전투원으로서는 너무도 심각해 폐급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정도의 결함을 지닌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전투에 주명을 따라 나서면서부터는 하나도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최대 약점이 저분을 만나 치유라도 된 것일까?
아니면 그 결함이란 것은 그저 도피가 아니었을까.
무사에서 낭인으로 굴러떨어진 후, 실추된 자존감과 실종되어버린 자신감이 그저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실패를 겪고 유형화된 것이 아닐까. 피를 보지 못한 결함 뒤에 숨어 스스로의 부족함을 가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노병의 마음은 소태를 핥은 것 마냥 씁쓸했졌다.
하지만 자신의 감상 따위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야마모토는 그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만약 그 결함이라는 게 혹시 도피였다면, 두려워서였다면 주인 덕분임이 분명했다. 저분의 드높은 깃발 아래 놓여져 있었던 덕분에 피할 필요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니까.
야마모토는 이유야 뭐였든, 치유가 되었든 아니든간에 오늘만큼은 적어도 저분께 방해가 되지 않고 한사람 몫을 다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장대를 높이 들어올리며 그는 다른 해병대원들을 쳐다보았다.
"여어 히로시! 꽤나 하는데? 오늘만큼은 진짜 무사라도 된 것 같아."
"하하하! 이런 좋은 무구를 지니고도 뒈지면 진짜 병신이죠!"
저마다 한두명의 적은 해치운 듯 자랑스럽게 피범벅이 되어있으면서도 웃고들 있는 동료들을 보며 야마모토는 주명에게 감사했다.
주명이란 걸출한 대장이 적을 휩쓸어 전열을 찢어발기고, 전투의지를 박살내 놈들의 전투력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저기 동료들의 발밑에 쓰러져 주검이 되어있는 적들의 운명은 자신들의 것이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주명이란 강한 대장을 만난 덕분에, 그라는 태풍이 불어준 덕분에 자신들은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줍듯 그저 손쉬운 수확을 전장에서 한 것 뿐이라고 볼수 있었다.
"다 쳐죽여주마!"
적장의 수급을 얻었음에도 주명은 멈추지 않고 적을 베어넘겼는데, 그게 야마모토에게는 마치 혹시라도 적의 저항이 거세지며 부하들이 피해를 입을까 미리 주변을 정리하는 하려는 것 같았다.
부하들을 아끼는 주인의 모습에 노병은 끓어오르는 감격과 충성심을 느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실제로 주명이 적장의 목을 딴 뒤에도 전장을 휩쓸고 있는 목적 중 하나는 자신의 부하들이 소모되지 않도록 잡몹을 정리한다는 것도 분명 들어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가 보지 않는데도 야마모토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목숨을 다해 모겠습니다. 주인이시여.'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아직 전투중인데도 야마모토가 서 있는 공터는 시체만 그득하고 적막만 가득했다.
그런 적막속에 4m가 넘는 기다란 장대는 놈의 수급이 걸리며 전투가 끝났음을, 승패가 정해졌음을 알리는 훌륭한 홍보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거기에 한마디의 목소리만 더해진다면 더더욱.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주명을 바라보며, 야마모토는 그의 주인이 하지않고 남겨둔 중요한 일을 자신이 대신 하려 했다.
왠지 주인이라면 자신이 나서더라도 주제넘었다 뭐라할 것 같지 않다는, 오히려 칭찬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주명 대장께서 적장 신사부로의 수급을 베었다!"
그것은 승리의 선포. 적장의 수급으로 증명하는 승리의 선언이었으며, 전장의 흥분을 잠재우고 정리하는 종막의 외침이었다.
"우와아아! 다이쇼 반자이(대장 만세)!"
"이겼다!"
해병대원 스무명이 외치는 승리의 함성은 온 전장에 퍼져 수백의, 수천의 함성이 되었다. 그 함성으로 전쟁이 끝났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
대마도주가 기거하는 영주성에는 늦은 밤에도 밝은 불이 휘황찬란하게 피어 있었고, 음악소리를 배경으로 승리를 만끽하려는 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저 멀리 명나라에서 들여온 최고급 술이 내뿜는 향기롭고 감미로운 주향이 성 내에 그득해 공기만으로도 취할 것 같았으며,
이 대마도 최고의 숙수들이 모여 내놓은 음식들은 아기자기하지만 아름다운 그 외관 이상으로 감칠맛나는 진미(珍味)를 품고있어 저절로 침이 고이게 만들었다.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회관과는 좀 떨어져 있는 접견실, 달아오르는 잔치의 분위기로 흥겨운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소음을 허락하는 것은 주인에 대한 모욕이라는듯 진중하고도 적막했다.
주명은 대마도주와 그의 가신단에게 공로를 치하받고 있었던 중이었다.
"은인께서는 조선에서 왔다고?"
"그렇소."
본래 이 대마도의 지배자인 소 요시토시를 만나게 되면 설령 귀족이라도 극상의 예를 표해야 했으며, 주명같은 민간인은 더해서 온갖 복잡하고 굴욕적인 예를 따른 후에야 그와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마도주는 잃어버릴뻔 했던 대마도의 지배자 자리를 보전하게 해준 은인의 앞에서 그런 걸 따지거나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절대로 저자를 적대시해서는 아니됩니다 주군. 일신의 무력이 하늘에 닿아 있어 가히 일군(軍 : 12,500명)의 위용에 비견되는 자입니다."
더군다나 가신인 마에다로부터 그가 얼마나 엄청난 무위를 지닌 자라는 것을 들었기에 괜히 되도않는 예의를 강요하다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도 않았다.
대마도 전체의 전력과도 비견되는 저 무인에게 대마도의 주인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으니까.
또한 소 요시토시 역시 전국시대의 다이묘, 실리를 위해서는 명분 따위는 어찌되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현실의 인물이었으니까 예의 따위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 했다.
"이 대마도를 무도한 왜구의 손아귀에서 구해줘서 고맙네. 대마도를 대표하여, 또 일본국의 일원이자 신하로서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지."
사실 대마도주는 일본과 조선 양쪽에 신속(臣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의 신하인지가 애매했지만, 일본어를 쓰고 일본식 옷을 입고있는 일본의 다이묘 소 소시토시가 정말로 어디의 신하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조선으로부터 예조참의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음에도 '일본국의 신하'라고 칭하는 대마도주의 모습에 잠시 기분이 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를 이해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왜구를 사실상 방관했고, 임진왜란에서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전공을 세우며 조선인을 무수히 죽인 놈이 저자이기에 감정이 좋을 리는 없었다.
어떤 식의 예의를 표해야 할지 나름 역사를 배워 잘 알고있었지만,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여 형식적인 감사를 표했다.
또 지가 기분나쁘면 어쩔텐가? 여기가 수십만의 병력이 동원될 수 있는 왜놈들의 본진인 오사카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니 그냥 수틀리면 뒤집어 엎고 뛰쳐 나가면 그만인 것을.
몇몇 가신들이 발끈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정작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는 그다지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다.
"보상을 무엇으로 줄까 많이 고민했네만 본인에게 물어보는 정확할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불어 물어보려 하네."
대마도주와 가신단의 분위기 따위는 알바 아닌 주명이었지만 보상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실 치하를 한답시고 이름뿐인 벼슬을 내린다거나 하는 등 말로만 때우려 했으면 뒤집어 엎었을 거고, 재물로 보상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을 거다. 돈이야 한 영지의 예산단위가 아닌이상 부족함을 못 느꼈으니까.
이 시대에 온 이상, 그가 역사를 알고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조선인들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잘 아는이상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곳에 왜국에 의해, 왜구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지만 그 자신도 보상으로 요구한 게 얼마나 민감하고 큰 건인지 알기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공손한 태도로 대마도주에게 말을 올렸다.
"...!"
역시나 경악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대마도주의 표정.
"이곳에 수백의 조선인들이 터전에서 끌려와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공을 높이 쳐 주신다면, 수천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을 인정해 주신다면 적어도 고향을 떠나 고통받는 백성 수백을 풀어주시는 것은 밑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물론 말로는 그렇다는 거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작 수백이었지만 광산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한 곳에 투입하거나 사내들의 노리개로 써먹어 민심을 위무하는 등 요긴한 역할에 쓰이는 자들이 그 조선인들이었으니까.
갑자기 잘 부려먹던 바닥의 수백 하층민을 돌려달라고 하면 누가 쉽게 들어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네."
대마도주의 답변에서도 그걸 확인할 수 있었고.
노기등등하게 고함을 치며 단칼에 거절당하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인 것이다. 그정도로 대마도의 주력군이 전멸하는 것을 막고 왜구들을 소탕한 주명의 공은 컸으니까.
보고받은 바로는 최소 500명의 왜구를 그자 혼자서 참했다고 하니 대마도가 소씨의 지배를 받은 이래로 어디 이만한 공을 세운 이가 있었던가.
하지만 전장에 서 수백 왜구들의 목숨을 벤 공으로도 속환은 쉬이 이뤄지기 어려운 듯 보였다.
접견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조선 통신사들이 묵고 있는 귀빈실의 공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후끈했다.
"하하하! 정말 장하네. 정말 잘했어!"
화통한 성격의 김성일은 주명의 등을 두드려 주며 격하게도 칭찬을 했다.
대마도의 지배자인 소 요시토시의 면전에서도 당당했던 주명이었지만 한국인으로서 조선의 고관이자 나이 지긋한 노인이기도한 저 김성일 앞에서는 차마 마음 내키는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공손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비록 거짓을 말하여 임진왜란을 조선이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잘못이 있는 인물이라지만, 그때 조선이 털린게 그 혼자만의 잘못인가.
그리고 그가 사실을 말했어도 이미 조선의 군사력이 박살난 상황에서 고작 몇년만에 방비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으니 그래도 털렸을 거다.
방비를 할 거였으면 10년 전(1581년)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을 때 했어야 했다.
그때 그걸 하성군(선조) 그 방계 왕새끼와 조정의 대신들이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탄핵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또라이가 이웃의 섬나라 일본을 통일했을 때, 이미 반도국가 조선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 잘못을 인정하고 나라를 위해 종군하다 진주성에서 병사하지 않았던가.
훌륭한 인물이라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니, 변절하여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욕 같은 트루 매국노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안 그래도 아국의 백성들이 광산에서 그 천인공노할 행패를 당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는지 모르네. 대마도주의 대접이 극진함에 미혹되어 진실을 몰랐던 게야."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가족을 모두 잃은 노파, 지아비를 잃은 처자, 어버이를 잃은 아이.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김성일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대마도주에게 항의했는데도 자신과는 무관하다, 정당하게 이곳으로 이주한 자신의 백성이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더군. 사신으로 온 마당에 화의를 깰 수는 없어 화만 삭히고 있었지. 그런데 자네같은 의인이 응당 받아야 할 보상마저 포기하고 이렇게 대의를 위해 나서줄 줄이야."
"아직 해결된 게 아닙니다. 대마도주가 어찌 나올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네 덕분에 자리를 보전한 저 대마도주가 사람이라면 절대로 물릴 수 없는 상황이네. 정치판에서 나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본관이 장담할 수 있네."
사실 주명 본인도 스스로가 이룬 공의 크기를 잘 알기 때문에 결국은 대마도주가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도움을 받았음에도 입을 씻는다면 안 그래도 직속 병력이 줄어 권위가 예전같지 않은 그의 위신이 나락으로 치달아 통치가 어려워질 테니까. 또 그 자체로 신의가 없다는 명분이 되어 대마도의 다른 야심가들이 칼을 빼어들 위험요소가 될 테니까.
하지만 김성일이 정치에서의 관록을 운운하니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건 역사를 알고 있어서일까.
'이양반아 그렇게 정치적 관록이 대단했으면 선조 앞에서 "일본애들 안 쳐들어와요! 히데요시는 쥐상이라 별거 아녜요!" 그러면 안되었지!'
훈훈한 두 사람의 모습, 그리고 조선 백성들이 분명 귀향할 것이라는 바람직한 상황에 흡족한 미소를 짓는 이가 한명 더 있었으니 통신사의 정사였던 황윤길이었다.
"안동 김가의 후예라고 들었네."
"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미래의 후손입니다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겠다는 생각에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라고 주명은 생각했다. 그 덕에 주명의 출신에 대한 대단한 오해를 한 황윤길은 '내막'을 짐작한다며 그냥 사람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분명,
'어느 누군가의 서얼이라는 것을 잘 알겠네. 하지만 집안에 뭔가 변고나 우여곡절이 있어 이런 타향까지 왔다는 것도. 큰 공을 세워 자네의 부친 함자를 여쭙고 싶으나 그러면 자네가 곤란해질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묻겠네.'
라고 무언의 대답을 해준 거겠지.
황윤길은 주명을 따스한 눈으로 쳐다봐 준 뒤 시선을 돌려 부사인 김성일을 바라보곤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여기 김 장사가 훌륭한 무위를 보여준 것은 다행이네만, 왜인들의 성정이 참으로 흉악하기 그지없구먼. 이렇게 반란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왜인들은 신의가 없는 족속들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김성일의 대답에 주명의 눈이 번쩍 띄어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놀라운 것은 고작 대마도의 싸움에 불과한데도 양측 합쳐서 1만에 가까운 병력이 격돌했다니, 제가 알고 있었던 왜국에 대한 정보가 틀렸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서,"
전쟁 불가론을 역설한, 일본애들이 안 쳐들어 온다는 희대의 뻘소리를 했던 그 김성일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놀라웠다. 너무도 긍정적인 방향의 놀라움이라 이런 놀라움이라면 계속해서 놀라고 싶을 정도로.
"저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대판(大阪, 오사카)에 가는 동안 일본국의 사정을 면밀하게 살필 생각입니다."
그 김성일이 일본의 사정을 살피며 전쟁가능성을, 그리고 혹시 전쟁이 날 경우를 대비해 적군의 규모를 살펴본다고 한다. 전쟁 안난다고 우기던 그 양반이.
그리고 황윤길이 김성일의 의견에 동의하며 한 말이 귀에 들어오자 너무도 바람직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에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그저 뒤떨어진 문화를 지닌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생각이 바뀌었네. 전모를 듣고 보니 고작 해적들의 침공이었음에도 그 병략이 섬뜩할 정도로 훌륭하여 여기있는 김 장사가 아니었으면 거의 성공했으리라 생각될 정도였지."
"고작 해적의 병력이 그러한데 얼마전까지 전 국토가 나뉘어져 전쟁을 밥먹듯이 치러 왔다는 본주(혼슈)의 인물들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얼마나 전쟁에 익숙하겠는가."
"그래서 본관은 왜국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저들의 기물 역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작년에 대마도주가 입조하여 보여준 조총이라는 물건, 어쩌면 생각 외로 위험하고 전쟁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대마도주가 주게 될 보상보다 이게 더욱 값진 보상이 될 지도 몰랐다.
수백의 백성을 구하는 것도 값진 일이지만 저 두사람의 각성으로 임진왜라는 보다 잘 방비하게 된다면 수백만의 조선인들에게 너무나도 값진 일이 될 테니까.
역사와 달리 이뤄진 신사부로의 난(亂)이라는 불길은 그것이 발화(發火)되고 주명에 의해 진화(鎭火)되는 과정에서 '경각심'을 조선에 일깨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봉화처럼, 왜국에 첨병으로 들어온 두 통신사의 마음에 피어난 경각심이라는 불길이 조선 조정에 당도하게 되면 분명 원 역사보다 덜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