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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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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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목소리
2022.06.06.
최종 보고가 끝나고 대표를 포함한 몇 명이 먼저 복도로 나왔다.
“한 대표님. 정말 기대되는데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열심히 노력해 주셨으니 좋은 성과가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료 책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리라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시우는 그의 어울리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 회장은 시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늘 말했었다. 리라는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반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화를 이끄는 모습에 그에 대한 신뢰도가 또 한 번 상승했다.
궁금한 게 많은 디자이너는 계속해서 질문했고 시우는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리라와 에이치 코리아 디자인팀의 합이 좋았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힌 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4호점 오픈 후 따라올 화제성과 매출, 본사 방문 보고까지. 군더더기 없이 진행될 상황이 책장에 책들이 꽂히는 것처럼 착착 정리되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란히 복도를 걷던 시우는 잠시 양해를 구한 후 핸드폰을 확인했다. 업무적인 연락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뜻밖의 메시지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대표님. 바쁘세요?]
도아는 업무 중에 연락을 잘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곧장 답장을 보내려던 시우는 잠시 고민하다 월튼을 불렀다.
“4호점 방문일정 조정할 수 있어?”
“시간 조정하고 싶은 거야?”
“아니. 불참.”
“오늘은 박 상무님이 가니깐 괜찮긴 한데. 오늘 안가면 다음 주에 무리해야 할 텐데?”
“괜찮아. 취소해.”
몸이 아파도 갈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의문을 표하던 월튼은 물어봐야 소용없을 것을 알았는지 바로 의전팀에 연락을 취했다.
시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리라와 대화를 이어갔다. 이제 작별 인사만 남은 참이었다.
“이 비서 만나고 가시겠습니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리라를 빤히 보던 시우가 예의 바르게 권유했다. 귀를 쫑긋 움직인 리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면 저야 좋죠. 그렇지 않아도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대답하며 반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시우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게까지 경계심 가득한 모습을 보일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천 회장은 도아와 시우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말했었다. 그건 리라도 동의하는 바였다.
“대표님과 디자이너님은 사무실에 들렀다 갈 테니 다들 편하게 이동하세요.”
대화를 새겨듣던 월튼이 상황을 정리했고, 목적지가 같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만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랐다.
날씨와 식사 같은 흔한 내용을 주고받으며 한 걸음, 회의 때 다루지 못했던 이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한 걸음.
모퉁이에 낸 기다란 창문으로 새파란 가을볕이 깊게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저 코너만 돌면 도아가 있는 사무실 입구였다.
시우는 아까보다 더 차분한 표정으로 보폭을 넓혔다. 누가 불러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움직임은 날카롭고 쩌렁한 소리에 툭 끊어졌다.
정확히는, 그 쌀쌀맞은 목소리가 전한 ‘이도아 언니’라는 대사에.
**
‘무슨 일 있어?’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 늦은 밤이었다. 도아의 집 앞으로 온 시우가 보드라운 뺨을 만지며 물었다.
‘네? 아니요. 전혀요.’
도아는 하늘의 색과 비슷한 다감한 눈동자를 애정 어리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얼굴 잠깐 보자고, 이 시간에 굳이 여기까지 온 시우를 향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일 없어요. 대표님이야말로 안 피곤하세요?’
‘피곤하지. 그래서 보러 왔잖아. 힘내려고.’
‘뭐야. 진짜.’
다정해도 너무 다정한 시우의 대답에 도아가 픽 소리 내 웃었다. 발그레 물든 그 미소를 보고서야 시우는 안도의 숨을 짧게 내셨다.
병원에서도, 회사에서도, 지금도.
단정한 얼굴 속에 희미하게 깃들어 있는 근심 어린 눈빛이 신경 쓰였다.
뭘까. 너를 속상하게 만드는 게.
업무적인 고민이라면 아마 상담하듯 털어놓았을 것이었다.
헨리에게 떠밀려 한국지점의 대표로 오게 되었을 때, 목표는 하나였다. 에이치 코리아의 안정적인 정착.
탑 3안에 자리 잡게 되면, 그 후부터는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1위를 노리는 것.
나무에 대해, 가구에 대해 설명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에 그의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기도 했다.
때문에 직원들의 가십거리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간혹 자신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보고받기도 했지만, 그것이 회사의 성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도아에게 벌어진다 생각하니 몹시 거슬렸다.
다음 날, 월튼을 통해 회사 분위기를 알아보라 명령했다. 퍼질 대로 퍼져 있던 소문은 너무나 손쉽게 시우의 귀에도 들어왔다.
글로 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내용부터, 번외편처럼 새롭게 생겨난 커스텀 서비스와 관련된 이야기까지.
시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정원을 응시했다. 그러다 바로 전날, 괜찮다며 웃던 그 미소가 겹쳐 속이 뒤틀렸다.
잔뜩 흥분해 구구절절 내용을 전하던 월튼은 그 표정을 보고 잠시 주춤하더니 곧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소문의 내용은 언제나 퍼트린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기 마련이었다.
보통은 대표와 비서를 엮어 있지도 않은 자극적인 내용으로 흥미를 유발한다. 대표와 비서. 누구든 상관없이 사람들의 관심만 끌면 그만인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로.
그런데 지금 회사에 떠도는 내용은 그런 흔한 스캔들이 아니었다. 오로지 도아만을 향하는 내용들. 노골적으로 도아를 싫어하고 있었다.
매서운 분위기가 앙상한 가지를 잘라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한 명씩, 한 명씩,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도아에게 들었던 이름들. 도아와 업무적으로 닿아 있는 사람들. 대표와 비서가 가까웠던 모습을 보았던 목격자. 회사를 지나쳐 외부 모임과 식당가.
함께했던 순간들을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용의자를 떠올리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유리컵에 담긴 물을 한 잔 마신 시우가 선선하게 물었다.
‘이번 회의 때 유리라 디자이너도 참석하지?’
‘맞아. 그건 왜?’
‘몇 개는 바로 고쳐야지.’
커스텀 서비스 관련 소문은 리라가 도아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일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리라에게 도아를 만나고 가라고 제안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랬는데, 상황이 몹시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월튼이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황급히 나아가려는 것을 시우가 가볍게 손을 뻗어 저지했다. 그리고 민 팀장과 그 조카가 벌이는 연극을 지켜보았다.
침착하게. 화를 억누르고 또 억누르며.
“커스텀 서비스도 그냥 아이디어만 낸 건데 마치 언니가 다 한 것처럼 자랑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기관총처럼 우다다 쏟아내는 내용에 얼굴을 구긴 건 도아만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낀 리라가 조용스럽게 질문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시우가 눈길을 아래로 내려 디자이너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회의실 정리를 마친 사람들까지 올라와 한산하던 복도가 꽉 매워졌다.
“아, 그게, 회사원들끼리 작은 오해가 있나 봅니다.”
옆에 있던 직원이 이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고자 가벼운 일로 치부했다.
“내용을 들어보니 작은 오해 같지는 않군요.”
시우가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자 얼빠진 표정으로 있던 주변 사람들이 술렁였다.
리라는 도아가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저런 오해를 받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까지 빨개지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충동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저는 솔직히 이 비서님이 다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떨리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어 사람들이 헉, 소리를 내며 당황스러움을 표했다.
인적이 드문 복도였다. 그곳에 팀장과 상무, 심지어 대표까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소란의 중심에 있던 세 사람의 표정은 각기 다른 느낌으로 뒤바뀌었다.
가장 놀란 것은 도아였다. 리라가 있음에 적잖이 놀랐던 눈동자는 시우를 발견하자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요동쳤다.
잠잠해 보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한 창피함이 반, 나 지금 너무 화가 난다고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이 반. 그리고 먼지 같은 다른 감정들도 치열하게 뒤섞였다.
내려앉았던 어깨를 고쳐 세우며 도아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디자이너님이 어떻게…….”
여기 계세요?
도아는 무던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리라의 어깨너머에 있는 시우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는 결국 그 짧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술을 눌렀다.
“최종 보고 끝나고 인사하고 싶어서 왔어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리라가 방향을 바꾸어 주혜를 쏘아보았다.
“이 비서님이 저를 설득한 게 맞아요. 저는 처음에 에이치 코리아와 일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고, 그런데 여러모로 도움을 주셔서 제가 마음을 바꿨어요. 그게 뭐 잘못된 일인가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주혜가 치맛자락을 비틀어 쥐었다.
“아. 그랬구나. 저는, 저는 정말 몰랐어요. 언니, 그랬으면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경련 난 볼을 끌어올리며 주혜가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눈썹을 내리며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가여운 모습이었다.
“말했으면?”
저런 모습도 이제는 그저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이 한없이 귀엽게 여기던 동생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디어도, 디자이너를 설득해서 계약까지 진행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나야.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네가 그대로 믿어줬을까?”
이미 지쳐 있던 도아가 매끈한 손등으로 이마를 살포시 눌렀다.
정적이 이어졌다. 한숨을 작게 내뱉은 도아는 흐릿한 눈동자를 들어 올려 시우를 찾았다. 그의 시선이 구경꾼 무리 어디쯤을 향해 있었다.
시우가 걱정된다는 표정 한 번만 지어주면, 큰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도 바라지 않던 걸 그에게 기대하는 자신의 마음이 우스웠다.
하지만 대표가 여기서 자신의 편을 들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도아는 빠르게 체념했다.
띠리리리.
이제 그만하라는 듯, 사무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몇 명은 잊었던 일이 생각난 듯 자리로 돌아갔고, 몇 명은 뒤늦게 대표가 서 있는 복도 쪽으로 인사를 했다.
상황이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흩어지자 뒤쪽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진아 대리의 모습도 나타났다.
배를 움켜쥔 채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는 그녀에게 살짝 웃어 보인 도아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민 팀장님.”
15층에서 늘 듣던 차갑고 서늘한 시우의 목소리가 구경꾼 틈 속에 숨어 있는 인사팀장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