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겨울잠 자는 법(1)
이건 아직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를 가기 전에 있던 일이다.
제야의 종이 울리고 1월이 되었다. 12월보다 1월 날씨는 훨씬 춥고, 바람이 사나웠다.
그래서 윤슬이는 매일 출근할 때마다 목도리를 볼 위까지 둘둘 둘러야만 했다. 내가 그렇게 시켰으니까.
“이거눈 입이 넘무 막히자나!”
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늘 있던 일이었으나 얼굴이 꽁꽁 얼어서 아파하는 것보다야 나았으니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우우... 이거 바바. 옵바 때문에 목도리 이렇게 돼써.”
출근하여 가게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윤슬이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단면을 보여준다.
그곳엔 마치 아침 이슬처럼 침방울이 맺혀있다. 날이 추운 탓에 입으로 숨을 쉬다보니 자연스레 목도리에 맺힌 것이다.
“이리 줘봐, 오빠가 깔끔하게 말려줄게.”
“흥, 여기 있쏘.”
내게 목도리를 넘겨주면서도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
얼굴이나 턱 주변에도 침이 은근히 묻어 기분이 썩 불쾌해보인다.
“윤슬아, 근데 이거 목도리 안 하면 목이랑 옷 사이로 바람 숭숭 들어가서 감기 걸려. 감기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함모니랑 옵바가 약손을 해줘. 이제 영히씨두 있으니깐 약손이 세 개야... 움?! 무적?!!”
“원래 고양이 손이 효과 더 좋은 거 알지?”
영희씨가 설명하자, 5세는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단 듯이 기뻐 몸부림을 친다.
“.... 그것도 중요하지만 감기에 걸리면 윤슬이가 많이 아프겠지? 그럼 손해가 크잖아.”
“움? 어떤 점에서?”
“감기 걸리면 다 나을 때까지 오빠가 죽만 먹일 건데. 아픈 동안 오빠 음식 하나도 못 먹어. 간식도 못 먹고.”
“크억! 목도리 이리조.”
아무래도 요리를 못 먹는 상황은 윤슬이 입장에서도 피하고 싶은지, 내 손에서 목도리를 빼앗아가서는 다시 자기 얼굴에 꽁꽁 매기 시작한다.
“웁... 웁... 앞이 안 보여!”
문제는 너무 꽁꽁 싸매어서 마치 미라처럼 되어버렸다는 것. 앞이 안 보여 비틀거리는 윤슬이가 웃겨서 그냥 그대로 냅두기로 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아서 목도리를 풀겠지.
“오늘 장사 준비나 시작해볼까.”
한국인이라면 서늘한 날씨를 느끼곤, 속을 덥혀줄 국물 음식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이번 겨울철에 준비했던 오늘의 요리는 대부분 국물 요리였다.
오늘도 마찬가지.
“순두부찌개에 차돌 넣어버려야겠다.”
차돌순두부!
일전에 외할머니네에서 순두부찌개를 끓였던 기억을 되살려 만들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 순두부찌개는 열량이 국물 요리치곤 열량이 적다. 그걸 보완하기 위한 차돌이라고 할 수 있다.
넉넉하게 끼어있는 지방 부근과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이 예술인 차돌.
찌개 안에 들어있는 메인 재료인 순두부와 어우러져 만족스러운 맛을 내어줄 것이 분명하다.
“영희씨, 바깥에 오늘의 메뉴 좀 적어주라.”
“오냐.”
“윤스리두 같이 가야징.”
바깥에 내어놓을 앉은뱅이 칠판에 오늘의 메뉴를 표시해두는 일.
굳이 따지자면 잡일이고,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굳이 영희씨가 이 일을 맡게 된 이유는.
[차돌 순두부찌개]
“움, 역씨 영히씨 글씨가 젤루 이뻐.”
“후후후... 당연하지. 고양이가 마음만 먹으면 닝겐들보다 더 이쁘게 글씨를 쓸 수가 있다고!”
나보다 글씨를 더 잘 쓰기 때문이다. 윤슬이는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논외.
내 필체가 더러운 것은 아니다만 왠지 모르게 영희씨는 달필이다.
깔끔하게 쓰여진 글씨 아래, 윤슬이가 펜을 잡더니 무언가를 끄적끄적 그리기 시작한다.
“뭐 그리는 거야?”
“순두부찌개, 옵바가 만드는 거 그릴 거야. 그러믄 손님들이 몬지 몰라두 그림 보구 맛있다구 생각하겠찌?”
제법 좋은 생각이었다.
물론 순두부찌개를 모르는 사람은 한국에서 좀처럼 없겠지만 옆에 아기자기한 그림 하나가 붙어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한 번 더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이다.
순두부를 자르다가 그림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직접 보러 가게 되었다.
어차피 순두부찌개는 의외로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음식이라 오늘 아침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 이건?”
“움? 순두부찌개라구 했자나.”
그림을 보자면 일단 냄비처럼 보이는 그릇에 무언가 울퉁불퉁한 것들이 잔뜩 들어가있긴 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걸 보고 순두부찌개라고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애초 앉은뱅이 칠판에 색을 칠할 수 없기 때문에 찌개를 그린다고 치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일 것만 같다.
그나마 옆에 ‘차돌 순두부찌개’라고 적혀있으니 망정이지.
“옵바, 이거 바바. 잘 그렸찌? 누가 봐도 순두부찌개자나.”
“....”
나는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주고, 주방으로 복귀했다.
“취미로라도 미술은 시키지 말아야겠다.”
그게 동생을 위한 길이다. 우리 윤슬이는 다른 분야에도 재능 많으니까 괜찮아.
**
가게가 오픈하자 누구보다 먼저 황치호씨가 방문했다.
우리 남매와 영희씨에게 반갑게 인사하고는 바 테이블 부근에 자리하는 치호씨.
“치호 아저씨 궁금한 게 있따.”
“응? 궁금한 거? 윤슬이가 나한테 궁금할 게 뭐 있어?”
윤슬이는 치호씨가 자리에 앉자마자 허겁지겁 달려가서는 물어본다.
“있자나여, 왜 수이니 언니는 더 안 와? 요즘 넘무 안 오는 거 같아. 치호 아저씨는 이니 언니 친구니깐 알자나여. 왜 안 오지? 옵바 음식이 질렸나?”
크나큰 충격!
우리 가게 개인 매출 1위를 달리는 분이 내 음식이 질렸다고?!
안 그래도 요즘 잘 안 오시는 것 같아서 신경쓰고 있었는데, 괜히 불안해지네.
최대한 질리지 않게 하려고 메뉴도 매일 바꾸고 있는데 말이다.
“아니, 그건 아닐 걸?”
“움? 그러믄 왜 안 오지?”
“되게 단순한 이유인데. 그냥 추워서 안 나오는 거야. 걔가 은근히 귀차니스트거든. 여기에서 자기 집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일일이 바이크 타고 오는 것만 생각해봐도.”
“움... 그렁가.”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1월이 춥긴 하지.
“윤스리는 추워두 저거 목도리 꽁꽁 싸매구 출근하는데! 이니 언니보다두 윤스리가 더 쌔다. 왜냐면 추위를 이기니까는. 그리구 맨날 인나기 귀찮아두 옵바 출근시켜야대니깐 같이 일어나주거든!”
“크크, 그 말 전해줄게. 근데 왜 백수인이랑 나는 동갑인데 난 아저씨고, 수인이는 언니냐고.”
“그거눈 어쩔 수가 업써. 이미 정해진 사항이야.”
“.... 오늘 면도를 안 하고 와서 그런가.”
치호씨는 자기 턱을 매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이유가 아니란 것쯤은 본인도 슬슬 알 때쯤이 되었는데, 윤슬이에게 오빠라고 불리는 것을 좀처럼 포기할 수가 없는가보다.
유감.
“그나저나 저번에 같이 눈치웠던 거 아직도 기억나는데, 신년이 되어도 눈이 안 녹았네요.”
“그 전날 워낙 폭설이었잖아요. 출근할 때도 아직까지 저만큼 쌓여있구나 싶어서 깜짝깜짝 놀라요.”
치호씨는 문 바깥의 눈더미를 가리켰다.
12월 말쯤에 한 번 눈이 거세게 내린 적이 있는데, 그때 쌓였던 눈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와 별 다름이 없는 게 문제다.
날이 춥고 바람이 부는 것도 한 몫하지만, 무엇보다 해가 잘 들고 있지 않다.
그게 문제인 듯하다.
“잔깐만! 윤스리 얘기는 아직 안 끝났슴미다.”
우리가 몇 마디 나누고 있는데, 윤슬이가 손을 번쩍 들며 우리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었다.
아직 백수인씨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
“궁금한 거 더 있어? 지금 전화라도 연결해줄까?”
“우움... 수이니 언니 말구 몬가 이상한 게 이써.”
“으응? 이상한 게 뭐가 있어?”
“몬가 날이 추워지니깐 윤스리는 깨달은 검미다.”
“뭘 깨달았는데 그래.”
“바깥엔 사람밖에 없어졌어. 나뭇잎들두 전부 사라졌어. 그리구 강아지들두 많이 업써. 팔랑팔랑 나비랑 애애애앵 거리는 모기들두 안 보여. 이게 어떻게 된 일임미까? 수이니 언니처럼 설마 걔들두 전부 추워서 집에만 있는 건가?”
윤슬이는 불만스러워보인다.
날이 추워지니 확실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연히 1월이니까,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사람도 적어질 테고.
또, 곤충들은 자연스레 동면에 들 테니 눈에 안 보이는 게 당연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까.
“음... 그건 조금 특별한 이유인데.”
“특별?”
“응, 원래 이렇게 추운 겨울이 되면 동물들은 겨울잠이라는 걸 자.”
“겨울잠...!”
“응, 겨울 내내 잠만 자는 거야. 저번에 한 번 동물 다큐에서 봤던 적 있지 않나?”
“움? 그랬던가?”
“그래, 곰 나오는 다큐에서 한 번 봤잖아. 곰들은 날씨가 너무 추우면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자기 집에다가 먹을 것 잔뜩 쌓아두고는 한동안 잠만 잔다고.”
“움... 움...”
윤슬이는 잠깐 기억을 되짚는 듯 관자놀이를 검지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다가.
눈을 팟! 하고 뜬다. 떠오른 것 같다.
“전혀 기억이 안 남니다.”
“??”
아니었다.
그냥 기억 난 척 해보고 싶었나보다.
“근디 겨울이 추운데 대체 어디서 잠을 잔다는 거지? 윤스리랑 옵바처럼 집이 있는 것두 아니자나.”
윤슬이는 궁금해졌는지, 배달 용기를 준비하고 있는 영희씨에게 다가간다.
아무래도 길거리 생활이 길었던 영희씨라면 알 거라고 추측한 모양이다.
“실제루 어떻씁미까?”
“겨울잠을 어디서 자느냐고?”
“웅.”
“흠... 그건.”
애초 고양이들이 겨울잠을 자던가? 내가 알기로 고양이의 조상은 사막에서 살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겨울잠을 보통 안 잘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직접 겨울잠을 자진 않았지만, 그래도 봐둔 게 있지.”
“오오...! 역씨 영희씨야.”
영희씨는 윤슬이를 데리고, 문앞까지 나가서는 손가락으로 크게 쌓인 눈더미를 가리킨다.
“보통은 이런 데에서 자지.”
“잉? 춥자나.”
“안에 공간을 잘 만들어두면 꽤 버틸만해.”
“작쩐 시작...!”
그 말을 듣고 윤슬이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모양.
갑자기 장갑을 끼더니 문밖으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