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4화 (4/80)

4.

“안경 쓴 아저씨 말고, 콧수염 아저씨라구요.”

에시엘의 주장에 롬포드는 쥐고 있던 초상화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의 손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동그란 안경을 쓴 자의 초상화와,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관리한 콧수염을 가진 자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들은 세이든 공작과 베르게일 공작이었다. 둘 중 한 명은 대공을 끌어내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로, 레고니스 가문의 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물론 롬포드 대공이 그런 별 볼 일 없는 것들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황제가 가당치도 않은 이유를 대며 전쟁을 선포하겠다 선언하기 전까지는.

“이게 뭔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 그건…….”

에시엘은 변명이라도 내뱉으려 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누가 계략을 꾸미는 중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아저씨 얼굴이 더 사악하게 생겼어요.”

“하!”

롬포드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보였다. 벌벌 떨며 말을 더듬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임에도 아이의 눈빛에는 어쩐지 강단이 있어 보였다.

“딱 봐도 악당같이 생겼잖아요.”

“악당?”

에시엘은 손가락을 거두곤 롬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심장이 몹시 빠르게 뛰었다. 눈앞의 이가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라는 이유였다.

‘아마 이맘때쯤…….’

소설 내용에 따르면 추후에 롬포드는 베르게일 공작과 황제에 의해 전장으로 떠밀리게 된다. 하지만 그건 필요치 않은 전쟁이었다. 롬포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귀족이 입을 모아 전쟁이 필요하다 외쳤다. 뿐만 아니라 롬포드가 전쟁을 거부하는 이유가 반역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 틀림없다며 그를 몰아갔다. 이는 전부 베르게일 공작이 다른 귀족들을 제 편으로 포섭한 탓이었다.

‘하지만 어림없지.’

물론 롬포드는 모두가 예상한 시기보다 훨씬 빠르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왔으나, 레고니스가는 많은 병력을 잃었다. 그걸 예측하고 있는 지금의 롬포드는 꽤나 골머리를 썩는 중이리라.

“……내 잠이 부족하긴 한가 보군. 저 하찮은 것의 말을 듣고 있다니.”

롬포드는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끽해야 제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아이의 근거는 타당성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가리킨 쪽 초상화에 계속 시선이 향했다.

순간 긴장감을 깨듯 멀리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이제 잠자리에 드십니까. 혹시 반…….”

집사가 롬포드를 발견했는지 점차 다가왔다. 그는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아 피곤할 주인에게 반신욕을 권하려다가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함께 있던 에시엘을 발견한 탓이었다.

“아니,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확인을 했어야…….”

급히 허리를 숙이며 사죄하려는 집사의 행동을 저지한 롬포드는 인상을 쓴 채 자신의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지금 깨어 있는 시종이 있나.”

“예. 아마 서너 명 있습니다.”

“일단 이거, 씻기도록.”

롬포드는 특유의 무심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눈두덩이에서 내려온 마디 굵고 투박한 검지가 에시엘을 향했다.

‘에……? 씻겨 줄 필요까진 없는데!’

“……따라오시죠.”

집사는 순간이나마 드러냈던 당황한 표정을 빠르게 숨기곤 에시엘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놀란 탓에 더욱 동그래진 눈을 끔벅거릴 뿐이었다.

“네, 네에.”

* * *

햇살이 들이찬다. 초여름의 태양은 일찍 찾아왔다.

아무리 저택의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라도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막을 순 없었다. 침대 위 빼꼼히 드러나 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 낸 붉은 머리칼 위로 윤기가 돌았다.

“포근해…….”

에시엘은 진작 잠에서 깼지만 그저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왕성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찍 깨면 빨리 일어난다고, 늦으면 늦잠을 잔다고 혼이 나곤 했으니까.

심지어 지난밤에는 대공의 명을 받은 시종들이 따뜻한 물로 씻겨 주기까지 했다. 이것 또한 왕성에서는 당연한 일이 될 수 없었다. 에시엘에겐 여름이든 겨울이든 늘 어쭙잖은 핑계로 찬물만이 제공되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태양의 따뜻한 기운이 편안했다. 이런 작은 행복들을 계속 누릴 수 있다면 볼모로 잡혀 와 느낀 두려움, 공포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듯했다.

“아, 좋…….”

벌컥―.

물론, 돌연 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나 성가시게 굴 아이는 예외로 삼았다.

“야!”

해가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터인데 아침부터 기세가 좋은 페루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쩐지 신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뭐야……. 아직도 자고 있어? 이거 엄청나게 늦잠 자네.”

‘이렇게 일찍 오지만 않았어도 아주 반갑게 맞아 줬을 거다!’

에시엘은 기분 좋게 읊조리던 혼잣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앙다문 상태였다. 동시에 말똥히 뜨고 있던 눈도 곤히 감았다. 잠든 것처럼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에잇. 야, 볼모!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일어나!”

페루딘은 못마땅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가져오는 모양인지 바닥을 끌 때 나는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이불에 싸인 에시엘의 몸뚱이가 지그시 꾹꾹 눌렸다. 느껴지는 면적이 꽤 넓은 게 손가락을 이용하는 평범한 방법은 아닐 듯했다.

그 행동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에시엘이 누워 있는 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참자, 참자, 참……을 수 없어!’

점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행동에 결국 참다못한 에시엘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의자를 반대로 돌려 등받이를 껴안고 앉은 페루딘의 모습과, 그 옆에 내동댕이쳐진 한쪽 신발이 보였다.

“놀자!”

입매를 시원스럽게 끌어 올려 웃음 짓는 페루딘은 흡사 동네를 뛰노는 개구쟁이 같았다. 한없이 말갛다 느껴지는 그의 얼굴에 말괄량이처럼 주근깨가 박혀 있어도 어울릴 듯했다.

“좋아. 대신, 이번엔 그냥은 안 놀아. 내기하자!”

“내기?”

페루딘은 에시엘의 말을 되뇌었다. 약하게 찡그려진 미간으로 보아 꿍꿍이를 짐작할 수 없어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에시엘은 침대 위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그리고 방 한쪽 테이블 위에 고이 개어 놓았던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읍, 파―! 응.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옷의 머리 구멍을 빠져나온 에시엘이 말했다. 옷을 입느라 머리가 부스스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어 에시엘의 입꼬리가 장난스레 씨익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페루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소원? 그으럼, 이번엔 밖으로 나가자.”

“어엉?”

에시엘이 얼떨떨하게 되묻는 사이, 곧 페루딘이 의자에서 다리를 빼내곤 일어서 문가로 향했다. 그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귀공자 같은 멀끔한 차림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와!”

한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은 페루딘이 반대 손으론 검지를 까딱이며 말했다.

“……진짜 밖에 나가자는 거야?”

에시엘이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머릿속에선 무모한 행동이라는 생각과 가 보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이 공존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자 페루딘이 빨리 따라오라는 듯 재촉했다.

“지금은 다들 바빠. 신경도 안 써.”

“나는…….”

“에이 씨. 비밀인데 나 지름길도 알고 있어. 가자!”

페루딘은 그럴싸한 회유책이라도 제시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곤 에시엘의 손목을 낚아채어 문밖으로 이끌었다.

“어어?!”

아침을 맞는 저택의 부산스러운 소리는 다행스럽게도 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에시엘은 그럼에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아, 모르겠다. 설마 대공을 마주치겠어?’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페루딘이 말했다.

“저기 끝, 통로가 지름길이야. 야, 이거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이다!”

“나, 나도 비밀로 할게.”

페루딘은 눈을 날카롭게 뜨곤 에시엘을 째려보며 손가락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고상함이 가득한 대공저의 다른 문에 비해, 흔한 장식조차 없어 심심하게 느껴지는 소박한 문이 보였다.

두어 걸음 앞장서던 페루딘은 곧 익숙하게 그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엔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곳인 듯 벽을 따라 위아래로 원형 계단이 나 있었다.

“야. 다치면 귀찮으니까 잘 따라와.”

에시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단히 엄포를 놓는 페루딘을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문 두 개가 보였다.

“자, 내 말대로 지름길 맞지?”

페루딘은 그중 하나의 문을 열고 그곳에 기대어 선 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팔짱을 끼고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 보여 영락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에시엘은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음 짓곤 문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향해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정성스레 가꿔진 그곳엔 푸른 잎에서 새어 나온 여름의 싱그러움이 가득했고 색색의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와아……. 엄청 예쁘다.”

에시엘의 녹옥빛 눈동자 속에 정원의 청청함이 스며들었다. 왕성의 정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와 아름다움이었다. 넋을 놓고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감상을 깨트리듯 신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놀자! 아, 내 소원 먼저 말해 줄까?”

에시엘이 고개를 돌려 마주한 페루딘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뭐어? 너야말로 지고 나서 다시 하자고 하면 안 된다?”

“여기서도 내가 질 것 같냐, 이 멍청아.”

베에에―. 페루딘은 혀를 주욱 내밀며 그녀를 약 올리는 것에 열을 올렸다.

“이씨, 당장 해!”

에시엘이 동그란 눈매를 찌푸려 보이며 제법 성난 표정을 만들었다. 귀엽게 느껴질 법한 그 얼굴엔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럼…… 숨바꼭질 시작! 술래는 너다. 100까지 세라!”

페루딘은 외침을 남기곤 재빨리 달려 나갔다. 마치 전광석화같이 잽싼 움직임은 얍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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