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맑은 하늘 우산(1)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퍼지는 백색 소음.
사람들은 분주한 듯 걸으나 그 속도는 빠르지 않다.
대부분이 유니폼처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으나, 그걸로 소속감을 느끼진 못할 것이다.
인근 대학 병원에 와있다.
윤슬이나 내가 아픈 것은 아니고, 건강검진을 위해서다.
성인이 되고 나선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쯤 의무감이 들어서 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윤슬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갑자기 아프거나 하면 곤란하니, 미리미리 건강을 챙겨두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우무무무... 옵바, 넘무 오래 걸린당."
"그러게.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기네? 지루하지?"
"갠차나. .... 진짜루 갠찮거둔."
콩콩콩콩-
괜찮다면서 자기 머리를 내 팔에 툭툭- 부딪히는 윤슬이.
내심 안 괜찮지만 그래도 티를 안 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얼마나 인내심 강한 5세인가.
이래 봬도 오늘 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에서 대기했으니 지칠만도 하다.
무언가에 열중하여 일하는 것보다 그저 하염없이 대기하는 게 정신적으로 더 피로하니 말이다.
그나마 간단한 검사 때는 옆 간호사분께 동행을 부탁드려 같이 있긴 했지만, 수면 마취가 필요한 검사 때는 백수인씨를 잠깐 불러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 제 소설 에피소드로 참고해도 괜찮다고 하시면 무조건 가드릴게요.
라고 하길래 부담 없이 부탁할 수 있었다.
내가 수면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원고를 쓰고 싶은 마음이 뿜뿜 터진다며 재빠르게 귀가했다.
이윽고 접수처에서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집으로 가자니깐 그제야 윤슬이 표정이 밝아지며 해맑게 내 손을 잡는다.
모처럼 휴일인데, 나를 따라와서 고생을 한 동생.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검사를 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
얼마 전에 할머니께서 이런 문자를 보내셨다.
[외할머니: 주현아, 너 요즘 가슴 아프거나 하지는 않지? 숨쉬기 답답하거나 뭐가 막 걸린 것 같은 느낌 들면 꼭 병원 가라.]
할머니께서 저렇게 걱정 섞인 문자를 보내신 이유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수술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심장 관련해서 말이다.
무슨 질병인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우리 아빠가 나처럼 심장에 문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내 심장에 문제가 있던 것은 유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주 어렸을 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그런지 지금껏 별 문제는 없다.
건강검진 중 조언을 주신 간호사분께서도
- 수술 이력 있기는 한데, 그다지 문제되는 부분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직 한참 젊기도 하니까, 당분간은 큰 문제 없을 거예요. 그래도 시간 날 때 꼭 건강검진 한 번씩 들리시고요.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중에 할머니께 건강검진 해봤는데, 별 문제 없었더라고 따로 연락을 드려야겠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슬이가 자꾸 내 눈치를 보더니 바짓자락을 꾹꾹 잡아당긴다.
"왜 그러시나요."
"옵바, 윤스리한테 할 말이 업나여?"
"윤슬이한테 할 말? 뭐가 있을까요?"
"그거룰 옵바가 맞춰야지여."
어떤 주장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지만 밑에서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동생이 귀여운 나머지 시치미를 뚝 떼기로 한다.
그러자 윤슬이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오른다.
"이잉... 윤스리 오늘 오래 기달렸눈 거 옵바두 아는데."
"그렇네. 우리 윤슬이가 오래 기달렸는 건 오빠도 알지."
"그러문 칭찬을 해조야지! 어뜨케 한 마디두 없을 쑤가 있찌?"
"서운하구나?"
"당연해. 지금 서운해질라구 그래."
"오빠가 어떻게 해드리면 우리 윤슬이 서운한 게 풀릴까요?"
"그거눈 옵바가 잘 생각해바!"
단단히 화가 난 듯 고개를 훽 돌린다.
근데 그러면서도 내 바짓자락은 놓치지 않고 꼭 잡고 있는 게 포인트다.
귀여워서 행복사 할 것 같다.
아무래도 건강검진 때 동생이 너무 귀여우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심장에 해로울 정돈데요.
라고 여쭤볼 걸 그랬다.
나는 가방에서 맛짱짱 초코 우유를 하나 꺼낸다.
놀랍게도 진짜 제품 이름이 '맛짱짱 초코 우유'다.
"그... 그거눈?!"
"흐흐,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해놨을 것 같나?"
"앗, 이건 윤스리두 몰랐눈데. 츄릅."
윤슬이가 침을 흘린다.
이건 내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초콜렛을 좋아하는 데다가 우유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좋아하는 두 가지 식품.
우유와 초콜렛을 합친다?
최강이라는 얘기다.
좋아하는 것 + 좋아하는 것 = 매우 좋아하는 것.
대략 이런 이치.
윤슬이에게 곧바로 빨대를 꽂은 맛짱짱 초코 우유를 넘긴다. 앙증맞은 손으로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인다.
"흥, 이거믄 용서 가능이지. 앞으루 윤스리한테 이런 거 준비해놨으믄 숨기지 말아조."
"숨기지 말고, 진작에 말을 해야돼?"
"후루루루룩-! 웅, 안 그러므는 서운하자나."
"알겠습니다, 아가씨."
우리 동생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맛있게 맛짱짱 초코 우유를 흡입한다.
후루루룩-
후루루루룩-
그렇게 맛짱짱 초코 우유를 몇 번 흡입했을 때쯤 동생이 다시 내 바짓자락을 쿡쿡 잡아당긴다.
"응? 왜 그래."
"옵바, 근데 있짜나. 뒤에 바바."
"뒤?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평범한 길거리.
가게로 향하는 길이지만 이 근처는 한적하다.
그다지 눈에 띠는 것은 없다.
뒤에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계신 할머니 정도.
....
아니다.
확실히 신기한 점이 있긴 하다.
그 할머니가 되게 의외인 행동을 한 가지 하고 계신다.
"저 할머니 때문에 그래?"
우린 목소리를 작게 낮춘다.
"움... 맞어. 근데 있짜나 옵바. 저 함모니가 아까부터 윤스리랑 옵바 따라오구 이써."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고?"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저 할머니께서 무엇하러 우릴 따라오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던 중 윤슬이가 보충 설명을 한다.
"저 함모니, 아까 우리 병언에 있을 때두 있었눈데. 지금두 이써, 우리 뒤에."
그 말까지 이어서 들으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마 이 말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 수면 마취에서 깬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쪽은 윤슬이다.
대기 시간도 길었으니 오히려 병원에 누가 있었는지 더 잘 기억하는 쪽도 윤슬이일 것이다.
"일단 계속 걷자. 혹시 모르잖아. 그냥 방향이 같은 걸 수도 있으니까."
"움... 근데 아까 맛짱짱이 꺼내느라구 잠깐 멈춰 있을 때두 저 함모니 멈춰써."
그게 정말이라면 두 가지 지점에서 놀랍다.
그 디테일에 눈치 챈 우리 다섯 살의 시신경.
그리고 저 할머니가 하고 계신 한 가지 특이한 행동과의 연관성.
나는 윤슬이 손을 잡고 태연하게 걷는다.
딱히 별다르게 눈치 챈 게 없다는 듯이.
같은 속도로.
자연스럽게.
원래 자연스럽게, 라는 것은 의식하면 더욱이 어려워지는 법인데. 실제로 그렇다.
나와 윤슬이 모두 걸음걸이가 어정쩡해지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뉘역뉘역 해가 저물고 있고.
구름은 띄엄띄엄 하늘을 가린다.
**
가게에 가까워졌을 때쯤.
확실해졌다.
저 할머니는 우릴 따라오고 있는 게 맞다.
가게 문을 열려고 하자 할머니께서 똑같이 멈추어 우릴 바라보고 있는데.
심지어 열 발자국 정도밖에 거리가 차이나지 않는다.
명백히,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다.
우선 가게를 열고 윤슬이를 내 뒤쪽으로 숨긴다.
그리고 할머니께 말을 먼저 건넸다.
"어쩐 일이세요? 혹시 손님이신가요? 죄송한데, 오늘 제가 건강검진을 받게 돼서 가게 휴일이거든요. 다음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접어 땅을 쿡- 찍은 뒤 나에게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다가온다.
그리고 자기 손을 내 어깨에 툭 올려두더니.
- 나 밥 줘.
라고 하신다.
"움...?"
"밥, 이요?"
- 응, 나 배고파. 밥 줘. 빨리.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우리 가게 문을 밀고 멋대로 들어가신다. 그 할머님 손엔 여전히 우산 한 개가 들려있다.
할머니가 하고 계시던 특이한 행동 한 가지.
우리 뒤에서 줄곧 우산을 핀 채로 쓰고 계셨다.
날이 맑아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오늘 비가 내렸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 저 할머니는 병원에서부터 따라오셨다고 했다.
우리가 있던 곳은 인근의 대학 병원이다.
오누이 식당 근처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택하다보니,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거기에 줄곧 있다가 우릴 따라오셨다고 한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윤슬이를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나도 들어간다.
할머니는 테이블 쪽에 앉아서 우산을 휘휘 흔들며 순진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 나 배고프다니깐! 밥 줘!
라고 한 마디 더 하신다.
"움... 혹씨 밥 맡겨두셨나여, 함모니?"
시비조가 아닌 걸 봐서 5세는 진심으로 궁금한 것 같다.
- 아니. 저번에두 줬잖어. 그러니까 오늘두 달라는 거지. 왜? 안 돼?
"움... 안 대는 거눈 아닌데. 그래두 더 착하게 말해야지 우리 옵바가 밥을 주지여."
- 착하게? 어떻게 하면 착한 건데.
"움... 그거눈 넘무 어려운 질문."
윤슬이랑 대화를 이어나가는 할머니.
다섯 살 난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발음도 꽤 어눌하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행동도 천진난만해보인다.
온건하지 못한, 병명 하나가 내 머리 속을 스친다.
[알츠하이머]
우선 잘 챙겨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차피 밥은 가게에서 윤슬이랑 챙겨먹고 귀가할 생각이었다.
병원에서 집까지 가는 길 사이에 오누이 식당이 있기도 했고. 여기서 저녁을 챙겨먹는 편이 내가 더 편해서.
식당 문을 닫는 날임에도 굳이 여기까지 걸어온 이유다.
"우선 앉아계세요. 저희랑 밥 먹고 돌아가시죠."
- 응, 그래. 고마워.
몸 상태가 온전치는 못하지만 요리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면 마취하면서 충분히 잠을 자기도 했고.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도 큰 문제 없었으니 팬을 휘두른다고 큰 일 날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남매 밥 챙겨먹는 김에 할머니한테도 밥 한 끼를 챙겨드려야겠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렇다.
꼭 어느 노인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병이 아니기에 매몰차게 대하고 싶지 않다.
또, 배가 고프신 것 같다.
우리 식당에 들어온 사람이 배를 주리는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밥 한 끼 정도 챙겨드린다고 벌 받진 않을 것이다.
"재료가..."
냉장고를 열며 남아있는 식재료를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