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68화 - 함선(艦船)(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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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척의 해적선이 소탕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않았다.
주명의 배를 습격한 적의 대장선의 경우 아무리 '그리'라는 제한적 의미의 부사가 쓰였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라는 수식어를 쓰기 민망할 정도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나미에에게 막말을 한 해적놈에게 주명이 싸대귀를 날려 흩날리는 강냉이들을 배경으로 한방에 기절시키자 다들 할 말을 잊은 채로 무기를 떨어뜨렸던 것.
'조부'를 들기는 했지만 점점 피를 보는 것을 즐겨하는 자신의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기질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가지고 있던 주명이 가까스로 스스로의 살기를 누른 결과였다.
다른 해적들도 한두군데 베이거다 두들겨 맞거나 했을 뿐 죽은 이는 단 한명도 없었고 이는 3척의 해적선에 나누어 타고있던 모든 해적들이 다 그러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해병대원들의 압도적인 실력과 더불어 판금갑이라는 방어력 갑의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제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산채로 제압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주명 일행의 실력이 해적들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놈들을 살려준 것은 결코 자비를 베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 쓸모가 있어서 임시로 살려둔 것이었는데 즉석 재판을 통해 민심을 얻어야 하니까.
"저놈이 어제 제 아버지 죽였습니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저항해 봤지만...흑흑."
주명에 의해 풀려난 노예들은 그의 예상대로 모조리 아이누 사람들이었다.
해적 놈들은 에조치 서쪽 해안을 돌며 아이누 마을을 습격해 노예를 얻으려고 해적질을 일삼던 놈들로, 풀려난 아이누 사람들에 의해 그 죄목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죽여버려."
"사, 살려주십시오! 목숨...끄악!"
뎅겅
드러난 여러가지 추악한 죄들에 대한 판결은 당연히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혹시나 해서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는데 너무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해적들의 끔찍한 죄상에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단 한놈도 예외없이 모조리 목이 잘려버린 해적들.
사형을 집행한 해병대원들은 소정의 경험치라도 얻었겠지만 큰 죄악을 저지른 것에 비해 실력은 시원찮았기 때문에 경험치 측면에서는 큰 소득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명과 해병대를 향해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아이누 사람들을 보며 그 소득이 뭔지를 깨닫고, 또 어떻게 확대해야 하는지를 주명은 결심했다.
"샤를, 에조치를 시계방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음 보통은 꽤나 걸리지만 내 실력이라면 한 3~4일 정도면 충분하다고 선장."
"좋다. 저 사람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데려다 주고 이번 기회에 에조치 해안을 돌며 해적놈들을 쓸어버리면서 올라간다."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하자 아이누 사람들은 기뻐서 서로를 부여잡고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보며 주명 역시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의 생각은 아이누인들을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데서 더 나아가 에조치라 불리는 섬을 둘러보며 일종의 측량을 하는 데에도 초점이 가 있었다.
녹둔도 외에도 자신의 세력권 내에 포함시킬 권역 중의 하나로 이곳을 점찍었기 때문에 해상교통망의 정비를 위해서라도 사전 측량은 필수였다.
측량이라고 하니 무슨 거창한 작업 같지만 기본적으로 배가 다닐 수 있는 최적의 항로를 개척한다는 의미이고,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더욱 복잡한 작업들은 항해의 먼치킨인 샤를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니 안심이었다.
"주명 저 사람들 옷이..."
"그래 나도 봤어. 물고기 비늘을 엮어서 만든 거야 저거."
"..."
비록 주명도 옷이라고 표현해 주기는 했지만 지금 나미에가 느끼는 감정은 저 물고기 비늘로 만든 넝마조각에 대한 상식적이고 진실된 반응이 담겨 있었다.
어찌 저런 것을 옷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기본적으로 폴리네시안 인종이라 그런지 일본인보다 아이누 사람들의 체구가 큰 편이라고 들었는데 현실에선 아니었다.
유전자 외적인 요소, 그러니까 삶의 질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크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으니까.
아까 죄다 목을 쳐버린 왜인들보다도 작고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있는 아이누 사람들을 보며 그걸 느꼈다.
"꼬마야, 너 몇살이니?"
"어...저 결혼까지 했습니다."
"..."
아이누 사람들의 이런 꾀죄죄하고 처참한 몰골은 분명 해적들은 물론이고 근본적으로 에조치의 아이누를 인디언 때려잡듯 몰아내고 있는 왜인들에 횡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들이 선량한 지배자였다면 자신이 파고들어갈 여지가 없었을 텐데 이런 식이라면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을 충분히 각인시킬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은 해 보았지만 남의 불행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선인들과는 달리 자신은 그들에게 타지에서 온 남이 맞고, 또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땅을 노리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다만 일본인들과의 차이점이라면 땅만을 노리고 아이누를 내몰고 있는 그들과는 달리 주명은 아이누 사람들을 노리는 것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는 것.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타인에 의한 지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누 사람들을 왜인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이상의 뒷면에 가려진 자신의 욕망에 대해 돌아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주명이었다.
이제는 일곱척이 되어버린 주명의 선단은 에조치 서부 해안을 따라가며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경각에 달했던 한 아이누 사람들의 마을의 운명.
철제 묵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왜인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자경단이 힘없이 무너지고 사냥당했다.
그 결과 남겨진 이들은 끔찍한 일들을 당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
"꺄아아악!"
"요시히로님께 노예들을 바쳐야 한다. 어서 서둘러!"
에조치 동부에 위치한 한 아이누 마을이 카키자키(蠣崎) 가문의 병졸들이 자행한 약탈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카키자키(蠣崎) 가문.
본래 에조치 남부에 일본인들이 세웠던 개척마을 성격인 12개 관(舘) 중 하나인 하나자와관(花沢舘)의 관주에 불과했던 카키자키씨.
일개 촌주에 불과했던 그들이 일약 에조치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건 아이누를 피로 누름으로써 가능했다.
가문의 시조인 카키자키 노부히로(蠣崎修宏)가 1457년에 일본인들의 수탈에 견디다 못해 아이누인들이 들고 일어난 고샤마인 봉기에서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카키자키(蠣崎)씨는 에조치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스에히로의 대에 와서는 아이누의 수장이었던 타리코나를 살해함으로써 에조치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굳혀 조정으로부터 인정만 못 받았다뿐이지 실질적으로 다이묘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
그들의 영광은 모두 아이누의 피와 연관되어 있으니 에조치의 아이누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가 바로 저 카키자키(蠣崎)씨였다.
그걸 카키자키(蠣崎) 가문도 알았지만 굳이 피정복민이자 치워버려야할 대상인 아이누 사람들의 민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심심하면 일어나는 아이누의 반란세력도 약화시킬 겸 종종 아이누 촌락을 약탈하여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갔던 것이다.
"흐흐흐, 족히 70은 되겠군. 요시히로님께 바치면 칭찬해 주시겠지."
"계집들도 꽤나 챙겼으니 정말 그러하실 겁니다 크크크."
"이번 달에만 벌써 다섯번이군. 이런 식이라면 우리 영지가 부흥하는 것도 머지 않았어."
그런 기조는 당대 카키자키 가문의 당주이자 오오다테(大館)를 거점으로 하는 에조치 영지의 다이묘인 카키자키 요시히로(蠣崎慶廣)대에 와서는 더욱 심화되어 적극적으로 아이누 사람들을 약탈하고 사람을 끌고가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 이유는 요시히로의 이후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본 역사에서는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고자 상경하여 벼슬을 받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정의 인정을 바라고 있었다.
진짜 다이묘가 되기 위해서는 조정에 상경하여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야 했고, 아이누인과 일본 본토 사이의 중개무역에만 의존하고 있던 영지의 경제력으로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으니 약탈은 필연이었다.
아이누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모피와 연어 두가지지만, 모피는 문명 수준이 석기시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아이누 사람들의 수준으로는 충분한 생산이 어려웠고 연어는 고작 물고기에 불과해 상품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아이누 사람들에게 철기를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아이누와 일본인의 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철기(鐵器)로 동물을 푹찍하여 모피를 열심히 생산하기는 커녕 일본은들을 찢어죽이려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
춥다는 이유로 에조치에서는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았으니 소량의 모피와 돈도 안되는 연어를 아이누로부터 사들여 본토에 파는 것이 카키자키 씨의 유일한 수입원이었으니 뇌물이라고 불릴 정도의 거창한 금전을 만들 수 있을리가 없었다.
물론 아이누로부터 모피와 연어를 사들이는 거래가 공정할 것이란 착각을 하는 사람도 없겠지?
눈꼽만한 철제 조각을 농기구라고 우기며 산더미같은 연어들과 바꾸는 날강도같은 짓거리를 통해 폭리를 취하고 아이누의 무장 수준도 통제하는 이들이 바로 카키자키 가문이었으니 말이다.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저들이 타고온 배로 끌고가는 왜인들의 병졸을 보며 아이누 사람들의 표정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아빠 어디갔어? 아빠는?"
특히 가족들을 지키려다 왜놈들의 칼에 목숨을 잃은 정감 넘쳤던 이웃의 어린 아이가 울며 아비를 찾는 모습을 보며 다들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엄마 안 아픈거지? 아까 이상한 아저씨가 엄마 괴롭혔을 때 다친 거 아니지?"
아이의 천진난만한 걱정이 아이누 여인들이 당해야 했던 끔찍한 경험을 상기시키자 여기저기서 비탄에 가득찬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끄럽다!"
퍽
"꺄아악!"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던 병졸들은 노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때려 눕히며 그 통곡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상처와 슬픔은 그런 걸러 잠재워질 리 없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흘러나오려는 울음소리를 끅끅 소리를 내며 억지로 참아가며 아이누 사람들은 부디 처 짐승같은 왜놈들이 천벌을 받기를 신께 기원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인 카무이께서는 오늘 그들의 가족이 죽기 전에도, 그리고 몇 백년전 왜인들이 침공했을 때에도 자신들의 간절한 기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 기원은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그지없었다.
"저놈들이 믿는 신이 그 카무이인가 뭔가라지?"
"하하하, 그딴 게 진짜 있다면 저놈들이 이렇게 짐승처럼 살겠어? 제 백성들을 우리한테 당하고 끌려가게 놔두었겠냐고!"
있지도 않은 카무이란 신을 믿는 아이누인들의 멍청함에 대한 조롱도 있었지만, 병졸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을 그저 바라만 보고있을 신이란 놈팡이에 대한 분노도 가득 담겨있는 말이었다.
병졸의 생각에 신이 있다면 자신이 이렇게 남의 피나 빨아먹는 살인자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 아니면 나중에라도 나타나 자신을 단죄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그딴 건 없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오오다테로 돌아가기만 하면 흐흐흐. 응?! 저기 왠 배들이? 뭐가 저렇게 많아!"
"어? 그보다 저기 누군가 달려오는 것 같은데?! 대체 저게 뭐야!!!"
저 멀리 바닷가에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수십척의 배들이 수상쩍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물 위를 마치 지면을 달리듯 걸으며 뛰어오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보자 병졸들은 기겁했다.
"저, 전투준비! 모두 무기를...어어어어어!!"
나름 대응해 보려고 진형을 갖추려 모여들었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다가온 사내가 행한 거대한 검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그 검격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거인이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는 것 같은 폭발적인 강맹함을 지니고 있었으니.
콰앙
단 한번의 검격에 모두 육편이 되어 찢겨져 피와 뼛조각과 함께 사방에 날리는 처참한 꼴이 되었으니 그들이 대응한다고 모인 건 한번에 죽여달라고 스스로 몹몰이를 자청했던 것밖에 되지 않았다.
고기조각이 되어버린 동료의 파편뿐 아니라 땅에 아로새겨진 거대한 충격의 상흔을 쳐다본 왜인 병졸들은 오줌을 지리며 공포에 사로잡혔고 밀려오는 절망감에 주저않는 이도 속출했다.
그리고 바다를 뛰어온다는 신비한 힘과, 수십의 적을 쓸어버린 압도적인 힘을 행한 한 사내를 보며 아이누 사람들은 절망감에서 벗어나 일어서서 그를 향해 환호했다.
신비하고 압도적인 힘을 행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분뿐이니,
"카무이님이다!"
"카무이께서 우타리(아이누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를 구하러 오셨다!"
카무이라는 말을 듣고도 주명은 낯설어 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왜인들의 패악질이 극에 달했는지 이미 자신을 아이누 사람들이 카무이라고 칭송하는 이런 광경을, 그 광경이 있기 전에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카무이
아이누 사람들의 신이자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
사람들이 사는 지상과 구별되는 천상의 타자적 존재인 이 카무이라는 단어는 이방인인 자신이 아이누 사람들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내내 고민하던 주명에게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기댈 게 없어 오직 신을 찾을 정도로 절망적인 아이누 사람들의 신이 대신 되어주자.
그 대신 자신은 신민으로 아이누 사람들을 얻는 것이다.
유니크 아이템 때문이라도, 그리고 자신의 목적 때문이라도 아이누 사람들에게 자신이 쓰는 한국어가 퍼지고 조선의 문화가 퍼지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자신이 누구였는지는 깨달을 수 있도록 언어와 문화를 최대한 보존시켜줄 작정이었다.
아무리 창칼로부터 보호해주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 자신을 잃도록 만들면 그게 어디 사람이 할짓인가.
사람이 할 짓도 아닌데 저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을 자신이 할 짓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도록 만드는 일은.
그건 어차피 먼 훗날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라 여기며 주명은 군데군데 주저앉아 있는 왜인 병졸들의 목숨을 하나하나 끝장내 버렸다.
적어도 평화로운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잡아가는 이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자리에 스스로 와 있는 저놈들 중에 갱생의 여지가 있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거의 30척은 되어 보이는 배가 마을에 정박하였고 붉은 갑옷을 갖춰입은 해병대원들과함께 노예로 끌려갈뻔 했던 아이누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이 생긴 수백명의 사람들이 어설픈 조선말을 섞어 가며 같이 따라내렸다.
아이누 사람들을 향해 다가온 수백의 무리들을 향해 아비를 찾고 어미를 걱정하던 꼬마아이가 다가가 질문했다.
"아저씨들은 누구에요?"
그러자 꼬마처럼 아이누 사람이었던 그 무리중 한명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카무이님을 따라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온 거란다."
"카무이님이요?"
꼬마는 고개를 돌려 해병대원들에게 뭔가 미안한 듯이 멋쩍게 웃고있는 당당한 체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이처럼 시선을 그 사내에게로 돌린 이의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존경심과 충성심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카무이님께서 이 땅을 돌며 모든 야마토인(일본인)들을 쓸어버리셨단다. 이제 남은 건 저 카키자키 놈들 뿐이지. 하지만 절대로 카무이님께 상대가 안될거야."
"왠지 알 것 같아요! 카무이님은 신인데 어떻게 인간이 신을 이기겠어요!"
"똑똑하구나."
슬픈 일을 당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특유의 천진하고 밝은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카무이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눈빛은 카키자키 가문이 웅크리고 있는 쓰루가 해협 북단의 일본인 거점인 오오다테를 향하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왜놈들을 이땅에서 몰아내 주실 거란다."
그리고 그 눈빛은 강렬한 적의와 함께 반드시 무너질 것이 뻔한 적을 바라보는 조롱까지 섞여 있었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노예로 잡혀갈 뻔 했던 마을의 아이누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을 하나씩 쳐다보며 그간 겪어야 했을 울분과 슬픔에 애도를 표한 뒤에 그는 모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카무이께서는 우리 동포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다!"
"우와아아아! 카무이님 만세!"
에조치 곳곳에서 시계방향으로 순차적으로 이미 일어났던 일들이었고, 이제는 점점 규모가 커져버린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는 게 지금의 기쁨에 찬 함성 소리였다.
그리고 역시나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던 왜인들의 절망과 고통에 찬 비명소리 역시 더욱 큰 형태로 발전하여 이젠 에조치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웅크린 다이묘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카키자키 가문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