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스토커는 아닙니다, 진심으로(4)
백수인씨의 식사 시간은 짧지 않다.
많이 먹으니까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편이기도 하다.
역류성 식도염과는 거리가 먼 생활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어찌 보면 본업이 작가인 터라 식사 시간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백수인씨가 13인분째 그릇을 비울 때쯤.
손님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고.
만들어야 할 요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겼다.
"오오...! 오늘 이니 언니 음청 마니 머거!"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종류 별로 메뉴를 주문하여 드시는 중이라 더욱 테이블이 풍성해보인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 으적으적... 꿀꺽, 열세 그릇째 먹는 손님한테 할 질문은 아니죠.
"뭐, 그렇긴 한데. 말문을 좀 트고 싶어서요."
- 설마 아까 그 얘기 때문에?
"그런 셈이죠."
- 아후, 뭐 궁금한 거 있으면 얘기는 해주겠지만. 아직 다른 손님들도 있어서 조금 이따가 하면 안 될까요?
그 소설.
[악마대공님의 딸이 되었는데요]
우리 남매가 모티브가 된 소설의 이야기다.
유독 신경 쓰여서 질문하고 싶은 부분이 생겼다.
백수인씨가 식사를 마치기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어플을 통해 그 소설을 훑어보며.
내용보다는 그 전반적인 분량이 신경 쓰인다.
아직 완결이 난 소설은 아니지만 주 4회 연재에 161화까지 연재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그 분량이 너무도 신경 쓰인다.
이윽고 백수인씨가 15그릇 째를 비우고는 배를 문지른다. 옆에서 윤슬이는 '이 괴물은 뭐지?'라는 표정으로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그건 발코니 쪽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자주 오는 분들인데, 백수인씨가 신기록을 경신한 모습에 놀라신 듯하다.
바깥, 성북천 쪽 경치를 보라고 발코니 쪽을 뚫어놓았더니 이 대식가가 어그로를 다 끌어버리고 있다.
- 후우,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잘 들어가네. 역시 여기 밥이 제일 맛있어.
그 시선들에 설명이라도 하듯 혼잣말.
우선 그릇들을 치운다.
그때 윤슬이가 수인씨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는데.
"우어?! 이게 모야. 땡땡하다!"
- 언니 배 찌르구 그러면 안돼. 쑥스럽잖아.
"아앙... 미아내. 싱기해서 윤스리가 실쑤해써."
확실히 사람 몸에 15인분이 들어가는 모습을 직접 보면 저렇게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땡땡하단 얘기는, 그 안에 음식들이 가득 차있다는 거겠지.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다. 위는 경우에 따라서 고무처럼 팽팽하게 늘어날 수도 있다고.
손님들이 슬슬 돌아갈 때쯤, 나는 소설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우고 백수인씨에게 보이며 대뜸 묻는다.
"저, 궁금한 게요. 이거 지금 161화까지 연재돼있잖아요."
- 응... 네, 맞아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라고요. 수인씨가 저희 가게 들른 시점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4월 말에서 5월 초쯤일 거란 말이죠."
말 그대로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그러나 수영이나 지아, 연우씨와 혜원씨 부부 등과는 다르게.
단골 중에서도 백수인씨는 조금 늦게 다니기 시작한 편에 속한다.
"그런데 저희를 모티브로 썼다면 집필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신 거 아니에요? 지금이 8월 말이니까."
그때부터 시작해서 넉넉 잡아 4달 정도의 기간이 있다고 하자. 그럼 달에 40편씩의 원고를 작성한 것이다.
그게 쉬운 일처럼 생각되진 않는다.
심지어 그 기간 동안 퇴고와 플랫폼 및 출판사와의 협의까지 해야되지 않았겠는가.
그게 물리적 시간 상 가능한 일일까?
- 그, 그건.
"뭔가 아직 말씀 안 하신 게 있는 거 같은데."
- 흐어, 진짜 주현씨. 안 그렇게 봤는데 눈치가 엄청 빠르시네.
"원래 우리 옵바가 쫌 똑또캐. 그래서 저번에 쿠이즤~ 에서도 2등이나 했거둔."
백수인씨는 내가 추궁한 것을 듣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모든 것을 실토한다.
우리 남매를, 아니 그 이전에.
나를 처음 본 날에 대하여.
**
바람을 맞으며 무작정 달리는 일.
작가가 되고 나서 키보드를 만지는 시간보다 바이크의 핸들을 만지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글이 막힐 때마다 외출한다.
바이크를 타고 도심 속 도로를 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면 없던 아이디어도 샘솟는다.
백수인의 개인적인 리프레쉬 방법이다.
그런 날이었다.
머리 속에 뒤죽박죽 섞인 잡생각을, 하나의 상업적인 아이디어로 정리하기 위해 백수인은 그날도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맞닥뜨린 세렌디피티(serendipity).
정말로 우연히도 주현윤슬 남매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과장 보태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비주얼.
그리고 톡톡 터지는 티키타카.
동생을 향한 꿀 떨어지는 눈빛까지.
"이거다...!"
백수인은 두 사람을 처음 보고는 대박의 예감을 감지했다. 그건 5년차 작가 특유의 여섯 번째 감각이었다.
정확히는 남매가 강필중과 진호연을 대접하기 위해 마트에 가던 길이었다.
두 남매가 바이크를 타고 멀어지는 백수인의 등에다 대고, 동시에.
""머, 머싯다!""
라고 중얼거린 날.
그 순간 백수인의 머리 속에서는 육아물에 대한 아이디어가 화산처럼 뿜어져나왔다.
대박작, [악마대공님의 딸이 되었는데요]가 시작된 순간이다.
그러나 백수인은 이제야 스물 일곱이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를 해본 적이 '무려' 없다.
당연히 자식이 없다.
외동이며, 사촌들 중에서도 본인이 막내다.
육아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다.
물론 소설은 창작의 영역.
상상력으로 어떻게든 커버해볼 수는 있겠으나.
"소스가 없으니, 상상력으로 살을 더하는 것도 힘드네."
기본적으로 밑천이 모자라니, 재밌는 아이디어를 구성지게 글로써 정리하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하여 결심한 것은.
"이건... 스토킹이 아니야. 그냥, 아이디어를 몇 개 가져오는 거라고."
그 남매를 관찰하며 소설 전개를 위한 아이디어를 캐는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을 찾는 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도중에 그냥 다른 어린이집이나 견학하여 아이디어를 인풋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 남매가 아니면 안 된다."
기묘한 아집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그 남매의 비주얼과 티키타카는 어디서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악마대공 딸내미의 모티브가 된 윤슬이.
그 여자아이의 캐릭터성은 또래 아이들의 그것과는 차별되는 구석이 있었다.
작가로서 너무도 탐이 났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언제나 소설에 큰 보탬이 되니 말이다.
운이 좋게도 남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누이 식당을 개업했고, 마침 그 동네는 백수인이 거주 중인 곳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오누이 식당의 단골이 되었다.
실제로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식사까지 챙기게 되었다.
요리를 즐기는 편이 아닌, 자취생인지라 건강에 해로운 튀김류를 주문해서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누이 식당에서는 채소류와 탄수화물, 단백질까지 고루 챙길 수 있는 식단을 구성해주었다.
그러니 많은 양이 저절로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젠 오누이 식당 밥을 안 먹으면 버틸 수가 없잖아?!"
그러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원래는 소설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들렀던 곳이었는데.
어느새 생활 루틴이 되어 주에 5번 이상은 꼭 들리는, 주된 식량의 공급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식당의 남매에게는, 현재 대박이 난 소설의 아이디어까지 몰래 제공받았으니.
수익을 조금 안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지금에 잇따른다.
**
"생각보다 저희를 오랫동안 스토킹하셨군요?"
"움? 스토커? 그거눈 나뿐 건데. 윤스리두 알어."
- 아니에요! 스토킹은 안 했다고요. 그, 그냥 조금 재밌게 노시는 것 같아서. 구경하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받은 것뿐이에요.
"하지만 저희한테 허락도 안 받고, 뒤에서 몰래 따라다닌 건 맞잖아요."
- 그건 맞아요. 거듭 죄송합니다...
수인씨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정도면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다.
누구에게 피해가 간 것도 아니고.
또,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우리 남매가 귀여워보여서 소설에 적고 싶었고, 그걸 단지 여태껏 밝히지 않은 것뿐이니까.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매너가 덜 된 부분이기도 하다.
"움... 옵바, 용서해주는 게 조케써. 왜냐믄 이니 언니는 우리 가게 마니 오자나. 밥두 음청 마니 머거주자나."
"그건 맞지."
솔직히 손님 단독으로 보면, 백수인씨만큼 우리 가게 매상을 올려준 손님은 없다.
그 부분은 단언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용서해주고 싶지만.
대국적으로 생각하자.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수인씨, 혹시 그런 거 있어요? SNS 작가 계정 같은 거."
- 작가 계정? 그런 건 따로 없지만. 제 소설 팬 아트 보내주시는 독자분들이 있어서. 팬아트 전시용 SNS 계정은 있는데. 그걸 제가 직접 관리하긴 하죠.
"마침 잘 됐네요. 그럼 그 팬아트 전시용 계정에 우리 가게 좀 홍보해주세요."
- 가게 홍보요?
"네, 뭐 별다른 멘트는 필요 없고. 소설 작성하는데 모티브가 된 식당이라고만 적어주시면 될 것 같은데. 아, 이건 무조건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부탁이니까요."
그러나 약간의, 보이지 않는 강제성이 있다.
아무튼 수인씨는 우리에게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는 상황이니까.
- 으음... 사실 안 될 건 없죠. 가끔 팬아트 말고, 제 개인적인 잡담을 올릴 때도 있으니까요. 또, 그렇게 해드리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암튼 이 식당에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오늘 내일 중으로 해드릴게요!
"이니 언니가 우리 식당 더 잘 대라구 도와주는 거야? 너무 고마어!"
동생은 덥석 수인씨를 끌어안는다.
그런 윤슬이를 받아주며 약간 미안한 듯한 표정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거래 아닌 거래가 완료되고, 수인씨는 다시 원고를 집필하기 위해 자택으로 돌아갔다.
브레이크 타임이 되어 윤슬이에게 히트작, [악마대공님의 딸이 되었는데요]를 읽어주는데.
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자 빙의된 캐릭터인 리시아는 5살인 터라 발음이 부정확하다.
그런 탓에 악마 대공에게 아빠가 아닌 '압바'라고 부른다.
이 얼마나 디테일이 살아있는 설정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윤슬이는 그 설정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리시아: 압바, 시아가 이거 혼자서 해써. 대다나지?]
라는 대사를 읽어줬더니.
팔짱을 끼며 콧김을 내뿜는 5세.
"윤스리는 말 똑바루 할 쑤 있눈데. 이거 윤스리 보구 만든 거 아닐 거야. 그치 옵바?"
그렇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