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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시간 낭비 (39/85)

제39화. 시간 낭비2022.03.14.

침묵은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시우가 기다란 손을 들어 뒷목을 가볍게 눌렀다. 스스로 예상했던 대로 몇 주가 지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무를 살펴도, 일을 해도, 침대에 누워도 그날 들려오던 작은 빗소리까지 또렷했다.

16548719196937.jpg‘어제 일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아무 일 없었듯이 지내고 싶습니다.’

도아가 바다 위에서 말했던 이야기는 거짓말이길 바랐지만, 거짓말이 아니어야 하는 말이었다. 미련 없어 보이는 비서의 태도를 보며, 잘된 일이라고 낭창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곤 했다.

16548719196937.jpg‘저는 좋았어요.’

그래서 지금 들은 저 달콤한 말이 슬프기도 했다. 도아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면, 정말 그녀와 멀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저 쓰러진 사람만 보아도 괴로웠다. 3호점 흉기 난동 사건의 피해자 사진이나 천 회장의 모임에서 유리라 디자이너가 쓰러졌을 때나 단 한 번도 몸뚱이는 덤덤하게 그냥 넘어갔던 적이 없었다. 어김없이 공황발작이 찾아오고, 여진처럼 며칠 후에 툭. 또 몇 주 후에 툭. 괴로움은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이러다 곧 부모님처럼 죽겠지.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던 공허한 순간들이 생생했다. 어릴 때도, 어른이 된 지금도. 우울하고 무력하고 두려운 상념들이 늘 자신의 옆에 머물러있었다. 이런 삶에 도아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아무 일 없듯이 지내기로 한 선택이 옳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16548719196947.jpg“원래 침대 한번 가자고 세상 다 줄 것처럼 하는 사람도 있어. 그냥 그런 거였고. 그걸로 끝인 거야.”

그렇게 정신 못 차리며 안아놓고, 이딴 말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선득한 말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16548719196937.jpg“그럼 저한테 왜 가끔,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세요? 지금도 왜 치료해주셨어요? 봄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들어가도 됐잖아요.”

오늘 정원에서 처럼, 비서가 성큼 다가오면 차갑게 대하기 어려웠다. 분명, 봄에는 가능했는데 지금은 그 쉬운 게 안 됐다.

16548719196947.jpg“일해보니 괜찮은 사람 같아서,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호의를 베푼 것뿐이야.”

시우의 대답에 도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16548719196937.jpg“하! 인간 대 인간은 무슨. 대표님은 대단한 인류애라도 가지셨나 보죠?”

16548719196947.jpg“그날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둘 다 이성적이지 못했잖아.”

16548719196937.jpg“가볍게 말하지 마세요.”

젖어가는 눈으로 푸른 정원을 흘기며 그의 대답을 비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우의 시선 역시 말투와 다르게 고요하지 못했다.

16548719196947.jpg“내가 가볍게 말하는 거 같아 보여?”

16548719196937.jpg“네. 그래서 불쾌해요.”

형형한 눈동자가 다시 시우를 향했다. 이곳에 올라온 날 이후로 미련할 정도로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하는 비서였다. 그렇기에 가끔 내비치는 반항심 가득한 대꾸는 전혀 위협적이지도,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쏘아보는 눈빛과 진실을 캐묻는 책망의 목소리가 압통점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16548719196947.jpg“후회하지 않는다며. 제법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6548719196937.jpg“저도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던 도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상대방의 행동에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 촉촉해져만 가는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 필사적으로 눈물을 막았다.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려왔다.

16548719196937.jpg“그런데요, 대표님. 제가……. 자꾸만, 대표님을 생각해요. 마음이, 마음대로…….”

쏟아붓고 싶은 말은 한가득한데, 끝내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얼굴이 잠잠하던 검은 눈을 달궜다. 진심이구나. 시우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돌덩이처럼 무감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시우의 눈에는 제 앞에 앉은 여자의 피부가 어떤지, 무슨 색의 눈동자를 가졌는지, 두 뺨이 어떻게 물들어 있는지.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참고 노력하다 결국 터져 나와 버린.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이도아만이 보일 뿐이었다.

16548719196947.jpg“이도아.”

비서의 이름을 부르는 음색이 냉소적인 듯 부드러웠다. 얼음 한가운데 타고 있는 불씨처럼 이질적이었다. 도아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말해버리자, 시우의 결심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썩어 있는 물웅덩이에 맑은 빗물이 툭툭 떨어지면, 그 안에 사는 작은 물고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더 넓은 곳에서 풀잎과 흙과 물을 만나리라 기대하며. 지금 자신의 꼴이 그랬다. 모든 고민을 털어놓고 나도 너와 마음이 같다고 말해봐도 되지 않을까. 무엇이 몸을 움직이게 했는지, 미세하게 떨리는 커다란 손을 도아의 뺨을 향해 뻗었다.

16548719196947.jpg“나는.”

그 순간, 흐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참아내던 도아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슬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얀 피부에 늘어지듯 떨어진 한 줄의 물방울 위로 병원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눈물이 안개처럼 겹쳐졌다. 내면의 기억은 잊으려 해도, 잊었다 믿어도 불시에 휘적거리며 이딴 식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항상. 띠. 띠. 띠. 징그러운 기계음. 뒤이어 어머니의 관 앞에서 슬프게 우는 아버지와 자신의 모습이 엉켰다. 어린 자신이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려 팔을 뻗는 순간, 아버지마저 사라지고 자신 혼자 남아 서럽게 울고 있다.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 눈시울이 새빨개질 정도로 울음을 참고 있는 도아의 모습이 환영처럼 흔들거렸다. 왜 또. 지금. 원망 섞인 한숨에도 혐오스러운 기계음과 울음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울렸다. 목이 조인 듯 숨이 쉬어지지 않고, 시선은 캄캄해졌다. 도아를 향했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사랑해달라 매달릴 때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시우는 그을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도아가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내 모든 걸 줄 텐데. 도아의 고백에 일순 풀어졌던 마음을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조였다. 멈춰있던 손끝을 다시 뻗어 도아의 눈물을 가볍게 닦아 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바닥을 향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지금부터 하게 될 말들이 쉬이 내보내 지지 않았다. 그렇게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마음이 녹슨 철심에 찔린 듯 고통스럽고, 처참했다. 그 마음을 숨기며 최대한 천천히, 자신의 몸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16548719196947.jpg“울지 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깊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16548719196947.jpg“나는 관심 없는 사람과 그런 감정 놀음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아. 시간 낭비야.”

도아는 멍한 시선으로 고백의 대답을 담담하게 들었다. 익숙한 표정과 분위기였다. 그동안 잠시 잊었던, 차갑고 무감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표정. 시간 낭비. 도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그 말을 따라 말했다. 아무 죄 없는 단어임에도 오늘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가슴을 깊게 찔렀다. 나쁜 놈.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조금 전, 시우의 입에서 ‘나는’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바보같이 기대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사실은 나도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고백해줄 것만 같았다. 도아는 자존심도 없이, 그래도 만나면 좋을지 모른다고 말하려던 입술을 겨우겨우 눌렀다. 싫다고 말했음에도 계속해서 밀어붙이던 우진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 느꼈고, 어리숙한 판단으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철없는 주혜 같았다. 한시우 대표를 스쳐 지나가는 비서 중 한 명. 특별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흐릿한 존재. 자신을 그렇게 정의하고 나니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16548719196937.jpg“네. 잘 알겠습니다. 괜한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마음이 무너진 상태로 겨우 대답했다.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정원만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시우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은 채 비서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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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공을 응시했다. 조명이 반짝이며 무력감에 빠져있는 눈을 찔렀다. 도아는 눈꺼풀을 찌푸리다 벽에 툭 기대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미쳤었나 봐. 왜 그랬니? 도아야? 아무도 없는 15층. 비서실에 홀로 앉아 벽면에 머리를 퉁퉁 찍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보냈다. 슬픔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수치와 분노가 찾아왔다. 나는 왜 술도 마시지 않는데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가. 미쳤던 걸까? 거기서 울긴 왜 울어. 이 바보야. 한시우는 왜 전략팀으로 가라는 말을 꺼내서는. 아냐. 아무래도 한시우 자체가 문제인 것 같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문젠가? 열기 가득 찬 콧김을 내뱉으며 창피함에 헐떡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시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저녁 일정을 위해 회사를 떠났다. 차라리 무시라도 하면 좋으련만,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에 무심한 듯 턱 끝을 가볍게 내렸다. 안개처럼 뿌연 시선에도 모니터 속 글자는 선명했다. [사직서] 사직서를 집어 던져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인간이 분명했다. 이전 비서도 출장 다녀오고 사직서를 제출해서 안 좋은 소문이 돌았는데, 자신이 시우와 출장을 다녀온 것은 공식 일정이 아니라 사직서를 내도 대표에게 큰 타격이 없을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시우의 소문을 염려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결국,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컴퓨터를 막 종료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16548719196937.jpg“네. 비서실입니다.”

16548719252857.jpg-아! 도아 씨 퇴근 안 했구나! 살았다. 저 사내문화팀 현미 대리예요.

16548719196937.jpg“아. 대리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16548719252857.jpg-며칠 전에 올렸던 대표님 사인 필요한 인쇄물 기억나요? 오늘까지 받았어야 했는데 내가 깜빡했어요.

16548719196937.jpg“아. 네네. 기억나요. 전달은 했으니 아마 되어 있을 거예요. 확인하고 가져다드릴게요.”

16548719252857.jpg-아니에요! 내가 지금 15층 로비로 올라갈게요.

상대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도아 역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이 열려 있는 집무실은 초록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책상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결제 파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미 대리가 부탁했던 인쇄물은 다행히도 제일 위쪽에 놓여 있었다. 파일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서 만년필이 툭,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비서가 되고 한 달째 되던 날, 탕비실에서 과일을 씻다가 떨어트렸었다. 막막하고 절망적이었던 기분 역시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누군가 어느 날이 더 슬프냐고 묻느냐면 단연코 오늘이었다. 의미 없는 고르기를 하며 허리를 굽혔다. 시우가 만년필을 두는 곳은 왼 쪽 서랍 첫 번째 칸. 그가 만년필을 꺼낼 때 본 기억이 났다. 도아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처음으로 대표의 서랍을 과감하게 열었다. 서랍 여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혼낼 테면 혼내보라는 오기도 어느 정도 담겨 있었다. 가볍게 잡아당기자, 힘을 따라 부드럽게 열렸다. 그저 만년필을 넣기만 하고 끝내려던 계획은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 한쪽, 유리통 안에 고이 담겨 있는 목걸이를 발견하면서 중단되었다.

16548719196937.jpg“어……?”

도아는 한참을 그대로 멈춰 있다 눈을 가늘게 만들며 손을 뻗었다. 얇은 체인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혹시 몰라 고리 부분도 뻑뻑한지 확인해보았다. 자신의 목걸이가 분명했다.

16548719196937.jpg“이게 왜?”

회식 날 잃어버린 걸 왜 대표님이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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