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호수의 마음(2)
"우리 아가씨가 그런 생각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랬단 마리에여."
입술을 배쭉 내밀고 있는 동생을 들어안는다.
그리고 등을 토닥인다.
"괜찮을 거야. 왜냐면 호수는 지금 친구가 많이 생겼잖아."
"칭구 마니 생겨써?"
"그럼! 지금 우리도 이렇게 호수 옆에 돌면서 같이 있어주잖아. 그리고 저기 둘레길도 봐봐."
호수를 둘러싸는 산책로.
많은 사람들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거닐고 있다.
가족 단위로.
혹은 친구끼리.
그게 아니라면 연인끼리.
수많은 사람들이 거니는 이 거리는 호수를 끼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도 안 외롭지."
"움... 그래두 윤스리는 걱정이 대여. 혹시 호수는 바다가 보고 시플 쑤가 있짜나."
"그러게. 우리 윤슬이 말이 맞네."
동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호수가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긴 듯하다.
다섯 살인데도 이리 배려심이 깊다.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동생이 그런 부분까지 생각이 미치는 이유.
외로움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동생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고민에 대해 조금 멀찍이 앉아있던 미정 선생님과 유민이에게 전했다.
- 오우, 우리 다섯 살의 감성적인 고민. 마음이 울린다.
- 나두 같이 고민해볼께! 윤슬아.
"웅, 고마어!"
그렇게 우리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작전을 짜는 것이다.
호수와 바다.
두 이산가족을 상봉시킬 대작전.
- 근데 선생님이 생각하기로는 윤슬이가 조금 덜 걱정해도 될 것 같은데.
"움? 왜여."
먼저 미정 선생님이 입을 연다.
- 이 호수가 되게 넓잖아. 우리가 있는, 여기 말고 다른 쪽으로 가보면 습지로 이어지는 길이 있거든. 그 습지 쪽에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이 있어. 그래서 바다랑 호수는 영영 헤어진 게 아니야.
일리 있는 말이다.
바다와 호수.
그 둘 사이에 물길이 나있어, 서로 손을 잡고 있다면.
그 외로움이 한풀 누그러지듯이 보이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윤슬이의 마음은 다른 것 같다.
"그래두 호수가 바다가 대는 건 아니자나여. 떨어진 물이 있어서 걔들은 꼭 외로울 거 같아여."
- 음... 그런가.
그게 그들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딘가 한편으로 이어져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헤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치 윤슬이가 할머니댁에서 나오는 길에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처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전화 통화를 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외할머니와 떨어지는 일은 언제나 아쉬운 것이다.
윤슬이가 직접 표현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 나도 생각해봐써.
이번엔 유민이가 손을 번쩍 든다.
- 바닷물을 호수로 옮겨서 담는 거야. 그러면 바다랑 호수랑 만날 수가 있자나... 어때?
- 그거는 엄마가 조금 반대인데.
- 엥...
- 우리 아들이 너무 이쁘고 똑똑한 생각한 건 맞지만 바닷물을 호수에 붓는 건 별로 안 좋아.
- 왜여?
- 호수보다 바닷물이 짤 수도 있잖아. 그럼 호수 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깜짝 놀래서 도망가버려. 유민이도 갑자기 엄마가 요리를 잘 하게 되면 깜짝 놀라잖아?
- 아아... 그럼 난 진짜루 깜짝 놀래!
- 오오, 그렇단 말이지?
- 으윽.
미정 선생님의 함정 수사가 제대로 먹혔다.
유민이는 본인의 감정을 그대로 실토했고.
실시간으로 볼을 꾸깃꾸깃당하는 중이다.
얼굴이 부드러운 빵떡처럼 쫄깃해보인다.
유민이의 접근 자체는 참신하고 지능적이다.
바다의 일부를 그대로 호수에 붓는다.
그렇다는 건 서로 뒤섞이게 되는 것이니까.
물론 물길이 나있는 것과 직접 물을 섞는 것.
두 가지가 얼만큼의 차이가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큰 차이가 있다!
그렇게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윤슬이가 느끼는 감정은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유민이가 자기 의견을 말했을 때 윤슬이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반응했다.
중요한 건 윤슬이가 호수와 바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게 포인트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겠다.
"윤슬아, 이건 어때요?"
"몬데여?"
"바다에 있던 모래 있잖아."
"웅... 이써여."
"그걸 나뭇잎 배에 실어서 호수 위로 떠나보내는 거야."
"나뭇잎 배?"
"응, 오빠가 나뭇잎으로 배 만들 줄 알거든. 모래를 한 줌 집어서 배에 싣고 띄워보내면 그게 호수 위에 오랫동안 떠있을 거 아냐."
"움... 그치."
"그럼 바다랑 호수는 같은 모래를 공유하는 거잖아. 윤슬이랑 오빠랑 같이 요리 만들어서 먹는 것처럼. 호수랑 바다도 같은 모래를 품고 있는 거야."
"오오...! 그러믄 대겠다!"
내가 제시한 방법은 다행스럽게도 윤슬이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유민이랑 미정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다음 행선지가 정해진 것 같다.
**
경포해변에 도착했다.
리조트에 묵게 된 첫날이 떠올랐다.
그때보다 사람이 더욱 많아보인다.
차라리 우리가 놀던 날은 인파가 덜했던 것 같다.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첨벙첨벙 놀지도 못하고 있다.
여름철 해수욕장에선 빈번하게 있는 일이다.
그 가운데서 모래를 열심히 줍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바보 같은 행동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진지하다.
특히 내 동생이.
"윤스리가, 만나게 해주 꺼야... 바다랑... 호수랑..."
태양열이 모래를 데워 뜨끈했지만 조심해서 쥐면 손으로 못 잡을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플라스틱 물통에 모래를 조금씩 담았다.
바다의 마음이 담긴 모래 한 줌을.
**
다시 호수로 되돌아왔다.
자전거가 있었으므로 차량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해수욕장에 인파가 몰렸던 만큼 인근 교통상황도 살벌했기에.
호수로 되돌아와서는 적당한 나뭇잎을 찾느라 시간을 보낸다. 이쁜 것보다는 크고 튼튼한 나뭇잎을 골라야 한다.
그러는 쪽이 더 배를 만들기 쉽다.
- 근데 너 나뭇잎으로 배도 만들 줄 아니?
"그럼요."
미정 선생님이 옆에서 나뭇잎을 찾다가 말고 말을 걸어온다.
- 오오, 뭔가 낭만적인데? 누구 꼬실라구 연습했냐.
"그런 거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누구 꼬시려는 연습을 도와드리다가 저절로 배우게 된 거죠."
- 응? 그건 뭔 소리래.
나뭇잎을 찾다가 이런 과거를 떠올릴 줄은 몰랐는데.
내게 나뭇잎 배 접는 법을 알려준 건 강씨 아저씨다.
그 아저씨와 사이가 그럭저럭 사이가 좋아졌을 때쯤이었다. 스몰토크 도중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야, 주현아. 나랑 같이 나뭇잎 배 접어볼 생각 없냐?'
'갑자기요?'
'왜냐면 내일모레 나랑 영현이 결혼기념일이거든.'
'결혼기념일 선물로 나뭇잎 배를 접어서주시겠다?'
중년의 선물치곤 지나치게 풋풋하지 않은가.
발 벗고 나서서 말리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같이... 저기. 그, 욕조에 들어가서. 그... 물에 띄우고.... 그...'
유난히 말을 더듬는 아저씨는 아직도 기억 속에 맴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19금이었으므로 생략한다.
중년들의 결혼 기념일 이벤트를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이야. 뭔가 내 미래를 스포당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아저씨가 나뭇잎 배를 접었던 이유는, 그 안에 선물할 목걸이를 띄워서 분위기를 띄워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접을 줄 아는 나뭇잎 배 안에도 가벼운 것이라면 태울 수 있다.
- 흐응... 그래? 그 아저씨 되게 스윗하시네.
"그쵸, 좋은 사람이에요."
본인 아내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 부분만큼은 꼭 닮고 싶다.
- 그래서 그 이벤트는 성공했다니?
"아뇨. 대실패."
- 으응? 너랑 접는 연습까지 해두고서는 실패했다고?
"네, 왜냐면 나뭇잎 배가 목걸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했거든요."
- 으아, 저런. 그건 맹점이었네.
"근데 분위기는 좋았대요."
- 아무렴. 그러셨겠지.
쫄래쫄래-
그 사이 꼬맹이 두 명이 나뭇잎을 잔뜩 발견해왔다.
다행히 개중에서 쓸만한 게 있었고, 나뭇잎 배를 접는 것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오! 진짜루 배다. 옵바가 만드러써. 어뜨케 한 거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신기했는가보다.
윤슬이는 기웃거리면서 나뭇잎 배의 모양을 요리조리 살핀다.
"다음에 하나 더 만들어줄게."
"역씨... 우리 옵바는 모든지 잘 만드러."
호들갑떠는 것도 귀엽다.
배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호수에 띄워 떠나보내는 것.
윤슬이에게 모래가 담긴 플라스틱 보틀을 건네주었다.
"배에 조금씩만 담아봐."
"움... 알게써."
윤슬이는 찔끔찔끔 쏟아 배에 모래를 채웠고.
너무 많지 않은 양이 나뭇잎 배에 깔렸다.
그리고 호숫가로 가서 윤슬이 손에 배를 쥐어준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동생.
조심조심 호수의 수면 위에 배를 얹고.
둥둥-
배가 떠올랐을 때.
궁둥이를 밀어주듯이 살포시 밀어주자.
스스스스...
배가 떠나간다.
떠나간다.
멀리멀리.
떠나간다.
"옵바, 저거 너머지지는 않겠찌?"
"안 넘어질 거야. 왜냐면 오빠가 엄청 튼튼하게 만들었거든."
"웅, 윤스리는 옵바 미더여."
작은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동생.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알 것만 같았다.
결코 저 배가 어딘가 멀리로 떠나가지 않고, 호수 위에 오래도록 떠있어서.
사실 바다와 호수는 한 가족이었다고 알려주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기를.
윤슬이는 바라고 있다.
여리고 작은 나뭇잎 배가 한 점으로 작아져,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날이 저물었다.
저녁이 된 것이다.
우리는 다시 리조트로 돌아가 강릉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만끽하기로 했다.
"선생님이랑 유민이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 됐어. 우리도 나름 재미있었거든. 언제 이런 풋풋한 경험해보겠니? 휴가 끝나면 다시 일하러 돌아가야 되는데. 그리고 유민이 좀 봐봐.
유민이랑 윤슬이.
두 아이는 내가 따로 접어준 나뭇잎 배를 하나씩 들고 즐겁게 떠들고 있다.
휴가 내내 보았던 강렬한 태양처럼 눈부신 미소를 띠며.
- 우리 아들이 내성적이라 저렇게 웃고 다니는 경우가 잘 없어. 유치원에서도 그다지 친구도 없고. 근데 이렇게 휴가 나와서 자기 또래 친구랑 재밌게 노는 모습 보니까... 난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가끔 내 또래들이나 칠 법한 장난을 쳐서 그렇지.
김미정 선생님도 엄마였다.
"윤슬이도 유민이가 베프라고 생각하거든요. 가게 다시 열면 자주 오세요."
- 그럴 계획이야. 우리 아들이 내 음식을 못 믿는 것 같아서.
운전대를 잡은 채로 눈알을 굴리다가 한 마디를 덧붙이는 미정 쌤.
- 그런 의미에서 그냥 저 둘이 결혼시키자니까?
선생님 입에서 결혼이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민이가 움찔하며 볼을 밝힌다.
이토록 강렬한 분노를 느낀 적은 없다!
....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는 곧장 서울로 돌아왔다.
여행의 피로를 집에서 풀자는 취지에서 마지막 날은 빠르게 귀가했던 것이다.
윤슬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 얼굴을 봐야겠다며 영상 통화를 요구했다. 그 통화 중에 한 가지 놀랠만한 포인트가 있었는데.
- 뭐야! 윤슬이? 집 잘 들어갔어?
주문진에서 낚시할 때 뵀던 할아버지와 우리 외할머니가 여럿 모여서 함께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정말 두 분이서 오랜 지인이긴 하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할머니 아파트랑 주문진이랑은 꽤나 떨어져있는데 말이다.
우리 할머니의 인맥은 강릉의 어느 지역까지 퍼져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