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4화 - 무사(武士)(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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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이웃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그 이상으로 사이가 나빴으며 일본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앙숙이었다.
둘의 갈등을 일본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며, 둘 다 영지를 지닌 다이묘였기 때문에 갈등이 전투로 격화되는 경우도 흔했다.
덴쇼(天正) 17년(1589년)의 어느 봄날, 히고국(肥後国)의 어느 들판에서 수십의 무리가 서로의 피를 뿌리며 칼부림을 하는 것 역시 그 갈등 때문.
특별할 일도 없는 일상과도 같은 광경일 뿐이었다.
"나구모! 빨리 뒤로 물러나 지혈해!"
"예 대장!"
전장에 어울리지 않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 전투의 현장에서 울려퍼진다는 것을 빼면.
들판에서 벌어진 정찰대간의 국지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바로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이었다.
발군의 검술 실력으로 전장을 정리하고 있는 여검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소속의 정찰대 병력이 그들.
매섭게 몰아치듯 이어지는 그녀의 빠른 검격에 고작 눈을 몇번 깜빡일 시간이 지났음에도 적들 여럿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도망쳐!"
결국 견디지 못한 적들은 꽁무니를 빼며 물러나는 추태를 보여야만 했다.
승리의 주역이 된 여검사가 칼을 높이 치켜들며 외치자 그걸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우리가 이겼다!"
승리를 거둔 정찰대 병력들이 전장을 정리하고 향한 곳은 근처의 시골마을. 그곳과 왠지 어울리지 않는 아담하지만 정갈한 객잔이 있는 곳이었다.
"역시 나미에 대장이 최고라니까!"
"오타니 말이 맞아, 아까 적병 둘을 동시에 베어 넘기는 거 봤어? 정말이지 전율이 느껴지더라니까!"
"에이 씨, 침좀 튀기지나 마! 나구모 넌 한 것도 없으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에휴, 저 어리바리한 놈은 대장 아니었으면 진작에 전장에서 죽었을 건데."
객잔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병졸들 사이의 화제는 단연 나미에였다.
비록 고작 5명을 통솔하는 오장(伍長)에 불과하지만 그 발군의 검솜씨 덕분에 모두 그녀를 한 명의 사무라이로 여기고 존경을 담아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나의 부대를 이끄는 수장이 아닌 그저 오장일 뿐인 그녀임에도 말이다.
그 병졸들의 무리에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떨어진 술상에는 단아한 인상의 여인과 떠들석한 분위기의 주인공인 나미에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가토의 병사들이 그리도 흉악하다던데 이곳으로 몰려와서 부렸을 행패를 생각하면 아찔했는데, 우리 나미에 덕분에 이곳이 안전해 졌어. 이렇게 무사히 다시 만나 고맙다고 말해줄 수 있어 다행이네."
"에이 나나꼬 언니, 별거 아니었어요."
별거 아니었다는 나미에의 말에 마치 친동생의 활약을 보는 것 같아 대견해하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나나꼬라 불리는 이 객잔의 주인은 걱정스럽게 우려섞인 말을 건넸다.
"가토 영주가 굉장한 검객을 고용했다고 들어서 그래. 내가 객잔 일을 하고 있어 소문에 밝잖니."
"헤헤, 언니, 이 나미에만 믿어요. 사부님만 아니라면 일본에서도 절 이길 수 있는 검객은 찾아보기 어려울 걸요?"
하지만 그녀의 호언장담에도 나나꼬는 마음속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웬 여검객의 활약에 피해를 입자 가토 영주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정말로 엄청난 검객을 초빙했다는 얘기를 몇 주 전부터 여행자들 여럿에게서 들었으니까.
가토 영주의 적인 고니시의 영지에 속하는 이 작은 마을에까지 그런 소문이 들려올 정도면 확정적이라고 봐야 했다.
나미에와는 알고 지낸 지가 벌써 햇수로 3년. 이제는 친자매처럼 가까워져 가족같은 정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나미에였다.
그녀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비록 노파심일지라도, 잔소리로 들릴 지라도 나나꼬는 나미에에게 우려를 전달하며 그녀가 경각심을 가지길 바랐다.
"이름은 아직 못들었지만 발도술의 대가라고 하던데. 정말 괜찮겠니? 아무리 너라고 하지만 그 검객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떡을 맛있게 먹으며 마치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하게 부푼 나미에의 모습에선 그다지 걱정스러운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사(武士)라면 당당히 맞설 뿐이에요! 사부님께 그리 배웠거든요."
그래, 여자의 몸임에도, 어린 나이임에도 오로지 뛰어난 검술만으로 편견을 깨고 당당히 인정받고 있는 그녀라면 어떻게든 해쳐 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나꼬는 부디 지금까지처럼 나미에가 전투에서 승리하길, 여자라고 내리깔아보는 그 시선들을 상대로도 당당하길, 그녀가 무탈하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러고 보면 언니도 참 대단해요. 언제 전쟁터가 될 지도 모르는 이땅에서 젊은여자 혼자 이 객잔을 운영하다니. 제가 언니였다면 그런 용기를 못 낼 거 같아요."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야."
부드러운 손길로 나미에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음을 짓는 나나꼬의 모습은 마치 어린 여동생에게 언니가 흔하게들 그리 해 줄것 같은 그런 친근한 모습이었다.
언니가 없어 자매의 정에, 가족의 정에 굶주렸던 나미에가 바라던 그림같은 모습.
"작지만 이런 객잔을 운영하지 않는다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멀리서 바라만 봐야했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니? 다른 여인들처럼 밭을 일구고 길쌈을 하며, 아이를 돌보며 지내는 삶도 나쁘진 않지만 난 지금의 삶이 좋단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총총이 박혀있는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본 나나꼬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나미에를, 그녀 생각엔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저 샛별 같은 아이를 향해 웃어주며 부드럽게 쳐다보았다.
"그저 저 밤하늘의 별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높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무사들을, 영웅들을, 모험가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그중에 가장 빛나는 별이 바로 나미에 너였고."
"에이, 무슨 제가 별이에요. 별이라고 불리기엔 좀 많이 쑥쓰러워요."
갑자기 훅 들어온 언니의 칭찬에 쑥스러움이 밀려왔는지 나미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사레를 쳤다.
"후우...어차피 언니가 아니면 같은 편인 고니시 영주쪽 사람들 그 누구도 절 사무라이라고 불러주지도 않는걸요. 적군은 뭐 그냥 계집년이라고 안 부르면 다행이고요."
여자로서 겪어야 하는 편견의 벽이, 현실의 난관이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지만 언니처럼 생각하는 나나꼬가 해준 별이라는 말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 같은 건 그냥 술을 따르는 작부로, 심지어 기녀로나 다들 생각할걸?"
그녀를 달래주려는 듯 장난끼를 섞었지만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나꼬가 답했다.
"누가 언니를 그딴 식으로 불러요?! 말만 해주세요 내가 그자식을 그냥!"
"그래도 나미에 너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날 객잔의 주인으로, 한 사람의 대화상대로 여겨주지 않니. 후후"
나나꼬는 정말로 저 하늘에서 빛나는 별같은 재능을 지닌 무사 나미에가 자신을 대화를, 친분을 나누고 심지어 언니처럼 여겨주는 게 너무도 고마웠다.
"언니? 이걸, 이걸 어떻게..."
"우리 나미에가 튀김우동을 좋아한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았단다."
"고마워요 언니. 맛있게 먹겠습니당!"
고소한 떡이 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 달짝지근한 술의 향기가 그날의 즐거움을 같이 자축하려는 듯 객잔에 퍼져 흥겨운 분위기를 돋구었다.
저마다 알고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사의 노래를 전장에서 고함을 지르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힘겹게 부르며 그 웃기는 부조화에 어색해 하면서도 즐거웠다.
어둠에 잠긴 주변과는 달리 객잔에는 따뜻한 노란빛의 화톳불이 밝혀 있었고, 하늘에는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게 밝고 환한 달이 떠 있던 밤이었다.
분명 모두에게 추억으로 남았어야 할 그날이었지만,
"호오, 칼든 계집년이 네년인가? 잡것들 몇을 풀어 같잖은 승리를 맛보게 되면 그 근방에서 유난을 떨고있을 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예상을 깨고 너무나도 일찍 찾아온 한 검객에 의해 악몽으로 끝나고 말았지.
자신있다던 검술은 너무도 무력하게 그 검객에게 무너져 내렸다.
"주제를 넘은 건방짐에 비해 실력이 형편없군."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멋진 무사라며 그녀를 가장 지지해주고 응원해준 친언니 같던 여자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유린당하고 죽었고,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던 부하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 자리에서 소중했던 이들을 모두 잃어버린 나미에.
그 무사의 '계집'에 대한 조롱과 편견이 가득 섞여있는 자비와, 살아남아 치욕을 기억하는 게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한 놈의 가학성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런 삶이 과연 살아도 산 것일까.
"네년 같은 계집 따위는 검을 들 자격이 없다. 뭐 이 쓰레기는 검으로 쳐주기도 아까우니 고철로 팔아 노잣돈에나 쓰라고 남겨주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몸, 피칠갑을 한 채로 군데군데 검격으로 찢어진 무복, 그저 사부가 주었다는 추억 때문에 실전에서는 쓰지 않고 가지고 다니기만 했던 낡은 검 한자루만이 남은 것의 전부였다.
"저년 때문에 나구모와 오타니가 죽었어!"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에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떠밀려온 곳이 대마도.
당당한 무사가 되고자 했지만 비루한 목숨이라도 이어가기 위해, 나락으로 떨어진 자긍심이 차마 누르지 못하는 짐승같은 굶주림에 지쳐 택했던 것은 결국 도둑질.
아무리 악인들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그게 과연 무사의 길일까? 전혀 한점도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미에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어졌다.
무사도란 이상과 도둑질이란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 하고 부끄러워 했지만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으니까.
곁에 있었던 이들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자신따위가 무슨 무사(武士)라고. 도둑질을 하는 지금의 모습이 차라리 나같은 년에게 어울리지.
그렇게 자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긍심은 마모되어 버렸다.
무사로서 지켜야할 대상은 이미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거대한 적의 손에 살해당한 지 오래.
무사도를 이루는 두가지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건 드높은 긍지와, 그 긍지로 끝까지 지켜야할 약자.
결국 그녀의 무사도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까지 그녀에게 남아 있던 것은 낡은 검 한자루 뿐이었다.
그것마저 이젠 부러져 버렸지만.
무사도가 없이 그저 검만 쥐고 있다고 무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부러진 검을 들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
해병대원들을 한참동안 지도한 후 잠시 가진 휴식시간.
쉬는 동안 부러진 칼을 매만지며 잠시 과거의 악몽같은 사건에 대한 회상에 잠겼던 나미에는 그때 항구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쓰였다.
영험한 기운을 발하는 노파에 의해 머릿속으로 직접 들린 그 소리. 비현실적이게도 공간을 격하고 마치 전음처럼 들려오던 그 목소리.
-주명이란 사내를 찾아 가거라.-
-부러진 칼날의 운명을 지닌 무사여, 너를 다시 벼릴 수 있는 길이 그에게 있으니.-
지금 함께하고 있는 주명이 그 노파가 말한 슈아키라(朱明 : しゅあきら)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진 칼날을 다시 벼린다는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것 같은 의미심장한 문구 역시 지금 상태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고.
물끄러미 부러진 검을 바라보던 그녀에게 히로시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무사님..."
녀석은 그녀에게 검술에서 막히는 부분이 있는데 괜찮다면 가르침을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지금 해병대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역시 넘치는 호의였다. 굳이 저 젊은이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해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만 나미에는 검술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졌던 히로시의 열정이 떠올라서인지 순순히 응해 주었다.
"네가 말했던 그 기술. 펼쳐봐."
역시나 히로시의 검술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저런 실력으로 전쟁에 나갔으니 안죽고 살아온게 다행이란 생각에 속으로 혀를 찼지만, 저 어리숙한 청년의 목숨을 구해준 게 자신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뭔가 조금이라도 저 녀석을 도와주고 싶어졌다.
"히로시라고 했지? 그렇게 검을 휘두르면 실전에서는 절대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 없어. 파지에 신경쓰고 하체의 힘을 실어야 해."
"예 나미에 무사님!"
히로시에게 당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세심한 지도를 해주느라 꽤나 시간을 소비한 덕분에 별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해병대원들을 가르쳐야 했지만 왠지 마음만은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
히로시와 같이 열정적이었던 녀석이 있었다. 지금은 죽어버린 나구모라는 이름의 병졸.
왠지 자신의 그 편해진 마음에는 그 녀석을 한명의 당당한 검사로 만들어 주고 싶었던 아쉬움을 이런 식으로라도 대신 풀어서 그랬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미에는 괜히 우울해졌다.
그런 그녀의 심리상태가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 재개된 해병대원들의 훈련은 조금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나미에가 주명 일행의 검술 지도를 끝마친 뒤 홀로 수련장을 나와 찾아간 곳은 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대장간이었다.
도심지에 들어서 있는 만큼 규모도 크고 진열된 무기들의 수준도 훌륭했지만 둘 다 그녀가 찾는 대상은 아니었다.
응대를 위해 달려나온 점원에게 그녀가 찾는 한 사람의 이름을 대자 흠짓 놀란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대장간 최고의 도검장을 웬 여검객이 찾는다는 상황이 많이 이상했던지 한참을 머뭇거리며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점원은, 나미에가 보여준 낡은 검 손잡이에 찍힌 그 도검장의 표식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누가 나를 찾는 게야?"
마침내 그 대장장이가 도착하자 나미에는 이미 칼날이 부러져 손잡이와 반쪽짜리 칼날만 남아있는 그 물건을 보여주며 건네었다.
세월의 흔적과 고집이 느껴지는 대장장이 노인이 그녀의 검을 받아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부러진 건 차치하고서라도 상태가 영 좋지 못하군. 내가 이딴 고철을 만들었다니 참 마음에 안들어."
마치 자신의 부족했던 대장장이로서의 실력을 그때 만들었던 저 칼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보는 것 같아 노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만든지 10년도 넘은 이 쓸모없는 고철을 아직까지 들고 있는걸 보면 이 검에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가 보구먼."
그러다 무슨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 마냥 검을 오랫동안 간직해준 나미에가 신기했는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던 노인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눈이 커졌다.
"...너는 호, 혹시?!"
이미 노인을 알아보고 있었던 나미에는 마치 이제야 알아보냐며 타박하는 듯한 눈길로 그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답해 주었다.
"맞아요, 그때 이곳에서 사부님으로부터 칼을 선물로 받은 그 소녀죠."
나미에의 긍정에 노인은 지금까지의 낯선 이를 대하는 퉁명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나미에구나! 그 어린 소녀가 이리 훌쩍 커버리다니. 정말 반갑구나 반가워!"
해후의 기쁨을 나누는 노인과 나미에는 마치 처음 만났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설마 요즘도 그 튀김우동인가 뭔가를 그렇게 좋아하느냐? 아니 사람이 그렇게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건 내 평생 그때 처음 알았다. 쪼끄만 소녀가 어찌 그리도 많이 먹던지."
"에휴,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밥도 안 챙겨드시고 일만 붙잡고 사는 거 같아 보여요. 아니 사람 얼굴이 이렇게 홀쭉하다니. 몸도 이렇게 말라서야 어떻게 그 힘든 대장장이 일을 해요!"
"인석아 내가 이래봬도 이 근방에서는 알아주는 장인이야! 설마 망치질 할 힘도 없어서 빌빌댈까봐 그러느냐? 에잉!"
아직은 실력이 미숙했던 중년의 대장장이와, 검술을 배우는걸 어려워 했던 풋내기 검사지망생 소녀였던 그 때로.
"그나저나 이 검은 왜 이모양이 된 거냐?"
"싸움 중에 부러졌어요. 그래서 말인데 이 검, 고칠 수 있을까요?"
정여수라 불린 조선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나미에도 잘 알았지만 사부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이 검을 고치는 것은 그저 물건을 수선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러진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기에 그때와 똑같은 장소, 똑같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곳으로 이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그건...당장은 어렵단다. 후우..."
하지만 일전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나미에의 기대감 섞인 들뜬 얼굴은 그녀의 질문에 대장장이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서 불가능하다 답하면서 급하게 무거워졌다.
"지금 일본을 평정한 관백이 칼사냥(刀狩り)을 명했단다. 오직 무사들에게만 칼이 허락되어 버렸단다. 후...그래서 관원들이 철저하게 칼의 민간 보급을 통제하고 따르지 않으면 베어버리고 있는 상황이지."
그녀의 기분이 나쁠까봐 직접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받은 직첩이 있거나 직위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나미에는 무사가 아니었다.
"..."
스스로도 무사의 자격을 의심하고 자책해 왔지만 이렇게 현실에서 무사가 아님을, 칼조차 쥘 수 없는 비참함을 맛보게 되자 나미에는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 같았다.
"미안하구나...정말 검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조정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의 대장간이라도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 저 쓰시마 같은 곳 말이다. "
정말 미안해 하는 그의 위로에도, 위로랍시고 대안으로 건넨 그의 말이 왠지 너는 무사가 될 수 없으니 낭인으로 살아라는 말로 들려 마음이 착잡했다.
대장장이 영감이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처한 비루한 현실에 세상이 그녀에게 건네는 조롱 같아서.
참혹한 패배로 무사의 길에서 멀어져 대마도로 쫒기듯 도피했던 그녀의 처지를 이 세상이 비꼬는 것 같아서.
어두운 얼굴로 대장간을 나온 나미에를 맞이한 것,
그녀가 겪고있는 비루한 현실과 참혹한 패배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대검호 하야시자키 진스케(林崎甚助)였다.
"호오, 이제와서 검이라도 다시 구하는 겐가?"
그의 몸이라는 칼집에 언제라도 섬전(閃電)처럼 뛰어나와 눈앞의 대상을 베어버릴 수 있는 것 같은 살기를 갈무리한 것 같은 사내.
그가 왼손가락으로 검을 튕기자 검집에 수납되어 있던 일본도의 날이 살짝 내비치며 정오의 햇빛을 받아 빛났다.
진스케는 오른손을 들어 왼쪽 허리에 패용된 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나미에에게 이죽거렸다.
"계집년 주제에. 검이라니."
한번 패배한 전적, 그것도 아무것도 못해보고 압도적으로 패한 악몽같은 경험이 있기에 위축되는 것을 느꼈지만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더이상 위축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패용하고 있던 검에 손을 가져다 주면서,
그녀는 정여수란 조선 출신의 장인이 무인이 검이 없으면 안된다며 검을 건네주면서 손자인 옥현을 통해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아녀자에게 검은 어울린다 생각하지 않네만, 그래도 무인이 검이 없으면 위험하니 내 쓸만한 것으로 준비했네."
쓸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있는 무게중심, 시퍼렇게 선 칼날의 예리함, 검을 튕겼을 때 들리는 맑은 소리로 알 수 있는 훌륭한 내구도.
명검이라고 불릴만한 검이었다.
다만 흠이있다면 일반적인 일본도보다는 조선에서 쓴다는 환도에 조금 더 가깝게 생겨 검날의 휘어짐이 덜해 약간은 낯설었다는 것 정도.
"끄응. 내가 딱히 주고 싶어 주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무인은 봄을 보중해야 하니 이걸 차고다니게나. 크흠. 내 특별히 그대가 쾌검을 추구한다는 말을 듣고 가벼운 걸로 준비했네. 여인이 몸을 다치면 못써!"
그가 건네준 가벼우면서도 질 좋은 경갑주, 조선식으로 가죽찰갑이라 불리는 갑옷의 기분좋은 무게감을 느끼며, 왠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감촉을 느끼며 나미에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검을 바로 뽑을 수 있도록 오른손을 검 손잡이에 가져다 댄 나미에는,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긴스케를 응시하며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검이 뽑히지 않았지만 곧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 상황을 깬 것은 긴스케였다.
"그딴 눈, 건방져서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난 건방진 것들의 눈이 싫거든. 그래서 해주는 말인데..."
갑자기 품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뒤지던 긴스케가 꺼낸 것은 말라 비틀어진 눈알 하나였다.
"나나꼬라고 했던가? 나처럼 멋진 사내에게 몸을 내어주면서도 그딴 눈을 하길래 재미를 좀 보고 뽑아버렸지."
툭
쓰레기를 던지듯 나나꼬의 눈이었던 것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피가 묻어있는 채로 굳었는지 붉은 빛을 띈 말라붙은 안구를 보며 나미에는 그때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파왔다.
"이몸은 건방진 눈들을 보면 가지고 다니고 싶거든. 내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똑똑히 저승에서나마 확인하며 그 건방짐을 반성하란 의미에서 말이야."
"너, 너 이 미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놈이 그녀에게 어떤 짓거리를 했는지 확인하자, 또 지금도 어떤 식으로 그녀를 모욕하고 있는지 알게되었다.
나미에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눈에는 핏발이 섰다.
"이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부서질듯 자루를 움켜줬던 손으로 검을 뽑으며, 나미에는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시던가."
그녀의 돌진에도 진스케는 전혀 동요하는 것 없이 태연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