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상치 못한 꼬르륵 소리에 에시엘의 동그란 눈이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 더욱 커졌다. 머지않아 그녀의 뽀얗던 얼굴이 삽시간에 붉은 머리칼과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지금 이게…….”
롬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곤 고개를 살풋 갸웃했다.
“대, 대공님……. 배고파서, 잘못했어요…….”
에시엘은 눈을 꼭 감았다. 감히 대공저의 음식을 탐낼 거냐며 이대로 굶겨 죽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무조건 잘못을 빌려 했다. 안 되면 바짓단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아무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얘기도 있으니까.
한데 예상과는 달리 픽 바람이 새는 헛웃음 소리가 얼핏 들렸다.
“네 끼니를 챙겨 주는 일은 없을 테니.”
“…….”
“배가 고프면 알아서 먹어. 땅을 파든, 주방을 가든.”
그리고 에시엘의 발에 땅이 닿았다. 조심스레 눈을 뜨고 살핀 시야에는 큰 보폭으로 걸어가 벌써 저만치 멀어진 롬포드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뭐, 뭐야? 죽이진 않는 거야……? 방금 주방에 가도 된다고 한 거 맞지?”
에시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벅벅 닦아 냈다.
* * *
어렵사리 찾아간 주방에서는 가벼운 칼질 소리만 들렸다. 다행히도 바쁘다고 생각되지 않는 정도의 소음이었다. 에시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주먹 쥔 손으로 문을 세게 두들겼다.
쾅쾅―.
일순 일정하던 칼질 소리가 멈추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잉?”
그는 자리에 멈춰서 고개만 길게 빼내어 인기척을 살폈다.
“있잖아요! 혹시…….”
낯선 누군가의 고개가 살짝 보이던 그곳을 향해, 에시엘이 쭉 뻗은 팔을 방방 흔들었다.
“흐에엑?”
곧 주방 입구로 다가오는 듯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약간 놀란 에시엘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려 했는데, 돌연 그녀의 어깨가 붙들렸다.
“왕녀님?! 이곳엔 어쩐 일로……?”
“앗! 배, 배가 고파서요. 빵을…….”
“저런, 가여우셔라! 그러고 보니 주인님께서 식사를 챙겨 주실 리가 없군요.”
눈앞의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에시엘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게, 대공님께서 주방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고 했어요. 아, 아마도……? 헤헤.”
에시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잘됐군요. 아! 그럼 빵 말고 이걸 드셔 보시지요. 제가 어제 만든 건데…….”
“근데 아저씨는 나를 어떻게 알아요?”
그는 에시엘의 어깨를 놔 주고 바삐 냉장고를 향하더니 곧 그릇에 담긴 무언가와 포크를 가져왔다.
그것의 실체를 본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빛내며 꿀꺽 침을 삼켰다. 탐스러운 과일이 가득 토핑된 케이크 조각이었다. 어린아이는 어느새 본능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탐내고 있었다.
“저택에 이미 소문이 싹 퍼졌습니다. 아나이스 소왕국을 토벌하러 가셨던 주인님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데려와 여태 살려 두신다고…….”
유례없던 일이라도 되는 양 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그는 곧 에시엘에게 케이크와 포크를 건넸다.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맛은 괜찮을 거예요. 저는 주방장 도프니입니다.”
“나는 에시엘이에요!”
에시엘은 양 볼이 볼록 솟아오르도록 천진난만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잽싸게 그릇을 받아 들곤,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찔러 한 입을 왕 물었다.
푹신하고 촉촉한 빵과 상큼한 청포도의 조합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왕성이었다면 감히 손도 대지 못했을 음식이었다.
“마, 맛있어요, 주방장님! 대박! 진짜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에시엘의 입가에 하얀 생크림이 묻었다. 그녀는 도프니를 향해 제 작은 엄지를 추켜세워 보였다. 어린아이답게 행동하려다 보니 한계가 있는 표현력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도프니는 돌연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저기요, 도, 도프니 아저씨?”
“죄, 죄송합니다. 이런 대우가 얼마 만인지…….”
도프니는 시큰한 코끝을 문질렀다. 한눈에 봐도 안쓰러운 모습에 에시엘은 케이크를 더는 먹지 못하고 손에 쥔 포크를 어정쩡하게 든 채 그를 바라봤다.
“이런 얘기는 좀 그렇지만, 도련님들도 주인님을 쏙 빼닮아서 맛이 있든 없든 한 번을 말씀 안 하셔서 매 식사 시간이 살얼음판입니다. 그리고…….”
그간 서운함이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봇물 터지듯 털어놓는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본인의 요리 실력은 어딜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건 분명했건만, 제가 모시는 주인들은 언제나 이렇다 저렇다는 말이 없었다.
게다가 롬포드는 아예 식사하지 않는 날도 부지기수라 했다.
“이, 이제 내가 칭찬 많이 해 줄게요.”
에시엘은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도프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간신히 닿는 그의 팔을 토닥이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에시엘 님……. 머무르시는 동안은 배부르게 모시겠습니다! 말씀도 높이지 마세요, 절대요!”
도프니는 울음이라도 참는지 입술을 깨물며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
“네에? 아니에요, 저는 그냥 볼모일 뿐인데…….”
“그냥 볼모일 뿐이라니요? 혹시 모릅니다, 주인님께서 에시엘 님을 가만두신 거 보면…….”
도프니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인지 그가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에시엘 님을 아끼시는 거 아닐까요?”
이내 그는 에시엘을 향해 시선을 맞춰 오며 말했다. 일말의 거짓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그보다 먼저 말 편하게 안 하면 나도 안 할래요!”
에시엘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이었다. 그리고 볼에 바람을 뿌우― 넣으며 토라진 척을 했다. 이에 안절부절못하며 앓는 소리를 내던 도프니가 말했다.
“윽……. 조, 좋다! 내가 졌다. 그럼 말 놓자꾸나.”
“응, 좋아!”
대답을 들은 도프니는 무릎을 구부려 에시엘이 내려놓았던 것을 다시 건네주었다. 에시엘은 방긋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곤 또다시 케이크를 푹 찔러서 한 입을 양껏 물었다.
“도프니. 나도 이거 배우고 싶다.”
“이거라면…… 에시엘, 제과 제빵을 배우고 싶나?”
“응. 도프니의 제자가 될래!”
에시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똘망똘망하게 빛났다. 이런 환상적인 맛을 내는 제과 제빵 솜씨는 배워 두면 분명 아깝지 않을 것이었다. 이어 도프니가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며 말했다.
“당연히 되고말고!”
* * *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걷는 모양새가 마치 도둑고양이 같았다. 에시엘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연신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야 해.’
숨을 죽이는 이유는 단 하나, 대공을 마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몇 번의 만남 이후 에시엘은 한층 겁을 먹었다. 이른 오전 시간엔 이상하리만치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을 알아냈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그는 마주치고 또 마주쳐도 두려운 존재였다.
에시엘은 미리 알아 두었던 페루딘의 방을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점차 걸음을 빨리했다.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복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눈앞의 코너만 돌면 범상치 않은 문이 하나 나올 터였다. 벽에 바짝 붙은 에시엘이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였다.
“야!”
“으앗!”
코너를 채 돌기도 전,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는 조용한 복도를 가득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에시엘이 저도 모르게 휘저은 팔이 퍽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허우적거렸다.
“큭큭큭. 성공이다, 성공.”
“너, 너어…….”
“볼모인데 완전 바보이기까지 하잖아?”
페루딘의 킬킬거리는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은 에시엘은 왕방울만 해진 눈을 한 채 심장을 부여잡았다. 한껏 긴장했던 게 풀렸는지 심장 박동이 쿵덕쿵덕 널뛰고 있었다.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낄낄대는 페루딘의 모습이 무척 얄미웠다.
“에베베. 바보래요, 바보.”
“바보 아니야!”
“또 해 봐, 또! 이렇게? 이렇게?”
더구나 좀 전의 행동을 우습게 따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에시엘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마 더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탓이었다.
에시엘의 얼굴이 점점 더 핑크빛으로 물들었으나 페루딘이 쉽게 멈출 리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과장된 동작을 취하는 그의 입가에는 장난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잇…… 우, 웃지 마!”
“쳇.”
숨죽여 페루딘을 다그친 에시엘은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주변은 여전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저도 모르게 옅은 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저택 밖으로 벗어나는 게 심신에 좋을 듯했다. 아무리 대공의 저택이라고 해도 그가 너른 부지를 모두 감시하진 못하리라.
에시엘은 결심하듯 입술을 꾹 물었다. 슬쩍 바라본 페루딘은 고개를 홱 돌린 채 입술을 삐죽빼죽 내밀고 있었다. 토라진 모양새이긴 했으나 행동을 순순히 그쳐서 다행이었다.
“근데 너 뭐 한 거냐?”
“으응?”
“벽에 이상하게 붙어서 말이야.”
페루딘은 벽에 얼굴과 배를 붙이고 서서 살금살금 걷는 모양새를 흉내 냈다. 불과 몇 분 전 에시엘의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벽에 짓눌린 페루딘의 뽀얀 젖살이 마치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해 보였다. 손가락으로 폭 찌르면 끝없이 들어가 부드럽게 감싸 올 것만 같았다. 에시엘은 이내 잡념을 거두곤 명랑하게 운을 떼었다.
“너한테 가고 있었지!”
“나, 나한테?”
“응.”
“왜, 왜……?”
“나랑 같이 갈 곳이 있거든.”
“어딜?”
“재밌는 거 하러!”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한 그녀가 페루딘의 소매 끝을 붙잡곤 애원하듯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팔이 힘없이 한들거렸다.
페루딘은 잔뜩 당황하고 말았다. 손목에 살짝 닿은 에시엘의 손끝 체온이 어쩐지 불을 지핀 것처럼 뜨끈한 탓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녀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벼, 별로. 나 안 심심해.”
“그래도 무조건 가야 해. 헤헤.”
“뭐, 뭐야? 왜!”
“왜냐면 나, 소원권 쓸 거거든!”
에시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더는 가타부타 말없이 페루딘을 이끌었다. 맥없이 끌려오는 그와 신이 난 에시엘의 발소리가 겹쳐 복도를 울렸다.