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친애하는 해적에게(2)
[권수안: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죠.]
[나: 고마워요, 수안씨. 대신 값은 제대로 지불하기로 하셨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권수안: 그럼요. 주현씨가 소개해주시는 분이면 믿을만하겠죠.]
[나: 그럼 스토리가 완성되는대로 필요한 배경 추려서 설명 따로 드릴 테니까. 그때 다시 뵙거나 연락하는 걸로 하죠.]
[권수안: 인형극 스토리, 재미 있는 걸로 기대하고 있을게요.]
인형극의 준비를 위해 우선 무대의 배경을 준비하기로 했다. 배경 사진을 컴퓨터로 찾아서 컬러프린트로 뽑아볼까 고민도 했지만.
‘이거눈 별루 이뿌지가 않아서 별루야.’
윤슬이 말대로 인형극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인형극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주실 분을 찾기로 했다.
마침 차웅씨는 벽에 걸린, 루이와 윤슬이의 그림이 따듯해보여서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확실히 권수안씨가 그린 그림은 전체적으로 동화적인 느낌도 주었다.
지금 막 수안씨에게 연락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배경을 담당해주실 계획이다.
“다음은 스토리인가. 차웅씨 잘 돼가는 중인가요?”
전체적인 스토리 틀이 짜여있지 않으면, 캐릭터가 되어줄 인형이나 배경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갈 수 없다.
극을 만들 때 스토리는 기본 중의 기본인 셈이다.
- 아아... 어떻게든 해보고 있습니다만.
차웅씨는 무언가 구상하듯 종이 위에 적었다 지웠다 하다가도 옆을 자꾸 흘끗거린다. 바로 옆에서 무섭게 감시 중인 윤슬이가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윤스리눈 신경쓰지 안아두 대. 짜짜웅 아저씨가 하는 거 구경하는 거야.”
구경보단 감시에 훨씬 가까웠다.
팔짱을 끼고 의자 위에 서서 차웅씨의 옆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이야기를 처음 써보는 차웅씨로서는 저런 시선이 부담스러울만도 하다.
- 윤슬아 혹시 다른 데 가서 놀 생각은 없니?
“그렇타.”
- 이유가 뭐야?
“웅. 왜냐믄 짜웅 아저씨가 제대루 하는지 바야지 대게써. 궁금해.”
단순히 유민이한테 보여줄 인형극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5세가 저렇게 신경쓰는 것만은 아니다.
저 이야기의 토대를 윤슬이가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린 난관에 봉착했다.
- 근데 이야기라는 걸 어떻게 쓰면 좋을까요?
차웅씨를 비롯해 나나 윤슬이, 더 나아가 고영희씨까지 시나리오를 써본 전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땅히 인형극 시나리오를 대신 써줄 작가가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결국 차웅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토리여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한테나 술술 이야기해도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윤스리가 조은 생각 있따!’
그때 윤슬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꽤나 자신 있어보이는 표정이었기에 어떤 좋은 생각인지 들어보기로 했다.
‘저번에 미정 선샌님이 옛날옛날에 윤스리만큼 애기였을 때. 아앗! 윤스리 애기 아니야!’
얼마나 몰입했는지 말실수까지 했다.
5세는 결코 본인이 애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윤스리맨큼... 쪼끄맸을 때. 해적하는 게 꿈이라구 그래써. 그니깐 윤스리 생각에눈 해적 이야기를 쓰는 거가 조아.’
확실히 해적을 주인공으로 세워 이야기를 쓰는 것은 흥미도 끌 수 있고 좋아보였다. 결국 인형극을 봐주는 관객은 유민이와 미정 선생님이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해적 얘기에 흥미를 가질 것이었다.
‘해적이 보물을 찾는 얘기루 가므는 대게써! 왜냐믄 산적도 보물 찾기를 하니깐. 해적두 보물 찾기를 할 쑤가 있자나.’
- 해적이 보물 찾기...?
윤슬이는 단지 그런 얘기에 로망을 느낀 건지. 아니면 무언가 구체적으로 떠오른 장면이 있는 건지 차웅씨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
아마도 몇 달 전에 읽어주었던 산적 이야기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빼앗았던 보물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던.
그 산적의 이야기 말이다.
그땐 윤슬이가 내 볼에 ‘윤슬이 보물’이라고 적어두어 한바탕 소동이 있기도 했는데.
지금 이렇게 윤슬이 창의력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참 감정이 복잡해진다.
“움...! 해적! 짜웅 아저씨 근데 중요한 게 이써.”
- 뭐가 중요한데?
다시 한 번 윤슬이가 차웅씨에게 팁을 주려는지 손가락을 하나 세우면서 주목을 끈다.
“절때루 해적이 손해를 보믄 안대. 보물 잃어버리믄 안대. 그리구 다시 다 돌려주는 것두 안대.”
“....”
- 으응...? 왜 안되는 건데?
“왜냐믄 해적이 보물 다 까먹어버리믄 윤스리가 답답해. 그래서 싸이다 묵어야대.”
- ....
5세는 여전히 고구마 전개를 혐오했다.
한결같다.
**
다음날 브레이크 타임.
차차웅씨에겐 인형극 시나리오를 부탁드리고, 우리 남매는 잠시 가게를 빠져나왔다.
인형극에 쓰일 인형을 찾으러가는 것이다.
[신혜원: 그런 거라면 제가 잘 아는 인형 가게 있는데. 한 번 소개해드려요?]
[나: 그럼 감사하죠. 상호만 알려주시면 저희가 검색해서 찾아가볼게요.]
나는 우리 가게 손님들 중 또 다른 대표 금손인 신혜원, 천연우 부부에게 연락해보았다.
아무래도 두 분은 목재로 공예품을 만드시는 분들이다보니 인형극의 인형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그래서 혹시나 잘 아는 분이 없냐고 여쭤보니 바로 알려주셨다.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기 때문에 공예쪽 인맥이 꽤 있는 듯 보였다.
[신혜원: 그쪽은 마트나 잡화점에 대량으로 도매하는 쪽 전문이라서, 상호가 따로 없거든요. 제가 주소 알려드릴게요. 한 번 직접 찾아가보세요. 미리 연락해둘게요.]
[나: 아이고... 그렇게까지 도와주시다니. 완전 감동이네요.]
[신혜원: 대신 담에 저희 공방에 음식 배달해줄 때는 영희씨한테 고기 조금 더 얹어주셔야 해요?]
[나: 4인분 같은 2인분으로 배달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신혜원씨 덕분에 오누이 식당 근처의 인형 도매 매장에 방문하게 되었다.
목재 공방처럼 특별한 간판이 없어서 눈에 띠지 않았지만, 매장의 안쪽에 들어오자 알록달록한 바구니에 다양한 인형들이 오목조목 모여있었다.
앙증 맞은 느낌이 들어 귀여웠다.
- 아! 혜원이 소개로 오신 분이죠? 편히 구경하다가 가세요.
“감사합니다. 도매 매장엔 원래 저희가 들어오면 안 될 텐데, 뭔가 영업 방해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어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손님은 다 똑같은 손님이지. 이렇게 직접 와주셨는데. 이왕 오신 거 이쁜 걸로 몇 개 챙겨가세요.”
매장 내부엔 혜원씨 또래의 젊은 사장님이 한 분 계셨다. 매장이 넓지 않은 탓에 혼자서 운영하고 계신 모양이다.
그 덕에 조금 더 편하게 인형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후... 윤스리가 골라보게써. 디게 많으니까 잘 골라이지 대거둔.”
“그래, 우리 윤슬이가 골라보자.”
5세는 매우 의욕이 넘친다.
차웅씨를 도와드리는 것과 별개로 인형 구경에 신이 난 듯하다.
윤슬이 키에 비해 인형이 담긴 바구니들의 높이가 높았다. 그래서 적당히 구경할 수 있을만한 높이로 들어주었다.
심사숙고하듯 움- 움-
소리를 내는 5세.
“옵바, 쩌기 바바. 저거 해적?”
“그렇네. 저것도 해적 느낌이네.”
며칠 전에 해적 시나리오를 쓰는 게 결정된 후. 차웅씨와 셋이서 스마트폰으로 해적에 대한 이미지를 몇 개 검색해보았다.
그때 영화나 만화에서 그려낸 해적 이미지들을 많이 관찰했기에 이제 윤슬이는 해적처럼 생긴 인형을 구별해낼 수 있다.
“해적은 저게 좋케써.”
윤슬이는 다양한 인형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내게 보여줬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챙이 길다란 모자를 쓴 해적 인형이었다.
특히 장난감 칼을 손에 쥐고 있어서 앙증맞으면서도 터프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고 해적이야. 옵바. 그리구 미정 선샌님이랑 닮았으니깐 이게 좋케써.”
“그렇네. 정말 미정 선생님이라 이미지가 조금 비슷한데?”
차웅씨가 대략적으로 구상한 시나리오에 따르면 인형은 4개가 필요할 것 같았다.
주인공 해적 인형과 그 동료가 될 해적2.
동료와 주인공 해적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인형.
마지막으로 괴물 인형이다.
윤슬이는 먼저 해적으로 쓰일 인형들을 다 찾은 후 괴물 인형 찾기에 돌입했다.
더욱 적극적으로 보인다.
“쿠쿠... 윤스리가 개물 할 거니깐 젤루 무서운 개물로 찾을 거야.”
그렇다.
윤슬이가 맡을 배역이 괴물이다.
그래서 더욱이 분발하여 찾는 것이다.
5세의 성격 상 어중간한 괴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겠지. 괴물다운 괴물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움...”
“왜? 윤슬이 마음에 드는 괴물은 없어?”
“웅... 개물은 쪼꿈 더 무서워야지 대눈데.”
“하지만 이건 괴물이 아니라 괴물 인형이잖아. 그래서 조금 귀여울 수밖에 없어.”
“우우... 실맹.”
윤슬이는 실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형극에 쓰는 인형들을 살벌하게 만들었다간 아무도 원치 않는 비주얼이 될 것이다.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것은 영화나 만화 정도면 충분하다.
윤슬의 기운이 조금 빠져있지만.
이럴 때 말로 구슬려서 윤슬이 기분을 띄워주는 게 참된 오빠의 역할 아니겠는가.
“괜찮아, 윤슬아. 오히려 이건 기회야.”
“움...?”
“만약 저렇게 귀여운 괴물 인형으로 진짜 무섭게 연기를 하면 오히려 윤슬이가 더 대단한 게 아닐까? 왜냐면 별로 안 무서운 인형으로도 엄청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했다는 뜻이잖아.”
“잉...?! 그렁가?”
“그럼! 원래 진짜 실력자들은 도구를 따지지 않는 법이라고 했어. 윤슬이는 보스잖아?”
“그렇치.”
“그럼 귀여운 괴물 인형으로도 유민이랑 미정 선생님을 놀라게 할만한 연기가 가능할 거야.”
“아앗...! 듣고 보니 옵바의 말이 정답인 거 같으다!”
생각이 바뀐 5세는 두리번거리며 귀여운 괴물 인형을 찾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인형 가게 사장님이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주신다. 나의 말솜씨가 훌륭하게 먹혀든 것 같다.
우리는 일반 가격보다 조금 더 저렴하게 인형극에 사용할 인형을 구매하여 식당으로 복귀했다.
“짜짜웅 아저씨! 영히씨! 우리 왔따. 이고 바바. 인형 디따 기여운 걸루 샀어. 왜냐믄 윤스리가 짱짱 무서우니깐. 기여운 걸루 샀어.”
- ...?
영희씨는 윤슬이가 무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만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동시에 머리를 싸매던 차웅씨도 벌떡 일어나며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 저도 이제 시나리오 작업이 끝난 것 같습니다.
“오! 그럼 이제 배경이랑 무대만 마련하면 할 수 있겠네요, 인형극. 혹시 저희한테도 보여주시겠어요?”
“보여달라! 윤스리 아쥬 궁금.”
윤슬이를 무릎에 앉혀두고 천천히 글을 읽어내렸다.
정교한 동화나 소설처럼 글이 단단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차웅씨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글이었으니까.
“너무 좋네요. 이런 이야기라면 분명 미정 선생님이랑 유민이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 거예요.”
“그렇타! 윤스리가 개물 역할은 제대루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