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레종 데트르(4)
네.
네.
네.
.... 네.
할머니가 무엇을 물어보아도 진호연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네.'뿐이었다.
숨 쉬는 건 괜찮느냐.
어디 데이지는 않았느냐.
돼지고기는 좋아하느냐.
많이 힘들었느냐.
얼마나 많이 힘들었느냐.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랬느냐.
그 '얼마나'로 시작한 질문에도 '네'라고 답했다.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또, 자신을 구해줬던 사람에게 뭐가 힘들었고, 그것 때문에 죽으려고 했는데, 진짜로 죽을 것 같을 때쯤 너무 후회가 돼서, 미치도록 살고 싶었는데.
그래서 감사하다고.
그리 정돈되게끔 말씀드리기엔 아직 진호연은 어렸다.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그래서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여승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 바보 같은 늠, 대답도 똑바루 못하고 있어?
라고 웃으며 꾸짖었다.
그렇게나마 꾸짖어주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살 2인분이 나왔다.
치이이익-!
기름을 잔뜩 먹은 무쇠판에 목살이 드러눕는다.
그 소리만 들어도
먹기 전부터 진호연은 알 것 같았다.
입에 담아보지 않았으나, 이 고기는 맛있다고.
- 이 집은 내가 제일 자주 오는 고깃집이다.
"아, 네."
- 그래봤자 늙은이 입맛이라고 생각하지?
"그렇진 않아요."
- 그래? 그럼 한 입 먹어봐.
안쪽까지 바싹 익어있는 목살.
후후- 불어 식히고는 입 안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겉면을 비집고 이를 밀어넣자 육즙이 세어나오진 않는다.
조금 퍽퍽하다. 오버쿡된 것 같다.
'역시 우리 집 고기가 더 맛있네.'
우리 집?
무슨 얘기인가.
이상한 생각이 멋대로 머리 속에서 재생된다.
매연을 너무 많이 마신 영향인 것 같다.
- 어때?
"맛있어요."
- 그렇지?
질긴 고기를 입에 한 점씩 쑤셔넣는다.
놀랄 만큼 맛있게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고기맛.
다만 육체가 단백질을 원하는 듯했다.
손이 기계처럼 움직여 입 속으로 고기를 차곡차곡 쌓는 느낌.
다 익은 고기들을, 아니 지나치게 익힌 고기들을 불판의 가장자리로 빼며 그녀는 한 마디 덧붙인다.
- 이런 것도 못 먹는 거다, 죽으면.
"네."
- 그니까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어라.
"네."
- 악착 같이 살어.
"네."
- 내가 환갑인데, 살면 살아지더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아. 너가 너를 포기하면 그걸로 영영 끝이야.
".... 네."
내색은 안 했지만 그 말은 진호연 피부에 와닿았다.
살면 살아지더라는 말씀.
그 할머님도 틀림 없이 수많은 역경을 지나왔을 것이라, 진호연은 생각했다.
정치적인 혹은 역사적인 이유로 20세기에 대한민국은 여러 차례 앓지 않았던가.
연령을 고려하면 그 세월을 통째로 지나온 할머님이다. 언어의 무게가 다르다.
감사합니다.
차마 그 간단한 다섯 글자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집주인 할머니는 무겁고도 길지 않은 훈계를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려 한다.
고기는 한 점도 손에 대지 않으면서. 본인이 좋아하는 점포의 돼지 목살인데도.
'지금 감사하다고 하지 않으면, 영영 못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생각이 진호연의 머리 속을 스쳤다. 확정된 미래인 것처럼.
마주치기야 할 것이다.
집주인이니까.
그럼에도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결국 옥탑방을 떠나고, 아무런 말도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끝날 인연처럼 느껴진다.
확실치 않은, 허나 확실해보이는 미래가 눈 앞에 그려진다.
그러나.
'머리가 멍해서 아직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연탄 가스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
그런 한심한 핑계를 스스로 늘어놓고 말았다.
무슨 낯짝으로 저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보며 감사 인사를 전해야할지 몰랐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감사하다는, 그 간단한 말조차 쉽게 뱉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젊었던 진호연의 감정은 지금보다 섬세하고 연약했다.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다.
어차피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는다고, 뭐가 어떻게 변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합리화하며.
"삼촌."
그런데 그때.
언제부터인가 옆자리에 앉아있던, 머리를 뒤로 묶은 아이 한 명이 진호연을 부른다.
누굴 닮은 것도 같다.
"응? 너는."
"저 함무니 안 따라가여?"
"아직 고기가 남아있어서."
"그러믄 윤스리가 다 머글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애초에 누구인지도 몰랐다.
할머니 손주일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윤스리는 우리 함모니랑 고기랑 이쓰면... 함모니 쪼차갈 거야. 함모니가 더 조아."
꼬맹이가 어눌한 발음으로 무어라 지껄인다.
훈계할 셈으로 말하는 것이라 느껴진다.
"어차피 저분은 몇 번 보고 말 사람이야. 남이니까, 안 그래도 괜찮아."
그래서 변명한다.
이토록 작은 아이에게.
제 감정과 행동에 대해.
진호연의 말을 듣고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잉? 그러믄 왜케 화가 나이써여?"
"뭐?"
왜 화가 나있냐고?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진다.
유분이 살짝 뜬 볼살이 떨리고, 미간은 짙게 굴곡진다.
저만한 아이가 보더라도, 지금의 진호연은 화난 인상이다.
허나 누구에게?
라고 묻는다면 그럴만한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이것도 연탄 가스 때문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 텁텁하고 진한 것이 머리카락 틈새에 남아있다가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하려다가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버리면 이젠 자신이 너무 한심해진다.'
솔직해지기로 한다.
더 늦기 전에.
마음을 다 잡고 감사를 전하려 한다.
그렇지 못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후회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뉘집 아이인지도 모를, 꼬마 아가씨의 말을 듣고 노포를 나서기로 했다.
"꼬마야! 고맙다."
한 마디를 남기고.
"윤스리라니까!"
라고 뒤통수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유독 시끄러운 노포의 잡음에 묻혔다.
북적이던 식당을 나서자 더욱 번잡한 시장바닥에서 걸음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은 유독 밍기적거리고, 웬 자전거가 들쑤시고 다니는 터라 영 어수선하다.
그럼에도 시야의 저편, 저 멀리서.
붙잡아야 할, 그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 잠시만."
허나 인파는 도무지 길을 터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수많은 어르신들을 밀치고 달려나갈 깜냥이 되진 않는다.
'천천히 집에 돌아가서 인사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 속을 스쳤지만
그와 동시에
'이게 마지막 기회야, 이 멍청아.'
라고 마음이 제멋대로 되뇌인다.
논리가 몸을 제어할 수 있을 만큼 냉정치 못하다.
그래서 촌 출신답게 투박하고, 정직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제법 '진호연'다운 행동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할머니!!!"
이 시장판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소리친다.
전통 시장 바닥에 할머니는 수도 없이 많았고, 그들은 일제히 진호연을 바라본다.
물론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나 소년들도.
그토록 큰 외침이었다.
다행히도 저 멀리서 귀가하던, 집주인 할머니에게도 그 소리는 닿았다.
뒤를 돈다.
진호연을 바라본다.
'저건 뭐하는 놈이여.'
놀라다 못해 얼어붙은 얼굴의 할머니.
분명히 진호연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기회가 생겼다며, 이 투박하고 어리석은 젊은이는 자갈과 모래가 드물게 뒹구는, 시장의 거친 바닥에 냅다 머리통을 박아버린다.
팍-!
먼지가 풀풀 흩어지고
먼지처럼 인파도 흩어진다.
- 뭐야?
- 미친 놈인가?!
- 빨리 지나가자, 괜히 쳐다보지마.
변태라도 만난 듯 까무러치는 시장판의 반응.
웅성임이 커진다.
인파는 모세의 홍해처럼 갈라지고
벌어진 가운데로 두 사람만이 남는다.
50m 트랙만큼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평행하게 위치한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간단하고도, 어렵던 마음을
이제와서
이제와서야 전했다.
혹여나 닿지 않을까, 큰 목소리로 전한다.
제 마음의 크기만큼.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크게.
할머니는 저벅저벅-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와 진호연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 귀 안먹었어, 이 사람아. 그만 소리 질러.
투박하고도 주름 진 손을.
- 열심히 살아.
그 무게가 가볍지 않게 느껴지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후련함과 해방감이 명치를 서늘하게 할 때쯤.
기억의 바다 속에서 부표처럼 떠오른다.
이제야 홀가분하다.
20년간 묵혀둔, 가래를 남김없이 긁어낸 것만 같은 기분이다.
**
"흐억!"
수업 시간에 졸다가 일어난 학생처럼 한심한 소리를 내는 호연 형님.
매개 음식 탓이란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능청을 떤다.
"뭐야, 취하셨어요? 왜 먹다말고 졸고 그러세요."
"아, 아니. 뭐야 나 취했냐?"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미안. 야, 이것만 먹고 빨리 가야겠다. 나 피곤한가보다."
"그러게요, 내일도 일하셔야 되는데."
"그니까 말이다."
여느 때보다 밝고도 가벼운 표정으로 호연 형님은 식사를 마쳤다.
내가 구운 목살 소금구이를 먹으니까, 옛 생각이 난다며 막 웃는다.
헌데 그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지.
"고맙다, 주현아."
뜬금 없이 감사 인사를 한다.
"별 말씀을요."
내 입장에선 고기나 한 점 구워드린 것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목살을 다 먹고 나서야 형님은 오만 원 지폐를 내 앞치마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곤 다음에 또 들르겠다며 식당 밖으로 나가셨다.
- 여기 목살 구이도 팔아요?
뒤늦게 들어온 몇 분의 손님.
윤슬이가 냠냠 먹고 있던 목살을 보고는 '윤슬 효과'에 잠식당했다.
"아뇨, 이건 가족이라서 따로 구워준 거예요."
라고 설명한다.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다른 메뉴를 주문해주시기에 정성껏 요리해드렸다.
다섯 분 정도 손님을 더 받고, 오늘 장사는 마감했다.
[오누이 타이쿤!]
['빨간 돼지' 사장 진호연]
[종합 만족도: 100%]
['빨간 돼지' 사장 진호연 – 패밀리로 등록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가게 만족도가 100%까지 올랐다.
강씨 아저씨 건까지 생각해보면 매개 음식 덕분인 것은 틀림없다.
그 상세한 원리에 대해 파악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호연 형님이 가게를 나설 때 후련한 미소를 지었던 게 문득 떠오른다.
어떤 기억을 보셨을지 알 것 같긴 했다.
그날의 그 할머니를 다시 한 번 뵀을 것이다.
허나 그 기억은 형님에게 그리도 편안히 웃을 수 있을 만큼 좋은 기억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감정적으로 말려들 게 한 행동일 수도 있다. 형님께서 먼저 목살을 구워달라고 부탁하시긴 했지만, 어쨌든 매개 음식의 효용을 확인하려던 의도가 내 마음 속에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묘하게 찜찜하네."
마감 청소를 하며 상념에 잠긴다.
스마트폰을 꺼낸다.
[나: 똑똑.]
[달님: 누구세요?]
[나: 마침 오늘 달님이가 연락 담당이구나.]
[달님: 네, 우울합니다.]
[나: ?]
[달님: 오늘 등 하는 날인데, 풀다운 기구가 망가졌거든요.]
어쩌라는 걸까.
[나: 굉장히 유감이구나.]
[달님: !! 공감 능력이 뛰어나시네요.]
[나: 공감 능력이 뛰어난 날 위해 네가 조금 일해줘야겠다.]
[달님: 일이요? 무슨 일?]
[나: 사람 한 분만 좀 찾아줘.]
[달님: 사람이요? 누구요?]
[나: 이미 돌아가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