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발걸음을 따라2022.04.01.
지금까지 일했는데, 또? 다시 일할 생각에 저절로 뒷목에 손이 올라갔다.
“이 비서님. 왜요?”
우진이 고개를 바짝 대며 비서의 안색을 살폈다. 도아는 근육이 뭉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우진 씨. 죄송하지만 대표님이 업무지시를 하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같이 데이트하자는 그런 사적인 연락이라면 더 행복했겠지만. 어찌 되었든 대화를 끝낼 수 있는 내용인 건 감사했다.
“이 시간에요? 진짜 대표님도 참…….”
“괜찮아요. 그럼 주혜랑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알겠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연락……. 진짜 하지 마세요.”
도아가 눈매를 가늘게 만들어 다시 한번 경고했다. 제법 진지해 보이는 그 태도에 우진이 한 번 크게 웃었다.
“알겠어요. 이번엔 참아볼게요.”
우진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번보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도아는 확신했다. 인사를 마치고 길가로 나와 짙푸른 나무 아래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손을 펼쳐 제 끝에 남아 있는 시우의 온기를 되살렸다. 적당히 부는 바람이 괜스레 기분 좋은 한적한 밤이었다. 신호가 바뀌자, 도아가 불렀던 택시가 회사 앞에 멈추었다. 자연스럽게 차에 탑승하고 편하게 시트에 기대었을 때 핸드폰은 한 번 더 울렸다. 피곤함에 반쯤 감겼던 눈동자는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또렷해졌다.
[해결됐어. 쉬어.]
턱 끝을 움찔하며 허리를 고쳐세웠다.
“뭐지?”
승객의 혼잣말에 택시기사가 자신을 불렀냐며 고개를 돌렸다. 다급하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 도아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럴 일 없겠지만, 시우가 보고 있었나 하는 덧없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었다. 택시는 좌회전 신호를 받은 후, 회사 건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도아가 떠난 자리에 나뭇잎만 조용히 나부꼈다. 잠시 후, 도로 건너편에서 잠자듯 멈춰 있던 시우의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며 불이 들어왔다. 몇 분간 더 멈춰 있던 차량은 얼마 후 택시와 다른 방향으로 부드럽게 출발했다.
**
“이거 영화 진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주혜가 팸플릿을 보여주자 우진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아는 매몰차게 거절했지만, 갑자기 잡은 약속에도 한걸음에 달려 나와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럼, 주말에 보러 갈래요?”
“좋아요. 저번에는 우진 씨가 예매했으니, 이번엔 내가 할게.”
기분이 좋은지 주혜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예매사이트에 접속했다.
“이 비서님도 부를까요?”
하지만 우진이 꺼낸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굳어버렸다.
“언니요? 도와 언니 주말에 바쁠 텐데. 물어는 봐 볼게요.”
그러나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험담이 튀어나오려는 탱글탱글한 입술을 꾹 눌렀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상냥하게 눈웃음 지었다.
“내가 물어보면 안 올 거니, 주혜 씨가 나 없는 것처럼 해서 오라고 해줘요.”
장난스럽게 부탁을 한 우진이 불을 줄이고 볶음요리를 뒤적거렸다. 시끌시끌한 가게 소음 때문에 그다음에 무어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주혜가 들고 있던 얇은 팸플릿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마음은 전혀 모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힘들게 지은 귀여운 웃음이 점차 흐려졌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확실하게 말해준 적 없잖아.’
도아가 했던 말이 당시에는 짜증이 났지만, 제 태도가 너무 두리뭉실했던 거 같기도 했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이도아 잘되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다른 건 다 뺏겨도, 우진만큼은 안됐다.
“아니요. 안 물어볼래요.”
주혜는 용기를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의를 담은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저는 우리 둘이 보는 게 좋아요. 언니 없이.”
우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딸꾹. 당황스런 내용에 딸꾹질까지 튀어나와 급하게 물 한 모금을 삼켰다.
“하하. 알겠어요. 눈에 힘 좀 풀어요.”
하지만 곧 평정심을 찾았는지 다시 유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그것이 다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익어진 볶음요리를 앞접시에 덜고 주혜에게 그릇을 달라며 손을 뻗었다. 그 넉살 좋은 행동에 주혜가 인상을 쓰며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할 말이 그게 다예요? 왜 둘이 보고 싶은지는 안 궁금하고요?”
“아, 뭐. 주혜 씨가 이 비서님을 싫어하나 보죠.”
우진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누나들만 가득한 집에서 자랐던 우진은 여자들의 감정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눈시울이 붉어진 주혜가 앙증맞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에? 이 반응 보니깐 진짜 같은데?”
우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지금의 주혜는 이 비서님보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여웠다.
“제가 우진 씨랑 둘이 있는 게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요! 저는 우리 둘만 보는 게 좋아요!”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주혜가 때마침 애처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 허둥거리는 표정과 행동에 장난스럽기만 하던 우진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 고백이었다.
“아, 난……. 장난이었는데. 아. 주혜 씨 왜 울려고 해요.”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봉긋 차올라 있었다. 우진의 따뜻한 목소리에 곧이어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하, 참. 울지 말아요.”
우진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혜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깨를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에도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위로 따위는 필요 없었다.
“……는요?”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우진 씨는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강요하듯 물어오자, 토닥거리던 손짓이 일순 멈추었다.
“나도 주혜 씨랑 있는 거 좋죠. 그런데…….”
“그런데?”
“친구로서요.”
“…….”
대답을 들은 주혜는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미워. 미워, 이도아. 처음부터 잘해주지 말 걸 그랬어. 귀여운 질투가 이제는 제법 거대해졌다는걸 스스로도 느꼈다. 너무 미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주혜가 고개를 돌려 우진의 가슴팍에 깊이 안기자 그는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품을 내주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는 모습을 곤란한 듯 내려보다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신나게 웃으며 장난치는 주혜와 가볍게 미소짓는 도아가 동시에 겹쳤다. 훌쩍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 소리가 도아의 얼굴을 점차 희뿌옇게 만들었다. 우진은 멀뚱히 있던 손을 다시 들어 올려 가녀린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가게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 천지아 회장의 소식이 매스컴을 뒤덮었다.
‘천 회장님은 자식이 없었으면 더 성공했을 분인데 말이죠.’
‘그러니깐요. 어쩜 사고를 그렇게 치는지.’
병실 침대에 앉아 있던 천 회장은 사람들이 뒤에서 늘 하는 뻔한 이야기가 이명처럼 울려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혼자 지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의 천지아는 없을거라는 결론이 언제나처럼 내려졌다.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미소가 깃들었다. 병실 침대에 앉아 있던 천 회장이 들고 있던 신문을 협탁 한편에 내려놓았다.
“뭘 굳이 오고 그래?”
지면에는 그녀의 아들이 벌인 갑질 사건에 대한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오라고 연락하신 거 아니셨어요?”
시우가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보호자용 소파 의자에 앉자 그림처럼 멋진 모습이 연출되었다. 천 회장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오라고 연락한 거지. 내가 지금 자식 얼굴이 보고 싶겠니?”
호텔 고급 객실처럼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는 VIP의 취향 덕분에 기계음은 물론 티브이나 라디오 소리조차 없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등에 링거가 꽂혀 있지 않았다면 아마 이곳이 병실이라고 누구도 믿지 않을 정도였다.
“걱정했는데 안색이 나쁘지 않으시네요.”
“혈압 올라서 그런 건데 뭐 별거 있겠니? 김 비서가 유난 떤 거지.”
“속상하셨겠습니다.”
“속상한 정도가 아냐. 진짜 내가 전생에 그놈한테 엄청난 죄를 지은 게 분명허다. 그놈 요즘 좀 조용하다 싶더니.”
수액 줄을 설핏 바라본 시우가 나지막이 말하자 천 회장이 이마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비서는? 같이 안 왔어?”
“잠시 볼일이 있다고 해서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비서가 그럼 쓰나. 우리 김 비서처럼 딱 붙어 있어야지.”
“이제 월튼이 한국에 들어올 겁니다. 그 친구는 떨어지라고 해도 안 떨어질 사람이니 걱정 마시죠.”
“월튼이 온다고? 걔는 일 처리가 좀 물러. 정에 너무 휩쓸리기도 하고. 하긴, 그래서 너랑 더 잘 맞는 걸 수도 있겠지.”
천 회장은 궁금증이 해결되자 치워두었던 신문을 보여주며 다시 한탄하기 시작했다. 나이 먹은 관절이 쑤시는지 여기저기 주무르며 가족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익숙했다. 제법 오랜 시간을 바르게 경청하던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좀 열어도 될까요?”
“그래.”
익숙한 듯 블라인드를 올린 후 바깥바람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밀었다. 틈이 생기자 바람 소리와 자잘한 소음들이 정적을 깨트렸다.
“답답하니?”
“더운 것 같아서요.”
“내 정신 좀 봐. 너 병실에 오래 있는 거 싫어했지? 이제 어서 가 봐라. 김 비서. 시우 배웅 좀 해줘.”
“네. 회장님.”
시간을 확인한 천 회장이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답지 않게 서둘렀다. 두통과 답답함을 희미하게 느끼던 시우는 거절하지 않고 정장 단추를 잠그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입원한 자신보다 어째 더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상대방을 골똘히 바라보던 천 회장이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시우야. 너도 힘든 거 있으면 여기저기 털어놔. 나는 손주뻘인 너한테도 못 살겠다고 맨날 투정 부리잖니? 마음에 계속 담아만 두면 곪아.”
“네. 알겠습니다.”
마모된 듯 거친 손의 감촉을 느낀 시우가 고개를 단정하게 끄덕였다. 천 회장은 여전히 염려 섞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또 흘려듣기는. 그렇게 꽁꽁 싸매도 홀린 듯 말하게 되는 사람이 나타난다니깐?”
천 회장은 저주인지 덕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그만 가라고 손짓했다. 김 비서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후 도아에게 1층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승강기 기계음이 거슬렸다. 아무리 호텔처럼 꾸며놔도 병실은 병실이었다. 괜찮은 듯했으나 환자복을 입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니 어김없이 컨디션이 안 좋아졌다. 싫다. 휘감기는 생각이 언짢은 듯, 넓은 보폭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며 멀리 보이는 창밖의 나무들에 집중했다. 하지만 VIP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병원 특유의 냄새와 기운이 엄습했다. 싫다. 답답함과 짜증이 몰려와 더운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목적지를 향했다. 철벅철벅거리지만 그래도 오늘은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즘, 맞은편에서 직원이 이동식 MRI 침대에 환자를 태우고 천천히 시우의 쪽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누워있었다. 어린 시우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인 듯했다. 싫다. 이 공간이 너무나 싫다. 진절머리 나는 생각과 함께 일순 걸음이 멈추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을 타고 제 몸의 경직이 느껴졌다. 암벽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여기서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당장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저 멈추어 서 있는 것이 다였다. 그러자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또 무력한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막 들었을 때, 봄바람 불듯 달짝지근한 기분이 스쳤다.
“대표님.”
차분한 음색에 홀린 듯 시선을 보내자, 자신을 향해 걸어오며 환하게 웃는 비서가 보였다. 이도아. 늘 단정한 나의 비서. 거무죽죽한 잔흔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묘한 기분에 시우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