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6화. 너는 정말이지 (46/85)


제46화. 너는 정말이지
2022.04.08.


대표는 대답이 없었지만, 서류를 받은 비서는 익숙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16548720487989.jpg

‘이게 된다고?’

한시우가, 그 한시우가 정말 자기 뜻대로 움직여 줬다. 도아는 앞으로 일이 쉽게 풀릴 것이란 생각에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기분 좋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16548720487994.jpg

“도아 씨.”

비서가 당차게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시우를 마주했다. 올라갔던 입꼬리도 재빠르게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16548720487989.jpg

“네. 대표님.”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완벽한 비서처럼.

16548720487994.jpg

“데스크 정리할 때 보통 어디까지 하지?”

16548720487989.jpg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을 경우 제일 위쪽만 정리합니다.”

16548720487994.jpg

“서류들은?”

16548720487989.jpg

“빼두신 것들 중 승인처리 된 것만 가지고 나갑니다.”

16548720487994.jpg

“그럼 서랍은?”

16548720487989.jpg

“서랍…… 연 적 없습니다.”

꼬박꼬박 대답하던 비서가 여릿여릿 말끝을 흐렸다.

‘서랍 연 적 없다’라.

보통 서랍은 건들지 않는다거나 손대지 않는다는 말이 더 어울릴 텐데. 아니면 적어도 열어보지 않는다는 표현이 덜 어색할 텐데.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대답에 시우의 입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비서는 목걸이에 관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걸 보니 기억났나 보네.

단 하나의 실마리가 풀리자 겹겹이 쌓여 있던 의문들이 무섭게 풀려나갔다.

보관함과 목걸이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것이 도아가 고백했던 날. 아마 그날 기억났겠지. 그렇기에 주말이 지나고 만났을 때 그토록 태연했겠지.

그것에 휘둘려 마음을 졸이던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도 안개처럼 겹쳤다.

지난주, 그 마음은 유난히 고단하게 느껴졌다.

먼저 퇴근을 하고 내려와 로비가 보이는 길가에 차를 대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늦게 끝났으니 택시 타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갈 심산이었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 비서는 쉬이 도와주지 않았다.

보안직원과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은지. 건물 안과 시계를 느릿한 동작으로 번갈아 확인하다 이내 많이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있지도 않은 일을 확인하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 어설픈 행동을 한 덕분에 비서를 회사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그날따라 다니는 차도 적어 쓸데없이 고요했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도아의 머릿결과 셔츠 자락이 흔들렸다. 아름다운 것에 눈길이 가듯 시선이 언제나 자연스럽게 비서를 쫓았다.

축축한 먼지 바람이 부는 도로변인데, 그녀의 주변만 숲속처럼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던 비서가 자신을 향해 오는 택시를 확인하고는 손을 뻗었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택시 안으로 몸을 넣었다.

도아가 자리를 뜨고 난 후에도 시선은 여전히 그곳에 멈추어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건넸다. 마음을 인지한 순간부터 늘 대답은 세뇌당한 듯 정해져 있었다.

괜찮다.

월튼이 오면 자연스럽게 멀어질 사람이니, 그때까지만 잘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의문이 포로롱 고개를 들었다.

도아와 만나는 접점이 사라진다고 해도? 도아가 이대로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되어도?

눈썹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어서 한가지 가정이 하늘하늘 머릿속에 흩날렸다.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어도?

핸들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옳은 선택. 괜찮은 일. 잘된 일.

항상 그렇게 결론지으며 고민을 끝내고, 마음을 덮었다.

그러나 그동안 비서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어째서인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왜 그렇게 안일했을까. 생각만으로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운데.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나무 아래를 한 번 더 응시했다.

비서는 떠날 수 있다. 미소를 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울에 느끼던, 이제껏 느끼던 공허한 만큼이나 큰 허탈감이 밀려왔다.

정말 괜찮은가. 한 번 더 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그런 밤이었는데.

너는.

그간 했던 말들이 그저 자신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었다 생각하니 몹시나 허무했다.

동시에 순한 양처럼 고개를 조아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발끈해 얼굴을 구기게 만들던, 종잡을 수 없던 감정이 한없이 평화로와 졌다.

이성은 무슨 자신감을 얻었는지 감정 따위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외쳐댔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아.

16548720487994.jpg

“그럼.”

너는 정말이지.

16548720487994.jpg

“소개팅은 어떻게 돼가?”

그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서늘하게 들어 올리며 여유롭게 질문했다.

16548720487989.jpg

“네? 아, 그게…… 할, 할 겁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도아의 머릿속이 일사불란해졌다.

뭐야? 그런 걸 왜 물어? 안 할 건데. 이상해. 이도아 또 휘말리기 전에 정신 똑바로 차려.

대답하는 분홍 입술이 달막였다. 당황함에 눈도 수차례 깜빡였지만,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짙은 눈동자는 그 모습을 작품 감상하듯 천천히 새겨보았다.

16548720487994.jpg

“알겠어. 나가봐.”

이어지는 느긋한 대답에 비서의 눈썹이 가볍게 어그러졌다. 하지만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고 판단했는지 순순히 종종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기분 좋게 퍼졌다.

16548720487994.jpg

“참나.”

시우가 그제야 어이없다는 듯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허리를 뉘우듯 등받이에 가볍게 기대자, 의자가 빙그르 회전하며 정원 쪽을 향하였다. 가을을 준비하는 나무의 잎사귀가 살랑거렸다.

소개팅은 무슨.

비소를 머금은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비서에게 놀아나는 동안 얼마나 여유가 없었는지 물을 줘야 하는 시기를 놓친 식물들도 더러 보였다.

호스릴을 풀어 나무와 흙의 상태를 살피고 물을 뿌렸다. 이슬비처럼 흩날리는 물방울이 허공으로 아름답게 퍼져나갔다.

물줄기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시우는 몸을 틀어 뒤쪽을 확인했다.

깊고 잠잠한 눈동자는 한동안 아무도 없는 나무 사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16548720518037.jpg

 

**

그 이후로, 시우는 도아의 행동을 가만 관찰하며 여유롭고, 깔끔하게 일과를 수행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그 며칠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시우가 회의실까지 따라와 말했던 소개팅까지 미뤄야 한다던 그 중요한 스케줄. 언론사 인터뷰와 후원 단체방문일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16548720518042.jpg

“대표님.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16548720518042.jpg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너무 멋지셨습니다.”

외부일정을 담당했던 의전팀과 홍보팀 직원들이 충성도 가득한 발언을 하며 대표를 배웅했다.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그 모습을 주시하던 도아는 팀장 손에 쥐어있는 법인카드를 보며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정중하게 악수를 건네며 직원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고 고생했다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저 손 한 번 잡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더라. 고생했다는 말은 지금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시우를 어려워하는 모습에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이 스쳤다. 대표와 일하게 될 미래가 낯설고 두려운 와중에 작게 고개를 내밀던 설레던 마음을.

달칵.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직원 중 한 명이 차 문을 열었고, 후끈한 늦여름 열기와 함께 시우가 시트에 앉았다.

16548720487989.jpg

“대표님. 고생하셨습니다.”

16548720487994.jpg

“응.”

16548720487989.jpg

“댁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의 반듯한 모습은 차에 올라타서도 변함없지만 조금 피곤한 듯 고개를 편하게 기대었다.

핸들을 돌리자 작은 돌멩이들이 타이어에 밟히는 소리가 자근자근 들려왔다.

16548720487994.jpg

“원래, 오늘 소개팅한다던 날 아닌가?”

차 안에 잔잔한 바흐의 프렐류드 곡조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우가 대뜸 물었다.

또 저 소리! 도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16548720487989.jpg

“응원이라도 해주시려고요?”

하지 말라고 회의실까지 찾아와 놓고선 왜 저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16548720487994.jpg

“취소하라고 했는데 꿋꿋이 하는 걸 봐선 상대가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은데.”

16548720487989.jpg

“네. 뭐 잘생겼더라고요.”

16548720487994.jpg

“그래? 나도 궁금하네.”

16548720487989.jpg

“응원해주신다는 이야기 같으니, 제가 꼭 잘돼서 회사 경조사비를 받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메롱이네요. 한 대표님. 그렇게 여유롭게 아닌 척해도 네가 나 좋아하는 거 다 알거든. 도아는 차선을 바꾸는 와중에도, 시우의 말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덕담이 오고 가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차는 제법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16548720487994.jpg

“그래서 언젠데.”

16548720487989.jpg

“정하고 있습니다.”

16548720487994.jpg

“장소는 여전히 동네고?”

16548720487989.jpg

“음. 아마도요? 더이상은 노코멘트입니다.”

비싼 차 운전하기도 힘든데, 꾸며낸 거짓을 추궁해오니 핸들은 쥔 손끝이 자꾸만 뒤틀렸다. 도아는 무슨 대답을 할지 고르다가 저번처럼 급정차하는 실수를 할까 싶어 아예 질문을 끊어버렸다.

참나. 시우는 대답을 보류한다는 비서의 말에 누가 상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동자를 창가로 돌렸다. 검은 눈동자 위에 노을빛이 내려앉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버튼을 가볍게 눌러 창문을 내렸다. 차창 틈으로 들어온 해 질 녘 바람이 입술에 닿았다. 노란색 머금은 맛이 꽤나 달짝지근했다.

16548720487994.jpg

“도아 씨.”

시우가 이름을 부르자 도아가 도토리 같은 눈동자를 반질 굴렸다. 룸미러 속에서 마주한 그 모습이 귀여웠다.

16548720487994.jpg

“차 세워. 내가 운전할게.”

16548720487989.jpg

“네? 승차감이 불편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조심한다고 하는데 역시 좀 부족하죠?”

비서의 사과에 시우가 나직이 웃었다.

16548720487994.jpg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앉아서 밖에 좀 보라고. 하늘이 예뻐.”

중저음의 목소리가 짓궂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아는 그제야 오른뺨을 때리던 주황빛을 인지했다. 구름과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황홀한 빛내림이 서편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표의 명령에 따라 비서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보닛을 지나 조수석으로 걸어왔다.

저녁이 되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시원한 기분. 여름이 가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시우가 문을 열고 내리자, 점도 짙은 반짝임이 그의 옆모습을 타고 흘렀다.

프쉬케를 본 에로스가 이런 기분으로 사랑에 빠졌을까. 새삼스레 피어나는 그의 외모에 감탄하며 숨죽여 그를 응시했다. 자신에게만 허락된 고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탐난다는 듯이.

16548720487994.jpg

“도아 씨.”

그 진득한 시선을 느낀 시우가 고개를 돌리며 도아에게 눈을 맞추었다.

16548720487989.jpg

“네.”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로 대답을 하는 비서에게서 쉬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시우는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16548720487994.jpg

“이따가, 우리 집에 같이 올라가.”

도아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바톤을 쥐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감정도 알고, 상대방의 감정도 알고 있으니 저가 바톤을 든 계주가 분명했다. 순위는 상관없으니, 적당한 때에 결승선만 지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우의 그 한마디에 열심히 달리기를 하다 목적지를 잃고 멈춰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어 귀에서는 경고음이 세차게 울렸다. 제주도에서보다 더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165487205753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