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행복 상자를 만들까요?(3)
- 이쪽! 빨리 가자고. 시후 기다리겠다.
“우우... 영히씨가 오늘만 넘무 빠른 거 같으다.”
“그러게. 모처럼 신났네.”
우리 세 사람은 우선 시후네에 들르기로 했다. 유민이네에도 들를 계획이지만 아직 유치원에서 귀가하지 않았을 테고. 미정 선생님도 학교에서 근무 중이실 테니 말이다.
운 좋게 시후네 어머님은 시후와 함께 집에 계신다고 하셨다. 자연스레 그쪽을 먼저 가게 된 것이다.
“평소에도 저렇게 기운 넘치면 좋을 텐데.”
“움... 그렇타?”
우리 남매보다 열 발자국은 앞서 길을 안내하듯 걷는 고영희씨. 평소에 출퇴근할 때를 생각해보면 고양이 모습으로 변한 채로, 도시락 가방 안에 들어가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할 때는 나름 빠릿하지만, 쉬는 시간엔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인간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영희씨가 저렇게 들떠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우리 남매는 그 뒤를 따르며 조용히 웃음 지었다.
“도착했따!”
시후네 집은 우리 가게에서부터나 집에서부터나 얼마 멀지 않다. 휴일을 느긋하게 즐기는 걸음으로 30분가량 걷다보니 도착해버렸다.
우리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지, 다소 쌀쌀한 날씨인데도 외투를 걸치고 있던 시후의 모습이 보인다.
“시후당!”
5세는 신이 나서 폴짝! 폴짝! 뛰며 시후에게 자기 자신을 어필한다. 멀리서 우릴 발견한 시후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 윤슬이, 주혀니 형아. 그리구... 영히 누나다!
다다다다다...
시후는 재빠르게 달린다.
그 모습을 보고 윤슬이는 확신에 찬 듯 양팔을 벌린다.
아마도 시후가 자기 자신에게 올 거라고 예측한 듯하다.
“움?! 이럴 쑤가!”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시후는 윤슬이가 아니라 고영희씨의 품에 안겨있다.
- 영히 누나, 보고 싶어써요.
- 으휴... 이렇게 안겨드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영희씨는 작게 불평하면서도 시후의 뒷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참 보기 좋고, 애틋한 장면이긴 한데.
5세는 예상이 한참 빗나가버린 나머지 충격을 받은 듯하다.
“시후눈... 윤스리 부하인데! 영히씨가 뺐어가써...”
조직원 중 한 명을 고영희씨에게 빼앗겨버린 5세였다.
통한의 설움을 11월의 찬 공기를 가르는 콩알펀치 5연발로 날려버리고, 성큼성큼 시후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윤슬이.
동생이 분노한 것을 보고 시후네 어머님은 쓴 웃음을 지으시며 집 안으로 들였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는데.
킁킁...
킁킁...
“응?”
뒤에서 깊게 냄새를 맡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고영희씨가 그러는 줄 알았다. 시후의 냄새를 맡고 싶은 동물적 본능이 튀어나온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 시후, 저번부터 냄새는 왜 맡는 거야?
- 응... 중독이 댄다, 영히 누나 냄새.
“또 저러는구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평소처럼 장사를 하던 와중에 시후가 우리 가게로 놀러왔다. 식사를 하러 와준 것은 아니었고, 인근 시장에 시후 어머니가 볼일이 있으셔서 겸사겸사 들린 것이었다.
윤슬이도 아주 반가워했고, 영희씨도 역시 매우 좋아했는데.
시후가 한 가지 특이한 행동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발코니 쪽 테이블에 늘어져있던 고영희씨에게 다가가서는.
- 킁킁, 응? 이상하다.
- ....? 뭐가 이상해?
영희씨가 묻는 것에 답도 하지 않고, 거리를 점점 좁히며 가까이 다가가 옆구리에 코를 묻고는 냄새를 킁킁 맡아대는 것이 아닌가.
만약 시후가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면 다소 위험한 장면이었다.
- 몬가 어디서 맡아본 냄새인데?
- 으, 응?
킁킁...
킁킁...
그렇게 몇 번이나 냄새를 맡다가 시후는 영희씨의 체취에 중독되고 만 것 같다.
결국 그 냄새의 출처를 알아내진 못한 시후였지만, 그 뒤로도 영희씨만 만나면 저렇게 인사 차원에서 코를 박으며 킁킁대곤 한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외면하고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시후네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뭐지?”
“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려던 찰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5세가 건너편에 서서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다.
마치 소작농을 부리는 지주의 형상이다.
뭔가 명백히 원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생각했다.
지난 5분 간 우리 사이에 있던 대화와 행동의 흐름을 고려. 지금 가장 5세가 원할 만한 행동은?
다다다다다... 와락!
“윤슬이가 오빠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주 정이 많네?”
“히힝! 그렇타. 역씨 옵바눈 윤스리 맘을 안다.”
동생은 시후와 시온의 포옹이 부러웠던 것이다.
아무래도 시후가 자신을 스쳐 고영희씨에게 달려간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낀 것 같다.
그 소외감을 어떻게든 채워주고 나서야 우린 시후네 집 거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 그래서 주현씨네에서 오늘 어쩐 일로 놀러오셨어요?
아직까지 자세한 이유는 설명드리지 않았기에 시후네 어머니는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셨다.
특히 표면적인 설정 상, 우리의 직계 가족이 아닌 고영희씨가 동행한 게 신경쓰이는 듯하셨다.
상식 선에서 생각해봤을 때 식당의 휴일날까지 직원이 따라다닐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황치호씨와 함께 행복 상자를 만들었던 이야기를 설명하며 시후에게도 하나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더불어 영희씨는 요즘 시후랑 친하게 지내다 보니 따라오고 싶었다고 보충 설명했다.
실제로 거실에 들어와서도 시후의 ‘킁킁...’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 아휴... 또 저희 시후 챙겨주시고. 너무 감사해요.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저도 도와야죠.
시후 어머니는 밝게 웃으시며 어딘가에서 적당한 크기의 박스를 하나 가져오셨다.
그러자 시후는 자기 차례가 왔다는 것을 이해한 듯 영희씨에게서 떨어져 상자를 챙겨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 응... 모가 좋을까?
“모든지 다 조아! 소중한 거눈 다 챙기므는 대.”
윤슬이는 자신이 먼저 해보았단 걸 어필하고 싶은지 시후 옆에 다가가 조언을 해준다.
마침 시후도 고민하고 있었기에 고마워하는 듯하다.
“움... 어리니 왕쟈는 어때?”
- 어! 맞따, 어린 왕자!
시후는 책장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동화책 한 권을 꺼내어 윤슬이에게 보여준다.
- 이거 어린 왕자야. 내가 제일루 조아하는 책.
“잉! 윤스리두 읽으믄 좋케써.”
- 그치만 그러면 이거를 여기따가 못 넣자나.
“아앗... 그렇타... 그거눈 안대지. 시후꺼 소즁한 거 니까는.”
윤슬이는 약간 실망한 듯 입술을 비죽 내민다. 그러나 동생은 착각을 한 듯하다.
“윤슬아, 우리 저거 어린 왕자 책 갖고 있어.”
“움? 윤스리눈 이거 못 바써. 옵바 윤스리 바보루 알구 그짓말하는 거눈 아니겠찌? 그거눈 실맹이야.”
“아니, 진짜로 갖고 있다니까. 그거 출판사가 달라서 표지가 다른 거야.”
“표지?”
“응, 겉에 붙은 그림 있잖아. 저런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 윤슬이가 헷갈렸구나.”
“그러문 그림만 다르구 똑같은 책이라는 뜻?!”
“그렇지.”
“헤, 헷갈려쪄!”
여러 가지 것들을 곧잘 헷갈리는 5세였다.
그러나 그럴만도 하다. 아직 완벽히 한글을 뗀 것도 아니고, 표지가 다르면 같은 내용의 책들도 다르게 보이곤 한다.
저번엔 지아가 소설을 샀는데, 표지가 달라서 다른 책인 줄 알았다가 전에 읽었던 것이라 환불했다고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들도 헷갈릴 정도니, 윤슬이가 어딘가 모자라서 헷갈렸다고 보긴 어렵다.
- 그리구... 다음으루는.
시후는 잠시 고민하더니 책상으로 달려가서 포스트잇 한 장을 떼온다. 그것을 본 우리 남매와 영희씨는 일시정지했다.
- 이거... 보관할래여.
“움! 그건 아주아주 좋케써.”
시온으로서 보냈던 마지막 편지.
그것을 시후는 행복 상자에 간직하기로 정한 모양이다. 영희씨는 혼자서 몰래 눈물을 훔치더니 시후의 볼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 시후야, 이런 건 어때?
방 밖에서 시후네 어머니가 들어오신다.
손에는 고양이가 사용할 수 있는 크지 않은 스크래쳐가 들려있다.
- 그거, 시온 꺼!
- 응... 맞아. 엄마가 안 버리구, 잘 챙겨놨거든. 주현이 형이랑 윤슬이가 행복 상자 만들자구 같이 놀러왔으니까. 이번 기회에 여기에 담아서 간직하는 건 어때?
시후와 시후의 어머니는 스크래쳐를 고이 행복 상자의 안쪽에 담아두었다. 그 모습을 보는 고영희씨의 마음이 어떨지는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웠다.
슬펐을까, 아니면 쓸쓸했을까.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려는데, 뒤에서 윤슬이가 영희씨의 귀를 빌리더니 뭐라고 속닥속닥거린다.
그 말을 듣고 영희씨는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눈웃음을 짓는다.
시후 모자의 곁에 다가가 그 사이에 조심스레 앉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있잖아요, 고양이들이 왜 집에서 스크래쳐를 긁는 줄 알아요?
고영희씨의 물음에 시후와 어머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영희씨의 언행에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 그건 너무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이 집이 내 집이고, 세상이고. 여기 사는 사람들이 친구고, 내 가족이고. 다른 고양이들이 불쑥 찾아와서 내 행복을 방해하면 싫고. 우리 가족들을 해치면 싫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영역을 표시한 거라구요.
행복.
시온의 행복.
그 노란 털을 날리던 고양이가 스크래쳐를 긁으며, 영역을 표시하던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
시후의 어머니는 눈물을 끝내 보이셨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고영희씨는, 아니 시온은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이 스크래쳐가 이 집에 있는 한, 나쁜 고양이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행복에 훼방을 놓는 일은 좀처럼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물건 절대로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말고 오래오래 간직해야 돼요. 행복 상자에 넣어서.
- 응, 약쏙이에요. 영히 누나. 내가 절대루 안 잃어버리고. 오래오래 갖고 있을게요. 약쏙.
시온과 시후는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나누고, 감정에 복받힌 시후 어머니는 시후를 껴안고 작게 흐느낀다. 그 모습을 보던 시온은 느끼는 바가 있는지 가장 바깥에서 두 사람을 감싸안았다.
자상히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마치 시온이 시후와 어머님을 지키는 수호령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우리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를 죽인 채로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윤슬이의, 한결 같은 한 마디.
“히힝... 작쩐 성공이야.”
“훌륭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