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겨울잠 자는 법(2)
“겨울잠을 잠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윤스리도 눈 속에서 코- 하구 겨울잠을 잠니다.”
“....”
혼자서 허겁지겁 가게 밖으로 나가길래 다시 안으로 데려왔더니, 또 이상한 데에 꽂혀서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는 5세.
오늘도 한결같다.
“설마 가게 앞에 잔뜩 쌓여있는 눈 속에 들어가서 잘 생각이야?”
“응! 역씨 옵바는 마니 설명 안 해두 금방 알아준다니깐, 히히.”
확실히 애들 입장에선 탐스러운 눈의 양이다. 그 앞에 서면 내 명치 아래까지는 오는 높이니까, 꽤 높이 쌓여있다. 가끔 윤슬이를 위에 올려다가 몇 번 미끄럼을 태워준 적도 있을 정도.
“근데 저기 안에서 자겠다는 건...”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잔뜩 쌓인 눈에 굴을 파는 식으로 만들어내는 간이 집, 이글루.
“안 대는 검니까?”
윤슬이는 눈을 똘망똘망 빛내며 내게 묻는다. 안 되냐고 묻는다는 건, 보통 하게 해달라는 뜻.
“안 되는 것까진 아닌데, 윤슬이 혼자서는 힘드니까 이따가 가게 브레이크 타임되면 오빠랑 영희씨랑 셋이 같이 나가서 작업할까?”
“셋이서 같이 겨울잠? 그러믄 장사는 누가 해...?”
“셋이서 같이 겨울잠 자는 거 아니고, 이글루 만드는 거야.”
“이, 이글루? 그게 모여.”
“눈집. 저기 잔뜩 쌓여있는 눈 안에 공간을 만들어서 사람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집을 만드는 거야.”
“오오...! 그러믄 윤스리 집인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짱이다... 그렇다믄 작쩐을 쪼꿈 이따가 옵바랑 같이 하겠슴미다.”
윤슬이는 우선 장갑을 벗어두며 콧노래를 부른다.
같이 이글루를 만들게 되어서 많이 신이 난 모양.
“후루룩... 윤슬이 왜 이렇게 신이 났대?”
“움? 옵바랑 같이 이글루 만들기루 했따여.”
“이글루?”
“눈집! 저기 가게 바깥에 눈 짠뜩 쌓인 거 안에 파구 들어가서 자는 거야. 앞으루 윤스리 집.”
“오오, 재밌겠는데?”
차돌 순두부찌개를 야무지게 드시던 치호씨가 관심을 보인다. 식사는 거의 마치신 상태.
“나 이거 다 먹으면 같이 나가서 밑작업만 같이 조금 해둘까?”
“밑작업?”
“응, 나도 이글루 좋아하거든. 왠지 로망 있잖아.”
“오오...! 윤스리 집 만드는 거 도와주는 거야?”
“응, 도와줄게. 재밌을 거 같으니까.”
“치호 아저씨 조은 사람.”
“그니까 오빠라고 해줘도 된다니까. 아직 아저씨라고 할 나이는 아니라고.”
“움? 그럴 쑤는 없고. 치호 아저씨는 아저씨. 옵바는 옵바.”
“....”
5세의 의향은 역시나 한결같다.
다소 실망한 치호씨. 하지만 이글루를 만들고 싶은 마음만큼은 변함 없어 보인다.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식사하는 모습이 전투적으로 변했다.
후릅! 후릅! 우걱우걱...
꿀꺽...!
식사하신 그릇을 적당히 모아서 한 군데에 정리하시고는 계산대 쪽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그리곤 내게 지갑을 내밀더니.
“주현씨! 빨리 계산해주세요, 저 윤슬이랑 이글루 만들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아, 예...”
“쿠쿠쿠... 윤스리보다두 더 신나써.”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
“잘 되어가고 있나요?”
“움? 옵바가 나왔다.”
찾아주신 손님들에게 몇 그릇 정도 음식을 내어드리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치호씨에게만 윤슬이를 맡겨둘 수 없으니 여유가 생긴대로 가게 밖에 잠깐 나와봤다.
“이걸루 치호 아저씨랑 같이 하구 있어써.”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삽을 쥐고 있다.
치호씨는 일전에 제설에 사용했던, 철삽. 윤슬이는 모종삽(건물 공용 창고에 하나 들어있던데 대체 무슨 이유로 모종삽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음).
두 사람은 쭈그려 앉아서, 시간이 지나 단단히 뭉쳐있던 눈더미의 아랫부근을 야금야금 파헤치고 있었다.
“치호 아저씨가 여기 밑에 쪼꿈씩 파면 이글루 만들 수 있다구 그래써.”
“전에 군대에서 많이 만들었는데, 새삼 생각나고 그러네요.”
제법 능숙한 솜씨.
삽의 손잡이 부근을 두 손으로 쥐고 마치 티라미수 케이크의 끝동을 야금야금 갉아먹듯이 파내리고 있었다.
아마 한 번에 무너져내리지 않게끔 조심하는 듯하다. 직접 만져봤더니 눈이 오래 쌓여있던만큼 표면은 제법 단단하다.
그럼에도 철삽으로 한 번에 찔러넣는다면 들어가기야 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무너지는 게 문제니까, 저런 방식을 취하는 것.
“후하... 그래도 조금 팠다.”
치호씨가 자리에서 비켜나자, 그곳엔 윤슬이 하나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만큼의 구멍이 드러나있다.
동생은 신이 나서 그대로 몸을 웅크려 그 안에 쏙 굴러들어가버렸다.
“윤스리 아지트! 어때? 멋있지?”
“완전 특수 요원 같은데?”
“쿠쿠쿠... 보쓰거든.”
보스라기엔 이글루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꼴이 조금 애달프게 느껴졌지만, 본인이 만족한다는데 굳이 태클을 걸 필요는 없었다.
“근데 윤슬아 그러고 있다가 눈 무너질 수도 있어.”
“움...?!”
“눈이 한 번에 잔뜩 무너지면 윤슬이 거기서 평생 살아야 돼.”
“으악! 평생은 넘무 위험해. 그랬다가는 옵바 가게를 못 뺐어. 이제 쪼꿈만 있으믄 내 껀데.”
“???”
내 가게를 장차 빼앗을 생각이었단 말인가.
제법 치명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던 5세였다.
“근데 그러믄 어뜨케 해. 이거 쪼꿈 쉬고 나서 구멍 더 팔 건데 그럼 더 무너지자나. 무너지면 윤스리가 옵바 가게를 못 빼앗아.”
“진심으로 내 가게를 뺐고 싶은 거냐고.”
“.... 아주 쪼꿈 진심.”
“으휴, 그래 내 나이 먹고 은퇴하면 너가 우리 가게 주인이겠지 뭐.”
“쿠쿠쿠... 과연.”
뭐 어찌 됐건.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마침 윤슬이 손에 모종삽이 있으니, 이걸로 천장 작업을 따로 해주면 되겠다.
윤슬이에게서 잠시 모종삽을 빌린 다음에 이글루 밑 바닥에 드러누워서 천장 위를 힘을 주어 꾹꾹 눌러버린다.
천장에 자리하고 있는 눈이 그 윗부근과 잘 뭉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눈이 이렇게 잔뜩 쌓인 지 오래되었어도 눈더미의 안쪽 부근은 쉽게 무너질 수가 있다.
그래서 천장 작업을 따로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뭐야, 주현씨도 이글루 꽤 만들어봤나보네요?”
“아아... 많이 만들어본 건 아니고요. 전에 한 번 만들어봤어요.”
그땐 강씨 아저씨랑 만들었던가, 헌책방 앞에서.
그땐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어서 근처에 내린 눈을 모으고 모아서, 간신히 성인 남자 하나 들어갈만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기 쌓인 눈을 활용하면 윤슬이 뿐만 아니라, 성인 남자 두 명은 더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스리 아지트니깐 윤스리도 직접 해볼게.”
“그래, 이거 모종삽 들고 천장 꾹꾹 누르면 되는 거야.”
“아주 간단하거둔.”
치호씨가 잠시 휴식하는 동안, 이미 파헤쳐진 부근의 천장 작업은 끝이 났고.
어느새 기운을 차린 치호씨가 다시 열심히 삽질한 결과.
제법 그럴 듯한 이글루가 하나 완성되었다.
물론 만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완벽한 반구체의 느낌은 아니다. 우선 되는대로 제설할 때 눈을 쌓아둔 것을 활용한 것이기에 가로로 긴 이글루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넉넉하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고, 적어도 윤슬이는 대만족한 듯 보였다.
“우하하! 앞으루 윤스리는 여기서 살 거야.”
“집에 안 가고 여기에서 산다고?”
“웅, 이 정도믄 아주 땃땃해. 이불 안 덮구 잘 수도 있겠어. 왜냐믄 목도리두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 있으면 씻지도 못하고, TV도 못 봐.”
“그 정도눈 문제가 업써.”
“그리고 밥도 못 먹어.”
“움... 거기까지눈 생각 몬 했따. 밥은 먹어야징.”
아무리 아지트가 좋더라도 밥은 먹어야 하는 5세였다. 그래도 겨울잠은 자야되겠다며 윤슬이는 이글루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어차피 이미 이글루를 만들 때 곳곳이 젖은 옷이라 크게 신경쓰이진 않는다만.
“근데 윤슬이 왜 갑자기 겨울잠을 자려고 하는 건데?”
“움? 잠 마니 자면 키 잔뜩 크자나.”
“그냥 키 크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렇타.”
그런 이유였단 말인가.
어차피 이글루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겨울잠은 잘 수 없을 텐데, 이걸 먼저 알려줘야만 했던 것 같다.
그냥 이글루를 만들고 싶었던 건줄 알았는데, 자기 나름 겨울잠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모양.
“그럼 윤슬이 겨울잠 자고, 일어나면 식당으로 돌아와야돼.”
“알겠쏘.”
윤슬이는 그대로 이글루 안에 누워서 뒹굴거리기 시작했고. 치호씨는 자신의 위업을 사진으로 남긴 뒤에 흥겹게 집으로 돌아가셨다.
“설마 무너지지는 않겠지?”
어차피 날도 쌀쌀하고 바람도 많이 불고, 천장 작업도 꼼꼼하게 해두었으니 무너지진 않을 것 같다.
무너져도 천장이 그리 두껍진 않으니까 다치진 않을 것 같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
“우우... 결국 한 숨도 못 자써.”
“응? 한 숨도?”
“그렇타...”
“왜?”
“손님들이 자꾸 와서 윤스리 들여다보구 가써.”
“허허... 그랬구나.”
저녁 시간때쯤이 되어서야 윤슬이는 다시 가게로 들어와서 내게 하소연한다.
아무래도 이글루에서 잠을 자는 것은 무리였는가보다. 그나마 몇 번인가 손난로를 나와 영희씨가 조달해주어서 몸이 차게 식지는 않은 모양.
“손님들이 윤슬이 자는 게 보고 싶으셨나?”
“아니, 그냥 이게 모냐구 자꾸 와서 보구 가써.”
“그래서 윤슬이가 쫓아냈어?”
“아니, 한 번씩 들어오게 허락해조써.”
“아주 잘했네.”
그러니까 결국 윤슬이의 이글루 생활은 성공적으로 손님들의 관심을 끌어낸 모양이다.
딱히 그런 의도로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또 우리 착한 윤슬이는 손님들이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서 놀 수 있게끔 이글루의 한 자리를 양보해주었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 넓은 5세인가.
“대신 겨울잠은 집에서 실컷 자자.”
“그게 좋케써. 이글루는 사실 바닥이 넘무 딱딱해. 그냥 집이 체고야.”
“그럼 집이 최고지.”
결국 겨울잠을 포기한 윤슬이.
오늘 하루는 이글루 만들기 덕분에 금방 지나간 듯하다. 영희씨와 셋이서 함께 식당 마감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려는데.
윤슬이가 깜짝 놀라며, 나와 영희씨를 부른다.
“큰일 나써! 윤스리 집 무단점거 당해써!!”
“무단점거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상당히 다급해보여서 빠르게 이글루 쪽으로 가보았는데, 확실히. 무단점거는 무단점거였다.
귀엽지만.
“고양이들이 이쪽으로 몰려왔구나.”
길고양이들인 듯했다.
쌀쌀한 겨울 날씨를 피할 곳을 찾다가 우리 가게 앞에 있던 이글루를 택한 듯하다.
세네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괜히 웃음이 난다.
“밖에만 돌아다니믄 힘드니깐, 특별히 윤스리가 아지트 빌려줄게. 대신 여기다가 멋대루 쉬야하믄 안 댄다.”
냐아앙-!
고양이 중 한 마리가 마치 알았다는 듯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자기들은 깔끔해서 그런 짓 안 한 대.”
영희씨가 해석해주었다.
“윤스리 대신 거기서 겨울잠 자믄 대. 추우니깐 거기서 바람을 버텨야 대! 알겠지?”
고양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윤슬이는 뿌듯해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겨울잠은 못 잤지만 그래두 다행이다. 냥이들한테 도움이 돼서!”
“그러게, 우리 윤슬이가 또 대단한 일 했네?”
“움! 작쩐 성공!”
오늘은 밤새 고양이들 덕분에 오누이 식당 마당 부근이 시끌시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