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57화 (57/77)

〈 57화 〉 56화 - 입신(立身)(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입신양명이라는 말이 있다.

본래는 입신행도(立身行道)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해석하자면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는 게 효의 끝마침이라고 효경(孝經)에서 강조한다.

끝마침이 있으면 시작이 뭐냐고 물을 수 있을 텐데, 조선인들이 나중에 단발령에 거세게 저항하게 만들었던 그 신체발부 수지부모가 효의 시작이란 거고.

그러니까 몸 함부로 굴리지 말고 이름을 날린다는게 효경에서 말하는 효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물론 김작(金綽)이란 인간하고는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 효경의 저 구절이었다.

“아하하! 오늘 내 너의 옷고름을 풀고 말 것이야.”

제 아비처럼 횡음무도한 삶을 살며 몸을 축내니 효의 시작부분은 볼 게 없고,

“학문? 그거 소학만 대충 익히면 되는 거 아냐? 우리집안 재물이 얼만데 내가 왜 머리 싸매서 공부를 하느냔 말이야. 영웅은 공부따윈 하지 않는다는 말 몰라?”

영웅은 커녕 인간도 못되면서 공부는 뒷전인 관계로 효의 끝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온갖 패악질을 부려 부모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인간이니 더더욱.

다행이라면 다행인건 그의 아비인 김시신은 아들놈보다 더한 막장이었던 탓에, 이미 똥칠된 이름에 먹칠해 봤자 티도 안났다는 것.

하지만 양친중 부친은 요절했지만 아직 모친인 진씨는 살아있다는 게 문제.

아들놈의 망나니질에 그녀는 속이 먹처럼 까맣게 타들어갔고 전혀 나아지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 눈물을 보이는 날이 많았다.

자신을 돌봐 주지도 돌아봐 주지도 않았던  요절한 남편에게 원래도 원망하는 마음이 많았지만 그 피를 이어 똑같이 망나니질을 한다고 생각하니 더 원망스러워 진심으로 제삿상마처 차려주기 싫었을 정도.

물론 그래도 자신의 처지는 낫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형인 김시민의 아내 서씨는 아예 후사조차 보지 못해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에헤헤 어머니, 소자 풍류에 쓸 돈이 떨어져서 그런데 조금만 더 지원을 해 주십시오!”

이딴 아들놈이라면 차라리 없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형님인 서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아들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고 자신을 위로했으니까.

더군다나 남편과 사별한 자신과는 달리 멀쩡히 건장한 남편이 살아있음에도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그 속이 오죽하랴.

거기에 이젠 양자까지 들인다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정말 속이 썩이 문드러질 것 같을 것이다.

매일 서로 부둥켜 안으며 기구한 처지를 눈물로 한탄하던 두 여인에게 갑자기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다.

“뭐라고요? 형님의,  아주버님의 양자로 얼자가 들어온다고요? 정신 나간 거 아녜요!?”

“동생, 근데 그 얼자가 도련님(김시신)의 소생이라고 했어. 어찌, 어찌 내게 이럴 있느냔 말이야..어찌..흑.”

“마, 맙소사! 미쳤어! 형님 이럴때가 아녜요. 당장 어머님을 찾아봬야 겠어요!”

보통 일가를 이루면 분가를 하는게 법도에 맞지만 남편과 사별한 진씨와 남편이 거의 집에 있지 않았던 김시민의 처 서씨는 본가에 모여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여인이 한 곳에 모여서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

비록 몇대에 걸쳐 벼슬길에 나선 이가 김시민밖에 없지만 명망높은 명문가답게 큰 김시민의 본가.

그곳의 별채에 기거하던 두 여인은 일심동체가 되어 씩씩거리며 자신들의 시어머니인 창평 이씨(昌平李氏)를 찾아갔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단아한 외모에 기품을 지닌 시어머니 이씨는 두 며느리의 어찌 이럴 수 있냐는 울음섞인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내 셋째(김시민)에게는 단단히 일러둘 것이니 걱정 말거라! 어디 근본도 없는 것을 양자로 들인단 말인가."

역시나 명문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시어머니는 그녀들의 예상대로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셋째아가(서씨)는 너무 걱정 말거라. 너의 정성에 분명 하늘도 감동해서 아이를 점지해 주실 것이야."

강단있지만 인자한 성품을 보여주듯 며느리를 걱정해 주시는 저 말씀까지 들으니 며느리들은 크게 감동한 모습이었다.

사실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크게 의지하고 있었고, 그녀가 없었으면 이 본가생활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많이 따랐다.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도 분명 어질고 마음씨 좋은 분이라지만 뭔가 가장으로서의 위엄이나 강단이 부족해서 아쉬웠는데, 시어머니인 이씨가 반대로 우두머리 기질이 있어 집안을 휘어잡고 가문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모든 이가 이씨를 따르고 있었던 것.

그러니 이씨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김주명이라는 이름의 근본없는 왜국 여자의 자식은 이 집안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주변의 일가 친척 어른들이 찾아와 김시민에게 크게 꾸지람을 놓는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되자 정말로 안심이 되는 두 여인이었다.

그런데.

김시민이 집안에 파문을 던져 한참 시끌벅적했던 몇달이 지난 후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했다.

김시민의 아내 서씨가 그 달라진 분위기를 확인한 것은 시어머니의 호출에서부터였다.

"아가, 미안하게 되었구나."

"어, 어머니. 어찌 얼자를 부군의 양자로 삼는다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셋째 며느리에게 너무도 미안한지 고개를 들지 못하며 어두운 얼굴로 말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서씨는 이 결정이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을 직감했다.

"이번에 경인북정이 있지 않았느냐. 거기서 그 얼자 녀석이 큰 공을 세웠다는데 주상전하의 마음에 크게 든 모양이다. 무려 공신으로 책봉되고 전례를 뒤엎고 식읍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얼자놈이 공신이 된 거랑 이번 일이 무슨 상관이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항거할 수 없는 명령에 주눅이 든 것 같은 어머님의 표정에서 그녀는 이번 양자 건에 누가 개입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서 녹둔군(鹿屯郡) 김주명에게 그 뿌리가 되는 가문이 버젓이 있는데 왜 족보에도 올라와 있지 않느냐고 셋째(김시민)를 불러 물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셋째가 양자로 삼으려 한다고 하니 전하께서 껄껄 웃으며 참으로 합당한 결정이라 두둔하셨고..."

그걸 시어머니의 입으로 확인하자 서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왕이 개입한 이상 이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날 서씨와 진씨는 부둥켜 안고 밤새도록 서럽게 울었다.

진씨는 난봉꾼 남편의 외도의 결과물이 집안의 일원으로 정식으로 입적되는 괴로움에, 또 한명은 자식을 가지지 못해 결국 비천한 얼자가 남편의 후계자가 되게 생겼나는 비참함에.

그녀들에게는 이제 삶이 곧 고통이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절망 가득한 세월을 보내는지라 시아버지와 남편이 그 양자가 되는 녀석을 보기 위해 북도로 올라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북쪽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이 내려보내온 서신에 서씨는 두번 놀랐다.

그들이 둘 다 그곳에 '양자', 아니 그 얼자놈을 만나러 올라갔었다는 것.

또 하나는 아무리 망나니라지만 그래도 시아버지에게는 손자요 남편에게는 조카일진데 어찌 그 아이를 북도로 올려보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분개해 하는 진씨를 보며 서씨는 그 지시가 남편의 주장에 시아버지가 동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기에 남편의 잘못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것 같아 그녀에게 미안했다.

"형님, 도저히 안되겠어요."

"동생..."

그래서 미칠듯이 분개해 하는 그녀에게 위로밖에 해줄게 없었는데 그녀가 어느날 결연한 표정으로 찾아와 말했다.

"제가 작이랑 같이 올라가야겠어요. 그 추운곳에 아직 14밖에 안된 작이가 홀로 가면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어요. 또 그 얼자놈이 작이에게 함부로 굴면 어떡해요!"

이 시기에 북방으로 간다는 것은 유배를 간다는 말과 동의어일 정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다.

그래서 서씨는 작이를 그 험한 곳에 올려보내는 것을 막아야지 어떻게 같이 따라가겠다는 생각을 하느냐며 어떻게든 그녀를 타일르려 했지만 서씨 역시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가, 그 너희 시아버지가 너 역시 올라오라고 하는구나."

추가적으로 도착한 서신에 의하면 시아버지와 김시민이 올라오라고 한 이들은 총 네명이었다.

김시민의 처이자 주명의 양모가 된 서씨, 그리고 주명의 친부(?)의 정실부인인 진씨, 그리고 주명의 이복형제(?)인 작이에 더해 다른 한명의 이름이 들리자 옆자리에 있던 진씨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연이도 같이 따라오라 언급되었구나."

김연(金嬿)은 난봉꾼이었던 진씨의 남편과 집안의 여노비와의 사이에서 난 얼녀였다.

그녀는 정실 소생인 김작보다 한살 어린 13살이었는데, 유독 진씨가 연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난봉꾼 남편이 뿌린 다른 혼외자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아주버님인 김시민이 나서 살길을 터 주기는 했지만 앞으로 더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연이는 어미가 그녀를 낳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가문이 아니면 돌봐줄 이가 없어 지금까지 그 불륜의 증거이자 결과를 눈뜨고 봐야 했고 그게 진씨에게는 너무도 한스럽고 열받았던것.

진씨는 시어머니 앞이라는 것도 잊고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너무 화가 나는지 이를 바드득 갈았다.

***

휴가가 거의 끝나가는 양부 김시민을 배웅했지만 주명의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손주들은 지금껏 충분히 얼굴을 보았고 가문의 풍족한 재산 덕분에 충분히 일가를 이뤄 잘 살고있을 터이니 수십년 만에 다시찾은 손주를 지켜보고 싶다는 김충갑이 남았고 김시민의 당부에 의해 주명의 공부를 계속해서 봐 주고 있었던 것.

하지만 어려운 삶을 살아왔던 손자를 애틋하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또는 이런 온건한 방식이 누구와는 달리 '정상적'인 교육방법이 맞는 것인지,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양부로부터 배울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명의 성취가 보잘것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허허, 내 비록 생원과(生員科)까지만 합격한 부족한 유생(儒生)이라 가르침이 빈약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구나. 그리고 어찌 한달만에 사서삼경을 다 뗄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장하구나!"

주명은 이제 사서삼경을 그저 완독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름의 해석을 가져다 붙일 수 있을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마스터했다는 뜻과 동의어인 떼었다라는 표현을 조부인 김충갑이 쓴 것이다.

주명의 등을 두드려주는 김충갑의 얼굴에서는 감출 수 없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학문은 조금 여유롭게 가르친 대신 집중적으로 훈육한 예법이 이제는 손자의 행동 하나나에 배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학식과 예법을 갖춘 손자.

적어도 이정도면 입신양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몸을 세워 도를 행하는 입신행도(立身行道)라는 수준에는 올라온 것이니 손자는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생(儒生)이 된 것이다.

대견한 손자를 생각하며 요즘 웃음이 항시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김충갑 어르신을 웃게 만드는 것은 또 있었다.

"이제 식사를 하러 가자꾸나."

"예 할아버님."

처음에는 어찌 양반이 되어 다른 이들과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며 식당을 극력 거부했던 그는 샤를이라는 색목인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줬다는 요리를 먹어 보더니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식당에 갈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한학교의 옆에 지어진 식당은 최근에 지어진 곳인데, 할일없이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샤를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주명이 큰맘먹고 큰 재물을 들여 지은 곳이었다.

한참 공부해야 할 학교의 아이들을 위한 식사(급식)를 제공함은 물론 해병대와 총병대에게도 병영식(짬밥)을 제공하는 것이 식당의 역할이었고, 아무리 교대로 순번을 정해 먹는다고는 해도 도합 천명이 넘어가는 대인원이 식사를 해야 했기에 지금 시대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큰 건물로 지어졌다.

거기서 샤를을 총괄 지배인으로, 그리고 역시나 가족을 잃은 여인들을 정책적으로 채용해 찬모로 삼아 운영했고, 샤를의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기 때문에 이제는 마을 주민들도 제발 먹고싶다고 주명에게 청원을 넣을 정도였다.

녹둔도 만호 관사를 나와 식당을 향해 가는 길은 포장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평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손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방어진지의 사령부 역할을 해야 했기에 녹둔도의 북쪽에 치우쳐 있던 관사에서 정 중앙에 있는 대한학교의 바로 옆 식당으로 가는 길은 마치 남쪽으로 길게 뻗은 주작대로를 연상시켰고 그 길을 따라 요즘 녹둔도의 번영을 반영하듯 장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좌판을 깔아놓고 노점상처럼 상행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번듯한 상점 건물을 올리고 장사를 하고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라보는 김충갑 어르신은 손자의 선정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뿌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그 뿌듯함을 더 느끼고 음미하며 걸어갔던지라 발걸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노인인 할아버지를 재촉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주명 역시 김충갑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걸어갔다.

"어째 하루하루 더 번화하는구나 이곳은. 껄껄껄."

"요즘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서 그럴겁니다."

"아, 의사(義謝)가 만든다는 그 비누 말인가? 그건 정말로 대단한 물건이라 할 수 있지 암."

정여수 어르신의 호는 놀랍게도 '의사'(義謝)였다.

거기서 또 찻물을 뿜은 주명이었지만 굳이 옥현이 녀석처럼 어르신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정여수 어르신이 장인들을 조직해 만든 공장은 분업의 압도적인 효율 덕분에 효과적으로 화살과 각종 무구들을 뽑아내었고 항상 보급품에 목말랐던 북병사 이일은 거의 원가 수준으로 납품을 해주는 주명이 너무나 기특했던지 다시한번 연회를 열어 위무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연회라면 지난번 승전연만으로도 학을 뗄 껏 같은 주명이었기에 당연히 한사코 거절했고.

그러나 군납으로는 큰 돈을 벌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굳이 군납을 하려는 이유는 최대한 양질의 보급품을 조선의 최정예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함경도의 군사들에게 퍼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 돈을 벌 의도도 아니었고.

돈을 벌려면 비누를 만들라는 대체역사의 클리셰가 있지 않은가?

당연히 주명도 비누 만들기를 시도했지만 그 원료가 되는 핵심 물질들과 공정만 알 뿐이지 자세한 방법은 몰랐기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비누가 없으니 스캔 명령어를 쓸 수도 없는 노릇.

그걸 해결한 것은 갈릴레이와 윤아였다.

답답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본업이 수학자라 딱히 해결책을 줄 리 없는 그에게조차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화학에도 흥미가 동했던 갈릴레이라는 시대의 천재 과학자는 곧바로 실험을 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그 실험에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윤아를 참여하여 둘이서 몇날 몇일을 밤을 새며 주명이 알려준 기초 개념들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결과,

"아저씨! 비누 만드는 법 알아냈어요!"

너무도 기쁜 마음이 앞서 무작정 달려왔는지, 피곤에 절어있는 안색에 떡진 머리칼을 한채로 한달음에 달려와 자신에게 비누를 안겨주는 윤아를 볼 수 있었다.

역시 과학은 위대하도다.

그저 개념을 쥐어주고 과학자를 갈아 넣으면 제조공정이라는 기술을 뽑아내니 이보다 훌륭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이런 꿀맛에 세종대왕을 플레이하며 서원을 지어대는 것...은 아닌것 같다.

갈릴레이와 윤아가 찾아낸 비누제조 레시피 덕분에 정씨 어르신의 공장에는 비누 생산라인이 하나 추가될 수 있었고, 지금은 그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아예 비누공장을 하나 더 세워 호구지책이 필요했던 마을 사람들을 끌어모아 직원으로 채용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갈릴레이가 이 먼곳에 온 것에 대한 보답 겸, 또 장기적으로 기술력 위주의 공업을 육성한다는 당초의 목표도 달성할 겸 세운 유리공장도 그 옆에서 잘 가동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갈릴레이에게 커다란 천체 망원경을 선물해 주려 만든 것인데 이 유리의 가능성을 알아챈 정여수에 의해 온갖 상품으로도 생산이 되었다.

유리의 투명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 상품성을 확신한 조선 각지의 상단과 저 멀리 일본의 상단까지 몰려들어 녹둔도는 점차 국제 항구도시의 분위기마저 띄어가고 있을 정도였다.

비누와 유리.

높은 기술력을 근간으로 하는 공업의 산물이자 녹둔도의 미래를 책임져줄 두 상품을 파는 상점이 관사와 학교 사이에 난 대로 주변에 가득했고, 그 상점에 드나드는 갓을 쓴 조선인 상인과 촌마게를 한 왜인들의 발걸음으로 대로는 항시 북적였다.

당연히 사람이 많아지니 치안 문제가 우려되었지만 부리부리한 눈으로 완전무장을 한 해병대원들이 수시로 순찰을 도는 덕분에 치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윤아에게 몹쓸 짓을 하려했던 두 명의 왜인들이 목이 잘려 효수되는 것을 지켜본 상인들은 이곳의 법이 엄정하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기에 허튼짓을 감히 하려고 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그 두놈은 해병대 주둔지로 끌려가 차라리 죽게 해주라고 애원할 정도로 뒤지게 맞고 결국 죽었다고 한다.

김충갑과 주명의 발걸음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속도와 걸음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느렸고 그 경로도 자주 왔다갔다 갈지자로 꺾였던 것은 김충갑이 비누와 유리라는 산물을 구하고자 찾아온 타지인들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여수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초기 수준의 공작기계와 이제는 익숙해진 분업을 이용해 뽑아내는 기물들이 상점에 이리 전시되고 결국은 이 녹둔도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김충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는 것 같았다.

"의사(義謝)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아무리 역모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지만 사대부가 망치를 들 생각을 하다니."

"저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요. 저라면 그 노년의 나이에 제2의 길을 찾을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대부라면 주명의 말에 역정을 내면서 어찌 유생에게 제2의 길이 있다는 말이냐고 꾸짖었을 테지만 주명이 이룬 많은 것을 보아왔고 지금도 이 녹둔도의 번화함을 보며 그걸 확인하고 있는 김충갑은 조용히 손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손자가 잘 될 수만 있다면, 또 지금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계속 남을 수 있다면 유생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한가.

부모없이 살아왔을 손자의 그 험난하고 외로웠을 시간들을 생각하면 굳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유생의 길을 강요할 생각이 그에게는 없었다.

뭐 지금은 손자가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유생의 길도 걸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한번 술이라도 대작하며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 보아야 겠구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할아버님, 허나 이제는 그 사람이 양반이 아닌데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역모로 노비가 되었다 그저 면천만 된게 바로 정여수와 옥현이었다.

따라서 지금 신분은 그저 양민.

한때 양반이었다지만 지금은 양반과 같을 리 없었고 지금은 신분이 미천한 이들과 대작하는 것은 치욕으로 생각하던 시대이니 주명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양반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하겠느냐.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큰 공헌을 하는 이가 선비가 아니면 무엇이겠고. 선비와 대작을 하는게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껄껄껄."

다행히 할아버님은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에 주명은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고마웠다.

할아버님이 특권의식을 내려놓고 자신의 주변인들과 어떻게든 안면을 익히고 잘 지배보려 하는 데에는 주명에 대한 애정이 깔려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마치 조손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를 위해 할아버지가 아이의 친구나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려하는 그런 모습이 김충갑과 겹쳐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이번에 함경도에서도 향시(鄕試)가 열린다는데 그거 들었남? 진사과(進士科)라던데?"

"그려? 근디 요즘 몇년간 전란이 이어지는 통에 합격자가 없었을 건디 흐흐. 함경도에 선비가 어디있다구. 다들 잘 싸우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선비하면 우리 충청도지!"

상단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내뱉은 향시라는 단어에 눈동자가 떨리는 할아버님의 모습을 보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더군다나 진사과(進士科)라면 시와 부를 겨루는 건디 함경도에서 무슨 얼어죽을 시여 크크크."

"맞는 말이여. 함경도에서 진사가 나오면 내가 장을 지진다 크크."

그리고 진사과(進士科)라는 말에 번개를 맞은 것처럼 부르를 떨다 주먹을 말아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완전히 결심했다.

진사과(進士科)와 생원과(生員科).

같은 초시지만 무게감이 달랐으니, 시와 문예능력을 더욱 중요시한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생원은 진사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그 격차가 컸다.

김 생원(生員), 어찌보면 자랑스러워야 하는 그 호칭이 평생 따라다녀야 했던 스스로의 한계점이자 무능의 꼬리표라고 생각하는 김충갑이었고, 생원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스스로 유생이라 에둘러 칭하는 것이 아니던가.

할아버지의 부끄러움과 후회, 자괴감이 가득 담긴 어두운 얼굴을 보기가 너무 마음이 아팠다.

"크하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생원이 뭔 선비여 쓰벌. 앙? 우리 충청도 선비님들 처럼 진사정도는 되어야 선비라고 할 수 있지!"

자신의 주변에 그 생원이 있다는 것도 모른채 사내는 자신의 지방의 자랑과 생원에 대한 조롱을 침 튀기며 하는 통에 할아버님의 얼굴은 흑빛으로 어두워졌다.

'아나 씨발! 충청도 아재요, 뒤질래요?'

'조부'에 잠시 손이 갔지만 저 아재가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거두었다.

결심했다.

자신을 끔찍히도 위해주는 할아버지를 위해 김 진사(進士)가 되어 보기로.

여진족을 쓸어버리고 최근 레벨업을 하며 얻은 2점의 능력치 포인트를 조용히 지능에 때려박은 주명.

[이름 : 김주명]

[레벨 : 14(250/18,000)

[능력 : 힘 40(+10), 민첩 31(+10), 지능 30(+10)]

[기술 : 통솔(Lv10), 투척(Lv5), 검술(Lv24), 피아식별(Lv201)]

'충청도 아재요, 장 지질 준비나 하시죠?'

내래 여진족 간나새끼들 땜시 항시 고난의 행군을 보내고 있는 함경도 린민을 대표하여, 혁명적인 천리마 정신으로 콘솔 명령어를 누르며 총폭탄 정신으로 적군을 썰어가며 갈고닦은 봉건 반동 부르주아지(선비)의 학식을 보여주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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