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에시엘은 페루딘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숫자를 셌다.
이후 넓은 정원을 좁은 보폭으로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녔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여겼는데 페루딘이 생각보다 꼭꼭 숨어 버린 탓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 홈그라운드라 이거지?!’
가쁜 숨을 고르던 에시엘은 동그란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정원 구석진 곳의 작은 창고 주변을 휘젓고 다녔다.
페루딘은 바로 그 작은 창고 안에 숨어 있었다. 그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자신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만 하는 에시엘의 모습을 문틈 새로 훔쳐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역시 볼모 따위가 나를 이길 순 없지’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철푸덕― 하는 정체 모를 소리에 문틈 새를 내다보자, 창고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에시엘이 흙바닥 위로 엎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아야야…….”
에시엘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곤 옷과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려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야!”
페루딘이 작은 창고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나오며 소리쳤다. 그는 어쩐지 화가 난 듯한 모습으로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 페루딘! 찾았다!”
에시엘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제게 다가오는 페루딘을 가리켰다.
“네가 다치면 내가 귀찮아지잖아!”
“으응……?”
성큼성큼 에시엘에게 다가온 페루딘은 그녀의 옷가지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서툴지만 꼼꼼한 손길이었다. 의외로 승패는 상관없는 모양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볼모 주제에 왜 이렇게 성가셔?”
페루딘은 혹여나 상처 난 곳이 있지는 않은지 살피면서도 연신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와, 내가 이겼다!”
에시엘은 그런 모습을 의아하게 느끼는 것도 잠시, 동그란 눈동자가 사라질 만큼 해맑게 웃었다. 기쁜 마음에 양팔이 절로 뻗었고 자꾸만 미소 지어지는 입꼬리는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쳇, 그래서 소원은 뭔데?”
“으음, 나중에 알려 줄래.”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맘이지? 히히.”
성난 눈초리가 따라붙었지만 에시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 같으면 바로 일주일 동안 내 노예가 되라고 했을 텐데……. 아무튼, 네 소원은 승낙한다!”
페루딘은 제법 근엄한 투로 말했다. 에시엘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네 맘대로 해. 난 이제 갈래. 놀 기분 아니야.”
“어어? 진짜로?”
에시엘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으나 그는 대꾸도 없이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정말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아!”
페루딘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얼마 못 간 걸음을 멈추고 양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휘익―.
“으앗?”
그가 던진 무언가는 에시엘의 어깨에 부딪히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거, 볼, 아니. 에시엘 네 거인데, 먹든지 말든지.”
에시엘은 엉겁결에 그것을 주워 들었다. 투명한 포장지에 담긴 그것은 조금 부서져 동그란 형태를 잃은 쿠키였다.
* * *
롬포드의 그림자 격인 집사는 제 주인에 대한 믿음이 두텁고 몹시도 충직한 신하였다. 그렇기에 베르게일 공작을 조사하라는 주인의 느닷없는 명령도 서슴없이 곧장 이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명에 따라 신속하고 착실하게 수행한 결과물을 보이는 중이었다.
“분명 들었습니다. 황제가 뒷배를 봐주고 있으니 일사천리라고 했습니다. 또 빼돌린 세금으로 산 보석을 귀족들에게 주었으니 걱정이 없을 거라고…….”
롬포드는 눈앞의 무릎을 꿇은 이에게 서늘한 시선을 내비쳤다.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린 이는 베르게일 공작의 수하였다.
“그, 그런데 말씀하셨던 보석금은 확실하신 거지요?”
연신 눈치를 살피던 수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핏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라 퍽 우스운 꼴이었다. 그를 꾀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변변치 못한 주인 아래 비슷한 수준의 이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쯧. 웃기지도 않는군.”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이의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롬포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어차피 50 대 50의 확률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렌테.”
“예.”
“일단 데려가.”
“알겠습니다.”
“아, 저놈의 견장을 뜯어서 공작에게 보내도록 해.”
이에 집사인 렌테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짐작했다. 저자는 데려간다고 한들 목숨을 보전하기란 어렵겠다고.
롬포드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어쩐지 앉은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져 그답지 않게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몹시 거슬리는군.”
읊조리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결국 눈을 감고 시야를 차단하는 것을 택했다. 늘 타 오던 마차가 불편할 리는 없었다.
사실 그는 본인의 신경이 거슬리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지도 모른다.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선 작은 손가락을 꼿꼿이 뻗어 내던 아이가 자꾸만 떠올랐기에.
* * *
하루가 멀다고 꾸준히 찾아오는 페루딘과의 숨바꼭질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목이었다. 문득, 잘 가꾸어진 꽃들이 눈에 들어온 에시엘은 정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구경만 할까? 어차피 여태 들킨 적도 없으니까…….’
에시엘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주위를 살피며 색색의 꽃들 앞으로 걸음을 옮겨 쪼그려 앉았다.
“얘는 이름이 뭘까?”
자신의 눈동자 색을 빼다 박은 듯한 꽃이 눈에 띄었다. 녹색의 작은 꽃 여러 개가 모여 한 송이를 이루는 모양새였다. 제 얼굴만큼이나 작고 동그란 그것을 빤히 보다가 꽃잎을 손가락으로 톡 하고 건드리자, 꽃송이는 작은 힘에도 맥없이 살랑거렸다.
그리고 멀리서 에시엘의 자그마한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롬포드였다. 그는 저택으로 향하던 걸음마저 멈춘 채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곁에 선 렌테가 의아함을 느껴 분위기를 살폈으나 그라고 모든 뜻을 알아챌 순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선명하게 읽어 낸 것은 제 주인의 시선이 닿는 곳이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렌테는 유달리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족을 붙일 상황이 아님을 아는 탓이었다. 이에 롬포드가 렌테를 향해 잠깐 시선을 보냈다가 멈췄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얘기해.”
“볼모로 잡아 온 아이에 관한 사항입니다. 지난밤 그 아이를 씻긴 시종들의 말에 의하면―.”
롬포드의 뒤를 따르던 렌테는 심호흡하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뜸을 들였다.
“몸에 상처가 많았다더군요. 몹시요. 다쳐서 생긴 상처로 보이진 않았다 합니다.”
“그런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 롬포드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마 학대를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학대?”
그제야 롬포드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렌테와 시선을 마주하는 그의 표정이 어딘가 미묘했다.
“온몸이 생채기투성이랍니다. 약을 제때 바르지 않은 모양인지 흉터로 남은 것들이 더러 있었다는군요.”
“…….”
“그리고……. 어떠한 연락조차 없습니다, 아나이스 왕국에서.”
“제 자식이 잡혀 있는 데도 연락이 없다고.”
롬포드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듯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금 정원 한 곳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에시엘에게 향했다. 드레스 끝단이 바닥에 끌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신이 나 보이는 조막만 한 뒤통수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롬포드의 적안 위로 짙은 속눈썹이 드리웠다. 옅은 그늘이 생긴 그의 눈동자가 더욱 검붉어 보였다.
“볼모로서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버리는 게 어떠십니까.”
렌테는 롬포드의 답을 종용하듯 해결책을 내놓았다. 제 주인의 성격을 잘 알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아니. 그냥 둔다.”
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놀란 렌테가 이견을 제시할 새도 없이 롬포드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그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결국 렌테는 의문을 접어 두고 그의 뒤를 급히 따랐다.
머지않아 롬포드가 걸음을 멈추자, 조막만 한 뒤통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으응……?”
순간 움직임을 멈춘 에시엘의 머릿속에 일말의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여전히 내 저택을 잘도 헤집고 다니는군.”
마치 공포 영화 속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이 오싹해지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서서히 고개를 돌려 대상을 바라본 에시엘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히이익!”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이 정원까지 망치려 들고.”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도 잠시, 롬포드가 뻗은 커다란 손이 에시엘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자빠졌다면 눈앞에 보였어야 할 푸른 하늘 대신에 롬포드의 붉은 눈동자가 자리한 수려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결국 또다시 롬포드를 마주하고야 말았다.
“읏, 자, 잘못했어요…….”
에시엘은 사과부터 내질렀다. 제가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필 뒷덜미가 붙잡힌 탓에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제 뜻과 달리 눈망울에 눈물이 고인 것도 같았다. 에시엘은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연신 비볐다.
“왜 울지?”
“네, 에?”
“너 대체…….”
꼬르륵―.
에시엘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