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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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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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누구세요?
2022.07.08.
도아는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또 보았다. 첨부 파일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며 상신버튼을 눌렀다.
의자에 등허리를 기대며 길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핸드폰을 들었다.
“대리님. 저 도아요. 네. 수정해서 다시 올렸어요. 걱정 말고 재밌게 놀고 오세요.”
평소보다 몇 배 크게 고마움을 전하는 목소리에 도아는 맑게 웃었다.
진아는 아무래도 퇴근 직전에 올린 기안이 찜찜하다며 아직 회사면 확인해 달라 요청했었다.
가족 여행에 들떴는지 그녀답지 않게 실수를 했고 자잘하게 수정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몇 번의 통화가 필요했고, 이전 자료들도 찾아봐야 했다.
노트북을 닫기 전에 도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복도 문을 열어 둔 김에 비서실도 함께 환기를 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겨울바람은 차가웠기에, 짐을 챙겨 집무실 앞 프런트 데스크로 왔다.
이곳은 창문이 없어 시간이 이렇게 흐른 지 미처 몰랐다.
도아는 어지럽혀진 책상 위를 둘러보다 멈칫했다.
비행기 도착시각을 고려했을 때 시우는 이미 도착하고도 남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차가 막히나?”
전화해 볼까 싶어 핸드폰을 힐끗 내려보았다.
“안 되지. 그러면 회사에 있는 게 들킬지도 모르는데.”
없는 척하기 위해 로비와 복도 불도 켜두지 않고 있었다. 보안 직원이 아직 15층에 직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않는다면, 나름 깜짝 이벤트는 성공할 것이었다.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웠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에이치 코리아 카탈로그와 노트북을 가지런히 포개 들었다.
서너 걸음 걸어 문을 열었을 때, 노래는 멈췄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냉랭한 기운이 도아의 몸을 휘감았다.
“아, 맞다. 문!”
복도를 꽉 채운 찬바람에 놀라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내 정신 좀 봐. 추워서 여기 와 놓고는 문 열어놓은 걸 잊어버려.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도아는 들고 있던 집을 작은 문 옆 협탁 위에 올리고, 재빠르게 복도로 나갔다.
불 꺼진 복도는 컴컴했다. 평소의 깔끔하고 정결한 느낌이 증발해버린 듯했다.
기다란 창으로 밤빛이 들어왔다. 복도 바닥에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가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음산한 기분이 들어 도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냥 빨리 불 켜야겠다.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는 도아는 결국, 시우를 놀라게 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구둣 소리가 평소보다 조용하게 울렸다.
“어?”
복도 끝 출입문을 향해 나아가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예상치 못한 인기척이 들리면서였다.
바람소리라고 넘어갈 만한 작은 소리였음에도 어쩐지 안 좋은 기분이 들어 몸이 굳었다.
허리춤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았지만,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핸드폰을 가져오기 위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비서실에서 검은 형체가 스르르 걸어 나왔다.
두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
영희가 15층에 도착한 건 반 시간 전쯤이었다.
띵.
경쾌한 알림음이 대표가 있는 곳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영희를 반긴 것은 차디찬 밤공기였다.
1층 로비와 엘리베이터에서 몸이 녹았던지라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난방비도 없나 봐.”
조심스레 혼잣말을 내뱉고 멀뚱히 눈이 어둠 속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비상구에서 번진 초록 불빛 덕분에 금세 로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요한 정적에 익숙해지자 그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들이 줄지어 자리 잡은 정원이었다.
“이런 데 숲이 있네?”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어둠 속에서 흔들거리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유리면에 허옇게 닿은 입김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쯤, 활짝 열린 정원 문을 발견했다.
우우우웅.
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뻗어 나가며 동물 울음소리를 냈다.
복도를 흘깃 본 영희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고민하다, 정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머나.”
영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뭇잎은 없었지만 마른 가지는 크고 단단했고, 상록수는 겨울임에도 풍성했다.
넓은 흙바닥에 심어진 나무들도 있었고, 커다란 대형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가 건물 옥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걸음을 따라 나뭇가지가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향긋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암흑 속에서 눈을 반짝이던 영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기둥을 발견했다.
네모반듯하게 솟아 있는 나무 기둥은 제일 위쪽에 정사각형 유리가 달려 있었다.
“불이 켜지려나? 밝게 하고 싶은데.”
허리를 굽힌 채 여기저기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고는 발로 툭 치며 괜히 성질을 부렸다.
“고장 났나 보네. 고물 같으니라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던 영희가 턱 끝을 치켜들며 아! 하고 소리쳤다.
안개 같던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주저앉고 한 손에 들려 있는 케이크와 와인을 땅에 내려놓았다.
깡마른 손으로 케이크 상자 한쪽에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는 종이봉투를 뜯어냈다.
봉투를 탈탈 털자 알록달록한 생일 초와 성냥이 쏟아졌다.
얇은 초를 소중하게 움켜쥐고,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은 들짐승의 자취 같기도 했다.
촛불을 흙에 푹 찔러넣고 불을 붙이기를 반복했다. 혹시라도 꺼질까 싶어 몸을 말아 웅크린 채 집중했다.
수 분 후, 마른 흙과 낙엽들 사이에서 작은 불꽃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빛이 향처럼 기분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제 좀 보이네.”
왼쪽 화분에 하나. 오른쪽 바닥에 하나. 이쪽저쪽 바쁘게 옮겨 다닌 결과 정원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작은 앵두 전구를 켜 놓은 듯 앙증맞게 꾸며진 모습이었다.
“예뻐라.”
흐릿하던 눈동자가 환희에 차 붉게 빛났다.
“에치 가구 사장님도 좋아하겠지?”
뿌듯한 미소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화르르.
조금만 더 밝았으면, 영희가 그런 바람을 작게 내뱉어냈더니 그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불꽃이 커졌다.
불이 옮겨붙었다.
제일 안쪽에 있던 촛불의 불씨가 낙엽에 옮겨붙으며 크기를 키웠다. 손톱만 하던 불꽃이 이제 주먹만 해졌다.
더 밝아졌네, 라고 영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정원도 밝히고, 선물도 주고, 사과도 하고.
엉켰던 매듭이 풀려가는 기분이었다.
“에취!”
움직이는 법을 잊은 것처럼 한참을 서 있던 영희가 재채기하며 몸을 떨었다.
여기가 예쁘긴 하지만 사장님을 기다리기에는 좀 추웠다. 아무래도 안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 싶었다.
케이크과 와인을 나무 아래에 가져다 놓고,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며 처음 들어왔던 입구로 향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등불에 홀린 나방처럼 망설임 없이 로비를 지나 복도를 걸어갔다.
부츠의 고무바닥이 대리석 지면에 닿으며 쩌억쩌억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영희의 눈동자가 유난히 또렷했다.
영희는 닫힌 문들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다 열려 있는 방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반쯤 걸친 채 상체만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계신가요? 킥킥.”
아람의 말투를 흉내 내며 우아하게 질문한 영희가 혼자 낄낄 웃었다.
여기에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성큼 들어온 영희는 어슬렁거리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커다란 책상과 테이블, 캐비닛, 책장. 식물과 야경까지. 근사했다.
원형 테이블 위에는 쿠키 박스와 커피도 놓여 있었다.
철제 통을 열어 쿠키 하나를 입에 넣은 영희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또 다른 모양의 쿠키를 집었다.
다른 곳에는 또 뭐가 있을까. 닫혀 있던 다른 방들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장님 방은 따뜻할까? 거기부터 가봐야겠다.
탐험가가 된 듯 흥분에 찬 영희가 보다 다부지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복도로 나온 영희를 누군가가 불렀다.
“누구세요?”
**
짧은 침묵이 흘렀다.
경계심이 바짝 선 영희가 목에 감긴 스카프를 인중까지 끌어올렸다.
“저기요. 누구세요?”
가늘게 떨리는 단정한 목소리가 한 번 더 물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있는 곳은 복도 안쪽. 창이 없어 모습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질문을 하며 한 걸음씩 영희에게로 다가왔다.
구두가 대리석에 맞부딪히는 소리는 무겁고 선명했다.
영희는 목이 빳빳이 굳어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만 매섭게 뜨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복도 중간까지 도착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얄쌍한 턱, 깔끔하고 단정한 머리, 보석 단추가 박힌 카디건, 인어처럼 예쁜 모양의 치마.
잠시 그 모습에 넋을 놓았던 영희는 순간 의문을 품었다.
“그쪽은 누구세요?”
그래서 도아에게 되려 물었다.
“네? 저는 직원이에요.”
“직원?”
“네. 혹시 잘못 올라오셨나요? 미화팀 분이신가요?”
짧게 대답을 마친 도아가 다시 질문했다. 가슴팍에 박혀 있는 보석 단추가 영희의 눈을 찔렀다. 불쾌했다.
“당신은 뭐야? 누군데?”
“아, 저는 비서입니다.”
복도에 서 있는 영희를 발견했을 때 도아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누군가를 해치러 왔다기엔 너무나 왜소한 중년 여성이었고, 흉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새벽 출근한 날 간혹 만나던 미화팀 직원분과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상대방의 날카로운 대꾸에도 침착할 수 있었다.
“비서?”
‘지금 한 대표랑 비서 둘 다 회사에 도착을 못 했다고 해요. 오늘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거든요.’
‘이 사람은 비서예요. 외국인 남자 비서. 좀 생소하죠?’
‘올라가 봤자 아무도 없어서. 오늘은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람이 해주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영희는 눈을 가늘게 만들어 다시 한번 도아를 관찰했다.
“네. 비…….”
영희가 자신을 의심스럽게 보고나 말거나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무심하게 대답하려던 도아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시선 안에 붉은 멍울들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뭐지?”
오늘은 정원에 조명을 켠 적이 없는데?
홀린 듯이 고개를 틀었다.
정원이 이상했다. 듬성듬성 밝은 빛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도아는 눈꺼풀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가빠지는 숨소리를 따라 고개가 삐걱거렸다.
낯선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아는 그대로 영희를 지나쳐 달리기 시작했다.
놀란 나머지 발이 미끄러져 기우뚱거렸으나 이내 바로 중심을 잡고 정원에 도착했다.
지면에서 5센치 정도 떨어진 위치 즘에 작은 불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초?”
알록달록한 촛불을 바라보며 도아는 비명을 욱여넣었다.
당장 빼서 치워버려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쫓아 온 영희가 도아의 어깨를 으스러트리기라도 할 기세로 잡아챘다.
“어딜 도망가? 너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도아의 귀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