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행복 상자를 만들까요?(2)
결국 고영희씨가 훔쳐간 박스 말고, 다른 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어제 분리수거를 했던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갈 줄이야,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좌우지간 금방 찾아냈으니 다행이다.
- 윤슬이는 뭐 넣고 싶어? 상자 안에.
“움... 행보기 상자.”
넓게 펼쳐져 있던 상자의 바닥 부분을 맞대어 테이프로 고정해둔 상태다. 윤슬이 한 명 정도는 쏙 들어갈 정도의, 표준 크기보다 약간 더 큰 박스다.
그러니까 애들 장난감 상자로 만약 쓰게 된다면 넉넉히 넣을 정도는 되었다.
“이걸루는 넘무 부족한뎅.”
그러나 우리의 장군감, 5세에겐 턱없이 모자란 크기인 모양이다. 불만이 있는 듯이 볼을 부풀린다.
“뭘 넣으려고 그러시는데요?”
“움... 이고 바바. 일딴은.”
윤슬이는 허겁지겁 가게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주차되어 있는 붕붕이 3호를 끌고 온다. 그리고는 행복 상자 옆에 다시 주차해본다. 완벽한 후방 주차였는데.
문제는.
“바바! 행보기 상자보다두 붕붕이가 더 크자나.”
“.... 그렇네.”
붕붕이를 직접 박스 옆에 대어 크기를 비교해보더니 5세의 불만은 더 커진 듯하다. 있는 힘껏 볼에 바람을 부풀린다. 우우웅- 하고 볼이 부풀다가.
뽕...
하고 힘 없이 바람이 빠졌다.
침이 입가에 묻은 게 찝찝한 지 빠르게 소매로 훔쳐낸다.
“이걸루는 안 대자나.”
“그렇긴 한데.”
그러나 이 사이즈보다 더 큰 상자를 구하긴 쉽지 않았다. 또 다른 상자를 구하는 것쯤이야, 어떻게든 뒤지다보면 한두 개쯤 나올 테니 큰 문제가 아니지만.
크기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 후후... 이 치호 오빠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움? 고굼마 아저씨가?”
- 절대로 오빠라곤 안 해주는구나!
5세는 나 이외에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진 바가 없다.
- 자... 이렇게, 이렇게 하면?
“움?”
치호씨는 밸런스를 잘 잡아서 붕붕이 3호 위에 행복 상자를 얹혔다. 유아용 전동차의 크기가 제법 크기 때문에 어떻게든 균형만 잘 잡으면 상자를 고정해둘 수 있었는데.
“이러케 하므는 상자에 너으는 게 아니자나.”
- 그래도 괜찮아. 어찌 됐건 상자랑 닿아만 있으면 허용 범위야.
“허용 범위 같은 것도 있어요?”
- 저희 가계에서 시작한 문화니까, 제 말이 법이에요.
그닥 틀린 말이 아니면서도 형편이 좋았다. 이것보다 더 큰 상자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웠을 거다.
황치호씨의 말을 듣더니, 윤슬이는 어쩔 수 없단 듯이 붕붕이 3호의 엉덩이를 행복 상자에 맞닿게끔 다시 주차한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믄 나쁘지눈 않어.”
행복 상자에 담고 싶은 게 많은 5세는 곧바로 다음 행동을 잇는다. 주방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작은 서랍. 그 안에 들어있던 목재 권총을 꺼낸다.
윤슬이가 아직까지도 아끼는 장난감 중에 하나이며, 이미 사격 가능한 고무줄은 다 떨어졌지만 그것 없이도 혼자 잘 갖고 논다.
“이거눈 여기에 담아야지 대게써.”
“그거 연우 아저씨랑 친해졌을 때 받았던 거잖아.”
“웅, 맞어. 이거 조서 윤스리가 여누 아저씨랑 칭구해주기로 해써.”
“그랬단 말이야?”
“바루 그렇타.”
5세와 친구를 하기 위한 비용은 꽤 비싸다.
기억을 거슬러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연우씨와 혜원씨네 부부와 그렇게까지 친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최근 들어선 연락도 자주 하고, 간단한 도움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자영업자끼리의 인연이랄까. 지난 번엔 시후와 영희씨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에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중요한 인연인 셈이다.
“움... 그리구.”
이번에 윤슬이는 또 다시 발걸음을 바쁘게 옮기더니, 가게 벽에 붙어있던 그림을 바라본다.
견공 루이와 나란히 서있는 윤슬이의 그림.
권수안씨가 그려준 물건이다. 요근래엔 좀처럼 가게로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간간이 연락을 주고 받는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외주를 받아 작업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들키진 않으신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약간 신경 쓰이기도 한다.
- 그 그림 되게 정감 가고 좋던데. 윤슬아, 그 그림 오빠가 그려준 거야?
“우움... 아니구. 수영이 언니네 옵바가 그려조써. 루이랑 가치 그려조서, 윤스리가 젤루 조아하는 그림이거둔.”
수안씨와 치호씨는 서로 면식이 없는 상태다. 두 사람이 만나면 케미가 잘 맞을 거 같기도 하다.
“다음으루는.”
그림을 떼어 행복 상자에 담더니 이번엔 다시 서랍 쪽으로 다가가서, 서랍 맨위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액자를 원하는 것 같다.
“우우....! 옵바! 도움!!”
그러나 서랍의 키가 제법 커서 액자까지 손에 닿지 않았다. 꺼내줘야만 했다.
어차피 원하는 것은 사진일 테니 액자에서 사진을 빼서 주었다. 액자를 넣었다가는 부서지거나 흠이 생길 수 있으니.
“옵바, 이거 바바. 옵바 얼굴에 수박 묻어써.”
“너 얼굴에도 묻었잖아.”
액자 속 사진엔 지난 여름 강릉에서 찍었던 한 폭의 풍경이 담겨있다. 해변가에서 놀다가 지쳐서 잠시 휴식 타임을 가졌었는데.
미정 선생님이 가져온 수박을 먹을 때 서로의 얼굴에 씨앗을 붙였던 것이다. 우리 남매끼리 장난하던 것인데, 어느새 유민이와 미정 선생님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렇게 네 명이서 사진을 찍었던 걸 간직하고 있다. 특히 유민이와 윤슬이의 범고래, 상어 수영복이 시선을 강탈한다.
“되게 여러 가지 일이 있었네.”
“움... 그렇타.”
가게를 차린 게 4월.
그리고 지금이 11월.
7개월 간 많은 일이 있던 것 같다.
윤슬이와도 많이 가까워졌고, 여러 손님들과 다양한 인연을 쌓았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굉장히 충실했다는 느낌이 든다.
“치호씨, 확실히 행복 상자가 좋긴 하네요.”
- 그렇죠?
단순히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고, 보관한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씩 다시 만져보고,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는 일.
그것 또한 상당히 큰 의미였다.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인 양 되살아나니까 말이다.
“그리구... 이것뚜. 아! 이것뚜 있눈데.”
윤슬이는 아직도 모자라단 듯이 여러 가지 추억들을 행복 상자 속에 담으려 찾아다닌다.
내가 처음 윤슬이에게 사주었던 자동차 장난감.
퀴즈 대회에서 우승하고 구매했던 미니어처 자동차들과 포스터들. 자신이 입고 있던 레이싱 자켓도 벗어서 집어 넣는다.
그렇게나 많이 넣었는데도.
“움... 그리구... 움...”
끝내 더 소중한 것이 없는가 고민하는 5세였다.
“더 넣을 게 남았어?”
“윤스리눈 아직뚜 모잘라. 소중한 거 다 안 잊어버리구, 윤스리가 잘 갖구 이쓸 거라눈 말이야.”
귀여운 욕심쟁이.
그러나 이런 욕심이라면 얼마든지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 욕심쟁이는 그것밖에도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몇 개를 더 행복상자에 집어넣고는 가운데즈음에 주섬주섬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비 바라보면서 상자의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옵바 자리.”
“.... 나더러 들어가라고?”
“움? 그렇타.”
방금 5세의 입에서 새어나온 ‘움?’에는 대략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느냐.’
그리고 동생의 그러한 당당한 태도는, 나로 하여금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으며.
꼼짝없이 상자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게 고양이의 기분?”
- 그렇타!
뒤쪽에서 윤슬이의 말투를 따라하는 고영희씨.
상자 안에 있자니 아늑한 것 같다, 라는 느낌은 결코 받을 수 없었다.
왜냐면 상자 속에 들어간 게 아니라, 족욕하듯 발만 담그고 있다. 쪼그려 앉아있긴 한데 몸의 70%가 상자 바깥에 있다.
이걸 들어와있다고 표현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고굼마 아저씨 사진! 사진!”
5세는 내 앞치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빼어가더니 치호씨에게 쥐어드린다.
- 어쩔 수 없구만. 찍어줘야지.
그렇게 나는 상자에 쪼그려 사진을 찍게 되었고.
치호씨는 윤슬이한테 좋은 추억 하나 선물해줬다며 생색을 내고 돌아가셨다.
“다음엔 식사 한 끼 공짜로 대접해드려야겠네.”
감사한 마음으로 공짜 식사를 제공하려 다짐하고, 행복 상자를 정리하려는데.
“옵바 잔깐만!”
“응?”
“영히씨두 같이 찍어야지 대거둔.”
“....”
결국 고양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고영희씨를 품에 안고 사진을 한 장 더 찍은 후에야 행복 상자를 정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다시 찾아온 가게의 휴일.
아침부터 꼬맹이 둘, 윤슬이와 시온은 내 몸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5세는 내 배 위에 떡하니 대자로 누워있고.
고양이는 내가 누워있는 채로 다리를 11자로 펴고 있는데, 그 11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들에게 상자와 비슷하게 아늑한 장소인 듯하다.
“옵바, 이고 바바.”
난방을 따듯하게 틀어놓고 꼬맹이들을 곁에 둔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윤슬이가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내 배 위에서 꼼지락꼼지락 위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가슴팍까지 올라와버렸다.
내 얼굴 앞쪽으로 스마트폰을 들이민다.
“저번에 찍었던 사진이네?”
내가 시온을 끌어안은 채로 찍은 행복 상자의 사진이 스마트폰 화면에 전시되어있다.
윤슬이는 이 사진을 찍은 이후로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확인해보곤 한다.
“웅, 옵바 있짜나 윤스리가 생각이 이써.”
“무슨 생각이 있는데?”
“움... 이거 고구마 아저씨가 만들어보라구 해서. 만들었눈데, 윤스리눈 넘무 조아써.”
“그래? 너무 다행이네.”
“움... 그렇타.”
“그런데?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어?”
“윤스리만 이런 걸 만드는 거눈 안 조아.”
“윤슬이만 하는 건 안 좋다는 말이야? 그럼 다른 사람들도 해야 돼?”
“그렇타! 따른 사람들은 몰르겠구. 시후랑 유미니눈 만들게 해조야지. 왜냐믄 윤스리 부하자나.”
윤슬이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더니 도리도리 흔들며 마구 비빈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엉키기 직전이다.
“그럼 윤슬이가 시후랑 유민이를 도와줘야겠어?”
“웅... 그러믄 좋케써. 옵바두 도와주므는 아주 좋케써.”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이번 휴일은 유민이와 시후의 행복 상자를 만들어주자는 얘기.
“안 될 거 없지.”
“움!”
시후와 유민이는 나한테도 소중한 동생들이다.
그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그럼 나갈 준비할까?”
“웅!”
우리 남매가 신나서 나갈 준비를 하려 화장실로 들어가 씻으려는데.
도도도...
작은 발소리를 내며 시온이 따라들어온다.
- 시후한테 갈 거면 나도 같이 가.
“당연히 그래야지.”
“영히씨두 가치 가는 거야! 이번 작쩐은 시후랑 유미니 행보기 상자 만들어주기!”
보스인 동생은 옆구리에 손을 얹으며 오늘의 작전을 근엄하게 선언한다. 그런 5세의 윗도리 내복을 벗기며 샤워를 준비한다.
“우국... 쪼꿈만 살살 벗겨죠. 머리카락 찝힐 뻔해써.”
“아구, 미안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