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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81화 (81/200)

81화: 더 멀리 있는(3)

"택씨! 택씨!"

손을 멀찍이 뻗어 택시 쪽을 가리키는 윤슬이.

멀찍이 뻗는데도 전혀 멀리 나아가지 않는 팔 기장은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강릉역 앞으로 나오자 대도로변 쪽으로 택시가 줄서있다. 지하철 인프라가 잘 되어있는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 택시를 잡을 필요가 없지만 애석하게도 강릉은 그렇지 못하다.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지인을 부르긴 했는데, 내일 합류하기로 했다.

휴가를 낸 미정 쌤이 자차를 끌고, 유민이와 함께 올 계획이다. 그쪽 집도 방학인지라 여름휴가를 잡았다.

윤슬이를 데리고, 택시에 탑승한다.

캐리어는 뒤쪽 트렁크에 싣게 해주셨다.

앞으로 전진하며 기사님이 미터기를 누르는데, 기본요금이 서울과 다르다. 조금 더 싸다.

새삼 타지역으로 여행 온 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  딸이랑 여행 왔어요?

"옵바 동생임미다. 딸 아니거둔요..."

-  하하! 딸이 아니라 동생이었구나. 아저씨가 착각을 했네.

뾰루퉁한 윤슬이 앞에 속수무책으로 기사님 뺨이 무너진다. 까만 피부에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계시다.

인상이 거칠어보였는데 아이 앞에서 저리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니 경계심이 풀린다.

-  손님들 운이 좋네. 여행하는 날을 잘 잡았어요.

"왜요? 강릉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  꼭 좋은 일이 있어야만 이렇게 말하나. 올해 날씨가 근 몇 년 들어 제일 좋아요. 해는 좀 쬐는데, 습하지도 않고. 또, 바닷물도 막 거칠지가 않아요.

"동해 쪽이 원래 파도가 좀 쌘 편 아니던가요?"

-  원래는 그런 경우가 많죠. 근데 올해 들어 조금 잠잠해졌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저짝 구석 항구에선 고기 잡으러 배도 많이 나가고 하더라고요.

"그럼 애들이 놀기에도 괜찮겠네요."

-  어휴, 강릉까지 와서 바다 안 들어가면 쓰나. 오빠랑 같이 손 잡고 들어가서 발 담그고, 얼굴도 좀 적시고 하는 거죠.

"옵바랑 물꼬기 자바머거."

윤슬이는 팔을 앞뒤로 휘두르며 낚시꾼 흉내를 낸다.

직접 낚시해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헛된 상상 중인 것 같다.

-  그래, 생선! 아저씨가 맛있는 생선 가게 하나 추천해줄 테니까. 거기 한 번 오빠랑 가봐.

"물꼬기 팔어여?"

-  응, 물고기 파는데. 거기가 바다에선 좀 떨어져있거든요? 근데 거기까지 가서 먹어보기만 하면 후회 안 할 거야.

"오! 그런가요? 그럼 이따가 내릴 때 주소지 좀 알려주세요."

-  걱정 마세요. 안 까먹고 알려줄 테니.

관광 맛집에서 먹어도 맛있지만 현지인 맛집은 결을 달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맛있는 집에 정통한 사람들은 강릉 길 곳곳을 쏘다녀본 택시 기사님들이다.

가서 직접 먹어봐야 알겠지만 기대가 된다.

택시는 번화가를 빠져나와 어느새 낡은 아파트 단지 내부에 도착했다.

값을 지불하고 맛있다고 추천 받은 식당의 주소지를 알아냈다.

짐을 내리자 윤슬이는 내 손가락을 잡고는 강아지가 산책을 조르듯 몸을 앞으로 숙인다.

"옵바, 옵바! 빨리 가야지 대. 함모니가 기달리므는 안대자나."

"알겠습니다, 아가씨. 짐이 있으니까 조금만 천천히 가면 좋겠어요."

"아... 맞따 옵바는 짐 이써서 빨리 가기는 쪼굼 힘드러. 윤스리가 몰라써."

내가 끌던 캐리어를 보고는 약간 자기반성하는 5세였다. 누굴 닮아서 그런지 성찰이 빠르다.

윤슬이가 이끄는 대로 아파트 건물 안에 도착했다.

계단이 꽤 가파른데도 씩씩하게

"끙... 끙..."

거리며 잘 올라가는 5세였다.

할머니 댁 앞에 도착해 벨을 울리자 문이 열린다.

언제 뵈어도 반가운 얼굴이다.

"내 새끼들 왔냐!"

"함모니다!!"

윤슬이는 할머니를 뵙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주위를 뱅뱅 도는 윤슬이.

오랜만에 만나는 만큼 신이 났다.

거의 반 년만이니까 말이다.

그간 저녁 시간대에 영상 통화를 하는 것을 빼곤 할머니를 뵐 기회가 없었다. 가게도 바빴으니까.

이런 휴가 때라도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할머니께서도 서운하실거다.

"할머니가 밥 채려놨는데? 점심 아직 안 먹었지?"

"옵바랑 계란 머거써. 윤스리가 이마로 이케! 이케! 해서 깨서 머거써."

아까 기차에서 계란 박치기를 했던 걸 온 몸으로 재현하는 윤슬이. 축구 선수가 공중볼을 경합하는 것과 같은, 진지한 표정이지만 아주 조금 가소롭다.

아직 윤슬이 이마빡엔 빨간 자국이 옅게 남아있기에.

1시를 넘어 2시를 향하는, 늦은 시간 세 가족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요근래 내가 밥을 차려서 윤슬이를 먹이다가 이렇게 할머니께서 만들어두신 음식을 앞에 두니까 감회가 새롭다.

반찬 개수부터가 10가지가 넘는다. 정성이 느껴진다.

"잘 먹게씀미다."

윤슬이는 언제나 그렇듯 먹방에 돌입한다.

오랜만에 맛보는 할머니 요리가 좋은지 꿀떡꿀떡 삼키며 식사 중이다.

그런데 유독 손이 안 가는 반찬이 있다.

"윤슬이, 아직도 가지 안 먹는구만. 오빠가 너무 오냐오냐 하나? 편식 하면 못 쓰는데."

"움... 함모니 가지눈... 별룬데."

할머니께 한소리 듣고 입술을 삐죽 내미는 윤슬이.

그러나 눈치가 보였는지 이내 포크로 가지 무침을 하나 찍어 밥 위에 올린다.

좀처럼 짓지 않는, 싫은 표정을 짓는다.

"우리 윤슬이 가지 잘 먹는데? 그건 윤슬이 입맛에 별로에요?"

"이거눈... 먹으므는 혀가 찌릿찌릿해서 별루."

이해는 된다.

가지 무침은 애들 입맛엔 안 맞으니까.

우리나라 요리이긴 하지만 가지를 맛 없게 조리한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중국풍으로 튀기거나 기름에 굽거나 하는 쪽이 더 맛있다. 실제로 가지 튀김은 우리 가게 스테디 메뉴 중 하나이고, 윤슬이도 잘 먹으니까.

"윤슬이가 가지를 잘 먹어? 할머니 집에선 맨날 윤슬이가 가지 싫다고 그랬는데."

"윤스리는 옵바가 해주눈 가지가 더 조아여."

"그래...?"

할머니가 내심 서운하신 듯하다.

오래도록 기사식당을 운영하셨던 터라 요리 실력이 좋은 편이다. 그때 모아두셨던 돈으로 지금 우리 남매가 살고 있는 집의 전세 자금도 보태주신 것이고, 이 아파트도 장만하신 거다.

인기가 좋던 기사식당의 주인이셨다.

그랬는데도 손주 가지 요리에 당신께서 직접 무치신 가지가 밀렸다고 생각하니 서운하실 법도 하다.

"그럼 윤슬이 할머니한테 가지 먹는 거 좀 보여드릴까?"

"아라써... 이거 함모니가 만둔 가지 머글께여. 편식 나뻐."

"아니, 그건 오빠가 먹을 테니까. 이따가 가지 튀김 먹자."

"옵바가 만든 거가 조아!"

윤슬이는 오빠가 만든 게 좋다는 이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가지무침을 내 그릇으로 은근슬쩍 옮겨담는다. 그리고 할머니 눈치를 살짝 본다.

할머니는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히힝..."

할머니가 넘어가주시는 듯하자 윤슬이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먹방을 재개한다.

"그래, 그럼 윤슬이가 가지 얼만큼 잘 먹는지 한 번 보자. 우리 손주 음식도 한 번 맛볼겸."

"그러세요, 제가 맛있게 튀겨드릴 테니까."

"이 할머니가 입맛이 많이 까다로워요. 왜 그런지는 말 안해두 알지?"

눈빛이 날카로워진 할머니.

전에 식당을 하셨던 만큼 음식 평가에 대해선 가차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윤슬이가 의도치 않게 가지로 도발을 해둔 상태인지라 할머니 눈에선 은근히 독기가 보인다.

긴장하고 만들어야겠다.

"걱정 마세요. 몇 달간 요리하면서 내공을 나름 쌓았거든요."

"흥... 고작 몇 달 갖고! 이 할머니는 가게 반찬으로 가지무침을 몇십 년을 내어놨다구. 근디, 요놈의 손녀가 업어서 키워놨더니... 할머니 반찬은 안 찾구. 섭썹하게씨리."

궁시렁궁시렁.

궁시렁궁시렁.

할머니가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듯하다.

궁시렁 모드에 돌입하셨다.

의외로 나이 많으신 분들이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다.

곧잘 삐지신다던가 하는.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는 내가 했다.

안 그래도 허리가 안 좋으신데 이만큼 상차리는 것도 힘드셨을 것 같았다.

당신께서 하시겠다고 말리는 걸 뿌리치고 고집을 부렸다. 암튼 할머니들은 손주들 일하는 꼴 보면 입에 가시가 돋혀서 문제다.

이쪽이 더 걱정한다는 걸 모르시는가 싶다. 아니면 사랑이 과하시거나.

먹었던 설거지를 우선적으로 끝내고 가지튀김 준비를 시작한다. 늘 하던 일이라 어려울 건 없었고, 늘 하던 환경이 아닌지라 색다르게 느껴지긴 했다.

"할머니가 식재료 잘 고르시네."

냉장고에 남아있던 가지를 확인하니 모두 싱싱한 것이었다. 근처 농지에서 재배한 걸 곧바로 시장에서 사들이신 것 같다.

표면이 매끄럽고 이쁘장하다. 색도 먹음직스럽게 보라색이다.

역시 식당하시던 경력 어디 안 도망간다.

가지를 튀기면서 생각해봤는데, 여기엔 토마토 페이스트가 없다. 집에 잘 놔두는 재료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간장 소스나 만들까."

일본에선 흔히 '덴다시'라고 불리는, 튀김 찍어먹는 간장이다. 생강과 양파, 설탕을 배합해 진간장과 함께 끓여 향과 맛을 입힌다.

고명으로 파를 얇게 썰어올리면 더욱 시원하다.

일본에 가면 집집마다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가정에선 이 정도 재료로 만드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튀겨진 가지와 덴다시 간장을 쟁반에 바쳐 거실로 가져간다. 윤슬이는 할머니랑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고 있다.

늘 그렇듯, 레이싱 프로그램이다.

"움? 이거눈 쏘스가 업써."

평소에 가지튀김엔 꾸덕한 토마토칠리 소스가 올라가니, 오히려 민낯으로 나온 가지튀김이 이상해보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번엔 오빠가 찍어서 먹는 소스로 가져왔어. 윤슬아 한 번 찍먹해봐."

"찍먹?"

젓가락으로 가지 튀김을 집어 후후 불어 열기를 줄이고, 간장에 담가 윤슬이 입에 넣어준다.

"우물우물... 이 마시거둔..."

덴다시 간장도 마음에 든 것 같다.

표정이 밝다.

할머니는 먼저 간장에 새끼 손가락을 살짝 찍어 맛을 본다.

"음... 간장 새로 끓였구만. 깔끔하니 괜찮네."

일단 새로 만든 간장 소스는 호평이다.

끓일 때 겉면으로 올라오는 거품을 거두어내며 깔끔함을 살리려 노력했는데, 그게 통한 것 같다.

이윽고 젓가락을 들어 가지튀김을 집고, 덴다시에 찍어 한 입 드시는데.

으적-

우물우물...

할머니 입꼬리가 느긋하게 호형을 그린다.

베어물고 남은 조각을 다시 찍어 한 입 더.

꿀꺽.

"주현이, 너 가게는 잘 되겠구먼?"

"나쁘지 않죠. 이번에 운 좋게 가게 확장도 해서 앞으로 더 잘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래야지. 우리 손주 음식이 이렇게 맛있는데 안 오고 배기나. 다들 와서 네 요리 맛 보라구 꼭 해라. 아주 괜찮네."

극찬이 쏟아진다!

처음엔 의심도 하셨던 것 같은데 직접 드셔보니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옆에서 자기 혼자 포크로 쿡쿡 찍어 가지튀김을 열심히 먹고 있는 윤슬이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윤스리눈 우리 옵바가 요리할 때가 젤루 머시써."

"그러게 말이다. 우리 손녀가 오빠 복은 타고 났네."

그리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표정은 어딘가 쓸쓸해보인다. 열심히 포크질하는 윤슬이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으신다.

내 가지만 윤슬이가 맛있게 먹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가지 튀김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윤슬이는 낮잠을 잔다.

여행을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느라 피곤했던 것 같다.

마침 동생이 잠든 김에 그간 할머니와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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