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67화 - 함선(艦船)(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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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척의 배는 동해의 푸른 바닷물을 가르며 힘차게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본래 하얀 갈매기가 푸른 하늘 위에 뜬 구름에 흰색을 더하며 날아 그 순항의 모습을 빛내주어야 하건만 하늘은 완연한 봄이라는 것만 알려주듯 구름한점없이 푸르기만 했다.
갈매기가 보이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말 이게 가능해?”
“이 샤를만 믿으라고. 최단 경로로 에조치란 곳과 혼슈 사이의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이란 곳에 가면 돼. 거기서는 연안을 따라 북상하면 되고.”
쓰가루 해협이란 지금 일본의 북쪽에 있는 큰 섬인 훗카이도와 본토인 혼슈 사이에 있는 좁은 통로를 말한다.
문제는 그곳과 녹둔도 사이에는 수천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동해바다가 있다는 것.
폭풍은 둘째치고 그 거대함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제대로 골로 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다 부산에서 대마도에 이르는 항로를 이용했다.
물론 발해 시절에는 신라와의 대립관계때문에 그럴 수 없어 동해를 가로지르는 항로가 개발되었던 적이 있다고 하지만 이미 실전된지 오래였다.
이렇듯 연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항해와 기항을 반복하는 연안항해나 하는 수준이었던 이 동방의 기존 항해술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 바로 지금 샤를이 보여주는 원양항해였다.
기본적으로 망망대해에서 위치를 잡기란 너무도 어렵다.
가도가도 바닷물 뿐인데 여기가 어디인지 뭘로 알겠는가?
연안항해였다면 옆에 보이는 육지의 모습을 보고 대충 가늠할 수 있겠지만 원양항해는 그럴 수도 없었으니까.
연안에 붙을 필요가 없어 일직선의 움직임이 가능하기에 최단거리로 움직일 수 있지만 유령선이 되는 최단 표류코스이자 태풍에 들이박는 최단 난파코스가 되기도 하는 모 아니면 도.
정말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게 뭔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원양항해였다.
지금 동방의 항해기술과 선박기술로는 하이리스크 부분을 감당할 수 없기에 사실상 불가능!
그렇게 불가능 하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샤를은 합니다!”
원양항해가 가능하게 하려고 범선을 구하려 가는 길인데, 가는 길에 원양항해가 가능하다니 뭔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한 것 같아 허탈하기도 했다.
“먼 바다가 위험하다고? 이 샤를에게 육분의를 주면 다 해결되는 문제야 하하!”
본래 티코 브라헤라는 걸출한 천문학자가 발명한 것으로, 녹둔도의 대한학교 교수로 와있는 갈릴레이가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다 개량한 저 육분의.
"지구를 남북극 지름 12,756.25km, 극지방 지름 12,713.5km, 둘레 40,075km인 구체로 보고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까?"
"오오! 그 수치로 만들어보니 너무도 정확합니다!"
이 시대 항해의 필수 아이템이었지만 주명의 미래 지식과 갈릴레이의 천재성이 만나 더욱 미친듯한 정확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애초에 지구의 정확한 크기를 알고있는 이는 이 시점에서부터 앞으로도 수백년동안 오로지 주명뿐일 것이니 저것보다 더 정확한 육분의는 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이름 : 갈릴레이의 육분의]
[레벨 : 50(경험치: 0/25)]
[효과 : 측량 효과 + 150%]
일반-마법-희귀-유니크라는 4개의 아이템 등급 체계하에서 고작 일반 아이템에 불과하지만 아이템이라는 것에서부터 이미 다른 오브젝트와의 넘사벽인 차이를 보이는 저 물건은 애초에 다른 육분의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이번 항해에 거는 기대가 컸던 주명의 '오브젝트 레벨업 - 아이템화'를 이용한 콘솔질로 인해 일반 아이템이 되어버린 저 육분의는 순조로운 항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름 수학적인 정밀계산이 요구되는 물건이었지만 지능 수치가 말해주듯 뛰어난 두뇌를 가진 샤를은 금세 이해하고 항해에 써먹었다.
물론 저 육분의는 그저 거들 뿐이지 실제 항해 자체를 이정도로 순조롭게 만든 데에는 샤를의 지분이 절대적이었다.
설령 육분의를 쥐어주지 않았더라도 놈은 항해를 순조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명은 항해에 있어서는 육분의보다도 저 샤를 녀석이 더 필수적이라고 봤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저 난봉꾼 녀석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항해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요원이 맞다고 생각하는 주명.
그놈의 껄떡대는 바람둥이 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정말 믿음직스럽고 유능한 동료일텐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미에 낭자?”
하지만 프랑스놈이 그 종특을 버릴 리가 없었다.
낭자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조선화된 프랑스인인 샤를.
항해 능력에서는 정말 존경심이 들 정도지만 저런 모습들 때문에 마냥 칭찬해 주기엔 짜증이 나는 녀석이었다.
물론 샤를에게는 허망하게도 나미에는 녀석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녀석이 말을 거는 방향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까부터 오로지 바다와 주명만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는 그녀였다.
“주명, 혹시 에조치에 오래 머물 거야?”
“응, 적어도 한달은 머물러야지.”
사실 아이누들을 포섭하게 된다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가져온 네척 중 가장 빠른 녀석으로 샤를을 태워보내 쾌속 연락선을 녹둔도에 띄울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된다면 그런 식으로라도 명령을 전달하며 녹둔도를 다스려야 하니까 말이다.
방치된 지 70년이 지났다는 범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수리하는데도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하니 단기간에 끝날 여정은 아니었다.
뭔가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는지 머뭇거리던 나미에의 떼어진 입에서 나온 말은 일본 내에서 가볼 곳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범선을 구하고 나면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어? 일본에서 찾아볼 게 있어서 말이야.”
뭘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몇달씩이나 걸릴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릴 탐색 같아 보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무리한 부탁이었다면 항상 스스로 서고자 노력하는 긍지높은 무사인 저 나미에가 자신에게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또 시간이 설령 오래 걸리더라도 그녀를 위해서는 시간을 내어줄 용의가 있기에 주명은 금방 수락했다.
"물론, 언제든지."
"..."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금새 이뤄진 수락에 놀란 듯한 표정의 나미에.
일본 내의 어디를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고민조차 하지않고 수락하는 주명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움에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마음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는 일본이 아니라 설령 무척이나 멀고도 험한 다른 어딘가에 가자고 해도 흔쾌히 같이 가줄 것 같아서.
"뭘 찾는지, 왜 찾는지 묻지 않아도 돼?"
"네가 필요하고 생각해서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이유를 알든 모르든 어차피 난 따라갈 건데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거 같진 않아."
"...!"
어떤 이유라고 하더라도 따라갈 것이기에 굳이 이유따위는 알 필요 없다는 주명의 말에 나미에는 잠시 눈동자가 떨리더니 말없이 그의 눈을 피했다.
"...고마워."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며 몸을 돌린 그녀는 저 너머로 보이는 동쪽의 바다를 응시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 그에게 들키면 쑥쓰러울 것 같은 어떤 감정을 숨기는 것 같아 보였다.
또 눈가가 조금 붉어진 게 굳이 여기서 말을 더 하면 괜히 등짝을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한 주명은 그녀를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마 그녀의 시선은 저 수평선 너머에까지 닿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쪽에 위치한 일본, 그 섬나라에서 나미에가 가려고 마음먹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왠지 그곳은 나미에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
한 사내의 위패를 모신 조그만 사당에 존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복식을 입은 사내가 굻어앉아 누군가를 추모하고 있었다.
"전하, 오늘도 이곳에 와 계시는 것입니까?"
"어허, 이제는 더이상 정이대장군도 아니고 그저 일개 다이묘일 뿐인 내게 그런 존칭따위는 과분하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지만 전하, 그건 저 무도한 히데요시가 억지로.."
"그만!"
한때 일본의 실질적인 지존이었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 줄여서 쇼군(大將)이라고 불렸던 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지닌 위엄은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형인 요시테루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당당한 검의 고수이기도 했으니 그 당당한 체구와 무인의 기백에서 나오는 기세를 그저 문관일 뿐인 나이든 가신이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가, 각하...흑."
그래서 주인의 명에 따라 쇼군에 대한 존호인 전하가 아니라 일개 다이묘에 대한 호칭인 각하라고 눈물을 머금고 격하시켜야 했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무로마치 막부가 사라진 지 몇년이 지났고, 실권이 사라진지는 몇백년도 넘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순리여야 하겠지만 평생을 쇼군가에 충성해 왔던 가신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전하에서 각하로 떨어진 주인의 존귀함이 마치 모든 영광이 사라져 버린 쇼군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이 막부에 쇼군은 나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형님 한분 뿐이셨다. 형님 앞에서 그 전하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지."
위패에 써 있는 그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라는 이름을 쳐다보며 호칭을 정정할 필요성을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산과 같았던 형님에 대한 그리움과, 막부 최후의 불꽃이었던 13대 쇼군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히데요시가 주군을 만나뵙고 싶다며 오사카로 오라고 합니다. 허나 어찌 관백 따위가 감히 무가의 정점인 쇼군을 오라가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허! 이젠 쇼군이 아니라고 내 말하지 않았는가!"
"...예 각하."
"그리고 이름만 관백일 뿐이지 실제로 이 일본의 쇼군이 히데요시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나. 천하는 이미 그의 것인 것을."
아마 또 지난번처럼 자신을 양자로 삼아달라 부탁하려는 것이겠지.
자신의 양자가 되면 실질적인 쇼군이 아니라 위대한 겐지(源氏)의 맥을 이었다는 명분으로 진짜 쇼군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막부를 자신의 대에서 폐하는 것에도 동의한 요시아키지만 그것만큼은 절대로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위대한 선조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내려준 겐지(源氏)라는 본성과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내려준 아시카가(足利)라는 성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요시아키에게 있어 비천한 신분의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가문의 세가 기울어 비록 막부는 놈에게 멸망당했지만 혈통의 위대함에서만큼은 절대로 굽히거나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요청을 거절해 왔고 앞으로도 수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천하를 쥔 비천한 놈이 쓰고싶어하는 쇼군의 관모따위로 전락한 아시카가 가문의 비루함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도 쓰렸다.
"형님, 이 아우는 끝내 막부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쓰라린 마음보다도 생을 불태워가면서까지 막부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형 요시테루를 보기가 너무도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위패 앞에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니 스스로 한심해졌다.
"형님께서 좋아하시던 튀김우동입니다.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이 하찮은 음식마저도 형님께선 전쟁에 쓰일 기름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라며 참으며 드시지 않으셨지요."
자신의 형은 그런 자였다.
자신의 즐거움마저도 막부를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 진정한 무사.
"부디, 부디 그곳에서는 스스로의 즐거움을 내려놓지 말고 마음 가는대로, 원하는 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부디 저승에서는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기를 바라며 요시아키는 형의 위패에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내려다보니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신분을 증명하는 옥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옥패에 쓰여진 아시카가(足利)라는 글귀를 보자, 아니 그 옥패의 형상이 눈에 들어오자 요시아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리고 눈 주위가 벌개졌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것은 막부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형의 유일한 혈육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에이로쿠의 변이 일어나 형인 요시테루가 죽음을 당한 그날, 형의 관저는 증오스러운 미요시 놈들에게 불타올랐고 그 관저에 있던 어린 생명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미요시 가문 출신이었지만 형을 존경하던 노구치 후유나가가 그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고는 들었지만 실패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요시테루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생의 증거였던 그 아이, 요시아키에게는 조카였던 그 아이가 불타는 관저에서 얼마나 고통과 두려움속에 죽었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무사는 누군가의 칼로부터 소중한 이를 지키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다.
헌데 어린 아이의 생명조차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아시카가 가문이 쇠락했으니 그런 주제에 어찌 무가의 정점인 쇼군의 직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실 그래서 히데요시가 무로마치 막부를 폐한다고 했을 때 크게 반발하지 않은 것이다.
굳이 히데요시가 막부의 종언을 외치지 않았어도 그날 그 아이가 불타 죽었을 때 막부는 끝난 것이다.
'나의 조카여, 부디 저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이라는 곳에 도달하여 못다한 삶을 살아가거라.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거라.'
살아있었다면 쇼군가의 여식답게 히메(媛)라는 존칭으로 불렸을 조카를 위해 다시 고개를 숙인 요시아키.
허나 막부가 사라진 지금 자신이 전하라고 불릴 일이 이제 없듯이, 생명이 사라진 그녀 역시 히메라고 불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쓰라린 마음을 다잡고 곧 일어서야 했다.
원숭이놈은 그다지 인내심이 많지 않으니 말이다.
***
"마시썽!"
나미에는 다람쥐처럼 양 볼에 빵빵하게 면발을 집어넣은 채로 미친듯이 우동을 흡입하고 있었다.
면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입꼬리를 굳이 보지 않아도 저렇게 눈으로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녀가 미각이 주는 극락에서 노닐고 있음을 주명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샤를놈을 무시하면서 요리는 또 잘 먹네'
샤를이 나미에에게 작업을 거는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조부'를 꺼내고 싶었던 것이 그녀는 자신의 여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샤를놈이 기본적인 선을 지킬 줄 아는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또 저런 작업질 자체가 놈에게는 마치 숨쉬는 것 같은 인격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해서 그러려니 했다.
물론 나미에의 차가운 반응이 결정적으로 주명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긴 했지.
어쨌든 샤를의 요리실력은 어디 가는 게 아닌지 비좁은 선상에서 제한된 재료만을 가지고 조리를 하는데도 무려 저 면발이 살아있고 국물이 죽여주는 환상적인 튀김우동을 만들어 주었다.
후루룩
'맛있긴 하네.'
놈의 요리실력은 정말이지 벌레가 꼬인 쉽비스킷마저도 맛있는 오성급 요리로 만들어줄 수준인 것 같았다.
주변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우동의 맛을 즐기고 있는 다른 해병대원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배를 탔을 때만해도 맛대가리 없는 쓰레기같은 음식으로 고통에 겨워하며 목을 넘겼는데 말이지.
한창 식도락을 즐기고 있는 일행을 일깨운건 전방에 나타난 육지의 실루엣을 대원 중 하나가 발견했기 때문이었고,
"저기 하코다테(箱館)가 보입니다!"
또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붉은 점들을 주명이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해적새끼들이군. 근데 저놈들 노예상인거 같네."
붉은 점들 사이에 군데군데 섞여 있으나 점점 희미해져가는 흰 점들을 보며 주명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부'에 손을 올려 뽑아들었을 뿐.
"전 대원 전투준비!"
칼을 뽑아든 주군의 모습을 보며, 주명을 따라온 해병대원중 가장 선임이었던 덩치큰 해병대원이 마치 주군의 마음을 읽은 듯 그 덩치만큼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정예중의 정예인 해병대답게 부하들의 전투준비는 신속했다.
노를 젓고있던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기 시작한 것.
더군다나 정여수가 장인들을 갈아넣은 덕분인지 이제는 모든 해병대원이 그 일본풍 판금갑옷을 지급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착용하는 갑옷은 붉은 빛이 인상적인 판금갑이었다.
무기는 장창에서부터 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한가지 동일했던것은 그들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필살의 기세와 강자의 여유.
피아식별 스킬 덕분에 볼수 있는 찬란하게 빛나는 녀석들의 푸른 빛때문이라도 그걸 잘 알고있는 주명은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저놈들 니들이 한번 쓸어버려 볼래?"
저 쪼렙들 썰고 얻은 하찮은 경험치 니들이라도 먹을래?
그런 뜻이었고 실제로 해병대원과 주명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아마 3척쯤으로 보이는 저놈들의 배 위에 단 한명만 올라서더라도 양떼 사이의 호랑이가 되어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주명은 확신했다.
검술로든 템빨로든 도저히 상대가 안 되니까 말이다.
"자신이 없습니다."
덩치큰 선임 해병대원의 말에 주명은 무슨말인지 알겠다는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질 자신이 말입니다."
"짜식들, 그럴 것 같았어."
자신들을 신뢰하는 주인의 미소에 화답하듯 그는 호탕하게 가슴을 치며 역시나 씨익 마주웃었다.
'그나저나 나미에도 활약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지? 해병대 애들 지금 신났는데 그녀가 나선다면 팝콘이나 뜯어야 할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미에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튀김우동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전투준비 함성을 듣긴 했어도 불쌍한 노예들이 타고있는 해적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해듣지 못해 의협심이 끓어오르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아마...
"마시써. 마시써!"
튀김우동이란 이유가 더 클것 같았다.
주명 일행에게 있어 해적놈들 수십을 상대하는 것은 우동 한그릇의 가치보다도 감흥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점점 다가오는 해적선 세척.
스타크래프트의 그 해적선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놈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으하하하! 가진 것 다 내놔라!"
나름 흉악해 보이려 노력하며 기세좋게 등장한 해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놈들이 상대하는 해병대원들은 사이오닉 검과 방어막만 없다 뿐이지 진짜로 현세에 강림한 질럿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저 허접한 해적놈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게 너무 같잖았다.
"어? 무슨 가, 갑옷이 저렇게 온 몸을 다 가리는 거지?"
"모, 몰라. 뭔가 무서운데? 어쩌지?!"
그리고 기세좋게 협박을 늘어놓아 놓고 정작 자신들을 보며 망설이는 꼴을 보고있자니 너무도 웃겼다.
피식
너나할것 없이 배에 타 있는 해병대원 모두가 동시에 짓는 비웃음.
"우, 웃어? 이새끼들이 감히!"
"드루와 병신들아."
까딱거리는 손으로 이죽거리는 해병대원들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느낀 불안감에 이성을 찾으려 했던 해적들의 그 이성이 날아가 버리고 분노가 가득 채워졌다.
"으아아아아! 죽여버릴 거야!"
"그래 어서 들어와 보라고."
눈치빠른 선임 해병대원은 노예선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는 노예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놈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 만약 해적선에 들이닥쳐 싸움을 걸었다면 백병전의 특성상 눈먼 칼에 노예들이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놈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진작 죽여버렸을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밀리는 척 하며 점점 뒤로 물러나는 해병대원들.
"몰아붙여! 다들 죄다 와서 힘을 보태라고!"
멍청한 해적들은 기세를 탔다는 생각에 해적선의 모든 전투원들을 투입한다는 올인 전략을 썼고 그건 애시당초 노예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해병대원들이 원하던 바였다.
다만 한가지 변수가 되었던 건 최대한 놈들을 끌어들이려고 너무도 뒤로 물러난 나머지 멀찍이 앉아 우동을 먹고있던 나미에의 모습이 해적들에게 보이게 되었다는 것.
여기서 해적들에게 더 불행해지는, 그리고 해병들이 시무룩하게 만들 변화가 일어났다.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야할 자신들이 모조리 몰려왔는데도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너무도 태연히 면발만 흡입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해적들이 굴욕감을 느낀 것.
그 굴욕감에 하필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어 버렸다.
"저 미친년은 우리가 왔는데 감히 면을 빨고있네? 썅! 저 건방진 년은 오늘밤 내꺼다!"
"...!"
눈을 크게 뜨며 우동그릇을 내려놓고는 번개같은 속도로 검에 손을 가져가는 나미에도 있었지만 그건 해적들에게있어 불행이 아니었다.
폭풍처럼 휘둘러지는 '조부'와 그걸 휘두르는 존재가 불행이자 악몽이었지.
해적들이 먼저 걸어온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그건 놈들의 악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