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생이 굴러들어옴-60화 (60/200)

60화: 최고의 보물(1)

어느날 갑자기 신이 강림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 앞에 늘어놓고

가장 필요 없는 것을 하나씩 지우라거든

오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마지막 순간

끝내 눈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윤슬이일 것이다.

달님이의 말을 듣고 작은 결심을 했다.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행동은 아닐지라도 내 동생을 위하여 그렇게 하기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좋지만 윤슬이가 우선이다. 무언가 내 동생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다면 보호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 우선 단골 손님들한테만 매개 음식을 먹여보면서 경과를 살피는 걸로 하자.]

지금껏 있던 일의 경과를 따져봤을 때, 그리 꺼림직한 선택은 아니다. 강씨 아저씨와 호연 형님, 두 분 모두 매개 음식을 드시고서는 굉장히 만족스런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손님들도 그렇게 만족하게끔 내가 만들면 된다.

"충분히 가능해."

타인의 기억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손과 테크닉.

그것들을 가지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나: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

하루 중 가장 안심되는 시간.

저녁 준비를 모두 마친 브레이크 타임만큼 마음 편한 시간이 또 없다.

의자에 앉아 윤슬이를 무릎 위에 올린다.

선풍기를 중간 세기 바람으로 멀찍이 틀어두곤 눈을 감는다.

머리 끝자락에 이는 바람이 기분 좋다.

아직 에어컨을 틀어야할 정도는 아니다.

선풍기 하나쯤 틀어두면 시원하게 버틸 만하다.

윤슬이가 무릎 위에 앉아서 내 가슴팍에 머리를 콩콩- 딱따구리처럼 부딪히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움!" 하는 외마디 감탄사를 뱉는다.

그리곤 점프해서 무릎 아래로 내려간다.

주방 서랍 맨 밑단에 있는 박스를 뒤적이더니 저번에 강씨 아저씨네 헌책방에서 빌려온 그림책을 한 권 꺼낸다.

그리곤 그곳에서 서서.

"옵바, 이거."

책을 높이 들어 내게 휘휘 흔들며 보여준다.

읽어줄 수 있냐는 뜻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읽어드릴 테니까."

"히힝-"

기분이 좋은지 작게 코웃음치며 내 앞까지 도도도- 하고 달려온다. 의자 앞까지 와서 45도 각도로 두 팔을 벌린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다시 무릎에 앉힌다.

윤슬이가 가져온 책의 이름은.

"산적의 보물?"

"보물!"

저번에 윤슬이가 집었던 그림책 중 한 권 끼어있던 것 같은 제목의 책이다.

아이들 보는 그림책에 산적을 등장시킨다니.

대담한 발상이다.

"일거조, 옵바."

윤슬이가 그림책의 커버를 넘긴다.

첫 페이지가 펼쳐진다.

상투적인 문구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표지가 약간 낡은 걸 보아 간행된 지 오랜 책인 것 같다.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남의 것을 빼앗기 좋아하는 산적이 살았습니다. 그 산적은 매일 같이 산에서 민가로 내려와 사람들의 소중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그 덕에 산적의 집에는 항상 보물이 가득했습니다.]

"잉? 옵바."

"응?"

"산저기 모야?"

"여기 그림 보면 사람들 물건 막 빼앗으면서 좋아하고 있지?"

"응. 막 웃고 이써. 나쁘게 웃고 이써."

"산적들은 옛날에 약한 사람들 물건들을 힘으로 빼앗던 사람들이래."

"그거눈 너무 나뿐데. 옵바한테 산저기 오므는 윤스리가 혼내주께."

[그런데 어느날 산적의 하나뿐인 어린 딸이 병에 걸렸습니다. 자신의 딸을 너무도 사랑했던 산적은 병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이번엔 민가에 내려와 의원에 있는 약들을 모조리 빼앗았습니다.]

"옵바눈 윤스리가 병에 걸리므는 어떠케 해?"

"오빠는 윤슬이가 병에 걸리기 전에 손을 잘 씻기고 따듯하게 입힐게. 그러면 병 안 걸리잖아."

"오오...! 옵바가 산적보다 똑또캐."

칭찬의 뉘앙스가 그닥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약들로는 딸의 병을 도저히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적은 의원의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딸의 병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의사는 답했습니다. 서쪽으로 가시오. 서쪽 끝에 있는 의원의 의사가 제일 가는 명의이니.]

"명이?가 모야."

"제일 치료를 잘 해주는 의사 선생님."

"똑또칸 이사 선샌님이야?"

"응."

"그러믄 옵바가 병에 걸리므는 명이한테 가므는 대겠다. 윤스리가 붕붕이 타구 데리구 오께."

"그때가 되면 부탁할게요."

"윤스리만 미더."

[산을 넘고, 강을 건넌 산적은 이 땅의 서쪽 끝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엔 작은 오두막에 사는 명의가 있었습니다. 산적은 명의에게 딸을 고칠 수 있는 약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명의는 거절했습니다. 산적이 그동안 너무나도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움... 그러므는 산적 딸은 병에 걸려서 계속 아푼데. 딸은 잘모시 업써."

최근 그림책을 많이 읽어준 덕인지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윤슬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약을 지어줄 수 있겠소? 산적이 묻자 명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지금껏 빼앗은 모든 물건을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주시오. 그렇게 하면 약을 지어드리지.]

다음 장으로 넘기자 산적이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하듯 고개를 푹 숙인 그림이 나온다.

[산적은 고민됐습니다. 그동안 보물을 모으는 과정도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산적에게도 소중한 보물들이었죠. 하지만 그것들이 사랑하는 딸보다 소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적은 다시 마을로 되돌아가 보물을 하나씩 하나씩 돌려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장엔 보물이 없어져, 텅 빈 산적의 집이 나온다.

그 집 안엔 이럴 수가!

딸이 아닌, 함박 웃음을 지은 명의가 있다.

[산적은 그동안 빼앗은 것들을 돌려주며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제 집엔 어떤 보물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 산적을 기다리는 것은 아픈 딸이 아닌 서쪽 땅에서 만난 명의였습니다!]

미친 듯한 반전.

손에 땀을 쥔다.

[명의가 모자를 벗고 옷을 갈아입자 어느새 그곳엔 산적의 딸이 서있었습니다. 산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딸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묻자 딸은 웃는 얼굴로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사실 마을 사람들과 자신이 꾸민 일이라는 걸요. 산적의 딸은 명의처럼 보이기 위해 변장을 하여 서쪽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이죠. 그리고 산적에게 모든 보물들을 다시 돌려주게끔 시켰습니다.]

"움...?"

윤슬이가 이 장면까지 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윤슬이. 뭐 모르는 거 있어요?"

"으응... 아니에여."

우선 계속 읽어주기로 했다.

[산적은 화가 나서 딸에게 따졌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거니? 그러나 딸은 오히려 침착하게 산적을 설득했습니다. 저는 아빠가 남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는 것을 원치 않아요. 착한 아빠가 됐으면 좋겠어요.]

"우우...!"

위에서 내려다보니 윤슬이가 거의 폭발 직전의 표정이다? 왠지 화가 난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읽어주기로 했다.

[산적은 딸의 말을 듣고 크게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았습니다. 보물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산적은 고민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어떤 보물들보다 딸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산적은 자신에겐 다른 금은보화나 보물들보다 딸이 중요하단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딸이 싫어하는 행동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결국 산적은 딸에게 사과하며 자신의 지난 날을 반성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산적을 용서하며 모두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그런 내용이다.

교훈도 있고, 반전도 있고, 감정선도 풍부한 명작이잖아. 이 정도면.

근데 왜.

"이잇!"

윤슬이는 화가 나있는 것일까?

앉아있는 채로 짧은 다리를 마구 허공에서 휘두르고 있다. 이 정도면 상당히 답답하거나 분노했다는 것이다.

"윤슬이 왜 화가 나셨어요?"

"윤스리 화나써!"

"화났어? 왜 그랬어."

"딸이 답다패!"

"딸이 답답해?"

"움!! 윤스리였으므는 옵바랑 가치 마싯는 거 마니마니 사서 머그므는 대는데. 그러믄 옵바랑 행보카게 살 쑤 있눈데."

윤슬이가 어떤 맥락에서 화가 났는지 알 것도 같다.

산적이 훔친 물건을 굳이 다시 안 돌려주고 딸이랑 행복하게 사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딸이 계략을 꾸며 산적으로 하여금 마을사람들에게 물건을 돌려주지 않게 하는 편이 나았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다.

이 5세는 정말로 5세가 맞는 것인가?

"만약에 윤슬이가 딸이고 오빠가 산적이었으면?"

"그러문 윤스리는 아푼 척을 안 하지. 옵바가 훔쳐온 걸루 초코 엄청 마니 사다달라구 할 꺼야."

이 5세는 욕망에 굉장히 충실합니다.

그림책을 읽어주자 몸이 나른해졌다. 책을 너무 열정적으로 읽어준 것 같다.

6월의 잔잔한 공기가 코 끝을 스치자 잠이 쏟아진다.

아직 저녁 타임 시작까진 4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윤슬아, 오빠 잠깐만 졸 테니까 혹시 안 일어나면 깨워줄 수 있지?"

"움! 윤스리만 미더."

"그럼 오빠가 윤슬이를 믿지 누굴 믿어요?"

"당연해."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팍을 두드리는 동생.

혹시 모르니까 스마트폰에 알람을 설정해두고, 눈을 붙인다.

**

"움..."

그릉-

그릉-

코를 고는 송주현.

그걸 바라보는 장윤슬.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자는 오빠를 보며 장윤슬은 생각한다.

"자유?"

어디선가 들은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어떠한 행동의 제약이 없는 상태.

송주현이 깨어있다고, 특별히 자신을 혼내거나 주눅들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자고 있으니 가슴 한 켠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다.

무얼할지 생각해본다.

붕붕이 3호를 타고 혼자 산책 나가보기?

"그거눈 안 댈 거 가태."

괜히 길 잃어버리면 본인이 더 피곤해진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볼까?

"손이 안 닿아여..."

화구에 손이 닿질 않는다!

싱크대 앞의 발받침대를 어떻게든 옮길 수야 있겠지만, 저건 튼튼히 만들어야 된다며 내부 구조가 꽉꽉 채워져있다.

즉, 매우 무겁다.

자신만 믿으라며 오빠가 눈을 붙여도 된다고 말은 해두었지만.

그랬다간 자신이 심심해질 거란 사실을 간과했다!

"이런."

송주현이 잠들자마자 극도로 심심해진 장윤슬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은 단 한 가지.

"옵바 자는 거 구경해야지~."

송주현이 차지한 자리 옆쪽에 위치한 의자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발로 서보려다가.

'윤슬이, 의자에서 서있으려면 신발은 벗어야 돼요.'

라고 오빠가 말했던 게 떠오른다.

신발을 벗어서 아래에 휙 던져버렸다.

"으음..."

그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낮은 신음을 뱉는 송주현.

고개를 테이블에 묻고 자다가 바깥 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한 쪽 볼이 여실히 드러나는 자세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장윤슬은 떠올린다, 아까 오빠가 읽어준 그림책의 내용을.

"보물...?"

산적에게 딸이 최고의 보물이듯.

'옵바' 역시 장윤슬에게 최고의 보물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빠진다.

빠지다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보물에는 표시를 해야지대. 그래야지 누구 껀지 알자나."

다시 의자 아래로 내려가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짧은 키를 최대로 활용해 어떻게든 계산대 맡에 있는 펜을 손에 넣었다.

검은색 유성 매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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