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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저는 좋았어요 (38/85)

제38화. 저는 좋았어요2022.03.11.

정답과 오답의 향연이 서리서리 이어지는 와중에 시우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20분 정도. 이 정도면 핸드폰도 시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도아를 제법 오래 도와준 셈이었다.

16548719033542.jpg“대표님, 물티슈 여기 있습니다.”

대단한 보물인 양 들고 있던 케이스에서 물티슈를 서너 장 뽑아 공손하게 건넸다. 티슈를 가져가는 손끝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달궈진 자신의 손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16548719033547.jpg“거봐. 손이 이렇게 뜨겁잖아. 어서 들어가.”

시우는 짧은 말 한마디를 남기며 손을 닦아내고는 녹청 빛 모퉁이로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는 눈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스쳤다. 왜일까? 처음과 비교하면 이런 대화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 것 자체가 기적이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준 어느 정도의 익숙함일 뿐. 자신을 한없이 특별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이야기는 적당한 선을 지키고, 평상시는 오히려 차가웠다. 그날 이후, 그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가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이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고. 어설픈 기대감이 만든 이룰 수 없는 희망일까. 지금 같은 아리송한 착각이 자신의 마음을 비대하게 만드는 주범인 듯했다. 도아는 햇살에 눌렸던 어깨를 더 곧게 펴며 생각을 다잡았다. 턱 끝을 하늘로 올렸다. 촉촉하게 젖은 나뭇잎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겨우 정신을 차린 도아는 시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건조한 것을 눈치채고 물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틀었다. 자신도 모르게 작게 비명을 지르며 물티슈를 툭 떨어트린 것은 찰나였다.

16548719033542.jpg“아야!”

종이에 베인 듯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분 나쁜 고통에 소리를 내질렀다. 불쾌한 고통에 본능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어디에 긁힌 것인지 두리번거렸다. 수형을 위해 잘려나가야 했으나, 살아남았던 나뭇가지는 제법 날카로웠다. 뾰족하고 거친 가지가 급하게 돌아선 도아의 손등에 새빨간 상처를 만들었다.

16548719033542.jpg“으.”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진 상처에서 조금씩 피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인상을 쓰며 팔목을 꽉 부여잡은 도아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의 옆으로 선선한 그림자가 성큼 드리웠다.

16548719033547.jpg“다쳤어? 봐봐.”

도아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에 시우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그가 다친 손을 가볍게 잡아 살폈다. 서로의 숨이라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손등의 고통도 잊은 채 잠시 두 눈을 깜빡이다 서둘러 시선을 떨어트렸다. 핸드폰 화면에 아직 통화 시간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한 도아가 손을 슬쩍 빼며 말했다.

16548719033542.jpg“대표님. 괜찮습니다. 통화 먼저 하세요.”

16548719033547.jpg“아. 통화.”

시우는 그제야 전화를 끊는 것도 잊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서가 뺀 손을 다시금 낚아채듯 잡으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16548719033547.jpg“이따가 다시 전화해.”

무심하게 통화를 끝내는 모습이, 예의 바르게 전화를 마무리 짓는 평소와 달라 당황스러웠다. 물론 비서와 통화할 때는 언제나 쌀쌀맞게 마무리하던 대표였지만.

16548719033547.jpg“손을 왜 빼?”

16548719033542.jpg“그냥 살짝 긁힌 겁니다.”

큰 손안에 잡혀 있는 상처 입은 손이 깃털처럼 가녀려 보였다. 미간을 좁힌 시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16548719033542.jpg“대표님. 이것 보세요. 그때 다쳤던 무릎도 지금 멀쩡합니다.”

도아는 무릎을 살짝 들어 보이며 깨끗해진 피부를 씩씩하게 자랑했다.

16548719033547.jpg“비서실에 구급상자 있지? 가자.”

시우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고는 도아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작은 힘이었지만 도아의 몸은 파도에 휩쓸린 듯 자연스럽게 시우의 쪽으로 떠밀렸다. 그러쥔 손에 이끌린 채 나무 그늘을 지나는 사이 그의 향기와 정원의 풀냄새가 도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조각난 햇빛이 눈을 가볍게 찔렀다. 이상해. 역시 이상해. 분명 그는 변함없는 태도인데, 그 틈으로 지금처럼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정말 나 혼자 착각하는 걸까? 속 시원하게 물어볼까? 아냐, 그냥 고백해버려? 고백했다가 차이면, 그다음은? 안돼. 안돼. 점점 시끄러워지는 마음의 소리가 버거워 반짝거리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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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우는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어내고 깨끗한 거즈로 상처 부위를 지그시 눌렀다. 비서실에 나란히 마주 앉은 둘 사이로 정원의 초록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구급상자에서 소독 용품과 습윤 밴드를 꺼내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만들었다. 에어컨 작동음이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주변이 의식되었다. 시우가 해 주는 치료는 도아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손을 어루만지는 쾌적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좋아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16548719033542.jpg“통화 급하게 끊으시던데, 괜찮으세요?”

16548719033547.jpg“월튼이야.”

16548719033542.jpg“아, 월튼 님!”

16548719033547.jpg“너무 반갑게 부르는 거 아니야? 내적 친밀도가 매우 높으신가 봐.”

그 말에 움찔한 도아는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16548719033547.jpg“이상하네. 우리 비서가 월튼이 남긴 자료 같은 걸 봤을 리도 없는데.”

시우가 픽, 작게 웃으며 한마디 더 거들었다.

16548719033542.jpg“아. 네에. 신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아는 한발 늦게 그동안 자신이 월튼의 업무 스타일을 과하게 참고했던 것을 인지했다. 눈치 빠른 그였으니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왜 시치미를 뗐지 싶어 후회되었다. 하지만 메모장도 들킨 판에 업무분장자료를 참고하고 있었던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경우였다. 눈을 굴리며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자신의 손을 친절하게 감싸 쥐던 온기가 사라졌다. 도아는 그가 치료해준 손을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듯 유심히 감상했다. 시우는 사용했던 핀셋과 거즈들을 집어넣다가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표와 비서. 표면적으로 평화로웠지만 그녀에게 이 시간들이 몹시 불편할 것이라 짐작했다. 조금 전 월튼과 통화를 했던 내용을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16548719033547.jpg“가을에 월튼이 한국으로 올 거야. 예정대로 오게 되면 전략팀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단정하고 서늘한 목소리에 도아는 갑작스런 공격이라도 받은 듯 동그랗게 변한 눈을 들어 올렸다. 당황한 시선 끝에 무심하게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시우가 있었다. 아…….

16548719033542.jpg‘일 년 다녀보고, 부서이동 안 되면 퇴사.’

대표가 속을 긁을 때마다 매번 하는 다짐이었다. 부서이동. 분명 원하는 일이었는데, 기쁘지 않고 당혹스러웠다. 섭섭함과 짜증. 알 수 없는 감정이 도아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 그러자 차수벽처럼 단단한 곳에 모셔 두었던, 시우에게 쏟아내고 싶던 물음들이 삐죽 튀어나왔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일과 할 말을 모두 마친 대표가 미련 없이 일어나는 것이 마음을 더 재촉했다.

16548719033542.jpg“대표님.”

도아는 거의 물에 빠져 지푸라기로 잡아보는, 본능에 가까운 손짓으로 그를 붙잡았다. 안된다고, 이대로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도 그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전제가 늘 깔려있었다. 시우는 분명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려가라는 말을 할 줄 몰랐다.

16548719033542.jpg“혹시, 제가 비서로 근무하는 게 불편하신가요?”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얼굴을 확인한 시우는 나가려던 몸을 돌려 다시 의자에 앉았다.

16548719033547.jpg“불편하지 않아.”

16548719033542.jpg“제가 업무를 부족하게 했나요?”

16548719033547.jpg“아니야. 내가 비서에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건 어차피 공식적인 일정은 전략팀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고, 비서가 저지르는 실수들로 신경 쓰는 게 싫어서였어. 월튼만큼 잘하는 사람이 올 거란 기대감도 없었고. 그런데 지금은 도아 씨 덕분에 꽤 편하게 일하고 있어.”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왔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16548719033542.jpg“그럼. 왜 내려가라고 하시는 거세요?”

16548719033547.jpg“도아 씨만의 장점이 있지만 전문가인 월튼과 비교할 수는 없어. 그건 본인이 더 잘 알 테고. 함께 일할 때 능률이 오르는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당연한 거야.”

뜻밖이었다. 비서가 가장 바라던 일 아닌가? 내려가라는 말을 들으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다. 바다 위에서 단단하게 쏘아붙이던 갈색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16548719033547.jpg“애초에 비서로 들어온 게 아니잖아. 전문 비서에게 넘기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거지. 도아 씨도 그편을 원했던 거로 알고 있고.”

한없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시우의 군더더기 없는 설명을 들은 도아는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16548719033542.jpg“네. 제 입장을 고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한 게 아니라. 저는 그런 의미로 물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홀린 듯 말하던 도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용을 정정했다.

16548719033547.jpg“그럼?”

시우가 삐딱하게 고개를 흘린 채 나직하게 되물었다. 촉촉한 입술을 잘근 깨물었던 도아가 시우의 시선을 저도 모르게 피했다가 결심한 듯 다시 맞추었다.

16548719033542.jpg“제주도에서 일…… 때문에 불편하시냐고 물어본 거였습니다.”

시우가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의 옆얼굴이 작게 꿈틀거렸다.

16548719033542.jpg“어차피, 없던 일로 하기로 했죠. 그런데 대표님,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제가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아까부터 조금씩 요란해지던 도아의 가슴이 갈수록 더 심하게 요동쳤다. 멀미가 인 듯 울렁거리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질문을 끌까지 들은 시우의 비스듬하던 고개가 천천히 일어섰다. 잠잠하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서가 이렇게 성큼 다가오면, 차갑게 대하는게 예전만큼 쉽지 않았다. 서로의 얕은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 상태로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 때쯤 들려온 대답은 매우 단조로웠다.

16548719033547.jpg“응.”

도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시우를 올려봤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짐작도 못 하고, 무심하게 내뱉는 대답의 내용이 너무도 서운했다. 아직 열감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은 어느새 붉은빛이 맴돌았다.

16548719033542.jpg“저는 좋았어요.”

달싹거리는 얇은 입술을 몇 번이고 누르던 도아는 결국 단호한 한마디를 흘려보냈다. 예쁜 말로 포장할 정신도, 아름답게 꾸며낼 시간도 없는 다급한 고백이었다.

16548719033547.jpg“……뭐?”

16548719033542.jpg“좋았다고요. 대표님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요. 아닌가요?”

몰아치는 도아의 대답에 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16548719033542.jpg‘먼저 유혹한 건 당신이야.’

긴장감이 서려 있는 도아의 얼굴위로 그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겹쳐졌다. 사막의 신기루였다고 결론 내렸던 자신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섭게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시우는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고, 침착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맑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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