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20화 (20/77)

〈 20화 〉 19화 - 달밤(月夜)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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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에는 이번 전쟁에서 한 게 없었다.

그저 주명을 따라가고, 딴지를 걸다 결국 그를 따라가 병풍처럼 서 있었던 게 그녀가 했던 고작이었다.

지난 전장에서 스스로의 무능으로 인해 부하를 잃은 좌절감, 전쟁으로 인해 마모되고 지쳐버린 탈력감이 그리 만들었다고 변명하기엔 해병대원들의 존재 때문이라도 그럴 수 없었다.

삼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들의 허접한 실력, 심지어 피를 두려워 하는 노인 하나와 전투경험이 전무한 햇병아리 19명으로 구성된 인선.

힘에 부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활약할 여지가 없다는 것쯤은 알면서도 저들은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주명과 함께 싸웠다.

아무리 주명이 압도적인 무위로 적의 군심을 탈탈 털어버렸다지만 해병대원들의 몸에 가득한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은 그들의 결의를, 그들이 투지를 증명하는 훈장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무사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히로시라는 이름의 젊은 해병대원이 적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구해준 것이 그날 자신이 활약한 것 중 유일하게 기억할 만한 수준이었다.

자신을 보고 무사라고 했는데, 과연 그녀 자신은 사무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잔칫상에서 왁자지껄 무용담을 떠들고 있는 해병대원들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저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자신은 저들의 전우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은 저 승전연에 낄 자격이 없었으니까.

"하아."

깊은 한숨을 뱉어낸 후 몸을 돌려 그녀가 향한 곳은 영주가 기거하는 영주성에서 가장 높은 곳, 다이묘가 승전연을 베푸는 오늘만 특별히 개방된 천수각에 있는 노대(露臺)였다.

꿀꺽

그래도 적군 몇은 베었으니 이정도는 챙겨도 되겠지 하는 생각에 가져온 청주(淸酒)를 병째로 입에 대어 마시니 그윽한 향과, 청주 특유의 달달한 맛이 느껴지며 얼큰한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니, 총총히 박혀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과 환하게 그 편안하고도 밝은 빛을 뿌려주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사부와 함께 전국을 주유하던 행복한 그 시절, 우연히 규슈로 건너왔을 때 들렀던 나가사키의 개항지에서 봤던 이국의 신기한 문물들.

특히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텐푸라(天ぷら, 튀김)을 얹은 우동의 맛과, 그녀가 봐 왔던 그 어느 배보다도 컷던 남만인들의 배.

그날 사부와 함께 튀김우동을 먹었던 행복했던 그 순간에도 저런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는 생각에 괜시리 마음이 아련해졌다.

아까의 일이 떠오르자 마음이 서글퍼졌다.

무사도 아니라면 자신은, 나미에란 사람은 대체 뭔가일까 하고.

미즈시나라는 성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얼굴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아버지란 자에게는 정을 붙일 시간조차 없었다.

그냥 그녀가 태어난 마을에 갑자기 들어와 살게 되었고,

이방인 여인을 만나 자신을 얻으며,

자신을 낳다가 여인이 죽어버려 그녀와 사별하고,

나미에의 몸에 묻은 핏기가 가시기도 전에 사부에게 그녀를 맡겨버렸다는 그 무책임한 친부.

"나미에는 아빠도 없는 거지년이래요."

그녀의 말투가 거칠어진 것은 가장 서글프고 괴로웠던 부모의 부재, 그 사랑의 결핍을 조롱하는 또래 아이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

"꺼져! 꺼지라고! 씨발놈아!"

더없이 여린 자신의 마음과, 상처받기 쉬운 그녀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유리병 같은 자신의 마음도 사부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지면 하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날도, 나미에 자신이 '역병'에 걸렸다는 그날의 일도 억지로 마음속에 묻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너의 길을 찾거라."

그렇게 사부의 뒤를 쫒는 것에서 안온함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었는데 사부는 가르칠 게 더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떠나보냈고,

"계집년 주제에 무사는 무슨! 반반한 얼굴로 유곽이나 가서 물이나 받고 살지."

"저년 때문에, 저 계집년이 지는 바람에 나구모가, 오타니가 죽었어. 빌어먹을! 저년이 우릴 이끌지만 않았어도!

일상 속에서도 편견 가득한 사람들의 냉대에, 전장에서는 그녀 때문에 동료를 잃은 병사들의 실망 속에서 그녀는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그녀가 향한 곳은 일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 대마도였고, 그곳에서 이어지는 굶주림에 지치고 무사답지 못한 삶에 실망하며 그녀가 보는 세상은 점점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역병'의 후유증으로 원래도 탁한 세상이었지만 계속된 실패로 끝없이 마모된 그녀의 정신이 생기를 잃어가며 이제는 어둡게 느껴지는 세상이었다.

저 밝은 달은 그래서 그녀와 멀어 보였다.

사실 그 달밤의 나가사키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따로 있었다.

제 아버지의 목에 무등을 하고 있던 소녀, 꺄르르 웃으며 달을 가리키곤 저 '노란색 경단(瓊團)'을 먹고 싶다며 천진난만하게 아비를 조르던 그 소녀.

왜 자신은 그 소녀와 같은 추억이 없는가.

꿀꺽

벌써 반이나 비어버린 병 만큼이나 더한 취기가 올라와 몸을 덥혔지만 시린 가슴까지 데워주지는 못했다. 마음의 결핍까지 치유했다면 술이야말로 정말 약수(藥水)였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분명히 닿지 않을 달을 손을 뻗어 만져보려 한다.

분명 그 소녀도 정말 먹고 싶었던 것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하늘에 떠 있는 그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푸근한 아비의 사랑이었을 테니까. 자신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그 '달'을.

꿀꺽

술병이 완전히 비어버리자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기가 몸을 지배하는 게 느껴졌다. 몸이 휘청거렸다.

주르륵

술을 마셔 감상적으로 변하는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친김에 손을 뻗어 달을 향해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면서 애처롭게 속삭였다.

"父ちゃん(아빠).."

"잉? 달밤에 혼술로 병나발을 부는 게 일본 무사들의 문화인가?"

쨍그랑

화들짝 놀란 나머지 들고있던 술병을 떨어뜨린 나미에는 다급히 소매로 눈을 닦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성난 목소리를 내며 쏘아 붙였다.

"야! 예의도 없이 기척도 없이 다가오면 어떡하냐고!"

"어, 음. 미, 미안."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 주명은 고개를 숙이고는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씩씩거리는 모습을 연기하며 주명을 째려보고 있는 나미에에게 주명은 해명을 하려는 듯 조심스레 들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그냥 이걸 주고 싶었던 거였어. 너무 맛있어서 나눠먹고 싶었거든. 이거 엄청 귀한거다?"

그가 들고있는 것을 본 나미에는 목이 메어 일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접시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은 보름달을 닮은 노란 빛깔의 경단(瓊團)이었다.

"..."

"방해해서 미안하고 이건 여기 놓고 갈게. 난 그럼 이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나미에의 모습이 자신에 대한 싸늘한 축객령으로 여겨졌는지 주명은 접시를 내려놓고 후다닥 자리를 떴다.

'아니 귀빈들만 먹는 귀한거를 같이 나눠먹자고 챙겨왔건만 왜 나한테 지랄이야? 해병대 애들 보러 내려가다가 지가 보이길래 안주면 서운해 할 것 같아서 귀찮아도 온건데! 하여간 일본애들은 여자애까지 황윤길 대감 말대로 신의도 없고 옹졸하다니까!'

마음 속으로 나미에를 씹어대면서.

한참을 그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응시하던 나미에는, 떨리는 몸을 가누며 발걸음을 옮겨 경단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방금 전 데운 건지 무척이나 따뜻했다.

풍겨오는 달콤한 내음에 저절로 손을 움직여 경단을 한개 집어 들었다.

오물오물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하얀 이로 살짝 깨물어 맛을 음미해 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흰 구름이 지나가며 보름달을 가리었다.

"맛있어."

귀한 물건이라는 주명의 말마따나 너무도 부드럽고 달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

미즈시나 히요리(水科日和)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24년 전의 그날 떠 있었던 환한 달은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의 운수대통을 의미하는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웬 병신같은 놈이 울면서 찾아왔었지. 크헤헤."

피로 물든 무복을 입은 그놈이 무서웠지만 그가 던져준 금쪼가리에 정신이 팔려 두려움은 금방 잊혔고, 정신을 차린 히요리에게 놈은 웬 갓난아기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었지.

미즈시나(水科)란 성을 쓰고있는, 평민따위는 아닌 무가의 후손인 그였지만 궁벽한 어촌에서 어부로 간신히 풀칠만 하던 상황이었다.

무가의 후손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자신을 찾아와 돈까지 쥐어주며 아이를 맡겼다지만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다.

그 아이를 싸고 있는 강보에서 발견되었던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던 것이다. 급박한 상황인지라 차마 그걸 빼둘 생각을 금편을 쥐어준 놈도 하지 못했겠지.

거기서 발견된 옥패에 새겨진 글자는 놈이 쥐어준 금편따위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천금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아시카가(足利)

오로지 일본의 가장 지고한 위치에 있는 정이대장군에게만 허락된 성씨.

온몸에 피칠을 한 그 무사놈이 떠나가고 바로 미요시(三好) 가문을 찾아가 고했다. 아시카가의 핏줄을 발견한 것 같다고.

에이로쿠의 변은 촌부인 그조차 들을 수 있었던 대형 사건. 당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척살한 그 미요시 가문이라면 쇼군가의 핏줄을 찾았다는 사실을 고했을 때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불행히도 그가 떠나있는 동안 아이는 그 무사놈이 다시 다녀갔는지 사라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차라리 그 애새끼에게도 잘된 일이겠지. 그냥 그대로 두었으면 굶어 죽었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미요시 가문에서는 쇼군가의 핏줄을 찾았다는 정보를 안 것으로 만족했는지, 아니면 뭔가 자신이 모르는 성과라도 거둔 것인지 약속한 대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큰 보상을 안겨 주었다.

그 결과,

"까르르,  무사님. 너무 짖궂으세요."

"오, 네 가슴이 아주 마음에 들어. 마치 보름달 같이 크고 탐스럽구나."

이렇게 매일 여인을 희롱하며 유흥을 즐기는 극락같은 삶을 수십년 동안이나 이어오고 있는게 아닌가.

아마 무사였다는 선조들도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자신의 대에 이르러 미즈시나(水科)라는 성씨가 가장 큰 복락을 누린다는 생각에 자부심마저 들 정도.

혹시나 자신을 찾아와 아이를 맡겼던 그 무사놈이 복수하겠답시고 찾아오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두려웠었다.

'이렇게 짱박혀서 유곽만 돌고 있으니 찾을 수나 있을까? 낄낄낄'

무려 24년 동안이나 무탈했던 지금까지의 경험상 앞으로도 전혀 두려워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을 비호해줄 미요시 가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아시카가 가문은 진작에 사라져 유명무실해진지 오래지 않던가? 쇼군가의 소속으로 보이는 그 무사놈도 제 살길을 찾느라 급급해 복수따윈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락한 무가의 운명은 자신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생활고에 찌들어 주군의 핏줄을 밀고했다는 하찮은 은원쯤은 충분히 잊어버리고 입에 풀칠하느라 바쁘겠지.

절대로 찾아낼 수 있을리가 없다.

"찾았다."

하지만 화려한 비단으로 치장된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온 한 사내에 의해 히로이의 24년동안 이어진 확신은 더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교접의 흔적과도 같은 음탕한 냄새는 사내가 문을 열며 들어온 피비린내 나는 시린 공기에 쓸려 날아가 버렸다.

열린 문틈으로 서릿발같이 차가운 냉기가 온 방안에 스며들어 온기를 앗아갔으며, 발빛이 비쳐 시퍼런 사내의 검이 쇄도하여 그의 목에 드리우자 사색이 되어 핏기가 사라졌다.

"버러지."

보름달 같이 크고 탐스럽다 추켜세웠던 기녀의 가슴은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사내가 들어온 문틈으로 비치는 시퍼런 달빛뿐.

그 환한 달빛이 지금 이순간 그에게는 너무도 두렵고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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