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먼 곳의 벗을 그리다(4)
결국 시온은 무지개 다리를 넘어갔다.
시후의 무릎 위에서.
비틀거리는 다리로 어떻게든 시후의 무릎까지 올라선 채로.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최후를 맞이했다.
예견된 이별 앞에 윤슬이는 훌쩍이다가 내 바지에 얼굴을 묻었고.
시후네 부모님은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다만 시후만큼은 울상을 짓되 끝내 흐느끼지 않았다.
내가 괜찮냐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시후는 자신의 부모님 앞으로 다가갔다.
힘이 빠진 시온을 품에 안은 채로.
이렇게 말한다.
- 시온... 보내주자.
그 말이 떨어지자 우린 시후네 부모님과 함께 주택의 넓지 않은 뒷마당에 시온을 묻어주었다.
울음을 애써 참는 듯 촉촉한 눈가를 비벼대는 시후에게 윤슬이가 슬며시 다가가 묻는다.
"시후... 갠짜나? 마니 슬퍼?"
- 으응... 슬퍼. 마니마니 슬퍼.
"안 우러?"
- 응, 안 울어. 왜냐면 시온 앞이자나.
"웅..."
- 내가 울면 시온이 슬퍼하니깐, 안 울어. 시온이랑은 이제 못 노니깐. 그래두 마지막에는 좋은 모습 보여주고 시퍼. 그래서 안 울어...
"웅... 시후 대다내."
윤슬이는 내게 가끔 해주듯, 혹은 내가 가끔 해주듯 자기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시후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그런 윤슬이에게 시후는 가만히 안겨있다.
눈길은, 뒷마당 한 켠에 불룩 튀어나온 시온의 무덤으로 향한다.
시온의 장례는, 그녀의 친구들이 추도하는 가운데 짧고 조용하게 끝냈고.
시온이 우리에게 맡긴 편지는 그날 시후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윤슬이는 내게 물었다.
"옵바, 시오니는 나즁에 대므는 그래두 돌아오겠찌?"
윤슬이는 그러니까, 시온과의 헤어짐을 죽음으로써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영혼 혹은 마음이 육신에서 멀어져 무지개 너머로 갔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런 윤슬이에게.
"그럼,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돌아올 거야."
라고 대답해주는 수밖에는, 내게 방법이 없었다.
**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9월도 하순을 향하는 무렵.
슬며시 공기의 온도가 차게 식는 듯한 기미가 보일 때쯤.
우리 가게엔 한 명의 베이비가 늘었다.
"시후! 손니미 온당."
- 응!
내가 특별히 부탁을 해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두 명의 베이비는 문 앞에서 본인들끼리 꽁냥대면서 놀다가 손님이 오는 기미가 보이면 벌떡 일어나서.
""어서오세여!""
- 어이구, 시후랑 윤슬이네?
이렇게 손님들을 맞이해준다.
윤슬이보다 두 살 많은 시후는 의젓하고 침착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5세에 비해 근육도 제법 붙은 것인지 냉장고를 열 때도 딱히 고전하지 않는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윤슬이의 질투를 사기도 했다.
"우우... 윤스리는 아직 냉장고 몬 이기눈데."
- 윤슬이는 냉장고랑 싸우는 거야?
"그런 거눈 아니지만. 흥! 돼써. 암튼 윤스리가 대장이구 보쓰니깐 그러케만 알어."
- 응... 아라써. 윤슬이가 보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5세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걸 보아하니 시후는 만약 동생이 있었더라면 좋은 오빠 혹은 형이 되었을 것 같다.
가끔은 서빙을 도와주겠다며 간단한 디저트 그릇을 옮겨주기도 한다.
- 주혀니 형아! 저가 옮길래여.
"괜찮겠어?"
- 응! 믿어바여.
"그래, 대신 혹시 떨어뜨릴 것 같으면 그릇은 깨도 되니깐 몸 조심해야 돼."
- 안 떨어뜨릴 쑤 있어여.
그렇게 시후가 옮겨준 디저트는 손님들의 만족도를 더욱 높이곤 하여 우리 가게엔 적지 않은 이득이 된다.
[오누이 타이쿤!]
[고객이 응대 서비스에 감동합니다.]
[식당 만족도가 7% 상승했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마저도 윤슬이의 질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시후가 멋지게 서빙을 성공시킬 때마다 윤슬이는 내 다리 뒤에 몰래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이를 간다.
"으윽... 윤스리두 저 정도눈 할 쑤 있눈데."
"대신 우리 윤슬이는 사이다 당번이지요?"
"움... 그렇타구 볼 쑤 있찌."
"윤슬이는 여기서 대기하다가 다른 손님이 사이다 주문하시면 잽싸게 달려가서 가져다 드리자?"
"웅, 그게 좋케써여."
다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복귀.
5세, 이따금씩 이토록 단순하다.
시후가 이렇게 우리 오누이 식당에서 함께해주게 된 것은 며칠 전부터다.
시후 어머니와 함께 시후가 직접 가게로 찾아왔다.
- 혹시 괜찮으면 오전 시간에만 시후 봐줄 수 있으세요, 주현씨?
시후 어머니가 먼저 부탁하셨다.
사정은 이랬다.
본래 시후가 면역 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판명이 된 이후로, 시후의 어머니는 일을 잠시 그만두시고 집에서 아들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고 하신다.
헌데 이제 시후는 거의 완치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슬슬 본업에 복귀할 준비를 해야되는데, 그렇다고 시후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그때 시후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한다.
- 엄마, 나 윤슬이랑 놀래.
라고.
그리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우선 오누이 식당에 부탁을 해보고자 찾아오셨다며.
장사에 방해는 안 되게 일러두고, 어느 정도 수고비를 우리에게 줄 테니 안 되겠냐고 물어보시는 것을.
'수고비는 괜찮으니까 시후한테 간단한 일만 돕게 해도 괜찮을까요?'
라고 말씀드렸다.
시후 어머니는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셨고.
윤슬이는 기뻐서 폴짝 뛴다.
그런 윤슬이에게 한 발자국 다가와 손을 맞잡는 시후.
"오오! 그러믄 시후 이제 맨날 놀러와?"
- 응! 윤슬이랑 주혀니 형이랑 놀러.
두 아이는 다정한 눈빛을 주고 받는다.
만약 이 장면을 6세 차유민군이 목격한다면 어떤 전개가 이뤄질지 대략 예상이 되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기대 중이다.
좌우지간 시후는 우리 가게에서 아주 간단한 일만 돕게끔 하며 임시 알바생으로 쓰는 중이다.
시후가 하는 일: 손님한테 음료 꺼내드리기, 손바닥만한 디저트 그릇 옮기기, 손님 맞이 인사, 식당 내부 분위기 띄우기
이 정도다.
디저트 그릇 옮기기를 제외하면 윤슬이랑 딱히 다를 바도 없다.
그럼에도 시후가 함께 해주기에 윤슬이의 텐션이 더욱 높아져 가게 분위기가 살아나서 좋은 것 같다.
이윽고 오전 파트가 끝나고.
브레이크 타임이 되었다.
오늘은 시후의 어머니가 약간 늦게 오신다며 평소보다 두 시간만 늦게 애를 데리러 가도 되겠냐고 물어보셨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스러웠던 게 브레이크 타임엔 저녁 장사를 준비해야 되기에 나름 바쁘다.
그 점이 신경쓰였는데.
[30만원이 계좌로 송금되었습니다.]
은행 어플에서 띄운 알림 문자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시후네 어머니는 굉장히 좋은 분이신 것 같다.
30만원 펀치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이건 기회였다.
아직 시후에게 전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타이밍을 재느라 윤슬이랑 나랑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오늘이야 말로 그걸 전할 때인지도 모른다.
시온이 시후에게 전하는 마지막 마음.
"시후 이거 바바."
- 응, 보여줘.
윤슬이는 자신이 나무 권총으로 채소를 저격하는, 몇 달 전에 찍은 영상을 시후에게 자랑하는 중이다.
자신의 무용담을 시후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전혀 만만한 5세가 아니란 것을 어필하고 싶은 모양이다.
- 오오~ 대단하네? 우리 윤슬이가.
"그치? 윤스리 대다내. 보쓰야."
- 응, 그렇네? 보쓰다. 보쓰. 시후가 부하야.
"당연해! 시후랑 유미니랑 루이. 다 부하야! 윤스리가 보쓰라구. 웅... 그래두 칭구야."
거의 시후가 윤슬이를 부둥부둥해주는 흐름이다.
윤슬이는 너무 자신을 올려치다가 무안해졌는지 금세 친구라며 말을 되돌린다.
꼬맹이들의 대화가 귀여워서 무심코 눈길이 간다.
꼬마들이 테이블 한 켠에서 떠드는 것을 구경하며 찐 고구마를 내어간다.
슬슬 긴 팔 시즌이라 하나씩 쪄먹을 생각으로 따로 구매해두었다. 저번에 할머니가 보내다주신 건 진즉에 다 먹거나 팔아버렸다.
윤슬이도 목이 막힌다고 툴툴거리면서도 고구마를 쪄주면 맛있다고 먹는다.
나도 쪄서, 썰어두면 하나씩 주워먹기 간편한 것 같아서 만족하는 간식 중 하나다.
- 고구마?
"우우... 고굼마."
윤슬이는 고구마를 보더니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사이다를 집으러 간다.
결국 맛있게 먹을 미래가 뻔히 보인다.
반면 시후는 내게 감사 인사를 꾸벅하더니 포크로 고구마를 찍어 한 입 두 입 베어문다.
그런 시후가 신기한지 윤슬이는 또랑한 눈으로 쳐다본다.
"시후, 목 안 맥혀?"
- 우물우물... 꿀꺽- 응, 갠차나. 천천히 씹어먹으면 대.
"이잉?"
윤슬이는 이해할 수 없단 듯이 고구마를 입에 한가득 넣고 우적우적- 씹다가
사이다에 의지한다.
"크아- 역씨 싸이다."
저러다 이 썩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드는데.
사이다를 평소에 많이 먹는 건 아닌지라 괜찮겠지 싶다.
고구마를 만족스럽게 먹는 시후를 보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낸다.
"고구마, 시온한테도 몇 번 줬었는데."
- 시온한테여?
"응. 우리 가게로 갑자기 훌쩍 들어왔거든, 몇 번."
- .... 그랬구나, 시온.
"되게 잘 먹더라고."
- 시온은 월래 사람 먹는 거 조아해여. 그래서 맨날 내가 먹던 것두 빼서 먹을라구 그랬는데.
시후는 시온을 추억하며 작게 미소 짓는다.
아직 아이에게는 버거운 이별이었을 텐데도 의젓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시온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던 날 말했던 것처럼.
우는 모습을 보이면 시온이 슬퍼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애써 태연한 척하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시후에게 시온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다소 배려심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내 앞치마 속주머니에 든, 편지를 전하려면 무언가 화두를 던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음 먹었다.
지금이라면 전해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온은, 우리에게 이 편지 대필을 맡길 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서, 다시 시후를 만날 수 없으면. 그때 이 편지를 전해줘. 대신 시후가 너무 슬퍼보이면. 조금만 미뤄주라. 괜찮아질 때까지만.
시온의 죽음에 관하여.
시후가 괜찮은지 아닌지를 묻는다면.
분명 후자에 훨씬 가깝겠지만.
적어도 시후 본인은 시온이 떠난 것을 어떻게든 이겨내려 하고 있었다.
그럴 때라면 이 편지를 전해주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시후야, 이거 좀 볼래?"
- 응? 먼데여?
시후는 얌전히 고구마를 먹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
천진한 눈빛.
그저 우리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해보여 괜스레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글씨는 이제 다 읽나?"
- 응... 거의 읽어여.
"그래? 똑똑하네."
"우우... 윤스리눈... 아직인뎁."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어 시후에게 쥐어준다.
편지다.
그러나 편지라기엔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크기의 포스트잇이다.
그곳에 길지 않은 두 문장으로 시온의 마음이 적혀있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시온이 내게 부탁했던 것이다.
- 이게 모에여?
"한 번 읽어볼래?"
시후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다.
고구마의 부스러기가 떨어져, 끈적이는 손을 티슈로 닦고는 접혀있는 포스트잇을 열어본다.
동공이, 어느날 우리 남매가 들렀던 경포호의 표면처럼 잔잔히 떨려온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그 포스트잇을 소중하게 쥐어 가슴에 묻는다.
"시후..."
윤슬이는 그런 시후가 걱정이 되는지 고개를 살포시 시후의 어깨에 얹어둔다.
아이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포스트잇엔 이렇게 적혀있다.
[넌 내 10년의 모험 끝에 찾아낸, 유일한 보물이야. 언제나 사랑해.]
시후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