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1화. 15층 (71/85)


제71화. 15층
2022.07.04.


아람은 눈을 내리뜬 채 수화기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월튼은 자신에게 미안한지 서둘러 다른 날짜를 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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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어때? 아니면 이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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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 해.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단정하고, 또렷했다. 무척 듣고 싶었던 한시우의 음성.

곧이어 월튼이 가능한 날을 짚어주었고, 아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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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어차피 지금 위에 아무도 없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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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아람.”

시우의 목소리에 섭섭함이 조금 누그러든 아람은 싱긋 미소지었다.

통화가 제법 길게 이어지는 동안 우진의 신경은 온통 주혜에게 쏠려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보안카드를 데스크에 툭 올려놓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주혜는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우진과 눈이 마주치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린아이처럼 그 행동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장난쳤다.

그 모습에 우진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즘, 통화가 끝났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몸을 돌려세운 아람이 영희를 향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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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 대표랑 비서 둘 다 회사에 도착을 못 했다고 해요. 오늘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거든요.”

이어서 핸드폰을 들어 부재중 목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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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했었는데, 제가 병원에서부터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놔서 미처 확인을 못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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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 사장님 이름이 달랐던 거 같은데요?”

목록을 유심히 보던 영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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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 사람은 비서예요. 외국인 남자 비서. 좀 생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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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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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 봤자 아무도 없어서 오늘은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다음 주에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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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선생님.”

그녀는 아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곧 씩씩하게 눈을 맞추었다.

아람이 먼저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 나갔고, 영희가 졸졸 쫓아갔다.

선생님 말씀을 아주 잘 듣는 모범적인 학생을 연상시켰다.

문 너머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영희는 와인 쇼핑백과 케이크를 쥐고 있는 주먹을 더욱더 단단히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

아람과 영희가 떠나자 고요하던 로비가 시끄러워졌다.

주혜가 남자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고, 우진은 왜 피곤하게 회사에 다시 왔냐며 마음에도 없는 핀잔을 주었다.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에 행복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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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주혜가 손을 번쩍 들어 쇼핑백을 열어 보였다. 우진이 좋아하는 일식집 초밥 세트가 맛깔스럽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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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대박 감동.”

저녁조인 자신을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와 준 여자친구가 귀여워서 환장할 것 같았다.

손을 가슴에 포개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주혜가 더 밝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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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삼십 분이나 줄 서서 기다렸어!”

우진은 이마에 쪽, 뽀뽀를 하는 것으로 지금의 마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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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역시 제 눈은 정확했다.

여전히 예쁜 건 이 비서님이었다. 주혜가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워도. 이 비서님이 누나와 닮은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도아가 더 예쁜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눈앞에 주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여자친구가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도도한 이도아 씨와는 다르게 귀엽고,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회사 사람들이 모두 주혜를 욕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깐.

괜찮아. 내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라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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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2인 1조로 근무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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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다른 형은 잠깐 순찰 돌러 갔어. 한 시간은 더 걸릴걸? 뭘 그렇게 꼼꼼하게 하는지. 어차피 보안시스템도 다 작동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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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나는 너 말고 한 명 더 있을 줄 알았어. 그러면 잠깐 나갈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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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자기야.”

주혜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아쉬운 티를 냈다. 우진이 풍선 같은 오른뺨을 찌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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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아무도 안 올 텐데. 그냥 나랑 잠깐 놀고 오자. 응?”

그녀는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어깨를 흔들며 앙탈을 부렸다.

결국, 우진은 판단력이 흐려졌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올 사람도 없었고, 대표는 있던 약속도 취소했으니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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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차피 형 오려면 멀었으니깐, 빨리 갔다 오면 들킬 일도 없을 것 같아. 올 사람도 없고.”

아직 사무실에 사람이 한두 명 남아 있겠지만, 뭐 여기서 무슨 일이 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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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거의 다 퇴근했는데, 뭐! 여기 있어봤자 아무도 안 오잖아.”

주혜가 이때다 싶어 몸을 바짝 붙이며 거들었다.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그녀에게 완전하게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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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서 올라가자!”

키득거리는 둘의 웃음소리가 로비를 가득 메우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화이트 톤의 로비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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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혼자 가시겠다고요?”

차를 주차해 둔 카페 앞에서 아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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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선생님. 오늘 저 때문에 시간도 내주시고……. 이미 폐를 많이 끼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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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그런 생각 하지 마시고 같이 주차장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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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괜찮아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보인 영희가 어색하게 눈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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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헛걸음하셔서 제가 다 속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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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괜찮아요. 곧 만날 텐데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극구 괜찮다 의사를 밝혔다. 케이크와 와인을 쥔 양손이 귓불만큼이나 빨갛게 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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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역까지만이라도 바래다 드릴게요.”

아람은 어쩐지 그 모습이 안타까워, 어르고 달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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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좀 걷고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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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이렇게 추운데요? 감기 걸리세요.”

그리고 너그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왕 데려다주는 거 짐이라도 들어줘야겠다 싶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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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내 거야!”

영희가 갈라진 음색으로 소리쳤다. 조금 전 상냥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려보는 눈빛에 아람의 어깨가 움찔했다.

당황스러웠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는 환자였지만, 시우를 만나기로 한 후에는 괜찮았는데.

아람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며 의사답게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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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너무 시려워 보여서 들어 드리려고 그런 거예요. 제가 가져가려는 게 아니었어요.”

아람은 토트백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코트 주머니 안에 넣었다. 케이크를 뺏어갈 손이 없어졌다.

경계심이 가득했던 영희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불안한 눈길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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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꼭 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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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많이 속상하셨을 거란 거 이해해요. 제가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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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 반대편으로 가서 버스를 타면 돼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람이 무어라 더 대답하기도 전에 영희는 허리를 숙여 깊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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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희 씨……?”

땅을 향했던 고개가 아람에게 슬쩍 향했던 순간, 어쩐지 영희는 기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인사와 동시에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그녀는 순식간에 행인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이 강하게 불며 아람의 뺨을 때렸다.

잠시 동안 멍하게 서 있던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불 꺼진 건물 유리에 자신의 모습이 반사됐다.

반짝이는 스텔레토 힐, 화이트 코트, 아끼는 가방, 한참을 고른 액세서리.

한시우 만난다고 뭘 이렇게 공들였는지.

속상할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음을 기약하며 홀가분하게 돌아선 영희를 본받기로 했다.

난폭한 모습을 보인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런 작은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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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지.”

또각또각.

얼어붙은 보도블록을 밟는 소리가 날카롭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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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틈을 걸어가던 영희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보았다.

아람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전보다 더 넓은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내쉬는 입김이 축축하게 얼굴을 감쌌다. 에이치 코리아로 향하는 걸음은 가볍고, 당찼다.

마침내 사옥 입구에 도착한 영희는 잠시 주춤했다.

벌겋게 얼어붙은 손에 들려 있는 와인과 케이크를 집중해서 보다가 결심한 듯 턱 끝을 당겼다.

어둑한 로비 안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유리 벽 너머는 평화로웠다. 깨끗한 로비, 데스크, 직원 출입구, 엘리베이터, 그림과 식물들.

아까 보았던 보안 직원과 여자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들리는 듯했다.

지금 들어갈까? 조금만 기다릴까?

영희는 숨죽인 채 고민했다.

여자는 좌우로 어깨를 흔들며 졸랐고, 남자는 곤란한 듯 애써 웃음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다락 다락 하더니 마침내 둘은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비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지금이야!

조용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영희의 눈동자가 확장했다.

건물 밖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로비로 들어왔다.

앞코 가죽이 낡은 부츠는 망설임 없이 직원 출입구로 향했다. 새하얀 대리석에 흙먼지가 조금씩 떨어졌다.

삐삐삐삐. 무심코 스피드 게이트를 지나려던 영희는 출입구에서 울리는 경보음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숨소리가 귓가를 짓눌렀다.

누가 오면 어쩌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경보음은 두세 번 정도 울린 후 멈췄고, 양복을 입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사이 짧은 기억을 더듬은 영희는 보안 직원이 무언가를 가져다 댔었다는 걸 생각해 냈다.

흔들리던 눈빛은 보안 데스크 위에서 멈췄다.

데스크 귀퉁이에 보안카드가 잠자듯 놓여 있었다. 아까 직원이 올려놓은 그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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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네?”

안도의 숨을 내쉰 영희가 입매를 올렸다.

망설임 없이 카드를 집어 든 그녀는 아까 본 그대로 카드를 검은 패드에 찍어보았다.

스피드 게이트의 유리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리며 손님을 반겼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다섯 살 아이가 엄마를 흉내 내듯, 우진이 했던 행동을 열심히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화면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영희의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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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선물도 주고 와야지.”

옹알이하듯 내뱉는 혼잣말이 끝날 무렵, 승강기 문이 열렸다.

영희가 다소곳이 몸을 실었다. 보안카드를 대고, 15층 버튼을 꾹 눌렀다.

숫자 버튼에 빛이 들어오자 영희의 뺨에도 붉은빛이 번졌다. 눈빛은 기대와 흥분이 뒤섞여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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