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레종 데트르(3)
"호여니 삼촌 오늘은 왜 빨모가 업써여?"
"오늘은 그냥 그런 기분이라서."
"그러쿠나."
윤슬이한테는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어제 친척 중에 한 분이 상을 당하셨다고 한다. 그 탓에 상가 주인분도 연락을 받고 달려가셨던 것이다.
가까운 친척은 아닌지라 어제와 오늘, 얼굴을 비추다 오신 듯하다.
덧붙이자면 어제 문자를 주신 것도 상가 주인분이 급하게 나가는 바람에 우리가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않을까, 알려주신 것이다.
원래 검은 양복을 입고 있다가 집에 자켓을 두고, 바지 정도만 갈아입고 다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이런 날까지 빨간색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로 집착이 심한 것은 아니다.
"가게는 오늘 쉬어요?"
"아니, 내가 해야될 고기 손질은 미리 다 해두고 나와서. 이모랑 알바 애들한테 맡기고 나왔어. 아까 전화로 연락해보니까 오늘 평소보다 손님 적대.
나 없을 때 일 터지는 것보다야 차라리 잘 됐지 뭐."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다는 듯 웃어보인다.
전날에 장례식장에 다녀온 양반이 어쩐 일로 우리 가게까지 들렀는지 궁금해 여쭤보려고 했지만
- 저희 계산할게요.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여럿 계산대로 몰려 잠시 시간이 걸렸다.
"아까 식사하시는데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제 지인이라서요. 장난치다가 그렇게 돼버렸네요."
- 아뇨! 재미 있었어요, 괜찮아요.
다행히도 지금까지 계시던 손님들 중 다수가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이기에 어렵지 않게 무마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호연 형님이 미안한 기색을 띠며 양손을 합장하고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윤슬이도 자세가 재밌어보였는지 똑같이 따라한다.
이제 가게엔 우리 셋밖에 남지 않았다.
"그냥 어제 민구가 여기 들렸다길래 한 번 나도 와봤다."
민구?
오래 전에 찍었던 계약서 한 장이 떠오른다.
그곳에 쓰여있던 이름이다.
어제 들렀던, 이 상가 건물주 이름이 '정민구'다.
왜 이 시간에 여길 들린 건지 궁금했었는데, 그 부분을 신경쓰고 있단 걸 호연 형님도 눈치챘나보다.
먼저 말을 꺼낸다.
"이 시간에 딱히 불러낼 친구놈들도 없고, 그렇다고 가게 돌아가서 일할 기분도 아니라서.
술이나 한 잔 할까 했는데 혼술할 만한 가게가 안 떠올라서."
은근 슬쩍 가방 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낸다.
그리고 실 없는 웃음을 짓는다.
"안주 하나만 만들어주면 안 되냐?"
"윤슬이한테만 조심하시면 그렇게 해드릴게요."
"오우, 역시 송주현! 내 제자답군. 땡큐!"
안주 하나 만들어드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건 기회다.
매개 음식의 효능을 다시 한 번 시험해볼 기회.
냉장고에서 돼지 목살을 꺼낸다.
"이걸로 양념육 만들면 어떨까 싶어서 한 번 사봤는데, 마침 잘 됐다."
내가 손에 목살을 들고 있는 걸 바 테이블 쪽에서 보더니 형님이 한 마디 건네신다.
"어? 뭐야. 목살이네? 그거 구워주게?"
"네, 괜찮죠?"
"대환영이지."
목살 소금구이.
굉장히 간단하면서도 육향이 강해, 일부 미식가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
호연 형님의 매개 음식이기도 한데, 그건 형님이 미식가이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몇 년 전이더라.
적어도 <빨간 돼지>에서 일한지 3년 이상 지난 시점이었던 것 같다.
형님이 장사하는 내내 죽을상이었던 적이 딱 하루 있었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워낙 밝은데다가 낙천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긍정적인 성격이시니.
그날 그 모습이 조금 걱정되어 알바가 끝나고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사장님, 한 잔 하시죠.'
'그럴까?'
술을 좋아하지만 일 때문에 많이 못 마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볍게 위로해드리기엔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나한텐 별 일 없었지. 하루 종일 장사만 했는데.'
'근데 그렇다기엔 너무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거 아니에요?'
'고민... 고민이라.'
맥주의 뚜껑을 따 벌컥 들이키다가
캉-
캔을 강하게 상을 때리듯 내려놓았다.
'차라리 고민이라도 해볼 문제였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때 본 표정은 내가 여태껏 본, 진호연이라는 인간의 얼굴 중 가장 어두웠다.
'돌아가셨대.'
'누가요?'
'내 생명의 은인.'
그날 들었던,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
20년 전, 진호연이란 인간은 지독히도 죽음을 희망하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명백한 비전보다는 패기와 오기로 상경한 20대 초반의 진호연씨는 어느날 크게 좌절했다고 한다.
본인이 생각한 것만큼 홀로서기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논밭 빼곤 아무 것도 없는 시골보다야 낫겠거니.
그렇게 생각하여 도착한 서울은 여름이어도 겨울날씨인 것마냥 쌀쌀해서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불행히도 휘말린 경제 불황에 자신이 한 없이 작아보였다고 했다.
그 심정과 역사는 나로서는 섣부르게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때 집주인 할머니가 옥상에 어질러둔 연탄에 눈에 가더라.'
그리하여 창문을 꽉꽉 막아둔, 5평짜리 옥탑방에는 매캐한 연기가 자욱히 피어오르고 호흡이 슬슬 가쁘고 가빠올 때쯤.
미치도록 후회했다고.
'뒤지고 싶던 게 아니더라. 뒤질 때쯤 그걸 알겠더라. 죽을 만큼 잘 살고 싶었던 거였는데, 그걸 내가 착각한 거지.'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 때쯤엔 이미 오래도록 일산화탄소를 마신 상태.
너무 늦었던 것이다.
심각한 어지럼증이 두뇌를 쥐어짜고,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입에서 즙을 짜듯 거품이 나올 것만 같을 때.
- 이눔이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
집주인 할머니가 열쇠로 문을 따서 들어오셨다고.
옥상에 눕혀 한참 심호흡을 돕고.
등을 두들기고.
몸에 묻은 토사물과 타액을 닦고.
제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고.
그 할머니께도 죄송한 일이다.
멋대로 연탄을 쓴 것도 그렇고.
세들어사는 주제에 혼자 방에서 뒈져버리면 그야 말로 할머니께 폐가 되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그분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불러내더니 돼지고기를 파는 노포로 데려가시더라고.
- 먹어라.
책망도 없이.
- 여기 목살 맛있다.
본인이 단골로 다니던 가게의 목살을 2인분을.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게야.
사주시더라고.
그때 그 할머님이 구워주시던 목살이 너무 맛있고 감사해서.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더라.
조금 더 힘 내서
돈을 벌어서
나중에 이토록 맛있는 고기를 파는 점포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그때 꿈을 키웠다더라.
'근데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더라고. 그 고기 팔던 노포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들려봤는데.
단골이라 확실히 기억하는데, 돌아가신 게 맞대.'
'....'
힘 없이 웃음 지으며 형님은 앞머리를 가볍게 손으로 쥐었다 폈다.
'사실 내가 우리 가게 고기 구워서 먹여드리고 싶었던 건 그 할머니인데 말야.
조금 더 가게 키우고 나서 들리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괜찮은 가게가 되면.
그 할머니가 인정할 정도로 좋은 가게가 돼서.
그런 가게 주인이 돼서.
할머니께 가서. 할머니가 살려주셔서.
이렇게 좋은 고기를 굽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잠시 정적.
'너무 늦어버렸네. 아직 감사하단 말 한 마디도 못했는데.'
그날 꽤 늦은 시각까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진호연이란 사람을 이해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 두 남자의 사이는 돈독해졌던 것 같다.
- 살면 살아진다. 그러니까 포기하지마라.
낙천적인 성격에 비해 뼈 있는, 그런 말을 뱉는 것은 그런 역사가 바탕이 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어렸을 적의 나처럼 믿음직스럽지 못한 고등학생을 알바생으로 고용해 이것저것 알려주고, 잘 챙겨주신 것도.
자칭 '촌놈'이었던 민구씨를 위해 방의 한켠을 선뜻 내어주고, 생활을 지원해준 것도.
그런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그 할머니께 갚지 못했던 은혜를 대신해서라도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 부채감이 진호연이란 인간의 행동 원리가 된 것이 아닐까.
오죽하면 최근까지 그 할머니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하고 다닐 정도이니 말이다.
이미 돌아가셨기에 만날 수는 없지만, 성묘라도 해야겠다며.
치이이이익-
기름이 넉넉히 둘러진 팬 위에 오르는 목살 한 덩어리. 격렬히 끓는 기름 방울들이 공중으로 튀어오른다.
"소리 죽이네."
주방의 소리에 귀기울이던 형님이 한 마디 하신다.
"그쪽 가게처럼 숯을 쓰진 않아서, 향은 덜할 거예요. 저희는 불이 가스불이라."
"야! 어떻게 고기 전문점도 아닌데, 숱향까지 바라냐. 그 정도 양심은 있어 임마."
소금과 후추를 듬뿍 뿌린 목살은 스테이크처럼 고루 익어간다.
겉면에 올라온 금갈색의 마이야르가 한 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미디움웰던까지 익을 때쯤 고기를 팬에서 꺼내어 레스팅한다.
돼지는 바싹 익혀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미디움에서 미디움웰던 정도면 충분히 먹을만하다.
기생충이 있니 뭐니, 논란이 있지만 그건 요즘 사육환경을 생각하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게 20년차 돼지고깃집 사장 진호연씨의 견해다.
편평한 접시에 담아 주방 칼로 일정하게 잘라낸다.
고기의 안쪽면에 분홍색 결이 슬며시 돈다.
"식감 미치겠네."
목살은 자칫 잘못 구우면 질겨질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적당히 쫀득하고 괜찮을 것이다.
호연 형님이 앉아 계신 바 테이블 위로 잘 구워진 목살을 올리자 그 옆에 있던 5세의 맹수가 더 격하게 반응한다.
"고기!"
"그럴 줄 알고 윤슬이 것도 하나 구웠으니까, 넌 이거 먹어."
형님 것보단 조금 작은 덩어리를 따로 구웠다.
아까 저녁을 먹였기 때문에.
"윤스리만 안 주며는 섭섭할 뻔해써여."
앙증맞은 손으로 박수를 짝짝짝- 친다.
형님이 소주를 따길래 내가 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물컵에 따라드렸다.
"소주잔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요."
"컵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이 나이 먹고 병나발은 좀 오바잖아."
졸졸졸-
컵을 반쯤 채울 정도로 소주가 차자 "감사."라고 한 마디 하시더니 먼저 목을 축인다.
그리곤 일정한 간격으로 잘린 고기에 젓가락을 댄다.
들어올린다.
입에 넣는다.
으적으적-
고기를 씹던 형님의 눈동자의 초점이 추처럼 흔들린다.
그대로 힘이 풀려버렸다.
**
"어...?"
정신을 차려보니.
아니, 정신을 차린 게 맞기나 할까.
자신의 팔을 굳게 쥔, 부르트고 주름 진 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이런 길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다가
햇볕에 내린 자신의 그림자보다 훨씬 작은 그 등살을 멍하니 지켜본다.
깨닫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옥탑방 집주인 할머니다.
진호연은 아직도 가쁘게 느껴지는 호흡을 다듬으려 심호흡하지만 혼탁한 기침이 날 뿐이다.
'병원에 끌고 가는 걸까?'
허나 그렇다기엔 이끌리는 방향이 저잣거리 쪽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들린 곳은 20세기 향이 풍기는 간판이 달린 노포.
인파로 북적한 시장의 복판이었다.
- 앉으라.
담담한 표정의 할머니가 먼저 자리를 잡은 채 진호연을 노려본다.
그 말씀에 저항할 수 없던 진호연은 몸을 움츠리며, 그녀의 맞은 편에 머뭇거리며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