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23화 - 무사(武士)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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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를 접한 대마도에서 살아온 자들 답게 해병대원들은 모두 기본적으론 자맥질에 능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발군인 녀석이 히로시였다.
거의 한마리 물개수준의 자맥질 실력을 지닌 트루 바다청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실력자.
히로시에 의해 서양인은 바닥에 닿기 직전 구해져 다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 히로시를 묶었던 밧줄을 두번 끌어당기는 것을 신호로 일행이 모두 달라붙어 당기니 놈을 꽉 부여잡은 히로시와 함께 딸려 올라온 덕택이었다.
"크으, 고맙다."
그 서양인, 훤칠하게 생긴 금발의 미남자가 폐 깊숙이 들어가 생을 앗아갈뻔 했던 짜디짠 바닷물을 게워내며 감사하다 말했다.
아무리봐도 정말 미남이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황금빛 모발과 환한 느낌을 제공하는 흰 피부, 신비롭고 지적인 인상을 더해주는 맑고 깊은 푸른 눈.
거기에 눈코입의 배치에 오묘한 섭리라도 있는 것인지 황금비율을 보는 것 같은 이목구비.
바닷물에 빠져 죽다 살아나왔기 때문에 물에젖은 생쥐같은 추레한 모습이었어야 하건만 그런 모습마저 마치 우수에 젖은 듯한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니 말 다했지.
서양 미남의 표본이 있다면 저자식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
왜 초면에 '자식'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냐면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마치 태양과 반딧불 정도로 그 외모가 차이가 나니 괜히 자격지심에 짜증이 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외모 문제는 치밀어오르는 열등감과 함께 일단 마음 저편으로 밀어두고 당장 확인해야 할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그 꼴을 당한 거지?"
그 질문에 미남자는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너무나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거. 아오 정말 나쁜놈들! 나쁜 새끼들! 저 해적놈들은 너무나도 야만적이라니까. 아니 대장 마누라가 많이 미인이더라고. 서로의 마음에 대해 대화를 한 것밖에는.."
그 짧은 순간에 말을 엄청 쏟아내는 그 속도가 매우 부담스럽고 짜증나기라도 했는지 주명은 말을 끊었다.
"잠깐! 혹시 말인데."
잘생긴 얼굴임에도 감출 수 없어 드러나는 매우 뻔뻔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해적선 대장의 아내라는 키워드가 거기에 더해지자 딱 감이 왔기에 핵심적인 사항을 질문하여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여자하고 대화를 했다는 게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것도 포함된 거지?"
그러자 그 미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한, 너무나도 뻔뻔하고 태연한 얼굴로 답을 해 주었다.
"아,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름다운 여인과의 대화에는 그저 말뿐인 대화 뿐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숨결을 섞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진솔한 몸의 대화도 당연히 포함되는 거지!"
왜 던져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짐승같은 남편의 무지함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했었지. 이제 진정한 사랑, 그 가슴 설레고 달콤한 감정에 대해 서로가 조금씩 확인하고 있을 때쯤 방해자가 나타날 줄이야."
'미친 새끼야, 그 방해자가 그 여자 남편이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내뱉는게 어찌나 속사포이던지 주명의 생각이 떠오르는 속도보다도 녀석이 말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세상에 생각의 속도보다도 빠른 지껄이는 속도라니.
거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늦잠을 자다 말고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온 나미에를 보더니,
"그래서 그 달콤함은 결국 저 겨울 바닷처럼 가슴시린 쓸픈 결과를...오? 거친 바다를 지나며 저 하늘의 수많은 별빛들을 바라보고 이정표 삼아왔지만 그대같은 아름다운 별은 내 인생에 처음이군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작업을 치는 게 아니던가.
'던져 버릴까?'
도로 바닷물에 던져버리고 싶은, 첫인상부터 아주 마음에 들지않는 난봉꾼 녀석이었다.
"하암, 쟤 뭐라는 거야?"
정작 나미에는 녀석이 하는 외국어를 아예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미남자가 뭐라 감미로운 감언이설로 지껄여도 놈이 작업을 건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주명은 플레이어의 특전인 건지 모든 언어를 실시간으로 통역해 주는 시스템의 권능이 있었기 때문에 놈의 언어를 알 수 있었다.
'하아, 누가 프랑스놈 아니랄까봐. 저자식을 어떻게 하지?'
***
"하하하, 내 이름은 샤를(Charles). 노르망디(Normandie) 출신의 바다 사나이이자 꿈을 쫒는 모험가,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눈과 마음속에 담고자 하는 로맨티스트기도 하지."
누가 프랑스놈 아니랄까봐 말도 더럽게 많았고,
"일본 사람의 머리카락에 이런 붉은 빛이 감돌다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 아름다움인가! 그대의 정열적인 모습에 혹시나 했는데, 마드모아젤(Mademoiselle) 나미에 당신은 저 태양이 떠오르는 근본(일본)이라는 뜻을 지닌 이땅의 아름다움을 지닌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요!"
누가 프랑스새끼 아니랄까봐 발정난 짐승마냥 주변의 여자(나미에)에게 항시 작업을 걸어댔으며,
"이몸은 그 어떤 식재료를 가지고도 그대들의 혀에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는 예술가이기도 하지. 이런 걸 음식이라고 먹었다고? 맙소사!(Mon Dieu!) 이건 이단이고 불경죄라고!"
누가 프랑스놈 아니랄까봐,
"우와 맛있어!"
역시 프랑스분 아니랄까봐 요리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죽지 않기 위해,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 넣었던 '음식물'들이 그의 손을 거치며 일행이 눈을 부릅뜨고 흡입하게 만드는 '요리'로 재탄생되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어, 이게 내가 먹던 그건가?"
심지어 벌레들이 파먹어 그 징그러운 것들의 체액이 소스로 첨가된, 주명이 아니면 이빨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내구성 갑의 그 건조 밀가루 덩어리마저도 그의 손을 거치니 고소한 향기가 일품인 스튜로 탈바꿈할 정도니 이정도면 연금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나가사키에 도착해서 입항 허가를 기다리는 시간, 원래대로라면 매우 지루하고 힘들었을 길고 지난한 함선에서의 대기시간이 너무나도 혀가 행복한 미식의 시간으로 바뀐 건 샤를이란 이름의 요리사 겸 항해사 덕분이었다.
자꾸만 나미에에게 작업을 거는 모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떻게든 내칠 구실을 찾고 있던 주명에게는, 또 그 체면과 예절 따윈 밥말아 먹은 것 같은 행동거지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씨 어르신에게도 불행하게, 저 바람둥이 미남자는 항해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항해사를 구한다고? 나한테 맡겨봐!"
처음 몰아보는 배(참수리호)임에도 그의 손에 조타륜이 쥐어지자 마치 배 자체가 달라진 것처럼 너무나도 훌륭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기에 의심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실업자 신세이고, 그 빌어먹을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프랑스에 돌아갈 일이 없으니 혹시 나를 고용해 주지 않겠어? 밥값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인이 채용을 원하기도 한 이상, 또 그가 이 배에 필요하기도 한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프랑스인 샤를은 결국 참수리호의 항해사가 되었다.
"이봐, 네놈들. 항구 출입을 허가한다."
딱 출입허가가 떨어져 일행이 나가사키 영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원래대로라면 들어가자 마자 끔찍했던 그간의 식사에 대한 보상으로 음식점으로 달려가 허기를 채울 생각이었지만 샤를의 합류로 맛좋은 요리를 맛본지라 그다지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일행이 향한 곳은 당분간 머무를 여관이었다.
당분간 이 나가사키에 머물며 항해에 필요한 인력을 더 확보하고, 참수리호의 성능을 끌어올릴 작정이었기 때문에 꽤나 오래 체류할 작정이었다.
"우와, 이런 최고급 여관에 묵는거야 우리? 우리 선장님이 엄청 부자였네."
옆에서 쉴 새없이 조잘대는 샤를의 목소리를 항시 켜있는 BGM처럼 들으며, 주명은 대마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련을 위한 공간을 알아보려 했다.
최고급 여관의 주인인 만큼 적어도 근방 부동산에 대한 정보에 빠삭하고, 훈련장으로 쓰일 수 있는 별장이나 건물을 임대할 만한 영향력이 되는 자들이 않아있었으니까.
오랫동안 머무르는 만큼 검술 스킬을 올리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사방 천지가 전쟁터인 이 일본에서, 그리고 야만의 시대를 살고있는 지금 이 세계에서 목숨줄을 더 굵게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까.
샤를 덕분에 배 안의 식재료만으로도 훌륭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따로 식사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 일행은, 여관 주인의 소개로 확보하게 된 근처의 저택으로 향했다.
머무르고 있는 여관에서 가깝고, 가끔 여관의 인력들을 데리고 주인이 잔치를 벌이기도 하는 관계로 잘 관리되어 있고 보조인력도 배치되어 있으며, 정갈하고 깔끔한 건물의 분위기 덕분에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 시작된 훈련.
"이것이 동방의 검술인가?! 롱소드 검술과는 달리 사용되는 무기(일본도)처럼 곡선의 유려함과 부드러움을 갖춘 것 같네. 뭔가 힘이 느껴지면서도 아름다워!"
거의 일행의 배경 BGM수준으로 항시 틀어지는 샤를의 목소리는 훈련의 열기에 묻혀 버렸다.
"거기서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힘을 더 빼고 부드럽게!"
"하, 하이!"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건지 나미에가 주명뿐만 아니라 다른 해병대원들의 검술을 지도해 주기 시작했고, 최고급 검술을 배울 수 있는 인생에서 보기 드문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녀석들이 내뿜는 열의로 넓은 저택의 공터가 후끈했기 때문.
"미즈시나 무사님의 검술은 고금에 다시없을 상승의 절기입니다."
일전에 무사였던지라 검술을 배웠던 적이 있는 야마모토 마저도 그 열기에 합류했는데, 나미에게 사사하는 품검류(風劍流)가 얼마나 뛰어난 검술이라는 것을 검술에 대한 조예가 있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야 고맙긴 한데, 왜 부하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거야? 검술은 비전(祕傳) 아니었어?"
후끈한 훈련의 열기가 한참 몰아치고 난 뒤에 가진 휴식시간에 주명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너한테 알려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정말 비전(祕傳)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제외한 거야. 다만 기초만 가르쳐 줬을 뿐이지."
글쎄, 야마모토 영감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고 주명이 봐도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는 그 검술이 기초 수준이라고 말하면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눈높이가 저 높이 가 있는 덕분인 거라고, 세상 모두가 이정도면 매우 뛰어나다고 극찬하는 수준의 검술도 그녀에게는 기초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가 가르침을 주면서 벌어지는, 의도치 않은 호의.
"으, 너무 오묘하고 어렵스므니다."
해병대 애들의 앓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 호의를 소화시키기엔 범인의 재능으로는 매우 벅차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중요한 대답은 이뤄지지 않았다.
검술을 가르쳐 주는 범위의 폭넓음이 아닌, 당초 약속한 대상인 자신과 옥현 외에도 검술을 해병대원에게까지 가르쳐 준 이유는 아직 듣지 못했으니까.
"죽는 거 보고싶지 않아서."
"뭐!?"
"너 하는 행동을 보면 앞으로도 지난번처럼 무턱대고 전장에 돌진할 날이 많을 거 아냐? 저 녀석들은 대장 잘못 만난 죄로 네 그런 행보에 모조리 휩쓸려 갈거고."
"아니,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 줘야 할 맹약이 있는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옆에 서게될 거니까 결국 저 녀석들이 싸우는 걸 봐야 할 거 아냐? 니가 단시일에 검술을 배워 내가 떠날 수 있다면 모를까, 그건 네 재능에 가능할 것 같지 않으니."
"뭔가 마지막 부분에서 기분이 엄청 안좋다만?"
주명의 기분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등을 돌려 쉬고있는 해병대원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저 녀석들과 앞으로 같은 전장에서 같은 편으로 싸울 일이 많을텐데, 같은편인 저 녀석들이 눈앞에서 칼맞고 쓰러지는 걸 보게될 내 기분은 더 최악이겠지."
왠지 납득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중요한 배경과 맥락에 대한 설명이 없었기에 크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 설명이었다.
글쎄, 전우라 하여 굳이 검술을 가르쳐 줄 이유가 있을까? 언제 동료가 적으로 돌변할 지 모르는 이 전란의 시대에?
하지만 굳이 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던 것은, 방금 전 등을 돌리기 전에 나미에의 얼굴에 잠시 드리웠던 미미한 슬픔의 감정을 주명이 캐치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지어졌다 사라진 찰나의 감정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자책하고 후회하는 듯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뭐 지난번 전쟁 얘기를 했을 때의 반응도 그렇고, 전쟁에서 전에 동료를 잃어 트라우마라도 생겼나 보지.'
굳이 복잡한 여인의 심사는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여자의 과거는 묻지 않는게 불문율이 아니던가.
***
일본에 있으되 일본같지 않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도시 나가사키.
나가사키의 그 이국적인 모습은 가장 밑바닥의 주점에서도 드러나는데, 무복을 입고 칼을 찬 낭인이 마시고 있는 저 럼주 역시 이곳이 일본의 항구라는 점에서 그 증거가 되었다.
중년 낭인의 얼굴은 흉터로 가득했고, 닳아서 헤진 지 오래인 낡은 무복 안에 감춰진 탄탄한 몸 위로도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말없이 독한 럼주를 거칠게 퍼마시는 낭인에게 덮수룩한 수염의 거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님 그 얘기 들으셨수?"
덮수룩한 수염의 거한에게서 형님이라고 불리는, 설사 나이가 많지 않더라도 그런 호칭으로 불려도 될법한 실력자 하야시자키 진스케(林崎甚助)는 고개를 들어 거한을 쳐다보았다.
게슴츠레하게 뜬 그의 두 눈에서는 마치 뽑기 직전의 칼날과도 같은 기세가 흘러나와 거한은 진스케가 아직 칼을 뽑지 않았음에도 절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런 사내였다 진스케란 사람은.
검집에 들어가 있으되 이미 뽑힌 검보다도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는 자, 이미 뽑혀있는 검보다도 빠른 검격을 날릴 수 있는자.
거합도(居合道)라 불리는 발검(抜剣)의 최고수이자 창시자.
아마 무방비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만 보고 손쉬운 사냥감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드는 놈이 있다면 순식간에 검집에서 뽑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죽음의 검격을 보게 되고 베이겠지.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의 전쟁에서 적장 두명의 목을 베는 엄청난 위업을 세운 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흐르는 세월은 이제 노인의 문턱을 두드리고 있지만 그 실력만큼은 세월에도 무뎌지거나 묻히지 않는 검의 고수가 바로 진스케니까.
얼마 전 히고국(肥後国)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판 붙었을 때도 그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던가.
거한은 그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진스케의 시선이 마치 겨누어진 칼날을 마주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바닥으로 까는 굴종의 행위를 통해 진스케의 시선을 피하며 거한은 말을 이었다.
"계집이 칼을 차고 다시 나타났소."
칼을 든 계집이라는 말에 가늘게만 열려 있던 진스케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일자로 굳게 다물어져 있기만 했던 그의 입이 조금 휘어지더니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입이 움직이며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이, 낮은 음색이건만 흉폭함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미천한 계집년에게 내 분명 지난번 전장에서도 경고했을 텐데 아직 주제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웅크리던 맹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마시던 럼주병을 내려놓고 일어선 그의 눈빛은 살기를 머금고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제를 깨닫게 해줘야지."
주점 주인에게 동전을 튕겨 술값을 던져준 뒤 진스케는 몸을 움직여 성큼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매여있는 일본도를 매만지며 밝게 비치는 햇볓을 음미하던 진스케는,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에 분칠을 한채 양산을 들고 들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그녀를 차갑게 훑으며 독백했다.
"계집년이 감히 검을 차다니.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럼주가 묻어있는 입술을 핥는 진스케의 혀에는 일전에 무참히 쓰러뜨려 버렸던 여무사의 눈물맛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목을 자른 두 병사의 피맛이 느껴졌다.
마치 럼주처럼 중독되어 버려 도저히 끊어버릴 수 없는 승리와 살인의 황홀한 쾌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