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갈 데까지 가보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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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갈 데까지 가보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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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갈 데까지 가보자 (2)
2022.08.22.
무관과 문관의 최고 관료가 단둘이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들과 같은 품계인 양연정이 있으나, 그는 한중의 태수로 부임을 간 상황이었다.
소무가 진유소의 찻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궁금하군요. 군사께서 직접 부탁하러 오실 만큼 중대한 사안이 무엇인지.”
진유소는 기품있는 손짓으로 찻잔을 움켜쥐며 말했다.
“포나라와 관련된 일입니다. 장군께서 없는 사이에 사신을 몇 번 파견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절도사 원규가 칭제하여 세운 포나라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음에도 군사력은 강하지 못했다.
병력만 놓고 본다면 소나라보다 많았으나, 그 수준이나 경험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장강 이남 지역은 오랜 세월 전투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군사력은 곧 외교력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국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예상외로군요.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인가요?”
“권한을 가진 실권자들은 우리의 사신을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송나라에서 함께 공격하자는 걸 막아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는군요.”
진유소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거나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선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야만 합니다. 그중에는 포나라의 병력지원도 반드시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외교 자체를 피하고 있으니 답답한 상황이군요.”
“예. 아마도 우리의 의중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을 파악한 소무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협상을 진행하려면, 그들이 회피할 수 없는 실권자가 가야겠군요.”
진유소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맞습니다. 제가 장군을 찾아온 이유이지요.”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소무는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군사께서 직접 가지 않으시고, 추밀원에서 움직이길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서 보낸 사신단의 기록을 살펴보니 쉬운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가더라도 제대로 된 회담이 성사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장군께서 움직이신다면, 제가 할 수 없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요.”
피하려 한다면 방법을 찾으면 그뿐이었다. 그리고 소무도 포나라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던 참이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의 부탁을 수락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마음 같아선 돕고 싶습니다. 헌데 공무가 잔뜩 밀려 있어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군요.”
진유소는 소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집무용 탁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들. 무관인 그가 검 대신 붓을 잡아야 하니, 얼마나 많은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 단번에 짐작되었다.
“혹여 저 일 때문이라면 제가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장양이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최고의 행정 능력을 지닌 군사가 공무를 도와준다니 내심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무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은근슬쩍 답했다.
“뭐 군사께서 도와주신다면야…….”
“저 정도 양이면 한 시진이면 충분하겠군요.”
소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레에 걸쳐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한 시진 만에 끝낸다니.
어느새 그녀는 찻잔을 치우고 서류 더미를 집어오고 있었다.
소매를 걷고는 한 손에 붓을 움켜쥔 채 쉴 새 없이 움직여나갔다.
“혹시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민공께서 요즘은 하루에 세 시진을 주무신다고 하십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농처럼 던진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을 짐작한 소무는 얼굴이 밝아졌다.
밤새 공무를 처리하느라 하루에 두 시진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던 장양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탓에 그의 수명이 깎여나가는 것이 걱정되었던 터였다.
그가 이제 세 시진을 잔다는 것은 군사인 그녀가 많은 것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가야겠군요. 민공께서 숙면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호호. 뭐 그렇게도 되는군요. 포나라의 궁성에서는 매일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볼거리가 많을 것입니다. 유람한다고 생각하시고 편히 다녀오십시오.”
진유소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서류 더미를 빠르게 훑어보며 좌우로 분류하고 있었다.
문서 하나를 검토하는 시간은 고작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두 눈과 양손을 동시에 움직이며, 핵심만을 집어내는 그녀의 두뇌는 일반인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소무가 이제 막 한 장을 처리했을 때, 그녀는 열 장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여하간 군사께서 이렇게 도와주시니 든든합니다.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겠군요.”
서로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일까? 둘의 대화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관료들끼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면서요. 그나저나 사천으로 떠나실 때 설풍 부장을 대동하고 가시는 게 어떨지요?”
설풍은 포나라의 황제인 원규가 절도사로 있던 시절 그의 직속 부하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곳의 관직을 포기하고, 다시 장안에서 과거를 통해 임관을 신청한 과거가 있었다. 대동하고 간다면 필시 도움이 될 터.
“조언 고맙습니다. 그리하는 것이 좋겠군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수북이 쌓여있던 서류 더미가 어느새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가 얘기했던 한 시진의 절반도 안 걸리는 시간에 끝이 난 것이다.
손을 털고 일어선 진유소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다음번엔 제가 초대하지요.”
“후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 *
집으로 온 소무는 모처럼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설화가 그의 밥그릇에 고기 한 점을 올려주며 물었다.
“사천에 다녀온다고?”
“응.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할 거야.”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떠난단 말인가.
시무룩해진 소소는 밥을 먹다 말고 오리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와 또다시 떨어져야 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소무는 미소를 지으며 다람쥐 같은 딸의 등을 토닥였다.
“이번에는 소소를 데려갈까 해. 위험한 일도 아니고, 경험을 쌓게 해줄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말이 끝나는 순간 소소의 큰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어서 활짝 펴진 얼굴로 아버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이에요? 아버지랑 같이 가서 너무 좋아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으니 기쁠 수밖에. 아이의 얼굴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소무가 바가지 같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알 수 없는 한기(寒氣)가 그의 오감을 자극했다.
이번에는 설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럼 나는 혼자 남아서 집이나 지켜야겠네.”
말투로 보아 삐진 게 분명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소무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연매도 함께 가자. 사천에는 볼거리가 많으니 셋이 같이 구경하면 좋을 것 같아.”
그 순간 어디선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마당 한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거대한 범 한 마리가 납작 웅크린 채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설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고 둘이 다녀와. 우리 다롱이를 굶길 수는 없잖아.”
타국의 도성에 산군을 대동하고 갈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이곳에 홀로 내버려 두고 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금방 다녀올게……. 다음엔 옆집에 맡겨놓고 같이 가자고.”
설화는 말없이 옆집 담장 너머를 슬쩍 넘겨보았다. 동생 초희가 마루에서 영영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대문 앞. 거대한 체구의 관원 한 명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한 듯 설화의 입에서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저래서 우리 다롱이를 맡길 수나 있겠어?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저리 수줍어해서야.”
“뭐 순수해서 보기는 좋잖아.”
“순수 타령하다가 내 동생 늙어 죽겠네.”
돌연 설화가 왼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소매에서 천잠사가 거미줄처럼 쏘아져 나갔다.
파르륵-!
가느다란 실은 옆집의 담장을 넘어서 대문에 틀어박혔다.
푸푹-!
기척을 느낀 일광이 흠칫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윽고 팽팽하게 당겨진 천잠사가 대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콰앙-!
마루에 앉아있던 초희와 영영이 어리둥절하며 대문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그곳에선 얼굴이 잔뜩 붉어진 일광이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일광 씨……?”
“그, 그게…… 제가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하는 그를 향해 영영이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일광은 종이에 둘둘 말린 무엇인가를 재빨리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그, 그래. 지나가는 길에 이것 좀 먹으라고 가져왔어.”
“고맙습니다~”
냄새와 크기로 보아 숯불에 구워낸 족발인 듯했다. 영영은 자신의 얼굴보다 큰 돼지 앞발을 움켜쥐고 어른들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따라 초희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그 모습에 일광이 더욱 당황했다.
“제, 제가 뭐 실수라도…….”
“일광씨한테 이런 박력이 있으신 줄 몰랐어요. 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여기까지 오셨는데 같이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떠신지…….”
“그, 그럴까요?”
둘은 어색한지 영영을 가운데 끼고 쭈뼛쭈뼛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담장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무 일가족은 깔깔대고 웃었다.
때맞춰 주변으로 기막(氣膜)을 둘렀기에 웃음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 설풍 부장이 찾아왔다.
“모시러 왔습니다, 장군.”
이미 딸아이는 새벽같이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산군과 놀고 있던 소소가 재빨리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랜만이네. 너도 같이 간다며?”
“네~. 헤헤헤.”
둘은 과거시험에서 같이 시험을 치르며 인연을 쌓았던 사이였다. 그렇기에 친분이 각별했다.
설풍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쪽을 살펴보았다.
문 앞에서 부인이 소무의 관복을 손보며 맵시를 내주고 있었다.
“고마워, 연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어디 다른 데로 새기만 해봐.”
“후후. 그럴 일 없잖아.”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딸아이를 불렀다.
“우리 딸, 잘 다녀올 수 있지?”
소소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엄마도 잘 있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히잉.”
“재밌는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너라.”
“네……. 다음엔 꼭 같이 가요. 알았죠?”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눈꽃이 수놓아진 작은 전낭이었다.
“그러자꾸나. 필요한 게 있으면 아끼지 말고 사용해도 괜찮다.”
묵직한 게 은자가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소소의 양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며 귓가에 걸렸다.
“히히. 고맙습니다~ 엄마 선물 꼭 사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