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49화 (49/77)

〈 49화 〉 48화 - 훈풍(薰風)(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종성진에 있는 북병사의 집무실.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검토하고 있던 이일의 표정은 늦은 밤까지 업무를 보느라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장계의 내용이 하나같이 좋지 않은 내용이었던 것이었던 터라 좋지 않았다.

봄이 오면서 짐승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동하듯 저 여진의 무리들이 위협적으로 준동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장계를 쓴 이들에게서 느껴졌다.

내용도 하나같이 기병이 몇이 나타나 경계를 강화했다거나 방어시설을 보수했다는 것을 보고하는 것으로 마치 겁에질려 화들짝 놀라 집에 틀어박힌 겁쟁이가 담장을 더 높이 올리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장계들을 읽어보던 이일은 조산보 만호 김갑수가 보내온 장계에 손이 가자마자 왠지 조건 반사적으로 웃음이 지어지는 것 같았다.

사실상 백의종군 중인 김주명이 김갑수의 손을 빌려 이일에게 보고하는 것인 이 장계는 언제나 그를 환하게 웃게 만드는 내용들만이 적혀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항상 승리만을 담고있는 저 장계는 다른 것과는 달랐다.

장계를 본 이일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하하하, 변경을 위협하던 야인여진 200기를 참살했다라.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크하하하!"

자신에게 보고를 했던 것은 그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이후인 최근 한달 정도이고 그 이전의 한달 동안에도 보고는 안 했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여진족들을 소탕해 왔으니 2달이나 여진족을 소탕해온 셈.

그 두달동안 그가 잡아족친 여진인들의 수효가 만단위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혁혁한 전공이란 말인가.

거기다 그런 전투병력이 삭제되었으니 그 몇배의 여진족 무리들은 전사들을 잃고 쫒겨가야 했을 것이다.

장계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일은 시선을 집무실 벽면에 크게 걸려있는 군사지도를 향해 옮겨졌다.

지금까지 주명이 들쑤신 곳은 두만강 하류 근방에 위치한 야인여진들의 지역이었고 그중에 굵직한 부족으로는 와집(窝集, 우지에) 놈들이 있었다.

번호로 삼아주었던 은혜를 잊고 니탕개의 난을 일으킨 놈들이 바로 야인여진들이니 그들을 쓸어버리는 주명의 행보는 그당시 다하지 못한 조선의 복수전도 겸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일은 여진 놈들이 통합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잠재력을 지닐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것을 경계해 왔다.

따로 부족단위로 분리되어 있었을 때도 조선은 이리 수세에 몰려 허구한날 털릴 수밖에 없는데, 만약 하나의 깃발 아래 모였을 때의 결과는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누르하치라는 신흥 강호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여진을 통일하기 위해 해서여진과 야인여진들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근심이 무척 컸었다.

특히 야인여진들이 문제였는데, 별다른 정체성이 없이 잘게 쪼개져 있는 그놈들은 누르하치같은 야심가가 봤을 때 너무나도 흡수하기 좋은 대상으로 비쳐질 것이니까.

야인여진이 누르하치에게 흡수된다면 과연 조선이 그들까지 포함된 건주여진을 제어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절대로 그렇다고 답변할 수 없었다.

그런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주명은 단순 무식하지만 시원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설령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야인여진을 복속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군."

모피를 지닌 동물들을 싹 죽임으로써 경제적으로 사보타주를 하듯이, 통합의 대상이 될 야인여진들을 싹 쓸어버림으로써 나중에 세워질 지도 모르는 여진족의 국가 잠재력을 깎아먹는 것이 주명의 해법이었다.

"수비할 때 청야전술을 편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적의 미래의 영토에 청야전술을 편다라..."

이를 주명은 선제적이고 공격적인 청야전술이라고 장계에서 김갑수의 이름을 빌려 표현했다.

어차피 여진 족속들은 조선에서 품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니 다른 놈도 품을 수 없도록 싹 쓸어버린다는 것은 다른 이가 봤을 때 잔인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평생을 여진족과의 전쟁에 종군했었던 이일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여진놈들은 죽어야만 잠잠해지는 짐승새끼들이다. 그런 면에서 아주 바람직해."

착짱죽짱과 같은 맥락의 '착한 여진은 오로지 죽은 여진'를 외칠 정도로 여진족을 증오하는 이일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

예전 발해가 이땅에 세워졌을 시절에도 이루지 못한 여진족의 동화를 이제와서 어찌 조선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종족도 언어도 다른 저놈들인데 이미 같은 피를 나눈 종족인 누르하치란 영웅이 깃발을 들어 따르라고 하고 있는데 조선의 품에 안기겠는가? 설령 안긴다 해도 그게 진심이겠는가?

니탕개의 난은 여진놈들은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는 것을 자명하고 뼈아프게 보여주었으며, 수백년 전 이땅에 흘러들어온 여진족이 아직도 '백정'이라하여 융화되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군가가 그걸 가지고 더 커지기 전에 태워버리는 게 현명한 일이다.

더군다다 그 누군가가 누르하치라는 위험한 놈이라면야.

이일의 시선이 주명에 의해 '부족이 있었는데 사라진' 와집(窝集, 우지에)이라고 적혀있는 두만강 하류지역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휘발(輝發, 호이파)이라고 적혀있는, 그가 있는 종성진에서 바로 북쪽에 위치한 부분으로 옮겨졌다.

"이제 근방에 남은 것은 해서여진인 휘발(輝發, 호이파) 놈들인데 놈들도 머리가 있으니 홀로 움직이지는 않을 터. 조만간 큰 규모로 맞붙겠군."

주명과 맞붙는다는 얘기는 삭제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니 이일은 조만간 큰 승전보가 들려올 것이라 확신했다.

호이파 부족이 터를 잡고 있는 흑룡강의 지류인 송화강이 피로 물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근데 수달가죽으로 된 외투를 보내왔다고? 흠, 보온에는 나쁘지 않겠으나 왜 이리 귀한 것을 보냈을꼬."

그때 강변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 부쩍이나 친밀해진 두 사람의 관계.

이일이 자신을 믿어주고 밀어주는 덕분에 주명은 운신의 자유를 얻었으니 뭔가 도움이라도 되는 것을 보내드릴까 하다 노년의 나이에 북방의 찬바람을 맞을 이일을 위해  산처럼 쌓여가는 수달가죽을 가공하여 보내준 것이다.

왠지 저 수달가죽 외투를 보니 누르하치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이 기묘한 감정이 뭘까 잠시 고민하던 이일이었다.

***

녹둔도에 터를 잡고 생겨난 주점은 모피무역이 호황을 구가함에 따라 날로 번창해 이제는 기와지붕까지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번듯한 자태를 자랑했다.

그 주점의 방 하나를 빌려 주명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맛이 쓰네."

수만의 여진족을 쓸어버리는 주명의 마음도 편한 것이 아니었다.

저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일 것이니,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남겨진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자명했다.

다른 부족에게 끌려가거나 길바닥에서 굶어 죽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강대한 여진놈들에게, 저 누르하치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여진족을 품어 부하로 쓴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누르하치의 존재 때문에 깨끗하게 포기했다.

같은 동족 중 누르하치라는 시대의 영웅이 존재하는데 어찌 이방인을 따르겠는가.

니탕개의 난은 물론 기존에 약탈하고 싸우고 했던 원한이 있는데 어찌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자신을 충직하게 따르고 있는 해병대 대원들과 총병대의 일부 대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여진족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 조선인들이 고통받는다. 해야만 하는 일이야..."

이일이 주명에게 넑두리처럼 말했던 장수는 하고싶지 않아도 해야하는 일이 있는법이다는 말이 귓전에서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빌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 해 보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결국 손에 피를 묻힌 자가 짊어지고 가야할 고뇌와 가책인가 싶어 술병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주명이 좋아하는 청주 특유의 향이 입 안에 퍼짐과 동시에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왜 나는 사람을 죽이면 즐거운 걸까."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고뇌에 생각이 미치자 마치 증발하듯 취기가 달아나고 주명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여진족의 가족들이 겪게 될 고통에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까지는 정상인데, 왜 막상 사람을 칼로 베어 죽이는 그 순간에는 스스로 정상이 아닌 것일까.

자신이 적들을 죽일 때의 표정을 스스로 떠올려 보려 했다.

볼 수 없었지만 떠올려 졌다.

너무나도 즐거워 미칠 것 같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술병에 남아있는 술을 모조리 입 안에 털어넣었지만 이번에는 향기도 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 청주 한병만 더 주시오."

술이 떨어지자 점원에게 들으라고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쳤고,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양 손에 하나씩 술병을 들고오는 그녀는 나미에였다.

"너, 너 여기를 어떻게 알고?"

분명 아무에게도 이곳에 온다고 알리지 않았을 텐데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궁상맞게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냐? 거기에 또 병나발을 불고 있네?"

가져온 술병을 술상에 올려놓은 뒤 나미에는 그럴 줄 알고 가져왔던 듯 정갈하게 생긴 작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건네지는 술잔.

"마셔."

찰랑이는 술의 표면에 떨리는 주명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한참을 침묵하던 주명은 그녀가 건넨 술잔을 받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손끝을 스치는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와 찌릿하는 듯한 느낌은 어떤 안주보다도 훌륭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탁자 위에 주명이 잔을 올려놓자 나미에는 말없이 다시 술병을 들어 술을 따라 주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나미에가 술을 따라주고 주명은 마신다는 그 행위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취기가 다시 올라오며 몸에서 나오는 열기로 방 안은 후끈했지만 둘 사이의 대화가 없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술 안줘? 너만 마시기야?"

"어, 어 미안."

그 어색한 침묵이 깨진 건 역시나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화 때문이었기에 근본적인 어색한 상황은 바뀔 수 없었다.

"흡."

이미 하나뿐인 술잔은 자신이 입을 대어 사용했으니 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안절부절 못하는 주명에게 나미에가 다가오더니 주명의 손목을 집어 술병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 사이에 이질적인 딱딱함, 굳은살이 느껴져 주명은 흠짓했다.

그녀에게서 나는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향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주명을 대신해 손의 통제권을 쥔 나미에는 술병을 움직여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하필 주명이 입을 댄 부분이라 물기가 남아있던 부분에 입을 대는 그녀의 모습에 주명은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보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앉아있는 상황이 더욱 민망했다.

꿀꺽

그녀에게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목으로 넘기는 소리마저 귀에 들려왔다.

소매를 들어 입술을 닦으려다 멈짓하더니 그냥 입술을 혀로 핥은 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야."

"응?! 무슨 소리야 그게?"

"괴물 아니라고. 너."

그날, 자신이 궁상맞게 그녀를 찾아가 눈물을 보였던 기억이 떠올라 안 그래도 오른 취기 때문에 붉은 얼굴이 더욱 화끈했다.

그녀는 그때 대답을 해주지 못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지금 찾아와 대답을 해 주는 것이다.

그녀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주명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들풀로 투박하게 얽어 만든 작은 탕건(宕巾)이었다.

"도깨비 감투라더라. 윤아와 아이들이 도깨비님께 뭔가 도움을 주겠다면서 몇일동안 끙끙대며 만든 거야."

그 장난감처럼 보이는 작은 모자가 주명의 마음속에는 너무도 크게 와 닿았다.

"이게 첫번째 증거야. 네가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 세상에 어떤 괴물이 저렇게 귀여운 아이들에게 이런 선물을 받겠냐."

면죄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죄를 씻어주는 세례라고 해야 하나.

자신을 옭아매던 불신과 자기혐오가 눈 녹듯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가슴이 따뜻해 지는 보람과 충만함이었다.

근데 첫 번째 증거라고 굳이 말했다는 것은 두 번째 증거도 있다는 것일 텐데 그 점에 대한 의아함이 주명에게 떠오를 찰나.

너무나 부드러워 그 안에서 녹아버릴 것 같은 그녀의 입술이 주명의 입술에 포개졌고,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짜릿한 감각과 함께 느껴졌다.

빨개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하는 주명에게서 고개를 뗀 뒤 나미에는 역시나 빨개진 얼굴로, 떨리는 눈동자로 주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번째 증거. 세상에 어떤 괴물이 나같이 예쁜 여자에게 이런 선물을 받겠어."

급격하게 들어온 자화자찬에도 전혀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은 아직 그녀가 포개고 갔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의 여운이 주명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운이 조금 잦아들 때쯤 찾아온 것은 너무나도 강렬한 기대감이었다.

마음에 두었던 그녀가 왠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느끼는, 미지의 설렘이 폭발하며 만들어낸 확실한 기대감.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는지 빨개진 얼굴을 돌려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 그 너머의 보름달을 쳐다보는 그녀의 귀에 방금 전까지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 들어왔다.

푸른 옥으로 만들어진 귀걸이가 걸려 있었던 것.

전에 대마도의 왜구를 공격했을 때 얻었던 노획품 중 푸른 옥으로 된 저 귀걸이가 있었다.

무심결에 이거 나미에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기대감은 더욱 불길처럼 커졌다.

"그래. 그 예쁜 여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멋진 무사에 천재 검객이라면 정말로 그러거야. 거기다..."

"..."

"나미에라는 여자가 준 선물이라면 설령 내가 진짜 괴물이었더라도 인간이고 싶을걸? 그 여자를 만나고 싶어서라도."

"...!"

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설렘 섞인 불안함에 떨려오던 두 사람의 눈동자는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시 주명을 쳐다보게 된, 이제는 웃고 있는 나미에게 마주 답했다.

"괴물이 아니라 도깨비야.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도깨비."

지금까지 봤던 그녀의 얼굴 중에 가장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의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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