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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한 번 만이야 (40/85)

제40화. 한 번 만이야2022.03.18.

사건 현장의 머리카락 집어내듯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초점이 안 맞을 정도로 가까이에 둔 채 한참을 관찰했다. 낯선 곳에 있는 익숙한 물건. 주혜가 회식 때 착용하고 있는 것을 봤다고 했으니 근무 중에 떨어진 것을 시우가 주웠을 리도 없었다. 미화 팀에서 발견했다면 비서에게 주었어야 했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추궁하듯 응시했지만,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목걸이가 그네처럼 왔다 갔다 흔들거렸다. 만약 15층 로비에서 복도 문을 열어달라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비서는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을 뻔했다. 현미 대리의 호출로 겨우 정신을 차린 도아는 목걸이를 주머니 속에 푹 찔러 넣은 뒤 인쇄물이 담긴 파일을 들고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잠잠한 창문 너머 보랏빛 하늘 위로 새털구름이 하느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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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후까지 나름 평화로웠던 시간은 자신의 다급한 고백으로 오염되고, 목걸이의 등장으로 변질되었다. 도아가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려다 맥주를 산 것도, 버스를 타려다 집에 가면 우울해질 것 같아 조금 걷기로 결정한 것도 모두 다 그런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와중에 집무실 정리와 15층 문단속까지 아주 칼같이 하고 나온 자신에게 칭찬을 보냈다. 더위를 머금은 밤바람조차 자신을 힐끗거리며 지나가는 듯했다. 다음 버스정류장을 향해 단정하게 걸어가던 도아는 대차게 차인 날임에도 옆에 시우가 함께 걸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저녁 모임에 동행하거나. 나란히 걷던 순간들이 아름아름 떠올랐다. 제법 넓은 보폭을 가진 사람인데, 생각해보니 늘 걸음을 맞춰 주었다. 제멋대로 뿌리를 내리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멈추는 것으로 미련한 희망을 끊어내었다. 지이이잉. 정신을 차리라는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무기력하게 전화기를 잡아 올린 도아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사는 곳이 멀어 이제는 자주 만나지 못하는 단짝 친구였다. 시우였으면. 끊어낸 줄 알았던 바보같은 희망은 구질구질 또 고개를 내밀었다. 도아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작게 웃었다.

1654871932981.jpg“여보세요.”

16548719329814.jpg-도아! 잘 지내고 있어?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저번에 말했던 거 때문에 그래? 보증금 올라간 거 때문에 속상해했잖아.

1654871932981.jpg“아니. 그것 때문은 아니고. 그냥 일이 힘들어서.”

16548719329814.jpg-퇴근은 했어?

1654871932981.jpg“지금 하는 중이야.”

16548719329814.jpg-야, 육아는 퇴근도 없어. 고마운 줄 알고 일해.

1654871932981.jpg“알았어. 그냥 목소리를 들으려고 전화한거지?”

16548719329814.jpg-응. 우리 도아 보고 싶어서.

친구와 통화를 시작한 도아는 버스정류장에 가려던 계획을 바꿔 앉을 곳을 찾았다. 친구와 통화하며 맥주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친구는 도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16548719329814.jpg-얘가? 오늘 진짜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혼났어?

1654871932981.jpg“아니, 그런 게 아니고……. 너 고백해본 적 있어?”

16548719329814.jpg-고백? 있지. 그건 왜? 세상에! 너 고백했어?

마침, 골목 언덕에 보이는 작은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잘난 대표의 정원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제법 큰 나무가 있어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16548719329814.jpg-누구한테 고백한 거야?

1654871932981.jpg“회사 사람. 그런데 차였어.”

16548719329814.jpg-대박! 누가 너를 차? 미친 거 아냐?

1654871932981.jpg“그지? 진짜 이상하지? 그냥 받아주면 안 됐나?”

자리에 앉은 도아는 차가운 맥주를 꿀떡이며 삼키곤, 주절주절 거리기 시작했다.

16548719329814.jpg-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거야.

1654871932981.jpg“나 창피해. 이제 얼굴 어떻게 보지?”

16548719329814.jpg-야. 그럴수록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 막 애타는 시선 보내고 그러면 안 된다고. 도도하게! 이도아!

1654871932981.jpg“도도하게 못 할 것 같아. 혹시 모르니깐, 다시 고백할까?”

16548719329814.jpg-미쳤어? 이미 고백했는데, 뭘 또 해? 대놓고 소개팅도 하고, 관심을 끊어버려.

확신에 찬 가르침에 어린양의 마음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1654871932981.jpg“선생님. 그랬다가 진짜 끝나면 어쩌죠?”

16548719329814.jpg-도아야. 그렇게 끝날 사이면, 네가 매달려도 절대 안 이어져. 그러니깐……. 앗!!! 야!!!! 너 진짜!!!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지!!!

친구의 비명과 함께 아이의 울음이 굉음처럼 울려 퍼졌다.

16548719329814.jpg-도아야, 미안한데 지금…….

1654871932981.jpg“괜찮아. 어서 수습해. 다음에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하자.

16548719329814.jpg-알겠어. 암튼, 너 절대 안 돼!

1654871932981.jpg“알겠네요. 얼른 끊어.”

꺼진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며 도아는 피식 웃었다. 요란했던 전화가 끝나자 다시 조금씩, 조금씩 시우와의 시간이 머릿속을 채웠다. 도아는 눈꺼풀에 힘을 풀며 고개를 젖혔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잎사귀들이 보드랍게 넘실거렸다.

1654871932981.jpg“벚나문가? 꽃이 안 피어 있으니 헷갈리네.”

습관적으로 나무 이름을 맞춰보려던 도아는 짜증이 난 듯 느른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물방울 가득 맺힌 맥주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 끝까지 탈탈 털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맛이 달아도 너무 달았다. 근처 편의점에 가서 조금 더 사 올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조심하지 않으면 또 다른 흑역사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다. 가방 속에서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 건, 주머니 속에 급하게 집어넣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을 즈음이었다. 지금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비서실 핸드폰이었다. 아니. 오늘 꼭 전화를 해야 해? 진짜 급한 일 아니기만 해봐라. 시우의 전화가 기다려지긴 했다. 비서실 핸드폰을 통해 받는 업무지시가 아니라, 개인 핸드폰으로 걸려오는 따뜻한 목소리. [한시우 대표님] 원래 회사 핸드폰이 울리면 머리를 감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아무리 바빠도 열 일 제쳐두고 받았다. 그러나 오늘은 한껏 뜸을 들이는 것으로 모자라 죄 없는 기계를 잡아먹을 듯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열기를 가라앉히고서야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1654871932981.jpg“에. 대표님.”

겨우 맥주 한 캔에 술기운 가득 베어버린 입술은 애석하게도 똑 부러지는 말투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16548719389172.jpg-도아 씨. 전략팀에 연락해서…….

쌀쌀맞게 대하리라 결심했던 것과는 다르게, 꽤 중요한 회사 일임을 인정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가 끝나자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전화를 마무리하는 대신 짧게 뜸을 들이다 한숨 쉬듯 물었다.

16548719389172.jpg-술 마셨어?”

그 순간, 도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서 스멀스멀 이상한 기분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1654871932981.jpg“네?”

16548719389172.jpg-술 마셨냐고 물었어.

단정하게 물어오는 시우의 목소리가 잊고 있던 기억을 콧잔등 위로 불현듯 떠 올리게 했다.

16548719389172.jpg‘술 마셨습니까?’

1654871932981.jpg‘조금.’

지금과 똑같은 풍경 속에 벚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선명한 기시감에 깜짝 놀라며 눈 몇 번 껌뻑이는 사이, 적막한 틈새에서 새어 나온 기억은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1654871932981.jpg“아니요. 안 마셨……습니다.”

해일처럼 몰아닥치기 시작한 망각의 실체에, 맥주캔을 구겨 쥐며 겨우 대답했다.

16548719389172.jpg-그래. 반말 안 하는 거 보니 많이 마시진 않은 거 같네.

짧은 인사를 끝으로 시우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도아는 한참을 그대로, 마치 망부석처럼 멈춰 있었다. 손에 감겨 있는 목걸이가 반짝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흔들렸다.

16548719389172.jpg‘취하셨네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1654871932981.jpg‘야!!! 안 취했다고!!!’

1654871932981.jpg‘너도 반말하면 되잖아!’

16548719389172.jpg‘그래. 반말할게.’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나무 몇 그루, 벤치와 가로등 불빛. 등 뒤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벚나무까지. 이보다 더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순 없었다. 결국 손아귀에 힘이 풀려 핸드폰과 목걸이를 놓치고 말았다. 도아는 울 것 같은 눈으로 시우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입을 틀어막았다.

1654871932981.jpg“미쳤어. 미쳤나 봐……. 진짜. 그때 안 잘린 게 다행이네.”

  ** 작은 공원에 몇몇 사람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도아의 눈에는 작은 나방 한 마리 날아다니는 것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자신의 술주정은 가히 놀라웠다. 반말하라 닦달하고, 칭찬을 왜 안 하냐며 윽박지르고. 더럽고, 치사해 회사를 관두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은 영원히 떠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1654871932981.jpg‘대표님. 왜 갑자기 저한테 반말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16548719389172.jpg‘무슨 소리야? 분명히 어제 나한테 반말해달라고 한 건 도아 씨였는데?’

반은 믿고, 반은 무시했던 말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몰상식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물을 닦으며 나름 평화롭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던 술주정의 현장은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16548719389172.jpg‘진짜 있네.’

1654871932981.jpg‘뭐가 진짜 있는데?’

16548719389172.jpg‘고개 들어봐.’

홀린 듯 시선을 위로 올리자 평소와 다른 느낌의 시우가 서 있었다. 스치는 바람과 터져 오른 꽃봉오리의 달콤한 향기. 빛을 받아 반짝이는 시우의 윤곽이 가뜩이나 아득한 상황을 더욱 꿈결처럼 만들었다. 자신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속에 느꼈던 감정이, 좋아하는 마음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지금의 상황을 모르는, 기억 속 자신은 너무나 태평스러웠다.

1654871932981.jpg‘어? 진짜인가? 진짜일 리 없는데? 왜 왔지?’

16548719389172.jpg‘왜는 무슨. 대표를 기어코 나오게 하지.’

1654871932981.jpg‘난 오라고 한 적 없어.’

16548719389172.jpg‘이런 데 혼자 있으면 위험해. 어서 가자.’

1654871932981.jpg‘하나도 안 위험해. 나 호신술도 배웠어.’

고개를 위로 쭉 빼고 말하는 모습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향기를 맡는 아기 동물 같았다.

16548719389172.jpg‘알겠으니깐 어서 일어나.’

1654871932981.jpg‘너, 너무 커. 목 아파.’

16548719389172.jpg‘일어나면 안 아파.’

1654871932981.jpg‘너가 너무 커서, 일어나도 눈 맞추기 힘들다고.’

짧게 한숨을 내쉰 시우가 한쪽 무릎을 땅에 닿도록 굽혔다.

16548719389172.jpg‘이러면?’

대표를 내려다보는 상황이 되어 버린 비서는 만족한 듯 웃었다.

1654871932981.jpg‘이제 좀 괜찮네. 머리 쓰다듬어도 돼?’

16548719389172.jpg‘뭐?’

시우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어째 점점 주사가 심해지는 것 같은 도아를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그러고는 사진을 찍을 때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브이 자로 만든 후, 도아의 눈에 가져다 대었다.

16548719389172.jpg‘이거 몇 개야.’

1654871932981.jpg‘세 개.’

16548719389172.jpg‘내 핸드폰 번호 말해봐.’

1654871932981.jpg‘공일공일삼사오육…….’

16548719389172.jpg‘그건 도아 씨 번호고.’

비서는 반말도 모자라 했던 말을 반복하고, 취해서 손가락 숫자도 제대로 못 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취했으면 다음 날 블랙아웃일 것이 분명했다. 기억을 한다 해도 잡아떼면 그만일 일.

16548719389172.jpg‘한 번만이야.’

약간의 포기를 담은 허락이 떨어지자 도아는 재미있다는 듯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1654871932981.jpg‘쓰다듬지 말고 쥐어박을까?’

16548719389172.jpg‘그런 속마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해.’

얇은 손가락은 부드러운 시우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끝을 가볍게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해맑은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갔다.

1654871932981.jpg‘나 이렇게 부드러운 거 만지는 거 좋아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거든.’

16548719389172.jpg‘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아 다행이네.’

1654871932981.jpg‘왜 그렇게 나한테 차가워?’

16548719389172.jpg‘너한테만 그런 거 아니야.’

1654871932981.jpg‘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면 안 돼? 나 진짜 노력하는데.’

작은 웃음이 예쁘게 담겨 있던 얼굴은 어느새 슬픔이 자리했다.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내린 시우가 턱 끝을 들어 그 얼굴을 확인했다. 적당히 헝클어진 머리와 달큰한 눈빛, 바람꽃 같은 하얀 피부와 다홍빛 입술이 환영처럼 몽롱하게 그의 시야를 채웠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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