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그녀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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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그녀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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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그녀의 마음처럼
2022.04.11.
석양이 구름 너머로 사라진 차 안에는 푸른빛의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확히 말하면 비서 혼자 매우 불편해하고 있었다.
조금 전, 시우의 제안에 도아는 대답을 바로 꺼내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지금 가면 자신이 시우를 덮칠 것 같다는 것이었고, 이어 왜 시우가 자신을 꼬시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은 삐죽 나온 스웨터 실오라기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순간순간 변하는 하늘빛처럼 도아의 낯빛도 짧은 시간 동안 다채롭게 변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 눈만 껌뻑이는 비서를 애정이 어리게 바라봐 주던 대표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고는 먼저 차에 올랐다.
정신을 차린 듯 다급하게 조수석에 앉은 도아는 그때부터 쭉 벌 받는 기분으로 입술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나무들이 우거지고 풀향기가 가득하던 곳을 지나 이제 빌딩들이 늘어진 도심이었다. 도아는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은 충분히 했어?"
그가 재밌다는 듯이 휘어 올라갔던 입매를 움직였다. 차라리 예전처럼 무감한 표정이 더 낫겠다 싶었다.
턱 끝을 파르르 떨던 비서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해 봤는데요. 거절하겠습니다."
"안 간다고 말하는 게 뭐 어렵다고 그렇게 시간을 끌어?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비밀번호까지 물어봤으면서."
넌지시 꾸짖는 태도가 부드러우면서 오만했다. 자신을 살살 놀리는 그 말투에 도아가 눈을 흘겼다.
"그건……! 대표님 아프실까 봐 그런 거죠."
"뜻밖이네. 우리 집 좋아해서 당연히 오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제가 대표님 집을 왜 좋아해요?"
"야경이 멋있다고 감탄했잖아."
"요즘 방송에서 좋은 집들 많이 보여줘서요. 대표님 댁보다 더 좋은 집들도 많습니다."
말대답도 잘하는 우리 비서님. 시우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짧게 웃었다.
"우리 집에 현대 미술의 거장 마크 로이 작품도 있잖아. 현관 앞에. 방송에 나오는 집들에는 없어."
"하하. 죄송하지만 예술에는 문외한이라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계속되는 장난에 비서는 운전자석 쪽으로 향했던 고개를 앙칼지게 돌렸다. 창문을 보는 어깨가 성난 호흡을 따라 들썩였다. 구부러진 머리칼은 예쁘게 하늘거렸다.
그렇게 한동안 씩씩거리다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고쳐세웠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사귀고 싶지 않다고 하신 건 대표님이잖아요."
때마침 앞차가 멈추며 내부가 조용해졌다. 빨간 제동등이 촉촉한 갈색 눈동자에 서렸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짐이 많아서 일손이 필요했을 뿐인데."
"네?"
깔끔한 대답에 비서는 고집스럽게 자동차 불빛만 보던 고개를 틀었다.
"아까 내가 받았던 선물들. 그걸 내가 어떻게 혼자 다 옮겨."
자신을 여유롭게 내려보는 눈빛에 도아의 두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오랜만에 비서의 마음속에서 참을 인이 울려 퍼졌다. 아주 크게.
내가 분명 계주인데. 믿기 어렵겠지만, 한시우를 가지고 놀아보겠다는 그 작은 계획은 나름 성공한 거 같았는데.
"그럼 정말 짐만 옮기고 갈 거예요."
도아는 어금니를 깨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급히 숨겼다. 창피함에 목까지 점점 더 새빨갛게 변해갔다.
"알았어. 나도 침대 뺏기는 건 별로야."
"대표님!"
시우의 마지막 한마디에 결국 저도 모르게 힘없는 주먹으로 어깨를 툭 때리고 말았다.
"하?"
그 물리적 힘을 느낀 시우가 가볍게 웃었다.
"예전엔 잘 웃지도 않으셨으면서 저 놀리는 게 그렇게 즐거우세요?"
뒤늦게 제가 한 짓을 알아차린 비서는 톡 쏘아붙인 후 눈을 감아버렸다. 지가 한 짓이 있으니 뭐라 하진 못하겠지.
눈을 감자 자신의 가슴이 뛰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꼭 누군가 돌로 머리를 통통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
"이걸로 눈물 닦으세요."
한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했다. 창은 작았지만, 천장의 등이 밝아 환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진료실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환자에게 아람은 익숙하게 티슈를 뽑아 건넸다.
"사과하고 싶어요. 너무 미안해요."
"이미 행동에 대한 속죄의 시간을 가지셨고. 쓰러졌던 분도 무사히 깨어나셨잖아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 없으세요.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적당한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환자의 표정과 행동을 살폈다. 불안한 시선 처리, 쉬이 두지 못하고 움직이는 손, 목소리의 변화.
아람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가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아니요. 그냥 다 죄송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왜 그랬을까 싶어서 밤에 잠도 안 와요."
"그 마음을 일기 같은 걸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된답니다. 너무 그 기억에 얽매이지 마세요. 일단 밤에 잠 편하게 주무실 수 있도록 약을 바꿔볼게요."
"가게 사장님이 절 용서해 줄까요?"
환자의 손에 들린 티슈는 어느새 꾸깃꾸깃해져 있었다. 아람은 허리를 숙여 갑 티슈를 환자의 앞으로 가볍게 밀며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그럼요. 벌써 다 용서했죠.“
그 말에, 세상이 무너진 듯 서럽게 울던 환자가 버럭 인상을 썼다.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사람을 만나봤어요? 내 마음도 다 모르면서! 지금도 그냥 하는 말이잖아!"
"그냥 하다니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너가 뭐 신이라도 돼?"
눈을 매섭게 치켜세우며 언성을 높이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풀이 죽어버렸다.
"아아. 죄송해요. 제가 왜 이런 말을."
"괜찮아요. 감정변화는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운동 꾸준히 하시고, 일단 약을 바꿨으니 효과가 있는지 일주일 후에 보도록 할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아람의 인사에 그녀가 고개를 픽 숙이며 일어섰다. 물에 빠진 듯 축 늘어진 걸음걸이였다.
문 앞에 서 있던 간호사는 환자가 나오자마자 진료실로 들어왔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환자의 큰 언성이 문 너머까지 들렸기에 걱정이 되었는데, 아람은 태연했다.
"괜찮아요. 뭐 이런 일 한두 번인가."
"이제 곧 마지막 환자니 힘내세요."
"알았어요. 선생님."
"저... 제가 저 분 통화하는걸 얼핏 들었는데요. 사고 쳤다는 가게가 작은 매장이 아니더라고요."
"그럼요?"
"에이치 코리아 부산점에서 흉기 난동을 일으켰데요."
관심 없다는 듯 다음 환자의 차트를 확인하던 아람이 행동을 멈추었다.
"에이치 코리아?"
기업의 이름을 말하며 여유롭게 머그잔을 들어 올렸지만, 그 안에 든 액체는 찰박거렸다.
"네. 그쪽에서 깔끔하게 처리해서 피해자들도 크게 불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왜 가해자인 저분이 난리인지. 아니, 거기 대표가 왜 저분을 만나요. 진짜 웃겨."
간호사가 눈을 가늘게 만들어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강 선생님.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머그잔을 부드럽게 내려놓으며 아람이 인자하게 타일렀다.
"아. 죄송해요. 저는 속상해서. 다음 환자 불러도 될까요?"
"1분만 있다가요."
"네. 알겠습니다. 원장님."
간호사가 나가자 아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창문을 응시했다.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하늘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우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렇게 인연이 끝나버리다니.
에이치 코리아.
한시우.
익숙한 이름들을 되풀이하며 읊조리는 사이 다음 환자가 문을 열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아람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켰다. 어제 만났던 남자의 메시지만 있을 뿐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에이치 코리아 대표 한시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다시 예쁘게 웃었다. 귀걸이가 요란하게 흔들거렸다.
지금 그녀의 마음처럼.
**
주차장에 도착한 검은색 차량이 부드럽게 멈췄다. 시우는 어느새 잠든 비서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숨소리에 탁한 느낌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여자였다. 어디 숨소리뿐일까. 행동도 목소리도 눈동자도 너무나 청량하고, 아름다웠다.
무시할 수 있다고 자만하던 감정이 언제 이렇게 커져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이 가고, 신경이 모이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그러쥐었다가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도아가 다른 사람을 소개받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수일간 들었던 지저분하던 기분이 풀렸다. 자신을 어설프게 골려대던 것쯤이야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무섭지 않게 옆에 있어 준다는 사람.
웅크리던 어린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동해 저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집에 오라는 그 권유에 얼굴을 붉혀준 것만으로도 괜찮다. 욕심내지 않는다.
이제,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그냥 오늘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도아."
내가 이기적이면, 결국 네가 힘들지도 몰라.
단단하고 차가운 손끝이 매끄러운 볼을 스치듯 어루만졌다. 그것으로 시우는 마음을 덮었다.
"도아 씨."
귓바퀴에서 산들거리는 나직한 음성과 뺨에 닿은 서늘한 감촉에 도아의 눈이 옅게 떠졌다. 기분 좋은 속살거림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에……."
"다 왔어. 올라가자."
다정한 목소리는 도로 눈을 감고 싶게끔 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또다시 저렇게 따뜻한 분위기로 말해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시우가 차에서 내리는 소리에 도아는 실없는 생각에서 바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거운 짐은 본인이 다 들면서 왜 굳이 자신을 그렇게 골려댔는지.
"대표님, 이 정도면 월급 더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우가 현관문을 막 열었을 즘 도아가 투덜거렸다.
"회사 물건 부수는 비서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때는 모기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채근하는 내용과 다르게 손잡이를 잡고 기다려주는 모습은 다감했다.
"문 잡는 거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 따라 한 건가?"
"하하. 맞아요. 비슷하죠?"
박스를 든 비서는 제법 당돌하게 그를 놀렸다. 따뜻한 솜털 같은 그 장난에 시우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낯설어 급히 지웠다.
이토록 마음이 여유로워진 것은 아마. 목걸이를 발견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비서의 표정. 그러면서도 자신만을 향하는 눈동자. 만족스러웠다. 이런 저가 우습지만, 그 감정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짐은 앞에 둬. 뭐 마실래?"
"어……. 그럼, 커피 주세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향이 좋아서 맛이 궁금했어요."
"알겠어. 쉬고 있어."
길게 이어질 것 같던 단정한 미소가 사라진 건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지면서였다.
놀란 시우가 도아를 등 뒤로 숨기며 날카롭게 인상을 썼다.
"음……. 저. 분위기 좋은데. 내가 눈치 없이 여기 있네……."
불을 켜지 않은 어둑한 거실. 낯선 목소리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