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먼 곳의 벗을 그리다(5)
[달님: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째서 시온이 인간이 된 건지는 저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는 거죠.]
[나: 그냥 원인 정도만 추측할 수 있다는 거?]
[달님: 네, 맞아요. 사실 외모를 바꾸는 건, 저희 같은 존재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달님이랑 저랑 운동을 할 때가 되면 몸을 평소보다 더 큰 크기로 키우거든요.]
[나: 몸을 키우거나 줄이는 것도 가능하고, 종족도 막 바꾸고... 그런다는 얘기냐.]
[달님: 그렇죠. 거의 저희 몸은 영혼으로 빚어진 찰흙 공예품이라고 볼 수 있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
시온은 어째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던 것인가.
그 녀석이 시후와 우리 곁을 떠나간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도 있다.
[햇님: 너무 신경쓰지 않는 게 좋아요. 예로부터 고양이는 영험한 동물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런 이유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저희랑 비슷한 존재들이 장난을 친 걸 수도 있죠.]
[나: 장난을 쳐도, 하필 그렇게 티 나는 방식으로 장난을 친다는 말이야?]
[햇님: 그럼요. 인간 세상에도 돌아이들이 많잖아요. 저희 세상에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인간 세상의 그런 분들은 법의 심판을 받고. 우리 세계의 돌아이들은.]
[나: 돌아이들은?]
[햇님: 염라한테 엉덩이를 맞게 돼요.]
[나: .... 그쪽 세상에도 엉덩이 맞는 형벌이 있다는 말야?]
우리나라에도 과거, 태형이라는 벌이 있었다.
관청에서 곤장을 처맞는 것.
엉덩이를 맞는다고 하니 말본새가 우습긴 한데, 실은 무시무시한 벌이다.
그 두꺼운 엉덩이 살이 부르트고, 피가 터져나올 때까지 맞게 된다고 하니 말이다.
[햇님: 그럼요. 엉덩이가 얼마나 적합한 타격점인데요. 어느 정도 때린다고 해도 큰 부상을 입지도 않고, 치욕감이 들어서 자기 잘못을 뉘우치게 되니까요. 물론 폭력은 나쁜 거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햇님이는 그런 설명을 늘어놓으며 가끔 달님이가 자신을 화나게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햇님이도 달님이의 엉덩이를 때려준다고 한다. 저쪽 남매도 사이가 좋구나, 싶어 흐뭇했는데.
여동생에게 엉덩이를 맞는다는 사실이 문자로 남는 게 싫었는지, 어플 채팅 기록에서 달님이가 말소시켜 버렸다.
[달님: 그런데 그게 그렇게까지 신경 쓰일 일인가요?]
달님이가 내게 물었다.
굳이 따지자면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하다.
우리 남매에게도 오누이 덕분에, 판타지적인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긴 하지만.
시온은 우리 남매와, 처음엔 아무런 관계도 없던 친구였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인간의 몸이 되었다가 고양이의 몸이 되었다가.
변할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우리 남매 밖에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판타지적인 능력을 활용하여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다.
또, 생명은 더욱이 지구 상에 넘쳐흐른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인간의 몸으로 변할 수 있던 고양이 시온이 우리 동네에서 살고 있던 것이다.
한 동네 두 동네 넘어가다보면 그런 존재들이 수도 없이 많을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런 생각을 오누이에게 설명했더니.
[햇님: 과연, 그런 걱정은 충분히 하실 법도 하지만 굳이 신경은 안 쓰셔도 돼요.]
[나: 너희 세상에도 뭔가 기준이 있겠지?]
[햇님: 그럼요. 그걸 조율하기 위해 규칙이 있는 거고. 규칙을 관장하는 염라가 있는 거니까요.]
염라.
라고 하면 염라 대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저승의 왕.
[나: 그래, 일단 알겠어. 고맙다.]
오누이와의 대화를 우선 맺는다.
하나 명확해진 것이 있다.
오누이 말고도, 나나 윤슬이가 사용하는 특별한 능력을 인간 세상에 퍼뜨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단순히 있다는 것을 넘어, 꽤 많다는 것이다.
햇님이가 말한대로 신경을 굳이 써야되는 부분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쪽 부분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윤슬이 때문이다.
"오누이 말고, 다른 녀석들이 윤슬이한테 접촉했다던가?"
그런 가능성이 머리에 떠오른다.
아직까지 어째서 윤슬이가 매개 음식으로 만들어낸 과거 회상에 개입할 수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누이 말고 다른 녀석들이 윤슬이에게 영향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윤슬이는 그 녀석들에게 어떠한 조건을 걸고 계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굳이 따지자면, 오누이 식당을 발전시켜 그들의 지명도를 높여주는 것을 대가로 계약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
햇님이 말대로 그들 세계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면 적어도 윤슬이에게 누가 해코지를 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내 동생의 보호자로서 신경써야 되는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오누이가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 윤슬이랑 따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면..."
이제야 다섯 살 난 아이랑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다는 얘기인가. 아직 오빠 소리도 제대로 못 내어 '옵바'라고 발음하는 애랑 말이다.
"움? 아까부터 옵바가 자꾸 윤스리 부르믄서 아무 말두 안 걸어."
"그게 아니라 혼잣말이야. 미안."
"이익! 혼잣말 하지 말구 윤스리 놀아주라! 심심허다! 아까 시후도 갔다눈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가씨."
윤슬이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담아주며 기분을 풀어준다.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뺨이 느슨해지는 게, 금방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이렇게 사랑스런 동생이 혹여 수상한 녀석들과 계약을 하여 안 좋은 꼴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때야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총동원해서라도 막아줄 테다.
난 이 아이를 사랑하니까.
시온이 시후를 사랑하는 것처럼. 혹은 그보다 더.
시후는 방금 전에 돌아갔다.
시후 어머니가 우산을 쓰고 마중나온 것이다.
9월인데도 비가 오는 탓에.
- 시후 오늘 윤슬이랑 주현이 형아랑 재미있게 놀았어?
- 응!! 주혀니 형아가 요리 엄청 잘해. 엄마보다두 더 잘해. 맨날 여기서 밥 머그니까 좋다.
- 아... 그, 그래? 그렇구나. 주현씨 오늘도 고마워요.
시후의 마지막 두 마디가 어머님의 허를 찌른 듯했지만.
아이들이 말하는 것이니 어찌하리.
왠지 모르겠는데, 시후도 그렇고 유민이도 그렇고 자기네 집밥이랑 내 요리를 자꾸 비교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들이 흠칫거리는 게 살짝 웃기다.
덤으로 윤슬이 어깨까지 쑥쑥 솟아오르니, 그걸 뒤에서 흘끔 지켜보는 것도 재밌다.
시후 어머니의 복직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복직하시게 되면 시후의 조부모님이 댁에 들러서 돌봐주신다고 하니 시후가 우리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윤슬이는 약간 저기압이다.
시후가 매일 같이 이곳에 있으면 같이 놀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윤슬이한테는 더 좋긴 할 것이다.
"윤슬이, 오늘은 같이 붕붕이 3호 타구 성북천이나 산책하러 갈까?"
"움... 그게 좋케써."
아직 못 읽어준 동화책도 쌓여있지만.
비가 갠 뒤의 거리는 그만의 낭만이 있어서 걷기 좋다.
그 낭만적인 거리의 풍경이 부디 윤슬이의 미미한 우울감을 씻어주길 바란다.
윤슬이는 뽈뽈- 작은 걸음으로 붕붕이 3호의 핸들을 잡고 가게 밖으로 향한다.
이젠 제법 유아용 전동차를 모는 솜씨도 좋아졌다.
윤슬이 생일인 5월 5일에 사준 것이니, 장장 4개월 반 동안이나 3호를 몰고 다닌 것이다.
애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움... 옵바, 바키가 다 젖어써."
"괜찮아. 이따가 들어갈 때 오빠가 닦아둘게요."
"그러믄 윤스리두 도와주께."
"옳지."
비가 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까닭에 아직 축축한 아스팔트 도로였다.
그렇기에 붕붕이 3호는 물론이고, 우리의 신발 밑창까지 젖게 되었다.
코끝에도 미약한 습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햇발이 느긋하게 내려와 습기에 젖어드는 피부와 옷의 겉면을 뽀송하게 말려주니 말이다.
마침 금방까지 비가 온 탓에 성북천에 사람이라곤 우리 남매뿐이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남지 않은 듯 사위도 고요하다.
"옵바."
"응?"
"시오니는 무지개 너머에 어디 이써?"
"음... 글쎄. 그건 오빠도 아직 무지개 너머로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그쪽 세상엔 뭐가 있으려나."
"으응, 아니야."
윤슬이는 불만스러운 듯이 고개를 훽 젓더니 붕붕이 3호를 멈춰세우고는 내 바지자락을 잡는다.
"안 가바두 대거둔."
"그게 무슨 말이야."
"옵바눈 무지개 너머루 가지 말구. 윤스리 옆에 이써! 시오니 어디 있눈지 몰라두 대. 그니까는 윤스리 옆에 이써. 무지개루 가지 말구."
"알겠어. 무지개로 안 갈게. 오빠는 계속 윤슬이 옆에만 있을 건데?"
"당연해!"
심통이 난 윤슬이.
볼이 빵빵해져있다.
아무래도 불안한 것이다.
시온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의미 있던 한 때를 보냈다.
그런 시온은 결국 우릴 떠나갔다.
그게 윤슬이 마음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움?! 옵바! 저거 바바."
그러나.
시온이 건네어준 선물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 우연이란 이름의 기적이 존재하는 걸까.
어느 쪽이건, 비 그친 직후의 거리만큼이나 낭만적인 일이다.
"어..."
윤슬이가 짤막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저 하늘 너머엔 무지개가 떠있다.
구름이 띄엄띄엄 흐르는 광활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무지개.
놀이동산의 거대한 롤러코스터처럼 공중을 횡단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지개 너머로 떠다니는 구름 중에 묘하게 고양이를 닮은 구름이 있다.
낮시간의 햇빛이 구름에 반사되어 은은한 노란빛을 띠는 것이, 딱 시온과 닮아있다.
"저거 시오니 아니야?"
"그렇네. 시온이 어디 안 가고. 저기에 있었네."
"웅, 마저. 시오니 안 가써. 윤스리랑 옵바 보구 이써. 그리구 시후도 보구 이쓸 거야."
"그럼. 당연하지."
우리 남매는 성북천을 걸으며, 하염없이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시온을 닮은 구름은 다른 구름들보다 훨씬 서서히 하늘을 흘러가는 듯했고.
성북천 인근의 탁 트인 시야는 그 구름을 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점차 동생의 표정이 밝아지고.
붕붕이 3호에서 덜컥 내리더니 내쪽으로 달려와 다리를 와락- 하고 안는다.
"옵바!"
"왜 그러세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애교쟁이다.
"윤스리가 옵바 마니마니 사랑해."
"크헉!"
불의의 습격.
'사랑해' 공격에 당해버렸다.
효과는 굉장했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쓰러져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버릴 뻔했다.
그랬다간 옷이 다 젖었겠지.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르고 동생을 안아든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오빠가 윤슬이 더 많이 사랑하는데?"
"잉? 그거눈 아니지."
"맞는데."
"아니거둔! 윤스리가 더 마니 사랑해."
"그렇다는 말이야?"
"응! 그러타는 마리야."
우리는 그 뒤로도 사랑이라는 말을 몇 번 더 입에 담다가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평범한 산책이었다면 이런 얘기까지 번질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 소중했던 시간도, 멀리서 우릴 지켜보던 시온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애초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날, 시후가 있는 병실에 들르기 전 시온을 대신하여 적던 편지에 '사랑해'라는 표현을 적게 되었기에.
그걸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괜스레 시온의 이름을 검색해보고 싶어졌다.
인터넷 백과엔 웬일로 시온이라는 이름에 대한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띠는 것은 '개미취'라는 꽃을 일본어로 시온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개미취?"
그 항목의 상세 정보를 손가락으로 눌러 확인해보니, 내 시선을 사로 잡는 것은 시온, 즉 개미취 꽃의 꽃말이었다.
[기억]
그리고.
[먼 곳의 벗을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