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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괜찮다 (45/85)


제45화. 괜찮다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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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조심하십시오.”

환자 이송 직원이 시우의 옆을 지나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묵음처리 된 듯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뭉개졌다. 이어 드르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몇 초가 지났다.

어머니를 연상시키던 환자는 멀어지고, 어느새 도아가 시우의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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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확인했을 때, 벌써 볼일 마치고 VIP 병동 쪽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표님이 바로 보일 줄은 몰랐어요. 천 회장님은 괜찮으신가요?”

잠든 핸드폰을 깨우는 대표의 연락은 내용과 상관없이 반가웠다. 비서는 들뜬 마음에 자근자근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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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그러다 겨울바람이라도 맞았는지 얼얼해하는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고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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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세요? 저, 혹시 몰라서 아까 차에서 내릴 때 약을 조금 챙겨왔는데요.”

천 회장의 모임에서 대표가 힘들어하던 순간이 떠오른 도아는 서둘러 약을 꺼냈다. 토트백에서 생수병까지 등장했는데, 물 뚜껑을 돌려 따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가 조용히 눈빛을 달궜다.

분명 싫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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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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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괜찮으세요?”

말갛게 되물어 오는 질문에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아는 한 번 더 권유할까 봐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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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이라도 드세요.”

하지만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듯 가슴팍으로 물병을 내밀었다. 명령에 가까운 말투에 시우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고 한 모금 삼켰다.

노긋한 그 태도를 보며 도아는 생각했다.

스스로도 믿기 어렵지만 가지고 놀아보겠다는 여름밤의 어이없는 결심이 나름 성공한 것 같다고.

식사를 거르는 것도, 야근하는 것도, 지금도.

비서의 부탁이라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다.

내가 당신의 마음을 다 알면서 이러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여기서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한테 더 가까이 와줄까. 다시 고백하면, 또 거절당할까?

시우의 검은 눈동자 속은 나무들이 울울창창한 숲 같았다. 정상은 보이는데, 가는 길이 어렵고 멀었다. 그 속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도 좀 잡을 수 없었다.

월튼 비서님은 가을에 온다고 했으니, 한 달은 더 있다 오시겠지? 아직 시간이 있어.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도아가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마침 들려온 시우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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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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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이따 회사 가서 말씀드릴게요. 오후 일정 때문에 서두르셔야 합니다.”

시우가 촉촉한 입 끝을 휘며 내려다보자 도아는 잠시 딴청을 부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이어서 이제 그만 가야한다며 빙그르르 돌아서자 밤갈색 머릿결이 하늘하늘 향기를 흩뿌렸다. 시우는 손끝에 힘을 주어 물병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넓은 보폭을 좁혀 도아의 걸음에 맞추었다. 서로의 손등이 부드럽게 스쳤다.

괜찮았다.

병원이 싫었는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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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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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이틀 비는 날이 있어, 병원 스케줄 잡아두었습니다. 아까 K대 병원 방문하셨을 때 담당 수간호사님 찾아가서 어렵게 잡았습니다. 확인해 보시고 진행 여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서의 눈은 맹수 사냥꾼처럼 용맹하고 단호해 보였다. 거절하면 당장 방아쇠라도 당길 것만 같았다.

병원에서 볼일이 무엇인가 했더니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었다. 캘린더를 확인한 시우가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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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지? 내가 분명 업무분장에 나와 있는 일만 하라고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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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하는 게 비서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서는 대표가 요즘 자신에게 한없이 무르니, 자신이 가진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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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받고 깔끔하게 끝내시죠.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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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건강은 내가 알아. 그 시간에 차라리 운동하는 게 효율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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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서우세요?”

오늘은 제법 건조하게 잘 대하고 있었는데, 도아의 황당한 질문에 시우의 표정이 부드럽게 헝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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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발상이네. 내가 뭘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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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일 수도 있고, 병원 분위기가 싫은 걸 수도 있고, 검사받는 과정이 두려울 수도 있고. 무서운 거야 많죠. 저도 피 뽑는 거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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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아 씨. 내가 애인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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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시는 행동은 치과 가기 싫어하는 제 친구 아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시우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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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당치도 않은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도아는 한마디도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대꾸했다. 시우가 저 말도 안 되는 이론에 어느정도 수긍한 건,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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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도 그렇고, 아픈 사람을 보면 유독 컨디션이 안 좋아지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부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이 싫으신 걸까요?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어머니가 있던 병원. 그곳의 분위기, 냄새, 소리.

어머니의 눈물이 나중에는 그만 보내 달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버지 역시 비슷했겠지.

어차피 그곳에서 듣게 될 이야기는 정해져 있었다. 언젠간 자신도 부모님처럼 되겠지.

그러니 갈 필요가 없었다. 무의미한 삶이 그냥, 끝나기를 바랐기에.

그딴 생각에 휩싸이게 하는 공간이 좋을 리 없었다.

싫다.

도아와 말싸움을 벌이던 시우가 그 허무한 마음이 되살아나 조금 씁쓸하게 비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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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봐.”

실랑이는 이만하면 됐다 싶어 간결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다음을 기약하며 몸을 돌려세웠을 비서가 오늘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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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주시면요.”

그리고 또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끝에 힘을 실었다.

동편에서 시작된 햇빛이 천천히 사무실로 고개를 내밀었다. 청량한 움직임이 하얀빛을 머금으며 도드라졌다.

어느새 시우의 책상 앞에 바짝 다가온 비서가 고분고분하게 놓여 있는 단단한 손을 살포시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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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무서워하셔도 됩니다.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대표님 혼자 무섭지 않게요.”

앙증맞게 포박된 자신의 손을 내려보던 시선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쪽을 향했다. 봄꽃처럼 부드럽게 미소짓는 도아가 보였다.

오전에 병원 복도에서 도아를 발견할 때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다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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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네?”

도아가 자신을 향해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부탁했다.

공손한 표정인 듯 투정 석인 말투.

맑게 반짝이는 갈색 눈망울을 마주하자 어깨가 뻐근해졌다.

술 취해서 주절거리던 날만큼이나 당황스러운 태도였다. 그러나 그날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마음에 들었다.

마음은 또다시 속절없이 풀어졌다.

이렇게 부탁하는데, 뭐 어렵다고.

병원이 싫었는데, 괜찮았다.

병실에 오래 머물렀으니 분명 오늘 하루 컨디션이 안 좋아야 하는데, 약을 먹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어야 하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저 부탁을 들어줘도 될 것 같았다.

비서의 권유에 순한 양처럼 따랐던 자신이었지만 입원하는 일정까지 이렇게 허무하게 수긍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내가 이렇게 바보처럼 착하게 구는데 말이지, 비서님. 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자 따위 소개받지 말라고 해볼까.

시우는 되지도 않는 치졸한 생각이 스치는 것을 서둘러 지웠다. 대신 잡혀 있는 제 손등의 감촉을 또렷이 되새겼다.

도아의 등 뒤를 타고 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시우가 살며시 입매를 올리자 사냥꾼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한 저 표정. 가느다란 목 안쪽으로 마른침이 부자연스럽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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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미동도 없네. 큰일 났다.’

나름 자신 있었던 마음가짐은 어엿비 여기는 듯한 검푸른 시선 안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불쑥 불안감이 찾아온 도아는 대표의 손을 허락 없이 잡은 것을 어떻게 변명할지 나름의 이유를 찾아 나섰다.

대표님의 몸을 좋아해서요? 손이 예뻐서요? 추워 보여서요?

별 거지 같은 내용만 떠올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절망감에 빠져들 즘, 구원 같은 대답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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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그 한마디. 침울하던 도아의 눈이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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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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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고. 스케줄 한 번 더 체크해서 원래 일정에 차질 생기지 않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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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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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그제야 아침의 고요한 햇살, 푸른 잎사귀, 깔끔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월튼 님. 제가 해냈어요.

도아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엄한 사람을 찾는 사이. 시우가 잡혀 있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비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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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놔주지 그래?”

사냥감을 용감하게 움켜잡았던 사냥꾼은 목표를 이루자 한없이 온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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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죄송합니다.”

도아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엉거주춤 등 뒤로 숨겼다.

항상 자기가 먼저 잡아놓고 아닌 척 놀라지. 숨을 들이쉬며 시우가 원목 서랍을 부드럽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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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친필 사인해야 하는 서류 받아서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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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또. 어제도. 그제도. 고백 이후 도아는 마치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다 알고, 정말 가지고 놀고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긴 한숨을 따라 평소보다 더 많이 열린 서랍에서 고급스러운 광택이 감도는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무심히 지나가던 눈길이 엉겨 붙은 건 투명한 통 안에 정갈하게 담겨 있는 목걸이를 발견하면서였다.

뭐지?

목표물을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유리 세공사에게 특별히 주문한 보관함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다양한 각도로 가공된 유리면과 가늘게 박힌 금장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고작 비서가 술에 취해 상이라며 걸어준 목걸이 하나 보관하자고 이딴 거나 주문한 자신이 우스워졌을 땐, 이미 제 손에 보관함이 들려 있었다.

자부심 가득한 세공사는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이를테면 보관함의 뚜껑은 그냥 닫아도 잘 어울리지만, 자세히 보면 가공이 맞물리는 방향이 있다고. 그렇게 두었을 때 안의 내용물이 가장 예쁘게 보인다고.

눈을 가늘게 만들어 유리함의 뚜껑과 몸체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자신이 닫았던 방향과 달랐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얇은 체인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도아의 목걸이.

초봄의 꽃처럼 고고하게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저 목걸이도 저렇게 놓여 있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누군가 발견했다가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그 누군가를 굳이 추리할 필요는 없었다.

시우가 미간을 좁히며 혀끝을 굴렸다.

신경은 온통 그곳에 쏟아 둔 채, 만년필 뚜껑을 열어 종이에 가져다 대었다.

서걱거리는 단정한 소리가 멈추자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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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나가보겠습니다.”

유리 벽면으로 아침 햇살이 제법 깊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도아의 맑은 피부가 깔끔하게 반짝거렸다.

같은 공간, 저 바로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는 비서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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