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너무 미워2022.03.21.
친근한 말은 감정을 키우지만, 오늘은 이미 이 여자한테 휘둘려 버린 날이니 상관없을 듯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없이 촉촉한 눈동자를 응시하다 담담하게 마음을 전했다.
‘……네가 너무 예뻐서, 내 마음이 풀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섭섭해도 어쩔 수 없어.’
맨정신에 들었으면 온몸이 굳어 버릴 정도의 엄청난 이야기를 그는 너무나도 여유롭고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
‘진짜? 난 너 싫어하기로 했는데. 너 짝사랑하네. 쌤통이다.’
비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용의 무게를 가늠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 셈이지.’
두 번 다시 꺼낼 리 없는 고백에 짝사랑이라 정의 내리며, 고소하다 말하는 여자였다. 그 모습도 나쁘지 않아 미소지으며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가 이해해주도록 할게. 오늘 이야기까지 들어줬으니 내가 선물 준다.’
도아는 혓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장난스럽게 핥고는 손을 본인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리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풀러 자랑하듯 시우의 눈앞에 가져다 대 보였다.
‘이걸, 날 왜 줘.’
‘내가 아끼는 거야. 잘 간직해.’
말끝에 단호함이 한가득하였다. 못마땅함에 재차 거절하려는 순간 도아는 안기듯 시우의 품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살가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웃으며 두 팔을 시우의 어깨에 올렸다. 가는 머리카락이 아래로 늘어지는 등나무꽃처럼 흔들거리며 시우의 뺨과 목에 닿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분 좋은 하늘거림에 얼굴을 구기는 것조차 잊은 그였다. 달콤한 향기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을 때쯤, 자신의 목에 비서가 해 준 목걸이가 아주 예쁘게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가 없어 하, 소리를 내며 도아를 온화하게 흘겼다. 무엇이 문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비서는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 웃음에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시우는 꽤 오랜 시간 굽어 있던 무릎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고는 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래다줄게. 이제 진짜 일어나.’
‘응. 알았어.’
도아는 그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벚꽃이 황홀할 정도로 예쁜 봄밤이었다. 틈새에서 튀어나와 해일처럼 몰려오고, 마침내 하나로 완성된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말도 안 돼. 미쳤어. 미쳤어.”
도아는 떨어진 핸드폰과 목걸이를 다시 줍는 것도 잊은 채 같은 말만 반복했다. 시우와 식사를 하다 핸드폰을 놓쳤을 때 그는 자세를 낮추어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그때 선명하게 떠올랐던 기억은 허상이 아니었고, 목걸이를 생각하면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여겨지던 것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필름이 끊겼지만, 귀소본능이 잘 발휘되어 별문제 없었다고 믿었다. 끊임없이 재생되는 자신의 추태 속에 두 볼은 열꽃이 핀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어떤 부끄러운 장면이 떠올라도 그 마지막에는 시우의 목소리로 끝맺음 되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내 마음이 풀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고개를 빳빳이 세우자, 턱 끝이 떨려왔다.
“한시우, 뭐야. 나 좋아하는 거 맞잖아.”
안도와 허탈감, 배신감에 작게 울리던 심장 소리는 커져만 갔다. ** 시우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어둑한 천장을 응시했다. 소파에 몸을 기댄 모습에서 무기력함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몇 시간 전 비서에게 업무를 지시했던 통화를 끝으로 정갈하던 에이치 코리아 대표는 완전히 사라졌다. 심장이 뜯겨 나간 듯 무의미한 기분에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힘없는 눈동자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갈증의 원인이 이런 물질적인 것이 아닐 텐데, 엄한 것을 밀어 넣으니 더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공황발작이나 불안증세가 지나고 나면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오곤 했다. 오늘도 그런 경우일 뿐이라 믿고 싶었지만, 원인이 너무나 명확했다. 도아의 고백. 분명히 매몰차게 거절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지금 꼴을 보면 오히려 고백했다가 차인 것은 자신이었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쏠리는 마음쯤이야 얼마든지 넘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며 호기롭게 장담하던 몇 달 전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비서에게 현혹된 것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어서 새는 것도 포기했다. 비서는 제주도에서 이성적이지 못하게 키스를 해버렸고, 씨근덕거리며 달려드는 상대방이 계속 생각났겠지. 그러다가 그게 호감 정도의 감정이 되어버렸겠지. 그녀의 고백은 진심이었지만 그 깊이가 자신보다는 얕을 것이라 확신했다. 도아의 감정이 그저 감기처럼 앓다가 지나갈 호르몬의 장난질쯤이라 결론 내렸다. 타이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시던 와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보다는 수면제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았다. 와인셀러 문을 열던 시우는 얕은 한숨을 쉬며 거실을 훑었다. 적요 속에 시계 소리가 커졌다. 여전히 낯설고, 넓은 공간이었다. 자신의 세상은 언제나 그랬다. 비서가 어떻게 나올지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그 성격에 실수했다 싶어 사표라도 깨작거리겠지. 그러다 책임감이 없어 보여 차마 제출은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리 만무하니 며칠 풀이 죽어 있겠지만, 곧 다시 웃을 것이다. 심한 말을 해도 진실이든 거짓이든 금방 웃으며 다가와 주었으니 이번에도 같을 것이고. 그렇게 그녀도 마음을 정리할 것이었다. 그렇게 끝. 그러나 안일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결론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안녕하십니까.”
새벽빛이 방을 채우는 순간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사실 주말 내내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던 시우는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비서를 보자 저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었다.
“저번 주 금요일 저녁에 지시하신 일은 주말 동안 처리해 두었습니다. 한 시간 뒤에 전략팀에서 올라올 예정입니다.”
단정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무성한 초록 잎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니며 나뭇가지를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늘 짓던 인형 같은 미소를 띠었거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터였다. 기억이라도 날려버린 듯, 너무나 침착하고 평온한 갈색 눈동자였다.
“대표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비행하는 새의 그림자가 빠르게 시우의 얼굴을 스칠 즘, 비서는 정말 걱정이라도 되는 듯 눈썹을 내리며 안부를 물어왔다.
“아니. 괜찮아.”
그가 시선을 피하며 당혹감을 감추었다. 분명 가면 같은 웃음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가늠할 수 없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도아는 여유로운 미소로 인사를 마무리하며 몸을 가뿐하게 돌렸다. 시우는 도아가 탕비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주시했다. 하지만 비서는 재빠르게 몸을 감추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아가 물을 꺼내고, 녹차를 준비하는 사이 멈췄던 걸음 소리가 일정하게 퍼지다 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다관 안에서 찻잎이 은은하게 우러나와 약엽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도아는 천천히 변해가는 녹차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걱정했던 것보다 잘 웃어졌다. 잘 보이려고 억지로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지어지는 미소였다. 처음에는 당장 그의 집으로 찾아가 목걸이를 보여주며 따지려고 했었다. 나를 좋아하면서 왜 마음을 숨기느냐고, 내가 절절매는 것이 우습냐고. 너무 미워. 못됐어.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가렸다. 손에는 다시 주운 목걸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갈 때쯤, 지금 감정으로 시우에게 가봤자 상황만 악화할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한껏 열 받은 와중에도 서로의 감정이 같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다. 자신을 향했던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말투가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축포라도 쏘아 올린 듯 기분이 들뜨고,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러다 차갑게 거절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계속 보니 별로라 마음이 변한 건가? 점점 유치해지는 생각이 결국 한숨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봄날에 다정하게 말해주던 그 마음이 변한 것만 아니라면. 그는 신중하고, 똑똑한 사람이니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한시우 대표님, 오고 싶지 않으면 거기 계세요. 비서가 대표한테 가는 게 뭐 어렵겠어요. 전날 했던 결심을 잔잔하게 떠올리는 사이, 어느새 알맞게 우러난 차에서 씁쓸하고 향긋한 향이 가득 풍겨왔다. ** 도아는 집무실에 들어와 책상 위에 트레이를 올려두고, 오늘의 일정을 차분히 보고했다. 모니터를 응시하며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방 역시 담담한 태도였다. 농도 짙은 키스를 하고, 좋아한다 매달리고, 거절하는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앉아 있었던 사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올린 시우는 도아가 뭐라고 보고하는지 도무지 집중되지 않았다. 대신 간간이 마주하는 시선 속에 늦여름의 아침 햇살이 맑게 자리 잡은 여자는 뚜렷하게 보였다. 언젠가는 저렇게 밝은 모습으로 근무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니었다. 적어도 며칠은 어색한 기류가 돌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왜, 너는 그런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을까. 시우가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비서를 관찰했다. 팽팽하고 불편한 긴장감이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신가요?”
긴 침묵 속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도아였다.
“손은?”
“아, 괜찮습니다. 잘 소독해 주셔서 흉도 안 질 것 같습니다.”
도아가 다친 부분을 문지르며 밝게 웃었다. 자신이 한시우를 좋아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작은 상처도 걱정해주니 기쁜 것은 당연했다. 비서가 밝게 웃으며 얼굴을 붉히자 시우의 복잡하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조금 빨리 마음을 추스른 것으로 판단하며 그녀의 빨간 입술을, 말간 두 눈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에 있을 외부일정은 도아 씨도 동행하도록 해.”
겹겹이 쌓이던 의문이 정리된 시우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명령했다.
“아……. 그 수요일 일정 말씀하시는 것 맞으신가요?”
대표의 말에 언제나 충성을 다하던 비서가 곤란하다는 듯 되물어왔다.
“왜? 선약 있어?
친구라도 만나려나. 대수롭지 않게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는 시우의 모습은 그저 직원의 야근 여부를 결정하는 상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총명해 보이는 눈빛을 보내던 도아가 쭈뼛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 그게, 소개팅이 있습니다.”
탁-! 도아의 말 한마디에 시우의 아귀힘이 순간 풀렸다. 찻잔이 떨어지듯 책상에 닿자, 넓은 집무실에 둔탁한 마찰음이 무섭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