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행복 상자를 만들까요?(1)
“고구마 아저씨.”
- 이제 슬슬 이름을 기억해줄 때도 됐잖아.
“고굼마 아저씨는 고구마 아저씨가 조아. 그게 몬가 이름이 조아.”
- .... 그래서. 왜 부르는데?
여느 때와 같이 오픈 시간에 맞추어 걸음을 옮긴 황치호씨. 바 테이블에 윤슬이와 나란히 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도 제법 가까워졌다.
윤슬이가 먼저 말을 거는 걸 보아하니 그렇다.
“윤스리 궁금한 거가 있따.”
- 궁금해? 뭐가?
“아저씨는 무슨 얘기를 써여? 저번에 윤스리한테 준 개미 같은 걸루 써여?”
- 아니, 그런 거랑은 완전 다르지.
“그거눈 다행이거둔. 왜냐믄 그런 얘기눈 넘무 답답햇허 읽으기가 시러. 그러문 모를 써?”
- 음... 너한테 설명하긴 조금 애매한데.
“몬데여. 윤스리한테두 알려주라! 궁금하당!”
5세는 심통이 났는지 두 팔을 만세하듯 하늘 위로 쭉 뻗으며 성질을 낸다.
볼이 슬슬 부풀어오르려고 하고 있었고, 이는 누가 봐도 분노의 전조였으므로.
황치호씨는 설명할만한 단어를 고르는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입을 연다.
- 대충 주인공이 이득을 보는 얘기?
“움? 이득?”
- 응.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이득을 보는 얘기.
5세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주로 후자보단 전자의 얘기에 감명을 받은 듯하다.
“악땅! 물리쳐!”
공중에 콩알펀치를 연달아 선보인다.
혼자서 악당을 물리치는 상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거눈 아주 마음에 드네! 악땅 물리치므는 멋이 있짜나. 만족이야.”
- 만족이야...? 다행이네. 메모... 메모...
치호씨는 또 다시 윤슬이의 캐릭터성에 영감을 받았는지 스마트폰에 메모하기 시작한다.
저 두 사람의 대화 흐름은 늘 저런 식으로 끝맺어지곤 한다.
- 윤슬이는 그럼 나중에 커서 뭐할 건데?
“윤스리? 그거눈 이미 정해써.”
- 이미 정했어? 빠르기도 하네.
“그렇타. 왜냐믄 윤스리눈 이미 할 게 이것밖에눈 없거둔. 옵바 도아서 오누이 식땅에서 일할 거야.”
- 좋네, 미래의 취업처도 이미 정해져 있고.
“치업처? 그게 몬데.”
- 일할 곳.
“움... 좋은 건가?”
장래가 정해져있단 건 분명 단점보다 장점이 많을 것이다. 요즘엔 취업하기 힘들어서 곤란한 20대들도 많다고 하니까 말이다.
특히 본인이 그 정해져 있는 장래를 선호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
“칼국수 나왔습니다.”
윤슬이가 주의를 끌어주는 동안 끓인 칼국수가 완성되었다. 오늘의 메뉴다.
동시에 황치호씨의 매개 음식이더라.
[오누이 타이쿤!]
[판타지 웹소설 작가 황치호]
[매개 음식: 칼국수]
지금껏 몇 번이나 그랬듯, 일부러 이 메뉴로 정한 것은 아니다. 11월의 찬 공기를 달랠 수 있는 음식을 찾다보니 자연스레 국물이 있는 면요리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오누이 타이쿤 어플에서 치호씨의 매개 음식이 칼국수라고 알려주었다.
다시마 육수에 갖은 고명을 올린 반투명한 흰색 국물.
굵고 구불거리는 면발.
- 칼국수 보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 치호씨는 옛날에 칼국수 자주 드셨나보네요.”
- 집에서 해먹기는 귀찮기도 하고, 맛있는 집이 하나둘 사라지다보니까. 요즘엔 잘 안 먹는데. 어렸을 땐 아버지가 자주 해주셨거든요.
“움? 아부지?”
윤슬이는 상상하기 어려운지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치호씨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 그래, 아저씨네 아버지.
“칼국수가 의외로 어려운 음식은 아니거든요. 아버지들도 쉽게 만드실 수 있었겠죠.”
육수만 다시마로 뽑아낸다면 사실 그 다음엔 그렇게 어려울 게 없는 요리다. 국물에 간장 등으로 간을 하고, 씻은 면발과 고명들을 넣고 끓이면 끝이니까.
그렇게만 해도 단순하지만 의외로 깊은 맛을 낸다.
치호씨는 칼국수의 열기가 끌어오는 은은한 냄새를 견디기 어려웠는지 군침을 삼키고는 젓가락을 들어 한 젓가락을 크게 흡입한다.
후루룩!
“윤스리두 이따가 머그믄 대게써.”
5세의 낭낭한 식탐과 함께, 아주 짧고 단편적인 기억이 스쳐지난다.
치호씨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중년 남자의 등살.
그 넓은 등을 바라보며 치호씨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칼국수를 먹는다.
짙은 서사가 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그저 얼마 넓지 않은 집에서 묵묵히 칼국수를 먹는 아들과 말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는 아버지.
두 사람이 전시될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풍경이 그립게 느껴진 건.
분명 치호씨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후루루룩-
후루루룩-
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하나에서.
후루룰룰루룰!
둘로 늘었다.
황치호씨가 먹는 것을 보고는 침을 줄줄 흘리는 윤슬이에게 한 그릇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평소보단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마치 내게 눈으로.
‘윤스리눈 지금 머그고 시프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 아아... 이제 곧 손님들 오겠다... 엄청... 많이...
본인 전용석(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 쬐는 발코니 쪽 테이블)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고영희씨가 탄식한다.
영희씨도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인만큼 배달이 들어오기 전 타이밍엔 서빙을 도와주곤 한다.
그럼 저렇게 흐트러진 자세로 늘어져있는 것도 못하게 된다. 고양이들에겐 치명적인 사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도 윤슬 효과는 계속되고.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영희씨는 등을 쫘악- 뒤로 늘어뜨리며 몸을 푼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칼국수를 후루룰룰루룰! 폭풍 흡입하고 있는 5세를 잠시 눈에 담고.
다시 화구 쪽으로 몸을 옮긴다.
“어서오세요!”
**
지하철에 탑승하는 승객이 몰리는 시간, 즉 출퇴근 시간 때를 흔히 러시아워라고 부른다.
그런 러시아워가 식당에도 있는데, 우리 가게의 경우 오픈 후 1시간이 지난 정오부터가 그렇다.
보통 그때 윤슬이 점심을 먹이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거의 한 시간가량 밥을 빨리 줬고.
그 덕분에 손님들이 몰리는 시간이 빨라졌다.
정오쯤 되었는데도 평소보다 손님이 적었다.
“근데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지?”
손님이 적어지고, 주문 수량이 줄어드니까 자연스레 눈에 띠었는데.
황치호씨가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다. 대략 5분 전부터 눈으로만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는데. 가게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아까 전에는 가게 앞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까지 윤슬이를 데리고 나갔다 오기도 했다.
“움... 업따.”
- ... 없네.
말하는 걸 들어보니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은근히 산만해서 관심을 끌 수가 없다.
“둘 다 뭐 찾고 있길래 그래요?”
“움! 역씨 옵바한테 물어보는 대게써.”
윤슬이는 쫄래쫄래 주방 안까지 들어와서는 내 바짓자락을 붙잡고는 횡설수설 뭔가를 설명한다.
“있짜나, 그니까는. 상자가 피료한데. 왜냐믄 그게 소즁하니깐. 움... 움... 상자가 소즁한 게 아니구. 움...”
“...?”
이해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치호씨 쪽으로 향했다.
- 지금 혹시 빈 박스 있어요? 되도록 큰 걸로.
“박스요...? 찾아봐야 할 거 같은데, 하필이면 어제 저녁에 다 분리수거를 해버려서.”
- 이런... 타이밍이 안 좋네요.
“뭐, 식재료 이따가 정리하다보면 하나쯤은 나올 거 같기도 한데. 혹시 뭐에 쓰시려구요?”
“소즁한 거를 담으는 거야.”
5세가 답변을 가로챈다.
“소중한 걸 담아?”
- 음... 그게 어떻게 된 거나면요. 아까 주현씨가 칼국수 만들어주셨잖아요. 근데 괜히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지금은 제가 서울 상경해서 얼마 못 뵙지만. 예전에는 저랑 가끔 놀아주시기도 했거든요.
황치호씨는 가족 얘기를 꺼내는 게 멋쩍은 건지, 볼을 긁적인다. 다른 손님들이 신경 쓰이는지 고개를 우리 쪽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 저랑 놀아주실 때 만들어주셨던 게 떠올라서요. 음... 이름이 좀 쑥쓰러운데. 행복 상자에요, 행복 상자. 제가 초등학생 저학년일 때 만들었던 거라서. 이름이 좀 유치하죠?
“하나두 안 유치하구 이뿐뎅. 윤스리눈 마음에 들어써.”
5세는 옆구리에 양 손을 올리고는 본인의 취향을 주장해본다. 그만큼 유아틱하면서 귀여운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듯해서 쓴 웃음을 짓게 된다.
- 오랜만에 그... 행복 상자를 만들어보면 좋을 거 같아서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시길, 지금 소중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 손에 쥔 모래처럼 사라져버린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으면 상자 속에 담아두라고, 그래야 자신이 과거에 무얼 소중히했는지 알 수가 있다고 그러셨어요.
“너무 좋은 말씀인데요?”
- 그렇죠? 저희 아빠가 원래 수필 작가셔서, 그런 낮간지러운 말씀을 잘하세요.
“간질간질?”
윤슬이는 낮간지럽다는 말의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자기 겨드랑이를 몇 번 쿡쿡- 찔러보다가, 간지러웠는지 쿡쿡거리며 웃음을 참는다.
황치호씨가 행복 상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십중팔구 방금 드신 칼국수 때문인 것 같다. 그다지 드라마틱한 기억은 없었음에도 매개 음식이었다.
아버지의 향수를 짙게 자극한 것 같다.
“그때 그 기억이 나서 상자를 찾으려고 하시는 거겠네요?”
- 네, 제가 쓰기에는 쪼금 그렇고. 이젠 나이도 먹었으니까. 윤슬이나 한 번 만들어줘볼까 싶어서요.
“그렇타! 윤스리 꺼 쓸라구 찾구 있었따.”
이제야 왜 그렇게 뭘 주섬주섬 찾고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윤슬이한테 그런 기억을 선물해주려고 하시는 거라면 오빠로서 반드시 도와드려야 할 텐데.
“일단 지금은 다른 손님들도 계시니까, 조금만 이따가 도와드려도 괜찮죠?”
- 그럼요, 원래 프리랜서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거든요.
“그렇타. 윤스리두 시간이 남아돌거둔.”
“....”
뭔가 치호씨 옆에 있으면 5세가 점점 불손한 어휘를 배우는 것만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손님들이 계산을 하고 빠져나갈 때까지, 치호씨는 윤슬이한테 동화책을 읽어주셨다. 그런데 5세가 볼을 부풀리며 공중으로 콩알펀치를 날리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5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인공이 답답한 동화책을 읽어준 것 같다.
윤슬이는 아주 화가 난 나머지 황치호씨의 가슴팍을 쿡! 쿡! 찌르며 “반갈죽! 반갈죽!” 스킬을 사용하려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욕망의 똑딱이를 누르지 않은 채로는 필살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자... 그럼 어떤 상자를 쓰면 좋으려나.”
냉동고를 뒤적였는데, 마침 고기가 한 팩밖에 남지 않은 박스가 발견되었다. 이 정도면 장난감 몇 개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크기다.
행복 상자로 쓰기에 적절할 듯하다.
“치호씨, 이건 어때요?”
- 오,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움... 윤스리눈 소즁한 게 아주아주 많어. 그니까는 모자랄찌두 몰라.”
5세는 욕심쟁이였다.
그러나 그런 귀염뽀짝 욕심이야말로 윤슬이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윤슬이와 치호씨에게 박스를 건네주려는 순간.
- 잠깐!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죽지를 강하게 잡으며 말렸다.
고영희씨였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상자는 안돼.
“아아...”
- 상자는... 내 꺼야! 내가 쓸 거라구!
내 손에 들려있던 상자를 들고선 호다닥 달아나버렸다.
어제 저녁 박스를 분리수거할 때, 오열하던 시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 내가 들어갈 박스는 남겨놨어야지!
라며 내 손에 냥냥펀치를 날리려 들었다.
고양이 감수성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미스테이크였단 것은 인정하지만.
저렇게 상자를 훔쳐갈 줄이야.
“도둑 고양이가 따로 없네.”
“움... 도둑 고영희, 넘무해.”
- 이름이, 고영희인데. 심지어 고양이처럼 박스를 좋아한다? 이건 캐릭터가 되겠는데? 메모... 메모...
결국 또 다른 상자를 냉동고에서 하나 장만할 수밖엔 없었다. 어차피 음식점엔 남아도는 게 종이박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