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친애하는 해적에게(3)
그리고 결전의 날이 되었다.
인형극을 위한 작은 무대를 구하고.
권수안씨에게 맡겼던 배경 그림을 받고.
짧은 대본이지만 어떻게든 극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외워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 이제 오겠군요.
“차웅씨는 무대 뒤쪽에 숨어계세요. 배경 넘기는 타이밍 실수하시면 안 돼요.”
- 그럼요. 그래도 제가 쓴 이야기니까,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짜짜웅 아저씨. 윤스리가 개물 너무 무섭게 해두 놀라믄 안 대는 거 알지? 인형 놀이 끝날 때까지 절때루 나오믄 안 대.”
- 그래. 윤슬이 괴물 연기는 여러 번 봤으니까, 이제 안 놀랄 거야.
차웅씨는 우리 남매를 각각 한 번씩 쳐다본다.
짧은 아이컨택.
인형극을 준비하며 차웅씨가 어떤 심정인지는 충분히 알았다. 오늘, 곧 다가올 짧은 시간을 위해 많은 마음들을 품었고. 많은 것을 준비한 차웅씨였다.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옵바, 갠짜나. 윤스리가 개물 연기 잘 하믄 유미니랑 선샌님두 감동 받을 거야. 그러믄 짜웅 아저씨랑두 다시 친해질 쑤 이써.”
“그래. 우리 윤슬이 역할이 아주 중요하겠네?”
“그렇타.”
곧 있으면 미정 선생님이 올 것이다.
유민이와 함께.
평일 저녁 시간대지만 가게엔 손님이 한 분도 안 계신다. 오늘을 위해 비워두었다.
가끔 휴일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혹은 윤슬이랑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려고.
그런 이유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온전히 차웅씨와 유민이네 가족을 위해서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미정 선생님에게는 학창 시절에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했고, 유민이는 우리 윤슬이와 가장 친하게 지내주는 친구이다.
그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가게 저녁 타임 한 번쯤은 투자할 수 있다.
덜커덕-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미정 선생님과 유민이가 나타났다. 유민이는 반갑게 윤슬이를 보고 인사하지만.
5세의 경우.
“쿠쿠쿠... 이고 바바.”
인형극에 쓰일 괴물 인형을 손에 끼우고 유민이를 위협한다.
크앙! 크앙!
유민이의 말랑한 볼을 꼬집어보거나 콧잔등을 톡톡 건들여본다.
그리곤 의아해한다.
“움...? 옵바, 왜 유미니가 안 무서워하지? 이게 개물 디게 무서운 건데.”
“그건... 아직 연극이 시작 안 해서 그렇지. 윤슬이가 연극에 직접 들어가서 연기하기 시작하면 엄청 무서워할 거야.”
“아하! 그러쿠나.”
전혀 아니었다.
아무리 무서우려고 해봤자, 5세는 5세.
심지어 인형도 단추 눈에다가 동글동글한 인상이라서 그닥 무섭지 않은 느낌이다.
5세의 바램은 아주 높은 확률로 무산될 듯하다.
-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인형극을 해? 되게 신기하네. 나랑 우리 아들만 부른 것도 그렇고.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저희도 다양한 걸 시도하는 거죠. 가게에 어린 애들 데리고 오시는 손님들도 가끔 계시니까. 그런 분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해야 되나?”
“그, 그렇타! 윤스리가 열씨미 연습하구 이써.”
- 흐응...
다행히 미정 선생님은 그냥 믿어주시는 것 같다.
이 인형극이 오직 오늘 하루만을, 그리고 당신들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 주현아, 나랑 유민이 배고프니까. 이거 인형극 끝나면 밥도 좀 만들어주라. 맛있는 걸로.
“재료가 남아있으려나? 그건 이따가 상황 봐서 해드릴게요.”
- 엄마, 나 빨리 보구 싶다. 윤슬이가 인형극 하는 거.
- 그래? 엄마도 기대돼. 윤슬이랑 주현이 형아가 엄청 열심히 준비했대.
- 응...!
또 다른 한 사람.
우리 남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 있다.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쿠쿠... 윤스리 개물.”
식탁들 중 일부를 식당 구석에 몰아두고. 유민이와 미정 선생님만을 위한 의자를 두었다.
가게 내 조명을 적절히 조절하고.
나는 작은 인형극 무대의 뒤편으로 들어왔다.
나와 윤슬이와 차차웅씨가 각자 맡은 역할은 이랬다.
윤슬이: 괴물 역할 한정
다양한 배역을 맡길 수도 없었던 게 주된 이유. 5세는 말 그대로 5세이기에.
괴물 하나 맡아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차차웅: 배경 변경 및 해적과 동료 역할
차웅씨의 경우 무대 뒤편에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을 예정이다.
그래서 그 뒤쪽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나머지다.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었지.”
지문. 그리고 괴물을 제외한 캐릭터들의 대사는 모두 내가 읽게 되었다.
차웅씨의 경우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윤슬이는 애초에 글을 잘 못 읽는다!
불가피한 분배였다.
유민이와 미정 선생님 모자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인형극을 시작했다.
“인형극, 넓은 바다와 해적의 보물. 시작합니다.”
짝짝짝짝짝-
내가 시작한다고 설명하자 매너 있게 두 사람이 박수를 쳐주었다.
심호흡을 하고.
인형극이 시작됐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먼 나라엔 자유를 꿈꾸는 소녀가 살았습니다. 그 소녀는 넓은 바다를 누비며 값 비싸고 반짝이는 보물을 찾는 해적을 동경했습니다. 그 해적들의 모습은 소녀가 꿈꾸는 자유와 아주 닮아있었거든요. “난 나중에 커서 꼭 해적이 될 거야. 그래서 보물을 찾고 말 거야.”]
- 엄마랑 똑같다. 엄마두 옛날에 해적 하구 싶었다구 그랬자나.
- 그러게. 엄마랑 비슷하네?
관객이 단 둘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속닥이는 게 들려왔다.
[소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넓은 바다로 떠났습니다. 해적이 되기로 한 것이죠. 처음엔 혼자였기 때문에 서툴고, 실수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점점 익숙해졌죠. 뭐든 자주 하다 보면 실력이 좋아지는 법이니까요.
점점 자신감 넘치는 해적으로서 바다를 유랑하던 사이. 어느새 소녀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 소녀는 더욱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물에게 습격받고 있는 어느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꾸아아아앙!”
5세, 혼신의 괴물 연기.
손가락을 꼬물거리자 인형팔이 허둥지둥 움직이는 게, 무대 안쪽에서 보면 제법 귀엽다.
[“날 구하지 말고, 빨리 도망가!” 괴물에게 공격당하는 남자는 말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다가 해적까지 위험에 처할까봐 걱정됐던 것이죠. 하지만 해적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험난한 바다를 지나온 해적에게 그 괴물은 한 주먹거리였거든요. 해적에게 도움을 받은 남자는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하지만 표정이 별로 밝지만은 않네요?
“난 어려서부터 괴물들한테 쫓기며 살았어. 그 괴물들은 나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해. 나와 붙어 있으면 아마 너도 그 괴물들한테 시달리며 살아야할 걸? 빨리 이곳을 떠나.” 남자의 말에 해적은 호탕하게 웃어요. “하하하! 상관 없어. 그 괴물들이 얼마나 몰려오든 내가 무찔러줄게.”]
- ....
- 응? 엄마, 왜 그래?
- .... 아무 것도 아니야.
관객이 어떤 반응을 하든.
인형극은 계속된다.
[해적의 호탕한 성격에 이끌린 남자는 동료가 되기로 했어요. 함께 드넓은 바다로 나가기로 했죠. 그녀와 함께라면 괴물이 두렵지 않았거든요.
두터운 바위를 피하고. 몰려오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아직 보물은 찾지 못했지만 해적과 동료는 깨달았어요. 어느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두 사람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 해적아, 내가 이 배에 함께 있으면 계속해서 괴물들이 몰려올 거야. 그럼 우리는 괜찮더라도 이 아이는 언젠가 크게 다칠지도 몰라.” 동료는 너무도 걱정되었습니다. 세상의 빛을 본 지 오래지 않은 아이는 연약했으니까요.]
유민이의 손이 미정 선생님의 손을 꼬옥 붙잡는 게 느껴졌다.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 떠나면... 안 돼.
[해적은 여러 번 말렸습니다. “셋이 함께라면 분명 괜찮을 거야. 이 배를 떠나면 안 돼!” 하지만 해적의 말은 동료의 결심을 바꿔놓을 수 없었습니다. 동료는 사랑하는 아이와 친애하는 해적을 위하여 배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동료가 떠나간 이후. 해적은 힘겨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남겨진 아이와 함께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아이는 해적과 동료, 두 사람을 너무도 닮았고. 사랑스러웠거든요. 하지만 해적의 마음엔 여전히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원망? 사랑? 추억? 그 감정에 대해선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이 오래 흘렀습니다. 너무도 오래 흘렀습니다. 해적의 아이는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자랐습니다. 소녀가 해적을 꿈꾸던, 그 나이와 비슷해졌습니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동료는 후회했습니다. “해적의 말대로 저 아이의 옆에 있어줘야만 했는데.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 엄마? 괜찮아?
- 크윽...
미정 선생님이 울고 있었다.
저런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분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인형극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클라이막스다.
[해적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보고, 듣고 있던 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동료의 체질을 바꿔준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괴물들이 동료를 쫓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 가족을... 스스로 망가뜨렸는데.”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많은 것이 너무도 늦어버렸습니다. 동료가 사랑하던 해적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조금 늙어버렸고. 아이도 자라났습니다. 아마 동료가 직접 찾아가더라도 아버지란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는 가족을 영영 잃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게 치사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너무 늦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만큼은 어떻게든 좋은 미래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핑계를 대자. 어디 좋은 핑계가 없을까?” 동료는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세 사람의 해적선에 돌아갈 수 있는 핑계를 말이죠.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직 해적은 보물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요. 바다에서 자유를 누리며 빛나는 보물을 찾는 것! 그게 바로 해적의 바램이란 걸 동료는 떠올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소한 것이라도 깨달았으니까. 동료는 말합니다.]
- 그러니까 내가... 조금, 아니 너무 많이 늦었지만. 다시 한 번만. 다시 한 배를 타고. 같이 보물을 찾아줄래? 내가... 많이 미안해.
- 차차웅...
투박하고, 저렴한 인형극은 끝이 났다.
그리고 동료는 해적에게 말했다.
다시 보물을 찾으러가지 않겠느냐고.
너무 늦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많이 흘렀지만.
그래도 한 번만 다시 함께 바다로 떠날 수 없겠느냐고.
그 시절이 행복했고.
이제 더 이상 괴물이 쫓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해적의 꿈, 아니 이제 모두의 꿈이 된 보물을 찾으러 함께 배에 타줄 수는 없겠느냐고.
해적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 다시 한 배에 타고 싶다면 조건이 있어.
그건 동료의 다소 이기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에 의한.
슬픈 결말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이에 대하여 윤슬이는 내게 물었다.
“움? 그러믄 옵바랑 윤스리랑 유미니랑 짜짜웅 아저씨랑 놀러 가므는 대는 거야?”
“.... 맞아. 이게 또 이렇게 됐네?”
해적은 자신보다 아들을 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