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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굴러들어옴-82화 (82/200)

82화: 더 멀리 있는(4)

할머니는 마른 안주와 육포, 소주를 가져오신다.

아까 한 입 먹어봤는데, 육포치곤 부드러웠다.

할머니도 드실 수 있는 정도였다.

또, 소주는 빨간 뚜껑이다.

"손주랑 같이 한 잔 해야 쓰겠네."

"어휴, 건강 생각하셔야죠."

"됐다, 더 오래 살아봤자 뭐한다구. 그냥 살 날에 하고 싶은 거나 잔뜩 하다가 죽을라니까. 말리지 말어."

이렇게 고집 부리시면 막을 방법도 없다.

내가 오늘 그만 드시게 하더라도 평소에 친구들이랑 막걸리 한 잔씩 하시는 것 같았다.

음주가 일상이라면 오늘 하루 금주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대신 저희 둘이 이거 한 병만 마시는 거예요."

"그럼 뭐 마시고 죽을 일 있겠니. 둘이서 한 병이므는 된 거지."

말씀을 듣자하니 애주가이긴 하지만 다량을 드시진 않는 것 같다. 듣던 중 다행이다.

각자의 소주 잔을 채운다.

한 모금 홀짝인다. 반 정도 밑잔이 남는다.

반면 할머니는 그냥 원샷을 때리셨다.

저 나이에 대단하시다.

"주현이, 너 내가 그렇게 안 키웠다."

"네?"

"소주는 원샷이지 않겠니."

"...."

한 모금 마시고 남아있던 밑잔을 마저 입에 붓는다. 강릉 할머니들의 문화인 건가, 아님 성격인 걸까. 할머니와 술자리를 갇게 된 것은 처음이라 헷갈린다.

원래 소주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집에서 아주 가끔 혼술을 할 때도 편의점에서 4캔 만 원 맥주를 사서 마시는 걸 선호한다.

2캔 마시고, 나머지 2캔 쟁여놓으면 기분도 좋아진다. 최근엔 윤슬이를 키우느라 술 마실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옆에서 자고 있는 윤슬이의 배꼽 주변을 살살 문지르며 할머니가 운을 뗀다.

"너도 그렇고, 윤슬이도 그렇고. 건강하게 잘 지내는 거 같으구나."

"아직 다섯 살이랑 스물다섯 살인데, 건강해야죠."

"흐응... 그래 좋을 때구만."

"할머니도 오래 건강하시구요. 부탁이니까."

"그래, 뭐 골골거리다 가는 것보다야. 건강하다가 죽기 하루이틀 전쯤에 좀 아프다 말구싶다."

소주를 입에 대셔서 그런지 아니면 고향 댁에 계신 탓인지 말씀이 직설적이다.

"윤슬이는 잘 키우고 있는 것 같네?"

"워낙 애가 밝고 순하잖아요."

가끔 와일드해질 때가 있지만.

손가락 총을 난사한다던가.

붕붕이 3호를 거칠게 후방주차한다던가.

지금껏 단 한 번이지만 기습 뽀뽀도 할 정도다.

"으응, 그게 아니야. 나랑 살 때보다도 훨씬 윤슬이 얼굴이 좋아졌어."

"그래요?"

"이 할미랑 살 때는 이렇게 밝게 웃고, 방방 뛰어다니고 하진 않았는데. 주현이 너가 윤슬이 기를 많이 살려준 모양이구만."

"노력은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윤슬이랑 살아서 너무 좋구요.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동생이 같이 있어주니까 삶에도 활력이 도는 느낌?"

"다행이구만."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잔을 깔끔하게 비우신다.

그리고 말씀을 잇는다.

"사실 이래저래 너한테 윤슬이 보내고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러실게 뭐가 있어요."

"할머니가 보면 너도 아직 꼬맹이인데, 꼬맹이한테 꼬맹이 맡기려니 마음이 불편하지."

"그러게요. 그래도 꼬맹이들끼리 마음이 잘 맞는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그니까 마음 쓰실 것 없어요."

"그래, 고맙다. 아주 고마워, 할머니가.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말씀 마세요."

나도 따라서 한 잔을 비운다.

이전에 삼켰던 첫 잔보다 더 쓰다.

할머니는 저렇게 불쑥 미안하다고 하신다.

친모에게서 나를 빼앗아 당신 손에서 돌봐주실 때부터,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씩.

저리 미안하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내 친모의 엄마다.

엄마의 엄마다.

저 미안하다는 말씀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아도 알고 있다.

친모는 어릴 적 나를 학대했고, 그건 변함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할머니께 더욱 감사드린다.

저렇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알바 자리를 잡고 돈을 벌 때까지 키워주셨다.

내겐 은인이다.

"할머니, 제가 요리 하나 더 만들어드릴까요?"

"뭘, 또 하려구? 여기 안주 있구만."

"마른 안주는 이에 안 좋잖아요."

"이거 육포 먹어봐라. 얼마나 부드럽다구."

"잠시만 기다리세요. 할머니 순두부찌개 좋아하시는 거 다 알아요. 제가 끓여다드릴게요."

"나 참... 그래! 오늘 날이다, 아주. 손주가 해주는 음식으로 배 한 번 터추어보자."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스마트폰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매개 음식: 순두부찌개]

할머니의 매개 음식이다.

이걸 드신다면 분명 예전에 운영하시던 기사식당에 관한 기억이 나올 것이다. 그 시절 판매하시던 음식이니까.

그때의 어떤 기억이 할머니의 기억에 깊이 자리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예전의 기억들을 마주하면 할머니 마음에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따스한 기억들이 기적처럼 넘쳐흘러 할머니의 마음을 치유해주지 않을까, 지금껏 다른 매개 음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바램을 안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키운다.

간단한 레시피.

파와 마늘로 기름을 내고, 고춧가루를 마구 섞는다.

그리고 물을 들이부으면 고추기름이 떠오른다.

순두부를 넣으며 간을 맞추곤, 마무리로 계란과 약간의 참기름을 넣어주면 먹음직스러워보인다.

"후룹."

한 입 맛본다.

개성적인 맛은 아니다.

그래서 좋다.

누구나 한 입 떠먹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말 것 같은 맛이다.

집밥스럽다.

"냄새가 좋네, 우리 손주가 식당하더니 요리에 도를 텄나?"

"그 정돈 아니에요. 그래도 순두부찌개는 나름 괜찮을 걸요?"

"그래? 그러면 한 번 먹어봐야지."

할머니 앞에 내어드리자 온화하게 미소지으시는 할머니. 곧장 숟가락을 드신다.

그리고 한 입.

후루룩-

미소 짓던 할머니.

그 미소가 옅어지고,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으신다.

동공이 흔들린다.

찌개가 끓어오르듯 기억이 되살아난다.

**

가족이라곤 단 한 명뿐이었다.

딸내미, 이주희.

남편은 일찍이 죽어버렸다.

열차 사고로 불행히도 죽어버렸다.

세상에 남은 모녀가 불행해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송주현의 외할머니, 안순연은 일해야만 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어떻게든 딸내미는 키우고 싶었다.

남편이 없어도 지켜야할 존재가 있었기에 일해야만 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요리 정도였고, 그 중에서 제일 자신 있는 음식, 순두부찌개.

"순두부찌개가 맛있지."

간단하면서도 대중적인 맛이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끓는다, 순두부찌개.

식당을 차려서 자신 있게 판매하던 음식.

손님들은 좋아했고, 딸내미도 좋아했다.

신물이 날 정도로 맛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좋아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별난 취향이다.

"난 엄마가 요리하는 게 너무 멋있어!"

"흐흥, 됐다 얘."

"진짠데? 난 우리 엄마 순두부찌개가 제일 좋아."

"그래? 그럼 내일 아침에 끓여두고 가야겠네. 우리 딸 먹으라구."

"너무 좋아! 우리 엄마 최고!"

달이 중천에 뜨고, 밤이 깊어갈 무렵.

고된 하루 장사를 마치고, 집에 귀가하면 딸내미가 맞이해주었다. 저런 간지러운 말들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세지도 못할 정도다.

애교가 많고, 감정이 섬세한 아이였다.

늘 느지막이 들어오는 자신을 대신해 집을 지키는 아이.

그런데도 엄마는 왜 이렇게 늦어?

엄마는 왜 나랑 같이 안 있어줘?

같은 불만섞인 소리도 한 번 하지 않았다.

하루에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곤 퇴근을 하고 나서 자기 전까지의 1시간 정도인데 말이다.

그런 나날의 무한한 반복인데 말이다.

'이해심이 많은 아이구나.'

그렇게 결론지었다.

안순연씨는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구태여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건강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는 아이였으니 딸의 심층에 어떤 감정이 자리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딸이 던진, 가슴 아픈 말.

아니, 문장을 마주한 것은 그 아이가 시인으로 데뷔하기 전의 일이다.

노트에 끄적인, 딸의 시를 읽어버렸다.

순두부찌개.

그게 시의 제목이었다.

순두부찌개를 입에 담았다.

반갑다.

엄마를 입에 담았다.

입술이 낯설게 부딪힌다.

습작이었을까?

아니면 이 작품을 시집에 담을 생각인 걸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네 줄짜리 시를 읽고 안순연씨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다.

".... 어떻게하면 엄마란 말이 낯설 수가 있을까."

순두부찌개는 반가운데도 엄마란 말은 입에 담기가 낯설다는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일을 나가고, 집을 비우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딸이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였다.

안순연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편이 죽은 것도.

자신이 순두부찌개를 끓이는 것도.

딸이 엄마란 말을 낯설게 느끼는 것도.

"전부 어쩔 수가 없네."

술을 즐기기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다'는 다섯 글자를 받아들인 무렵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사건은 돌연히 발생한다.

딸내미가 아들을 낳아 몹쓸짓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빼내어 대신 키웠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애한테 엄마 노릇을 못해줬으니까."

엄마로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드무니까.

몹쓸짓이지만.

누구에게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안순연씨, 본인은 딸을 탓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뭐 다른가."

손주, 송주현을 돌본 것은 그런 이유다.

인과응보.

손주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뜬구름처럼 전해졌다.

그날은 손녀에게 순두부찌개를 멕이려 끓이고 있었다. 아들에게도 몹쓸짓을 했으니, 제 딸에게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손녀를 지키고 싶어서 데리고 키웠다.

주희가 더 나쁜 인간이 되는 게 싫어서 데리고 키웠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끓는다, 순두부찌개.

"함모니, 그거 마시써?"

"그럼 맛있지. 할머니가 제일로 잘하는 음식인데. 느이 엄마도 좋아해."

"움... 윤스리두 한 번 묵어바야겠다."

"대신 뜨거우니까 할머니가 후후 불어줄 거야."

"윤스리가 할 쑤 있눈데."

손녀에게 먹일 순두부찌개.

넘쳐흐를까 앞에 서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주희씨의 어머니 되시냐고.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돌아가셨다고.

교통사고가 났다고.

그래서 지금 당장 이리로 와주셔야겠다고.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모르고 싶던 사실을 소름끼칠 정도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부글부글-

부글...

뿌걱!

넘쳐흐른다, 순두부찌개.

안순연씨는 뼈대를 통째로 분실한 것처럼 늑골부터 무너져내렸다.

손주보다 더 멀리 있는 딸내미 이름 한 번 불러보았다.

"주희야, 이주희..."

그 부름은 결코 닿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닿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딸이 세상을 떠나고, 한달 뒤.

윤슬이를 큰 손주, 주현이에게 떠넘기기로 결심했다.

아직 젊은 손주이지만 제 앞가림은 철저히 하는 아이이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다.

윤슬이는 너무도 주희를 닮았다.

곁에 두기엔 종종 죽은 딸이 생각났기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큰 손주에겐 미안하게 된 일이다.

그게 이 이야기의 결말.

순두부찌개가 불러일으킨, 어느 노인의 기억.

그러나 이 기억의 세계는 자애롭다.

"주희야, 이주희..."

그 기약 없는 부름에 답하듯, 새로운 기억이 재생된다.

".... 엄마? 왜 그러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가 안순연씨의 뒤통수를 간지럽힌다.

아니, 이젠 조금 낯설어진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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