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57화 - 양명(揚名)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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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양제 시절에 처음 실시되어 한반도에서는 고려 광종이 도입한 인사제도인 과거(科擧).
그건 지배층이라고 볼 수 있는 관료의 자격을 중앙정부가 부여하는 제도라 그 자체로 중앙집권의 상징이었다.
다만 왕권 강화라고 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것이라 미묘했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에서는 안동 김씨들이 이 제도를 이용하여 세를 크게 불렸던 것을 보면 말이다.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의 2단계에 걸쳐 시행되는 과거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과에서는 초시와 복시를 보고 대과에서는 거기에 더해 전시까지 치르는 총 5단계를 통과해야 했다.
당연히 합격 인원은 적었고,
최소 수십만이 넘는 전국의 유생들 중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과 진사로 불릴 수 있는 백패(白牌)를 받은 이가 고작 200명뿐이었다.
대과는 더 적어 33명만이 합격증인 홍패(紅牌)를 받을 수 있었다.
과거시험이 원칙적으로 3년 ~ 4년마다 한번씩 치러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극악의 합격 확률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그렇기 때문에 소과의 합격증인 백패(白牌)를 당당히 받아와 전국 200등 안에 든,
그것도 각각 100명씩 뽑는 생원과 진사 중 더 우위에 있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전국의 그 수많은 유생들 중 100등안에 든 주명이 김충갑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것도 이 함경도에서는 몇년만에 처음 나온 진사이고 백패 소지자라고 하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내 진사시에 합격하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었는데 손자가 풀어주는 구나. 정말 장하다!"
처음 주명이 진사시에 응시한다고 했을 때 그는 만류했었다.
과거시험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치러본 자신이 잘 아니 괜히 손자의 자신감이 꺾이고 상심할까봐 걱정했던 것.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작 몇달의 시간 동안 했던 공부를 가지고 과거를 치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일을 손자는 정말 해 내다니.
결국 뜻이 확고해 보이는 손자를 강하게 만류할 수 없어 시험이 치러지는 이곳 함경도의 감영이 있는 영흥부(永興府)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기대는 언감생심 꿈에서라도 하지 않았다.
부디 어느정도 만족할 만한 성취를 확인하고 오기를 바랐건만, 손자는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고 정말로 백패를 들고 당당히 돌아왔던 것.
"이제는 김 진사(進士)라고 불러야 겠구나. 하하하!"
손자의 너무나도 뛰어난 학습능력에 정말 손자의 양부가 된 자신의 아들 김시민의 말처럼 집안에 홍패(紅牌)를 안겨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점점 구체화되었다.
몇 달의 공부만으로 소과에 당당히 합격하는 손자인데 대과라고 어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그냥 있으면 안되겠다. 본가로 돌아가 널리 알리고 싶지만 네 임무가 막중하니 녹둔도에서라도 잔치를 열어야 겠어!"
손자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기쁨에 겨웠는지 눈물까지 흘리는 김충갑.
너무도 즐거워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주명은 소과를 치른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여진족들이 녹둔도 근방을 어지럽히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을 내서 온 곳이 이곳 영흥부(함흥)이었다.
오고가는 시간과 초시와 복시까지 모두 치르는데 든 몇주정도의 시간이 아깝기는 했지만 조부가 저렇게 즐거워하니 뿌듯함했던 것.
"할아버님,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 몇주의 공백기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기 때문에 주명은 같이 따라온 히로시를 비롯한 해병대원들에게 할아버지를 부탁하고 먼저 빠른 말을 몰아 북방으로 향했다.
본래 김충갑이 본가에서 데려온 수행인려과 저들이 함께라면 큰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며.
녹둔도를 향해 바람과 같이 말을 몰며 사라지는 손자의 뒷모습마저도 김충갑은 자랑스러운 눈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
주명이 없었던 몇주동안 그를 실질적으로 대리했던 자는 둘이었다.
군부에서는 해병대의 총대장 야마모토였고 그 외의 행정 전반적인 부분에서는 정여수였다.
군부는 특이할 게 없었다.
다행히 여진족들은 잠잠했기 때문에 군에서는 그저 활성화되고 있는 시장과 녹둔도 전역을 순찰하는 역할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해병대는 그 누구보다 그런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다.
주명을 숭상했던 그들은 도깨비를 연상시키는 무서운 가면을 투구 앞에 착용했는데,
그걸 쓰고 붉은 갑옷을 갖춰 입은 덩치들이 큰 칼을 차고 순찰을 도는데 치안이 나쁠 수 있을리가.
다만 정여수가 맡은 행정부분은 달랐다.
정말 눈코뜰새 없이 미친듯이 바빴는데, 비누와 유리를 보고 몰려든 상인들과 교섭하고 그들에게 물량을 할당하는 것도 그렇고 점점 늘어나는 유입민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거주지를 정해지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녹둔도의 번영이 그를 야근의 늪으로 밀어넣고 서류의 산더미에 쌓이게 만들었던 것.
아무리 무관이라지만 전직 관리라 해경험이 풍부한 자신마저도 혼자서는 도저히 힘에 부친다는 생각에 주명이 돌아오면 행정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할 참이었다.
주명이 이땅의 관리인 녹둔도 만호 겸 식읍의 주인인 녹둔군이라는 두 직위를 동시에 지녔기 대문에 이곳은 사실상 주명의 영지라고 봐야했다.
만호로서의 군사권과 행정권, 녹둔도 식읍의 주인으로서의 수조권과 요역권(노동력 징발)을 가지고있으니 사실상 이곳의 모든 것을 다 가진게 아닌가.
그런데 애초에 이곳은 조산보 만호가 기거하는 관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이라 관리들은 물론 아전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녹둔도는 점점 성장해 가는데 행정인력의 충원은 0명에서 단 한번도 이뤄진 적이 없으니 이제는 천명이 넘어가는 녹둔도 인구와 역시 천명이 넘는 군사들을 관리해줄 관료들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든 혼자 해온 주명이 자리를 비우자 그를 대리해서 마치 좀비처럼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만 해야하는 건 정여수였으니 너무도 힘겨웠고 심지어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대체 김 만호는 이 일을 어찌 홀로 해온 것인가.”
상태창의 기능을 이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정여수는 그저 자신의 은인이기도 한 주명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가 있었을 때는 저렇게 서류가 쌓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조건(영지민 1,000명 이상)을 달성하여 ‘영지 상태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영지 상태창’ 활성화 보상으로 기본 발전 능력치(상업, 농업, 공업, 문화)외에 플레이어가 원하는 특수 능력치(☆)가 해금됩니다.]
[영지 : 녹둔도]
[등급 : 개척지 Lv1(1/10)]
[인구 : 1,251]
(행복 100/100, 충성 100/100, 치안 100/100)
[군사 : 해병대 820, 총병대 200]
(인구에서 80명 추가징집 가능)
[발전 : 상업 3, 농업 2, 공업, 9, 문화 14, 과학(☆) 30]
[자금 : 은 600냥(명나라 화폐)]
[자원 : 쌀 1,500석, 그 외(+)]
[행복도, 충성도, 치안도가 모두 최상이라 인구 상승이 가속됩니다.]
이렇게 모든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지 상태창’이 있어 별다른 행정실무가 필요 없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물론 자원 항목은 저게 다 아닌게 주명의 인벤토리 안에 쌓여있는 무수한 화약과 설탕들은 표시해 주지 못했으니.
어쨌듯 인벤토리 내의 수량도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한 건 매한가지였으니 상관없었다.
"으으으...이 나이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쌓여가는 서류의 늪과 짙어지는 다크서클 속에 겨우 숨만쉬며 붙을 놀리던 정여수는 어서 주명이 돌아와 주길 바랐다.
"이것좀 드시고 하세요."
깔끔한 한복을 잘 차려입은 미녀가 정여수에게 과일 접시를 들고 찾아왔다.
"사부께서는 지금 시간에는 옥현이 녀석 수련을 봐 주는 시간 아니오?"
"오늘은 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다고 하길래 미뤄두었습니다. 홀로 관청에서 고생하실 어르신을 생각해서 이렇게 온 거에요."
칼같은 각도로 반듯하게 잘라진 사과를 정여수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이는 바로 나미에였다.
그녀가 옥현의 무술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손자의 사부를 존중하려는 의미에서 본인이 연장자임에도 말도 최대한 공손하게 건네고 있었다.
더군다나 주명이 없는 요 몇주 내내 행정에 갈려나가는 자신의 노고에 아무도 제 일이 아니라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거의 매일 찾아와 간식이라도 챙겨준 유일한 이가 아니던가.
나미에가 그러는 이유는 정여수가 그녀의 갑옷과 무기를 얼마나 정성들여 손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탁월한 검사였던 그녀는 다른 장인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차별화된 대단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었고 고마움에 이리 나섰던 것.
아삭
"고맙소, 조금은 살 것 같군. 후우."
"주명, 아니 김 만호가 일거리를 너무 많이 넘기고 간 것 아닌가요?"
"일을 넘기고 간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어서인지 새로운 일이 계속해서 생겨나니 그걸 나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워서 그렇다네. 휴.."
지금까지는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정여수를 쳐다보며 위로의 말을 던지고 갔던 게 나미에의 일과였다면 오늘은 달랐다.
이곳에 와 정여수를 볼 때마다 점점 쌓여가더니 이젠 관청을 죄다 뒤덮은 서류의 산더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와서였기도 했지만 호기심과 함께 강렬한 충동도 들었다.
왠지 저 서류더미가 목을 내어놓고 베어주기를 바라는 무력한 적들로 느껴졌으니까.
"그렇다면 저도 도울게요."
나미에가 팔을 걷어붙이고 저 멀리 쌓여있던 서류더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정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눈치였다.
손자인 옥현의 말에 따르면 엄청난 검의 고수라고 하던데 그거랑 행정 실무능력은 다르지 않나?
하지만 한 손이라도 아쉬웠던 정여수는 굳이 이 지옥굴에 굴러 떨어지겠다는 또다른 희생자를 막고 싶지 않았다.
"고맙소 나 사부."
그녀의 성은 미즈시나로 따로 있었지만 원래 한국인들 생각에 성은 당연히 한글자다.
그래서 전설적인 한국의 외국인 축구감독도 갑자기 ‘히’라는 뜬금없는 성으로 불리지 않았던가.
언제부턴가 나미에는 정여수에게 나씨 ‘성’의 사부로 불려지고 있었다.
어차피 나미에는 개의치 않았지만.
사과가 아삭거리며 씹히는 소리만 간간히 울려퍼질 뿐, 오로지 서류를 뒤적거리고 먹을 갈거나 빠르게 붓놀림을 하는 소리만이 이 하나뿐인 녹둔도의 관청에 가득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미에가 서류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놀라면서도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정여수는 오늘 다시한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관청을 가득 메웠던 서류가 이제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정도로 오늘 무지막지한 양을 끝마쳤던 것이다.
"생각보다 서류작업이라는 게 재미있네요."
"..."
바로 자신 앞에서 생긋 웃어보이는 왜인 여인이 가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 혼자서였다면 열흘은 넘게 걸려 결국 끝마치지도 못했을 호적의 정리와 물자량 총정리를 그녀는 두시간도 안 되어서 끝마쳤을 정도니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란 말인가.
“검술과 많이 비슷한 거 같아요. 검을 움직이는 대신 생각을 움직여 서류더미를 베어버리는 느낌이랄까. 빠르기와 날카로움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말마따니 자신이 그냥 오래된 검이라면 그녀는 천하제일의 보검 정도 될 것이다.
아무리 문자(한문)를 어렸을 적 그 사부란 자로부터 진작 배웠다고는 해도 어찌 한번도 배우지 않은 행정에서 이리도 뛰어나단 말인가.
그런 실무능력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할 수있는 영역이 아니란 건 자명한 사실인데 이 규격 외의 괴물은 대체.
다년간의 실무경험과 인생의 관록이 있어야 잘 할 수 있는게 행정일 텐데 고작 몇번 요령을 가르쳐준 것만으로 자신의 처리속도를 아득히 넘어서는 저 빠르기는 뭐란 말인가.
자신이 살아온 지난 세월의 무게가 괜시리 머쓱하게 느껴졌는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을 괜히 매만지는 정여수였다.
그리고 그 시각, 군부의 최선임이라고 할 수 있는 야마모토는 매우 곤란한 손님의 방문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네놈들이 그 얼자새끼의 부하들이냐?”
“근본없는 새끼 부하들 답게 짐승같은 왜놈들로 이뤄진 부대라니 크큭. 이거 아주 잡놈의 새끼들끼리 유유상종이네?!”
아무리 그가 조선어에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아직은 유창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새파랗게 어린 놈이 뜻모를 말로 지껄이는 것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주군과 자신들을 모욕한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장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놈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계속 그를 옥죄고 있었다.
“김주명인가 하는 놈의 부하라고? 내 형이라고 말하는 그놈?! 크하하 난 안동김씨 가문의 적자인제 네놈 주인같은 싸구려 얼자가 무슨 내 형이야.”
주인의 동생이 눈앞에 있었으니 야마모토는 설령 놈이 칼을 빼들었어도 놈에게 해를 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저 어린 망나니 놈의 뒤에 안색을 찌푸리며 서 있는 귀해 보이는 여인들의 기품있는 모습에 저절로 위축이 되고,
그녀들을 따라온 많은 수의 하인들을 보니 분명 주인의 본가에서 올라온 이들이리라.
“야, 왜놈! 어서 가서 여기서 가장 미녀를 데려와라!”
놈의 안하무인한 모습에 야마모토 뒤에 서 있던 해병대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아무도 나설 수 없었다.
무려 주인의 동생이니까.
동생놈.
그때 하필 이곳이 부모가 묻힌 언덕으로 가는 길이었던지라 저 멀리서 윤아가 두꺼운 책을 들고 읽으면서 걸어왔다.
“오, 저년이 반반한데 당장 데리고 오거라! 왜놈새끼들아 귓구녕이 막혔냐?”
야마모토는 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지 몰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군, 속하는 어찌해야 합니까!’
[영지 ‘녹둔도’의 치안도가 3 떨어졌습니다.]
말을 달려 급히 녹둔도로 오고 있던 주명은 무슨 재난이라도 났나 어리둥절 했고.
“아니면 어떤 미친 새끼가 분탕질을 치는 건가?”
주명은 습관대로 ‘조부’에 손이 갔다.
자신의 영지를 어지럽히는 놈에겐 폭력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