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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에필로그.3 (84/85)


제84화. 에필로그.3
2022.08.19.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거실까지 퍼졌다. 

코끝을 자극하는 요리에, 주이는 신이나 연신 거실과 부엌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다.


“삼촌, 나는 고기도 좋아해요!”

공주는 무슨. 아주 말괄량이지.

시우는 자그마한 몸으로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며 잔잔하게 웃음을 흘렸다.


“우와! 먹을 게 엄청 많아!”

“맘마!”

어느새 식탁에는 갖가지 요리들이 채워졌다. 서둘러 내놓은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상차림이었다.

결국 도아도 함께 먹을 것이니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렇게 판단내린 덕분에 나온 결과였다.

먹기 좋게 잘린 소고기를 입에 넣은 주이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전날 아빠가 해주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맛이었다.


“진짜 맛있다!”

“마시떠. 마시떠.”

“만세에!”

신이나 몸을 들썩이던 주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머리 위로 힘껏 올리며 소리쳤다.


“모두 만세!”

그저 기쁨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흐믓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은 고집스러운 눈동자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다 같이 만세 하는 거야! 시우 삼촌도! 도아 언니도!”

다 함께해야 한다는 대장의 명령이었다. 양 볼에 화를 단단히 품은 얼굴을 보고, 도아는 순순히 손을 들어 올려 항복했다.

시우는 별로 응할 마음이 없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것이 다였다. 다행히도, 주이의  다음 목표는 제 동생이었다.


“주한아, 너도 어서 만세 해야지이.”

오늘따라 누나 말을 듣지 않고 오물오물 콩나물만 먹는 동생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주이는 주한이가 앉은 아기 의자를 제 쪽으로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꼼짝도 하지 않던 의자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안돼!!!”

시우를 쏘아보며 당신도 어서 손을 올리라고 속삭이던 도아가 기척을 알아차리고는 놀라 외쳤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옆자리에 주이가 앉아 있어서 손을 뻗어 주한이를 잡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기우뚱. 아기 식탁에 올려두었던 그릇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음식물이 잘박, 엎질러지는 소리와 여기저기 튕겨 나가는 스테인리스 그릇들.

그 모든 소란이 멈췄을 때, 시우의 손끝에 기울어지던 의자가 아슬아슬하게 잡혀 있었다.

주한이의 작은 몸은 옆으로 쏠렸지만,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으아아아아앙!”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을 몇 번 깜빡이던 아이는 입술을 삐쭉거리다가 곧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했어요. 으아아앙.”

자신 때문에 동생이 다칠뻔했단 것을 깨달은 주이 역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주이야. 괜찮아. 많이 놀랐지? 몰라서 그런 거야.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

도아가 작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해 주자, 아이는 더 꺼이꺼이 구슬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즐거웠던 식사 시간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왔던 시간들. 업무적인 능력만 열심히 가꾸어 온 두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 어렵고 낯설었다.

다이닝 룸에서 울음소리가 사라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더 밝게 까르르거렸다.

너무나 잘 먹는 셋을 위해 시우는 요리를 다시 한번 해야 했고 주방을 정리할 여유는 없었다.

치워도 치워도 계속 떨어지는 음식들로 인해 뒷정리는 결국 나중으로 미뤘다.

주변은 엉망이었지만, 주이의 재롱과 주한이의 애교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삼촌. 내가 매니큐어 발라줄게. 나도 이따 발라줘야 해요.”

의자에서 내려와 총총 방으로 갔던 주이의 양손에는 어린이용 매니큐어가 잔뜩 들려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이번엔 핑크색을 발라줄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우의 새끼손가락에 분홍색 매니큐어가 반들거렸다. 

쭈그린 자세가 불편했던 어린 사장은 손님을 소파로 끌고 와 앉히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아는 저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미끄럼틀 태워주기, 볼풀장에서 말랑 공 던지기, 함께 트램펄린 타기, 동화책 읽어주기, 비행기 태우기. 나열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놀이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한아. 이것 봐. 슝슝!”

도아가 자동차 장난감을 움직이면 주한이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이 귀여워 피곤한 것도 잊고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하고 또 해주었다.


“이제 내가 다른 노래 불러 줄게.”

주이는 정말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고, 주한이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간식까지 깨끗하게 비운 아이들의 눈이 드디어 반쯤 감기기 시작했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는 언제 와? 아빠는?”

온종일 신이 나 종알거리던 주이는 잠이 오니 엄마를 찾았다.


“어마. 어마…… 엄아…….”

동생은 더했다. 누나가 도아의 토닥임에 스르르 눈이 감겨가는 와중에도, 너그럽게 잠들어줄 아량이 없는 듯 했다.

계속 칭얼거리기만 하고 쉽사리 잠들지 않는 주한이를 결국 시우가 안아 들었다.

매트 위에서 주이를 따라 끔뻑끔뻑 졸던 도아는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선으로 깊게 들어오는 노란 석양빛이 시우의 등 뒤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그가 나긋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커다란 손으로 연약한 등을 토닥였다.

이상했다. 평소와 다른 낯선 시우의 모습에 도아는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도아야.”

“네?”

“나는 방에 들어가서 아이 재우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눈이 마주치자 시우가 턱 끝을 까딱이며 말했다. 도아는 그의 시선이 떨어진 곳에서 어느새 잠들어 있는 주이를 발견했다.

천사 같은 얼굴이 방금 전 느꼈던 아릿한 기분을 자맥질하듯 끌어올렸다.

도아가 생각에 잠겨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방 안에 있던 주한이는 아늑하고 포근한 침대에서 꿈나라로 떠났다.

시우가 뻐근한 어깨를 누르며 목을 풀었다. 일하거나 운동을 할 때와는 다른 피로감이었다.

월튼의 업무를 조금 줄여줄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오자, 아수라장이 된 거실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공과 장난감이 발에 치이고, 동화책도 여기저기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널부러져 있는 물건들이 기억을 흔들었다. 저곳에서 도아가 아이들과 무엇을 했는지 작은 행동들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시폰 커튼 틈으로 따사로운 붉은빛이 스며들어왔다. 해 질 녘의 그림자는 평소보다 길게 늘어졌고, 새근새근 평화로운 숨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시우는 얇은 이불을 한 손에 들고, 거실 한가운데 잠들어 있는 둘에게로 다가갔다. 넓게 펼쳐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덮어준 후, 별다른 고민 없이 도아 옆에 자리 잡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얇고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건 결혼 후 얻게 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응접실에서 잠들어 있던 모습은 스치듯 흘려보내야 했다. 이제는 이 아름다운 것을 느긋하게 누릴 수 있었다.

이따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다시 혼자인 시간이 된다면 이제 견딜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이미 행복을 맛봐버렸으니, 네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

시우는 도아의 몸을 돌려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


하늘이 제비꽃처럼 물들었을 때,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왔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가사도우미는 청소는 걱정하지 말라며, 어서 들어가 보라 말했다.

잠에서 깬 아이들이 가지 말라고 눈물을 펑펑 흘린 탓에, 준비를 다 하고도 나오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했는지 샐 수도 없었다.


“아까 창문으로 보니깐, 공원 있던데 산책하고 갈래요?”

“얼마든지.”

힘들지만 따뜻한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구불구불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초가을이 몰고 온 깨끗한 바람은 먼지를 밀어내고 맑은 하늘을 선사했다.

머리 위에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었고, 귓가에 풀벌레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주이 뭐 부탁할 때만 존댓말 쓰는 거 알아요?”

“알아. 행동이 아빠랑 비슷해.”

“주한이도 그렇고, 둘 다 정말 예쁘고 귀여워요.”

“생김새가 엄마를 닮아 다행이지.”

둘의 눈동자가 동시에 부딪혔고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 웃었다.

차분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 지금 부는 바람 같았다.

발치에 느껴지는 작은 돌멩이의 감촉, 짙푸른 녹음의 향기. 도아는 그와 한마디 두마디 나누는 이 시간이 꿈처럼 행복했다.

그 아득한 감정이 몇 시간 전 떠올랐던 생각을 다시금 피어오르게 했다. 선잠에서 깨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 순간 느꼈던 자신의 바람을.


“아까 대표님, 아니 시우 씨가 품에 주한이 안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어색했어?”

“어색하다기보단,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우 씨가 아빠가 된다면 저런 모습일까.”

“상상만 해. 나는 부모가 될 마음이 없으니.”

“궁금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은, 나를 닮은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단호한 말투에 시우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올려보는 고동빛 눈동자에 힘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저 눈빛으로 말을 꺼내면 자신은 결국 그 명령을 따르게 되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쉬이 그래,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부모가 죽어가는 과정을 바로 앞에서 바라본 어린아이는 두려운 것이 많았다.

이제 무력감과 슬픔이 옅어졌지만, 그 어두운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사랑과 유복한 환경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희망일 뿐,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이미 도아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행복은 충분한데, 굳이?


“나는 너 하나면 충분해. 내 행복은 너로 이미 가득 차 있어. 다른 무언가로 그걸 깨고 싶지 않아.”

빗물을 머금은 나무의 색과 닮아있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은 다정했다. 지금처럼 거절하는 순간에도.


“맞아. 지금도 우리는 넘치도록 행복하죠.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욕심이 나요.”

“내 부모님은 나에게 사랑을 줬지만, 동시에 상처도 줬어. 나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알아요. 시우 씨가 걱정하는 게 뭔지. 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걸.”

“사람들은 모두 좋은 부모가 될 거라고 믿지.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야.”

“착각이면 어때요? 착각한대로 노력하면 그게 진짜가 되는 거죠.”

도아가 한 걸음, 시우의 코앞에 다가와 눈을 맞추었다. 


“사람은 참 신기해요. 어릴 때는 절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니깐요. 나도 내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할 줄 몰랐어요.”

담담하고 똑 부러지게 말을 잇던 도아는 마지막에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다 당신 덕분이야. 그러니깐 우리, 우리가 느꼈던 슬픔은 이제 털고 일어나요. 건강하고, 사랑을 듬뿍 주는 그런 부모가 돼요. 나 그러고 싶어.”

“도아야.”

“우리 서로 함께 있으면 변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한번 생각해 봐줘요. 응? 한시우 대표님?”

시우는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길게 뱉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아이로 인해 웃는 도아를 보는 것 또한 큰 행복이 될 것을 알았다.

무심하던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구석구석 마음을 흔드는데, 도리가 없었다.

경계해도 소용없었다.

오늘의 내가 거절하면 내일의 내가 수락할 것이 뻔했기에.

느릿하게 손을 올려 도아의 보드라운 입술을 매만졌다. 복숭아처럼 달콤하고 분홍빛이 맴도는 입술을.

그러다 자신의 손톱 끝에 알록달록하게 남아 있는 어린아이의 흔적을 보고 짧게 웃었다.


“나 말고,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시우는 아내를 닮은 아이의 얼굴을 말하는 것으로 희미한 수락의 뜻을 내비쳤다. 대답을 들은 도아의 눈가는 순간 촉촉해졌고, 이내 얼굴 전체에 따사로운 미소가 번졌다.


“나도 날 닮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왜?”

“저 예쁘잖아요.”

아내는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들이마시면 차가운 공기가 마음을 게우고 그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평범한 삶.

시우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 왔던 순간이 이루어졌음을 새삼 깨달았다.

어느 하늘, 어느 숲길, 어느 바다.

시선 끝에 이어지는 어디를 가더라도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도아의 모습일 것이었다. 

무심하려고 노력했어도 결국엔 실패했던 지난날이 그러했으니.

그런 꿈결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시우는 도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조잘거리는 목소리는 새소리처럼 청아했다.

무심히 보아 넘기던 풍경도 오늘따라 아름다웠다.

길가에 핀 풀꽃을 따라 걷던 도아는 가끔 나무의 이름을 물었고, 시우는 대답해 주었다.

두 사람의 미소가 부드러운 나뭇결 사이로 스며드는 행복한 가을밤이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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