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남자형제(2)
[달님: 공감각 능력은 잘 발동했죠? 기억에 접속하는 건 성공적이었나요?]
[나: 응, 덕분에 윤슬이가 험한 꼴 목격하는 건 피했어. 너희가 능력을 잘 개조해준 덕분이다. 고마워.]
[달님: 저희 관계가 그런 거죠, 뭐. 파트너잖아요? 장사만 제대로 해주신다면 저랑 햇님이가 어디까지든 지원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달님이가 모처럼 진지하게 대화에 임한다.
원래 같았으면 초장부터 자기네들 헬스가 어쨌느니 등이 잘 안 먹었다느니, 이상한 얘기를 늘어놓는데.
[나: 웬일로 그렇게 침착하게 문자를 보내? 뭔가 달님이답지가 않은데.]
[달님: 그럴 만도 하죠. 이번에 식당에 들리신 권씨 남매 사정이 워낙 절절해야 말이죠.]
[나: 그야 그렇긴 한데. 원래 너희가 그렇게 감상적이었나?]
[달님: 저희는 저런 남매애만 보면 암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솟는다니까요!]
그 말은 어쨌든 납득이 되었다.
달님이와 햇님이가 우리 남매를 도와주는 이유도 대강 그랬다.
나와 윤슬이의 남매애를 응원한다는 명분이었나?
그건 일부에 불과하고, 가게를 확장하여 자기네들의 유명도를 올리겠다는 이유가 더 큰 걸로 알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권씨 남매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거짓일 것 같진 않다.
그런 점에서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 너희도 그럼 수영이랑 수안씨를 도와주고 싶다는 거지?]
[달님: 일단 마음은 그렇다는 거죠. 마음은.]
[나: 그건 또 무슨 말이래.]
[달님: 아니, 사실 뭐 도와드리고 싶어도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미 어느 정도 해피 엔딩 아닌가요?]
[나: 지금도 나름 해피 엔딩이긴 하지. 남매 관계도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고. 우리 식당에도 자주 들러주게끔 됐으니까. 그리고 수영이가 패밀리 등급도 됐고.]
[달님: 그러니까요!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어요. 만약 권수안씨가 시력을 되찾는... 그런 기적적인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야 말로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저희의 영역이 아니죠.]
[나: 어째서?]
[달님: 그야 간단하죠.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안구를 새로이 드릴 수도 없으니까요. 전자의 경우는 아예 저희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얘기고, 후자의 경우는 이식하는 게 보통 수순일 텐데, 이쪽 절차는 의학 관할이지 저희 관할이 아니잖아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안구 이식이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시력이 완전히 망가진 경우에는 이식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수안씨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눈을 오누이의 능력으로 회복할 수는 없다고, 달님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
그러니까 수안씨가 시력을 기적적으로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내가 착안했다고 하면 달님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아주 조금만 희생하고, 아니 사실 희생도 아니다. 약간만 투자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일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이렇게 타이쿤 어플을 킨 것이기도 하다.
....
[나: 내가 생각했을 때, 이렇게 하면 수안씨가 시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제시한 방법에 대해 오누이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햇님: 혹시 주현 오라버니 천재신가요?]
[달님: 글쎄 누구는 호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다.
이 방법으로 수안씨가 앞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야 말로 '강제 단골'을 임명할 것이기에 장기 수익적으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도 한 아이의 오빠로서 권수안의 용기 있던 과거의 행동에 감동 받았기에,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은 마음이 크다.
**
텁텁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식당과는 사뭇 다른 냄새가 낯설지만 이내 그 부부가 곧잘 풍기던 향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8평 남짓한 공간에 무언가를 자르고 베는 기재들이 즐비하여 어수선하다.
그 가운데 신혼부부가 묵묵히, 열심히 꼼지락대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연우씨, 혜원씨."
- 아... 왔어요?
먼저 반응한 건 연우씨였다.
"윤스리 와써여!"
- 와 윤슬이다! 식당 말고 여기서 보게 되다니. 완전 좋아. 이렇게 된 김에 우리 윤슬이는 주현씨 동생 말고, 내 동생 하는 거 어때?
"움? 단호히 거절. 윤스리는 옵바 동생."
뒤이어 혜원씨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자주 있는 일이다.
- 그래서 주현씨.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주문 제작하고 싶은 게 있다 그래서 일단 작업소까지 와달라고는 했는데.
"아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번에 들어보니까 주문 제작도 해주신다고 했던 것 같아서."
- 네 말씀하시면 해드리죠. 만들고 싶은 게 뭔데요? 혹시 도안 같은 거 있어요?
미리 연우씨에게 말해두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문을 받는다. 우리 가게에 밥 먹으러 올 땐 이것보다 어눌할 때가 많은데, 자기 일터에 있으니까 프로페셔널해보인다.
혜원씨는 윤슬이에게 관심 받는 걸 포기하지 않았는지, 우리 남정네들을 내팽겨치고 윤슬이와 작업소를 한 바퀴 돈다.
이건 무엇이며 저건 무엇이라고 곳곳을 소개해준다.
개중에선 윤슬이의 호기심을 끌 만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모형 총이나 구식 자동차를 목재로 복각해둔 것을 보고 윤슬이는 침을 떨굴 뻔했다.
"이거 사진 좀 봐줄래요?"
윤슬이가 정신이 팔린 것을 확인한 뒤, 스마트폰을 꺼내어 연우씨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도안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 사람 셋에 강아지 하나?
"네, 저희 가게에 자주 오는 손님들이에요."
- 그런 것 같아보이네요. 여기 두 여자분은 몇 번 봤던 것 같기도 하고.
혜원씨네 부부나 수영이 지아는 워낙 식당에 자주 오니, 서로 얼굴을 마주한 적도 몇 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여기 사람들이 아니라 이 강아지에요."
- 강아지요?
"이 강아지 얼굴 본따서 혹시 펜던트 하나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요. 목에 걸 수 있는 걸로."
- 그 정도는 뭐, 어렵진 않죠. 크기가 작고 디테일하게 선을 내야 해서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이거 사진 연우씨한테 문자로 보내드릴 거고... 그리고 펜던트 뒷면에 이름 루이라고 적어주시겠어요?"
- 루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주문 비용은 어느 정도...?"
이런 공예품 주문 제작은 부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쫄렸다.
최근 수입이 괜찮게 나온다고야 하지만 몸에 배인 절약주의는 어쩔 수 없이 간간이 튀어나오고 만다.
스마트폰으로 몇 번 검색도 해봤는데, 크기와 재료에 따라 다르지만 5만원부터 2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선물 비용으로 소비하기엔 다소 망설여지는 금액이긴 하다.
- 비용이요? 그냥 2만원만 주세요.
"엥? 그것밖에 안 받는다고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 으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공짜로 해드리고 싶은데, 그러기엔 혜원이 눈치도 보이고 해서요. 아무래도 같이 하는 일이니까 아예 안 받겠다고 제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거든요.
"아뇨. 그럼 원래 더 받으셔야 되는 거 아녜요?"
- 저희가 정한 가격대로 하면 몇 배 더 받아야 되긴 하죠.
"근데 2만원만 받는다고 하심은...?"
- 저번에 신세졌잖아요. 덮밥.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죠.
"아아..."
연우씨는 저번에 내가 목살 덮밥 재료를 나눠드리고, 레시피를 공유한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듯하다.
듣자 하니 그날 부부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긴 했으니, 이렇게 할인해주시는 게 이해는 된다.
그땐 별 생각 없이 단골이기도 하니까 선심을 썼던 것인데, 이런 대가가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때 베풀어두길 잘했다.
"그럼 연우씨 호의 그냥 받아둘게요?"
- 그럼요. 호의도 아니죠. 오히려 제가 갚는 건데요.
"대신 다음에 또 저희 가게에서 맛있는 음식 발견했다고, 혜원씨가 그러면 몰래 저한테 문자 보내요. 제가 그 메뉴는 따로 레시피 적어두고 연우씨한테 알려드릴 테니까."
혜원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 흣!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주현씨. 저 저번에도 혜원이한테 말했는데 주현씨 같은 아빠가 되고 싶거든요! 그래도 괜찮죠?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아... 네, 그럼요. 좋을 대로 하세요."
안 된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그렇게 필요한 것을 주문한 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브레이크 타임에 잠깐 들를 수 있을 정도로 머지 않은 거리에 두 사람의 공방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옵바, 옵바. 저기 뚝딱뚝딱 만드는 데에 머찐 거 음청 마나써."
"엄청 많았어요?"
"네! 담에 또 구경 가구 십다."
"그러면 다음에 한 번 또 들릴까?"
"응! 조아!"
윤슬이도 공방에 들린 게 좋은 경험이었나보다.
**
일주일 정도 지나자 우리 가게로 주문한 물건이 배송되었다. 원래는 연우씨가 직접 전해주고 싶었는데 공방에 주문이 밀리는 까닭에 그럴 수가 없었다고 문자가 왔다.
그런 내부 사정까진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다.
어째 이 부부도 우리 남매를 지나치게 애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필요한 물건도 받았으니, 이제 수안씨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 사람의 대답 여하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아까 따로 연락도 해두었다.
오늘은 수영이가 학교 가는 날이니, 될 수 있으면 루이와 함께 우리 가게로 둘이서만 잠깐 와달라고.
가게까지 오는 길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예의상 물었더니
- 이미 루이가 오누이 식당 냄새까지 다 기억해버려서요. 가는 데까지 시간은 좀 걸려도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요?
라고 하기에 급하지 않게 천천히 와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옵바, 옵바 오늘 루이 온다구 그래써?"
"응 이제 곧 올 거야."
"그러믄 윤스리가 이따가 루이한테 사과 쪼금만 줘두 갠차나여?"
"그럼요. 대신 루이랑 수안씨한테 한 번씩 물어봐야겠지? 루이가 지금 배가 불렀거나 하면 못 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네. 아라써!"
당차게 알았다고 답하면서도 사과를 채 썰어둔 작은 그릇을 두 손에 꼭 들고 있다.
어지간히 기대되는 듯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안씨가 가게로 들어왔다.
루이와 함께.
"어서 와요."
"우아! 루이 와따!"
요근래 윤슬이와 친밀도를 쌓은 루이는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꼬리를 대차게 흔든다.
우리 식당에 처음 온 날과는 사뭇 다른 태도가 재미있기도 하다.
수안씨는 루이를 옆에 두고 바 테이블 쪽에 착석한다.
- 웬 일로 주현씨가 식당에 와달라고 부르셨어요? 어차피 이따가 수영이 학교 끝나면 여기서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별 상관은 없긴 한데.
"따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수영이는 안 들었으면 좋겠거든요."
- 설마 저희 동생한테 관심 있으신 건 아니죠? 혹시 설마 그런 거라면 절대 안 됩니다. 주현씨는 좋은 사람이지만 두 사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결사 반대할 거예요. 결혼식 올리면 찾아가서 깽판 칠 거라고요. 반드시.
오빠란 족속들은 하나 같이 이런가.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